둑카(DUKKHA, 苦, 괴로움, 불만족) (2) / 아짠 빤냐와로 마하테로 법문

담마마-마까
2022-08-24
조회수 874

1. 둑카(dukkha)  


• 때때로 겪는 다섯 가지 둑카

 

이러한 ‘네 가지 커다란 둑카의 원인’에 이어서 역시 ‘때때로 겪는 다섯 가지 둑카’가 표현됩니다.

"슬픔, 비탄, 고통, 번민, 절망은 둑카이다." 이 모두는 세상에 공통되는 것입니다.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슬픔'은 부모, 친척, 친구를 잃거나 재산, 또는 돈을 잃었을 때 느끼게 됩니다. 그에 의해 기진맥진해진 마음은 편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슬픔이라는 둑카에 압도된 마음으로는 담마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비탄'이란 슬픔은 스스로 참아낼 수 없을 만큼 강해졌을 때 일어나며 눈물과 울부짖음의 상태로 감정이 폭발하는 것입니다.

비탄은 멈추어져야만 하고 평화롭고 균형 잡힌 마음의 상태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고통'은 육체적인 둑카입니다. 즉, 작게는 모기에게 물렸을 때의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크게는 병이나 상처에 동반하는 육체적인 고통을 말합니다.

'번민'은 정신적인 둑카입니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는 것을 고통스러워하고 죽음이 오는 것을 원망합니다. 늙음, 병듦,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나셨던 부처님조차도 그것들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것들은 분명히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 역시 견뎌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담마(法)을 정확하게 수행한다면 정신적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절망'은 슬픔, 고통, 번민이 너무나 강해서 견디기 힘들 때 일어나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더 이상의 탈출구를 못 찾은 나머지 자살로까지 치닫기도 합니다.

만일 절망으로 자살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우울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에너지의 부족 상태에서는 절망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

 

"슬픔은 단지 안의 음식을 약한 불로 요리하는 것과 같다. 비탄은 강한 불로 요리를 할 때 단지로부터 음식이 끓어 넘치는 것과 같다. 절망은 단지 안의 음식이 다 말라버릴 때까지 끓어 넘쳐서 찌꺼기만 남은 것과 같다."

 

• 자주 겪는 둑카

 

모든 사람은 삶을 살아가면서 위에서 설명한 '때때로 겪는 둑카'와 함께 '자주자주 겪는 둑카'의 쓴맛도 봐야만 합니다.

'자주 겪는 둑카'는 다음의 세 측면이 있습니다.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은 둑카이다.

좋아하는 것과 떨어지는 것은 둑카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둑카이다."

 

태어남과 죽음은 인생에서 단 한 번만 찾아오고, 늙음은 인생에서 특정한 기간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병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끔 일어나는 반면, 이러한 세 가지는 우리가 매일같이 경험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자주 겪는 둑카'라고 부릅니다.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은 원하지 않는 사람이나 동물과 만나는 것, 불쾌한 것과 접촉하는 것,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 불쾌한 날씨를 견뎌야 하는 것 등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싫어하는 것과 불쾌한 접촉은 미약하게는 싫어하는 감정으로부터 격렬한 분노에 이르기까지 감정을 자극합니다.

만일 우리가 충분한 알아차림을 갖고 있지 않다면, 마음은 이렇게 좋지 않은 상태로 인해 쉽게 괴로워지게 됩니다.

 

'좋아하는 것과 떨어지는 것' 이것도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서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앞의 경우에서, 우리는 성냄이라는 화살에 상처를 받게 되며, 이 경우에는 욕망으로 고통받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 동물, 물건을 갈망하고 우리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이러한 형태의 둑카로 고통받아야 합니다.

욕망과 집착에 지배받고 있으며 헤어짐이 자주 일어나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가 이런 종류의 둑카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무상(無常)의 바다 속을 헤엄치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둑카를 자주 느껴야만 합니다.

 

우리는 또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을 겪어야 하고 우리가 담마를 수행하지 않는 한 이는 둑카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을 매우 광범위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태어남에 지배 받는 존재에게서 다음과 같은 바램이 일어난다.

'내가 태어남에 지배받지 않았으며,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하고,

그러나 이는 바램만을 통해 얻어질 수 없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그것은 둑카이다."

 

여기에서 '가끔 겪는' 것으로 설명한 둑카의 각 형태에서도 위와 같은 문단이 반복됩니다. 이러한 문단을 줄이게 되면 다음과 같이 될 수 있겠습니다.

 

"늙음, 병듦,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번민, 절망에 지배받는 존재에서 바램이 일어난다.

'아! 우리가 늙음, 병듦,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번민, 절망에 지배받지 않았으면, 그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면!'하고,

그러나 이러한 바램은 얻어질 수 없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둑카이다."

 

부처님은 만일 우리가 둑카의 많은 측면을 경험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단지 바램만 갖고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오직 담마의 수행과 통찰력만이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2. 둑카(dukkha)

 

'오온에 대한 집착은 둑카이다.'

 

이 마지막 구절은 둑카의 측면 중에서 가장 미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가장 우리 자신과 밀접하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온에 대한 집착은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부분이고 어느 곳에서도 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계속되는 둑카입니다.

태어날 때 우리는 과거 생에 만든 업 때문에 그것들에 집착합니다. 현생에서도 우리는 욕망과 거부반응을 통해 계속해서 업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이러한 오온은 본질적으로 견고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고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물이나 마른 모래를 한 움큼 움켜쥐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낙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상(無常)한 존재는 둑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의 자연스런 성품에는 자아나 영혼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실제로 내부에 들어앉아 있는 주인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무아(無我, anatta)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오온을 실제와 반대로 생각한다면, 즉 그것들은 견고하고 행복의 기반이며 변치 않는 신이나 영원한 자아가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스스로 둑카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온은 다음과 같이 제시되면서 모든 다른 종류의 둑카를 요약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오온에 대한 집착은 둑카이다."

그것들(오온)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그것들 때문에 사람은 슬퍼하고 한탄하며 그들 중 첫 번째 색온(色蘊) 때문에 고통받고, 나머지(受想行識) 때문에 비탄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들 때문에 절망에 빠집니다.

그것들은 좋아하는 것과 떨어지고 싫어하는 것과 만나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합니다. 그것들에 집착하면 반드시 우리는 엄청난 양의 둑카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오온이 둑카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왜곡해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둑카를 분명하게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지하게 수행하는 사람은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외부대상에 많은 자극을 받아서 심하게 활동할 때 둑카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몸이 활발히 움직일 동안은 몸 고유의 둑카를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몸의 경우를 먼저 보자. 몸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의 상태에 있습니다.

즉 걷는 상태, 서 있음, 앉음 그리고 누워있음 입니다. (다른 자세들은 단지 이 네 가지 자세의 변형일 뿐입니다.) 몸이 이러한 각각의 자세 중 하나의 자세로만 오랜 시간 동안 있게 되면 곧 고통스러워집니다.

어떤 사람이 도보로 일주를 할 때, 몇km나 몇십km를 걸은 후에는 몸의 자세를 앉는 자세로 바꾸든가 해서 몸을 쉬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몸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육체적 둑카)

또는 어떤 사람이 기차역이나 버스역에서 줄을 서서 오랫동안 서 있어야만 할 때를 보자. 30분 후 서있는 자세는 불편해질 것이고 한 시간이나 그 이상이 지나면 육체적인 둑카 때문에 앉을 필요성이 생겨날 것입니다.

또는 어떤 사람이 수행을 하느라고 전혀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다고 하자. 처음 삼십분이나 사오십분까지는 아주 편안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고부터는, 만일 그의 마음이 수행주제에 집중되어 있지 않다면 몸의 고통이 점점 강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마침내는 경행을 한다든지 눕든지 해서 움직일 필요가 생깁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너무 오랫동안 누워 있는다면(병원에 입원해 있을 경우와 같이)이 자세 역시 불편해집니다. 누워있는 동안조차도 사람은 몸에서 현저해지는 둑카를 피하기 위해 이쪽저쪽으로 몸을 움직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루 종일 분주히 움직이면서 자주 몸의 자세를 바꿀 때 우리는 이러한 모든 둑카를 보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것이 둑카를 보다 적게 만드는 것은 아니며 단지 우리가 그 사실에 무지(無知)한 것일 뿐입니다.

 

이는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고성제)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것은 또한 12연기의 첫 번째 요소(無明)입니다. 우리가 둑카에 무지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괴로움의 커다란 원인에 무지한 것입니다. 이러할 때 어떻게 우리가 행복할 수 있겠는가?

매일 한 시간이나 그 이상을 열심히 좌선 수행하는 수행자는 몸의 둑카에 대해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는 그것에 정면으로 대면하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네 가지 정신적인 온(蘊) 즉 느낌, 형상기억, 의지, 인식을 둑카라고 말할 때 이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다소 내적인 성찰이 필요합니다.

정신적으로 이리저리 헤매는 사람(정신적인 훈련을 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은 마음 상태가 산란하고 혼란스럽습니다. 무지(moha)에 덮여있기 때문에 그의 마음 상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둑카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스리고 수련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아서 그런 준비를 하는 사람은 곧 둑카를 알게 될 것입니다. 정신적인 온의 어느 것도 몸처럼 견고하지 못합니다. 느낌, 형상기억, 의지, 인식의 알아차림은 놀랄만한 속도로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 그것이 둑카이다."

게다가 어떤 수행자가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얻기 위해 열심히 정진하지만 이러한 네 개의 온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면서 마음은 곧잘 흩어지며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는다면, 그는 곧 산란한 마음은 본래 둑카라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오온에 대한 집착은 둑카이다." 라는 우리 자신에 대한 탐구는 고성제를 보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입니다.

이번 생 안에 법의 길에 들어서고자 하는 불제자는 최소한 이 고성제를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둑카를 내적으로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이 법의 수행에 대한 가장 훌륭한 동기가 됩니다.

둑카를 내적으로 체험하게 되면 그는 그것이 일어난 원인을 보려고 할 것이고, 그러므로 이 세상의 즐거운 대상에 대한 자신의 집착을 줄여나갈 준비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8정도를 수행할 때 둑카의 소멸, 곧 열반(nibbana)를 내적으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하 목꿋 왕자가 태국 왓 보원니웻 수도원장이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둑카, 그것은 이 오온이다.

존재에 대한 갈망이 그것의 원인이며

그것의 소멸은 열반(nibbana),

열반으로 가는 성스러운 길은 팔정도이다."

 

'태어남'은 보통 이번 생에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음 생(만일 이번 생으로 태어남을 끝내고자 하지 않는다면)에서는 담마(法)를 수행할 수 없게 되는 커다란 둑카가 없기를 목표로 해야 합니다.

이는 지금 선업(善業)을 많이 쌓음으로써 가능해집니다.

'늙음'은 가장 큰 육체적 둑카이며 반드시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만일 마음이 잘 다스려져 있어서 비탄이라는 정신적 둑카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는데 매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질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마음이 잘 다스려진 사람은 자기 연민에 빠진다거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또는 비통함을 느낌으로써 일어나는 둑카를 가중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때 괴로움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일어난 모든 것은 사라지는 성질이 있다."라는 간결한 법의 가르침은 경전에서도 수없이 찾을 수 있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이라는 죽음에 대한 정신적인 둑카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실제적인 육체의 죽음보다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마음은 비록 육체적 고통이 매우 커지더라도 둑카를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훈련되고 개발될 수 있습니다.

'슬픔'은 법의 수행에 의해 완전히 끊을 수 있고 만일 이렇게 된다면 또한 '비탄'의 원인까지도 없애게 될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은 몸에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그것을 치료할 수 없을 때는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몸을 '나에게 속한 것'으로서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동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신적 번민'은 훈련되지 않은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법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도에 따라 그것은 줄어들 것입니다. 그에 비해 자아에 대한 집착이 허상이라는 것을 본 아라한은 그것을 완전히 없애버립니다.

역시 정신적인 조건인 '절망'이 갈망과 무지의 배후에 남을 것입니다. 절망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신적 개발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싫은 것과 만나는 것,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모두 욕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욕망이 적을수록 이러한 둑카는 적어집니다. 욕망이 없어지면 둑카 또한 없어집니다.

 

'오온에 대한 집착'은 그것에 집착하는 사람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동시에 둑카입니다. 집착이 사라질 때, 이와 관련된 정신적 둑카가 사라지고, 그리고 나면 그는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순수한 오온의 상태가 계속됩니다.

그러나 붓다를 포함한 모든 아라한은 그들의 마지막 생 동안 우리와 마찬가지로 육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육체와 관련된 고통은 계속되었습니다. 부처님조차도 마지막 생에서 몇 번의 병을 앓으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과 아라한들은 모두 오늘에 이르기까지 육체적인 조건으로 번민하고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습니다.

 

현재 이 생에서 겪는 우리의 경험은 우리가 과거에 한 이에 의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현재 많은 둑카를 겪고 있다면 우리는 과거에 많은 악업을 지었고,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악의 뿌리를 스스로 강하게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일어나있고 치유될 수 없는 둑카를 우리는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미래에 열매를 맺게 될 업을 계속해서 짓고 있습니다. 만일 번뇌와 관련된 업을 짓는다면 우리는 더욱 많은 둑카를 얻어야만 할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이를 이해하고 둑카의 줄어듦과 끝을 향해서 훈련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법의 수행을 통해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한 행복을 만들어갑니다.

 

※ 위 법문은 붓다의 길따라 선원 홈페이지(http://www.buddhayana.kr/)에서 옮겨왔습니다.

0

INFORMATION


상호명 : (사)한국테라와다불교


법인등록번호 : 135-321-0000777  이사장: 이용재

주소 :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반계1길 21-33 붓다의 길따라 선원

TEL: 010-4242-5140/ 010-3181-2316 

E-MAIL: stonhi27@hanmail.net


Copyright© 사단법인 한국테라와다불교 사무국ALL RIGHTS RESERVED.


CONTACT

INFORMATION


상호명 : (사)한국테라와다불교


법인등록번호 : 135-321-0000777

이사장: 이용재

주소 :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반계1길 21-33 붓다의 길따라 선원




TEL:   010-4242-5140/ 010-3181-2316

E-MAIL: stonhi27@hanmail.net


Copyright© 사단법인 한국테라와다불교 사무국

ALL RIGHTS RESERVED.




© BYULZZI Corp. All Rights Reserved. hosting by byulzz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