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의 사물이나 자극을 의식하는 과정을 <지각> 혹은 <인식>이라고 합니다. 시각접촉이 일어날 때 저것은 '태양'이다 '하늘'이다 '구름'이다 라고 아는 것. 저것은 '붉은 태양'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이라고 인습적 명칭으로 아는 것. 빨리어로 <산냐>라고 하지요. 색수상행식 '오온' 가운데 '상(想)'에 해당합니다.
사람들은 '지각인식의 창'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 이라는 6감각기관이 대상과 접촉하는 순간 그 어떤 느낌과 함께 지각인식의 창문이 열립니다. 창문 너머 최초로 지각인식된 정보를 바탕으로 하여 끊임없는 생각과 판단과 행위가 이루어집니다. 생존을 위한 우리들의 일상은 이러한 과정의 연속입니다.
대상이 바르게 지각인식 되었을 때 그에 맞는 생각과 판단과 행위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지각인식이 잘못되었을 때는 그릇된 생각 판단 행위가 나타납니다. '지각인식의 오류'에 의해 발생한 잘못된 결과입니다. 대상과의 접촉이 일이나는 순간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잘못 인지ㆍ해석한 결과입니다.
잘못된 지각인식을 <착각>이라고 합니다. 6감각기관 중 하나가 대상과 접촉하는 순간 대상이 주는 원초적 정보를 잘못 받아들인 것입니다. <착각>은 일상 속에서 누구나 경험하고 있는 일반적 현상입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낯익은 사람으로 착각할 때가 있고, 약속 날짜나 요일을 착각하여 곤란을 겪기도 합니다.
<착각>보다 한 차원 더 심각한 지각인식의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을 <환각>이라고 합니다. <환각>은 접촉자극이 실재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무언가를 실재 경험(지각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낯선 누군가가 창밖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창밖을 내다보지만 창밖엔 그 어떤 사람의 흔적도 없습니다.
이처럼 <착각>은 접촉하는 순간 실재로 존재하는 자극에 대한 잘못된 지각인식인 반면, <환각>은 존재하지도 않은 접촉자극을 실재로 존재하는 접촉자극인 양 지각인식하는 것입니다. 지각인식의 오류와 관련된 용어 중에는 착각ㆍ환각 이외에 망각ㆍ망상ㆍ환상 등이 있습니다. 이 역시 지각인식의 오류에 기초한 정신작용입니다.
세상만물은 지각인식의 토대 위에서만 존재합니다. 지각인식은 사물에 대한 원초적 정보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만일 이러한 정신적 과정이 생략될 경우 마음은 정상적인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땅위에 박혀 있는 바위나 전봇대 같이 스스로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그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착각ㆍ환각이 누구에게나 단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일시적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정신적 장애를 겪고 있는 몇몇 사람들의 특수한 질환 정도로 인식합니다. 정상적 자각 가운데 극히 일부가 오자각을 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우리들의 삶 자체가 착각의 연속이요, 환각 그 자체라 단정짓고 있습니다.
만일 대상을 지각인식하는 창문이 오염되어 있다면 그 어떤 대상과 접촉하더라도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전제 자체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진실은 영원히 규명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령 "바다의 끝은 낭떨어지다"라고 했지만 지금까지 그 낭떨어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잘못 출제된 문제에 정답이 있을 수 없듯이.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모든 것들에 대해 의심의 여지없이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실재라고 생각합니다.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얼음조각을 입에 넣으면 차갑고 단단합니다. 실재입니다. 지금 테이블 위에 빨갛게 익은 사과가 한개 놓여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베어먹기까지 하였습니다. 실재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무엇을 근거로 하여 우리들의 삶이 착각의 연속이요, 환각 그 자체라 했을까요?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의 공간안에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는 곳입니다. 하나는 명칭이나 인습ㆍ관습에 의해 존재하는 상대성을 띤 가상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명칭ㆍ개념화되기 이전의 절대적 실재세계입니다.
강가에 앉아 강물을 바라봅니다. 눈의 시각이 흐르는 물과 접촉합니다. 순간 그 어떤 느낌과 함께 지각인식이 생겨납니다. 물이다. 강물이다. 한강물이다. 물은 본래 물이란 이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물ㆍ강물ㆍ한강은 사람들에 의해 붙여진 명칭입니다. 이처럼 세상만물은 사람들에 의해 명명되어진 저마다의 고유한 명칭을 가지고 존재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본연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있지만, 명칭이 덧붙여지는 순간 명칭이라는 가상의 존재로 재탄생합니다. 명칭ㆍ인습ㆍ관습 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명칭ㆍ인습ㆍ관습은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가상의 것들을 실재의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상의 것들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집착합니다.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인습ㆍ관습 저 너머, 그리고 명칭 붙여지기 이전의 본래 성품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명칭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조건에 따라 가치가 변하는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건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상대적인 것들에 대해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항상한 것이다 항상한 나의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것들의 본래 성품이 무상ㆍ고ㆍ무아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집착합니다. 집착은 또 집착을 낳고, 그로 인해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윤회의 세계를 전전하며 고통 받습니다.
착각ㆍ환각현상은 가상세계에 집착되었을 때 나타납니다. 명칭ㆍ개념과 함께 경험된 모든 것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다양한 형태로 무의식 속에 저장됩니다. 그 경험들이 모이고 쌓여 무의식 저 깊은 곳에 고정관념으로 뿌리 내립니다. 혹은 선입견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새로운 경험은 항상 고정관념ㆍ선입견의 지배를 받습니다.
대상이 6감각기관을 통해 지각인식되는 순간 그 대상은 고정관념ㆍ선입견의 거울에 비춰지면서 본래 모습이 왜곡됩니다. 왜곡된 것을 우리는 실재라고 확신하면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온갖 드라마의 각본을 써내려 갑니다. 드라마의 내용은 욕망과 분노, 기쁨과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언제나 '나' 입니다.
이처럼 고정관념ㆍ선입견은 '지각인식의 오류'를 일으키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지각인식'은 오온(색수상행식)이 작용할 때 느낌과 함께 가장 먼저 일어나는 정신활동입니다. 불에 비유하자면 불이 확산하기 이전의 작은 불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각인식의 오류' 야말로 모든 번뇌의 시발점입니다.
그러나 착각ㆍ환각은 '지각인식의 오류'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착각ㆍ환각은 지각인식의 단계에서 뿐만 아니라 지각인식의 토대 위에 진행되고 있는 온갖 심리현상들 속에서도 끊임없는 착각ㆍ환각이 일어납니다. 이와같은 오류에 의해 마침내 '견해(딧티)'에 대한 착각ㆍ환각이 생겨납니다.
오온은 본래 무상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상한 성품 때문에 무너지고 부패하기 마련이며, 무너지고 부패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고통의 덩어리며, 거기에 나란 실체는 본래 존재하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지각인식의 오류, 생각의 오류, 견해의 오류라고 하는 착각ㆍ환각ㆍ환상의 늪에 빠져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상한 것을 항상한 것으로, 부정한 것을 깨끗한 것으로, 본래 고통인 것을 행복한 것으로, 나ㆍ내것 아닌 것을 나ㆍ내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믿음이 착각ㆍ환각의 토대위에서 형성된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일평생 살아갑니다. 착각ㆍ환각에서 깨어나기 전까지는.
고따마 붓다께서는 일찌기 착각ㆍ환각의 늪에 빠져있는 중생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팬유삔도-빠망 루-빵
웨-다나- 붑불루-빠마-
마리-찌꾸-빠마- 산냐-
상카-라- 까달루-빠마-
마-유-빠만짜 윈냐-낭"
(이 몸의 현상은 한조각 물거품이요
느낌은 하나의 물방울 같으며
지각인식은 한편의 아지랑이 같고
심리현상들은 파초나무 같으며
의식은 마치 요술의 환상과 같느니라)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은 항상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가을들판에서 풀을 뜯는 염소처럼 마음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기억하고 궁리하면서 매순간 자신을 위장하고, 가장합니다. 때때로 양심의 잣대를 바꾸어가며 스스로를 합리화 시킵니다. 그 마음장난에 속고 또 속습니다.
속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마음이 착각ㆍ환각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내 다시 그 마음에 갇혀 버립니다. 들뜬 마음으로 칡넝쿨을 바라보면 칡넝쿨이 순간적으로 뱀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썩은 새끼줄이 칡넝쿨로 보이고, 수십가닥 삼줄이 새끼줄로 보이기도 합니다. 선입견ㆍ고정관념이 대상을 왜곡시켜 버린 것입니다.
착각ㆍ환각, 즉 지각인식의 오류, 생각의 오류, 견해의 오류는 팔정도 수행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습니다. 팔정도는 계ㆍ정ㆍ혜 3학이라는 세 가지 닦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청정한 계행의 실천을 통해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산란한 마음을 고요히 진정시켜 삼매를 이룬 뒤, 삼매의 힘을 바탕으로 통찰지혜를 개발해 나가는 것입니다.
통찰지혜는 사물의 본성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지혜입니다. 통찰지혜는 올바른 각성입니다. 올바른 각성은 잘못된 착각ㆍ환각으로부터 깨어나게 합니다. 자기 견해에 대한 강한 집착을 놓아버리고 올바른 견해를 갖게 합니다. 정견이 확립되었을 때라야 만이 모든 번뇌가 소멸한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통찰지의 계발은 집에서도 할 수 있고, 학교에서도 할 수 있고, 직장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앉아서도 할 수 있고, 서서도 할 수 있고, 누워서도 할 수 있고, 심지어 걸으면서도 할 있습니다. 통찰지의 계발은 자신의 몸 혹은 마음에 대한 관찰로부터 시작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관찰은 들숨 날숨에 대한 감각이며, 걷고 있을 때는 걸음의 감각입니다.
호흡의 감각ㆍ몸의 동작ㆍ느낌ㆍ의도 등을 관찰하다 보면 어느 순간 몸과 마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생겨납니다. 오온(색수상행식)에 대하여 나의 몸, 나의 마음이 아닌 오롯이 정신과 물질로만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납니다. 이때 비로소 '지각인식의 오류'로 부터 벗어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합니다.
오온에 대한 관찰수행을 계속해 나가다보면 통찰지는 점점 더 성숙하여 마침내 오온 속에서 오온의 무상한 성품을 여실히 보게 됩니다. 눈을 깜박일 때도, 팔을 들어올릴 때도, 몸을 구부리는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행위와 그 행위에 대한 앎이 생겨났가 사라집니다. 무상에 대한 인식이 더욱 정밀해지면서 차츰 '무아'에 대한 인식이 생겨납니다.
지속적인 관찰과 올바른 숙고에 의해 무아에 대한 인식이 명료해지면서 4가지의 고귀한 진리(사성제)를 깨닫게 됩니다. 오온의 다발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통찰의 지혜는 그 어떤 생멸현상에도 동요되지 않고 '지견(知見)의 청정' 즉, 알고 봄의 지극한 청정에 이르게 됩니다. 마음은 이미 오온을 떠나 열반을 향해 있습니다.
마침내 성자의 흐름에 들어섰습니다. 오온이 '나다' '나 자신이라' 라는 그릇된 견해와 '개체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잘못된 믿음으로부터 해방됩니다. 또한 악도에 떨어져 비참한 삶을 살게 하는 모든 부도덕한 행동들이 뿌리 뽑힙니다. 이윽고 감각적 욕망과 악의ㆍ분노라고 하는 족쇄에서 풀려나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이 세상으로는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성자의 과위에 들어섰습니다. 미세하게 남아있던 감각적 욕망과 악의ㆍ분노로부터 완전히 벗어납니다. 마침내 몸(물질)과 마음(정신)의 결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대자유인이 됩니다. 모든 고통, 모든 번뇌 소멸한 닙바나(열반)에 안착한 것입니다.
수많은 존재들이 생존을 위해 나무 꼭데기(천상)로 올라갑니다. 올라가 힘껏 나무를 끌어안아 보지만 힘이 달려 곧 땅바닥(인간세상)으로 추락하고 맙니다. 그들에겐 날개도 없고 의지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겐 '열반'이라는 의지처가 있고, '팔정도'라는 날개가 있습니다. 하루속히 착각ㆍ환각의 늪에서 벗어나 구경의 해탈열반에 이르소서!
*
우리들 마음 속에
허수아비 하나 서 있습니다.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과
빛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생각 사이
그 인식의 들녘에
허수아비 하나 서 있습니다.
썩은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듯
안개를 연기로 오인하듯
꿈속에서 우리는
허수아비를 부둥켜안고 웁니다.
허수아비를 얼싸안고 춤을 춤니다.
두려워서 뒷걸음질 치기도 하고
속상해서 잠 못 이룰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평생을
속고 또 속으며 살아갑니다.
일체는
이름을 빌려서 가상으로 존재하는 것.
산에서 내려온 고라니가
가상을 실재로 착각하듯
우리는 늘
덧없는 마음을 항상한 마음으로 보고
부정한 것을 청정한 것으로 인식하면서
나 아닌 것을 나의 자아
나의 것이라 집착하며 살아가나니,
만일 우리가 꿈이나 현실
가상과 실재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내 비록 사람의 형상은 갖추었으나
착각의 늪에 빠져사는 어리석은 고라니 !
*
불멸 2565(6).7.15
천림산 기슭에서
메따와 함께_( )_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의 사물이나 자극을 의식하는 과정을 <지각> 혹은 <인식>이라고 합니다. 시각접촉이 일어날 때 저것은 '태양'이다 '하늘'이다 '구름'이다 라고 아는 것. 저것은 '붉은 태양'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이라고 인습적 명칭으로 아는 것. 빨리어로 <산냐>라고 하지요. 색수상행식 '오온' 가운데 '상(想)'에 해당합니다.
사람들은 '지각인식의 창'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 이라는 6감각기관이 대상과 접촉하는 순간 그 어떤 느낌과 함께 지각인식의 창문이 열립니다. 창문 너머 최초로 지각인식된 정보를 바탕으로 하여 끊임없는 생각과 판단과 행위가 이루어집니다. 생존을 위한 우리들의 일상은 이러한 과정의 연속입니다.
대상이 바르게 지각인식 되었을 때 그에 맞는 생각과 판단과 행위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지각인식이 잘못되었을 때는 그릇된 생각 판단 행위가 나타납니다. '지각인식의 오류'에 의해 발생한 잘못된 결과입니다. 대상과의 접촉이 일이나는 순간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잘못 인지ㆍ해석한 결과입니다.
잘못된 지각인식을 <착각>이라고 합니다. 6감각기관 중 하나가 대상과 접촉하는 순간 대상이 주는 원초적 정보를 잘못 받아들인 것입니다. <착각>은 일상 속에서 누구나 경험하고 있는 일반적 현상입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낯익은 사람으로 착각할 때가 있고, 약속 날짜나 요일을 착각하여 곤란을 겪기도 합니다.
<착각>보다 한 차원 더 심각한 지각인식의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을 <환각>이라고 합니다. <환각>은 접촉자극이 실재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무언가를 실재 경험(지각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낯선 누군가가 창밖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창밖을 내다보지만 창밖엔 그 어떤 사람의 흔적도 없습니다.
이처럼 <착각>은 접촉하는 순간 실재로 존재하는 자극에 대한 잘못된 지각인식인 반면, <환각>은 존재하지도 않은 접촉자극을 실재로 존재하는 접촉자극인 양 지각인식하는 것입니다. 지각인식의 오류와 관련된 용어 중에는 착각ㆍ환각 이외에 망각ㆍ망상ㆍ환상 등이 있습니다. 이 역시 지각인식의 오류에 기초한 정신작용입니다.
세상만물은 지각인식의 토대 위에서만 존재합니다. 지각인식은 사물에 대한 원초적 정보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만일 이러한 정신적 과정이 생략될 경우 마음은 정상적인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땅위에 박혀 있는 바위나 전봇대 같이 스스로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그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착각ㆍ환각이 누구에게나 단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일시적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정신적 장애를 겪고 있는 몇몇 사람들의 특수한 질환 정도로 인식합니다. 정상적 자각 가운데 극히 일부가 오자각을 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우리들의 삶 자체가 착각의 연속이요, 환각 그 자체라 단정짓고 있습니다.
만일 대상을 지각인식하는 창문이 오염되어 있다면 그 어떤 대상과 접촉하더라도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전제 자체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진실은 영원히 규명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령 "바다의 끝은 낭떨어지다"라고 했지만 지금까지 그 낭떨어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잘못 출제된 문제에 정답이 있을 수 없듯이.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모든 것들에 대해 의심의 여지없이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실재라고 생각합니다.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얼음조각을 입에 넣으면 차갑고 단단합니다. 실재입니다. 지금 테이블 위에 빨갛게 익은 사과가 한개 놓여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베어먹기까지 하였습니다. 실재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무엇을 근거로 하여 우리들의 삶이 착각의 연속이요, 환각 그 자체라 했을까요?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의 공간안에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는 곳입니다. 하나는 명칭이나 인습ㆍ관습에 의해 존재하는 상대성을 띤 가상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명칭ㆍ개념화되기 이전의 절대적 실재세계입니다.
강가에 앉아 강물을 바라봅니다. 눈의 시각이 흐르는 물과 접촉합니다. 순간 그 어떤 느낌과 함께 지각인식이 생겨납니다. 물이다. 강물이다. 한강물이다. 물은 본래 물이란 이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물ㆍ강물ㆍ한강은 사람들에 의해 붙여진 명칭입니다. 이처럼 세상만물은 사람들에 의해 명명되어진 저마다의 고유한 명칭을 가지고 존재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본연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있지만, 명칭이 덧붙여지는 순간 명칭이라는 가상의 존재로 재탄생합니다. 명칭ㆍ인습ㆍ관습 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명칭ㆍ인습ㆍ관습은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가상의 것들을 실재의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상의 것들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집착합니다.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인습ㆍ관습 저 너머, 그리고 명칭 붙여지기 이전의 본래 성품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명칭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조건에 따라 가치가 변하는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건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상대적인 것들에 대해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항상한 것이다 항상한 나의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것들의 본래 성품이 무상ㆍ고ㆍ무아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집착합니다. 집착은 또 집착을 낳고, 그로 인해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윤회의 세계를 전전하며 고통 받습니다.
착각ㆍ환각현상은 가상세계에 집착되었을 때 나타납니다. 명칭ㆍ개념과 함께 경험된 모든 것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다양한 형태로 무의식 속에 저장됩니다. 그 경험들이 모이고 쌓여 무의식 저 깊은 곳에 고정관념으로 뿌리 내립니다. 혹은 선입견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새로운 경험은 항상 고정관념ㆍ선입견의 지배를 받습니다.
대상이 6감각기관을 통해 지각인식되는 순간 그 대상은 고정관념ㆍ선입견의 거울에 비춰지면서 본래 모습이 왜곡됩니다. 왜곡된 것을 우리는 실재라고 확신하면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온갖 드라마의 각본을 써내려 갑니다. 드라마의 내용은 욕망과 분노, 기쁨과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언제나 '나' 입니다.
이처럼 고정관념ㆍ선입견은 '지각인식의 오류'를 일으키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지각인식'은 오온(색수상행식)이 작용할 때 느낌과 함께 가장 먼저 일어나는 정신활동입니다. 불에 비유하자면 불이 확산하기 이전의 작은 불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각인식의 오류' 야말로 모든 번뇌의 시발점입니다.
그러나 착각ㆍ환각은 '지각인식의 오류'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착각ㆍ환각은 지각인식의 단계에서 뿐만 아니라 지각인식의 토대 위에 진행되고 있는 온갖 심리현상들 속에서도 끊임없는 착각ㆍ환각이 일어납니다. 이와같은 오류에 의해 마침내 '견해(딧티)'에 대한 착각ㆍ환각이 생겨납니다.
오온은 본래 무상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상한 성품 때문에 무너지고 부패하기 마련이며, 무너지고 부패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고통의 덩어리며, 거기에 나란 실체는 본래 존재하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지각인식의 오류, 생각의 오류, 견해의 오류라고 하는 착각ㆍ환각ㆍ환상의 늪에 빠져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상한 것을 항상한 것으로, 부정한 것을 깨끗한 것으로, 본래 고통인 것을 행복한 것으로, 나ㆍ내것 아닌 것을 나ㆍ내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믿음이 착각ㆍ환각의 토대위에서 형성된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일평생 살아갑니다. 착각ㆍ환각에서 깨어나기 전까지는.
고따마 붓다께서는 일찌기 착각ㆍ환각의 늪에 빠져있는 중생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팬유삔도-빠망 루-빵
웨-다나- 붑불루-빠마-
마리-찌꾸-빠마- 산냐-
상카-라- 까달루-빠마-
마-유-빠만짜 윈냐-낭"
(이 몸의 현상은 한조각 물거품이요
느낌은 하나의 물방울 같으며
지각인식은 한편의 아지랑이 같고
심리현상들은 파초나무 같으며
의식은 마치 요술의 환상과 같느니라)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은 항상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가을들판에서 풀을 뜯는 염소처럼 마음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기억하고 궁리하면서 매순간 자신을 위장하고, 가장합니다. 때때로 양심의 잣대를 바꾸어가며 스스로를 합리화 시킵니다. 그 마음장난에 속고 또 속습니다.
속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마음이 착각ㆍ환각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내 다시 그 마음에 갇혀 버립니다. 들뜬 마음으로 칡넝쿨을 바라보면 칡넝쿨이 순간적으로 뱀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썩은 새끼줄이 칡넝쿨로 보이고, 수십가닥 삼줄이 새끼줄로 보이기도 합니다. 선입견ㆍ고정관념이 대상을 왜곡시켜 버린 것입니다.
착각ㆍ환각, 즉 지각인식의 오류, 생각의 오류, 견해의 오류는 팔정도 수행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습니다. 팔정도는 계ㆍ정ㆍ혜 3학이라는 세 가지 닦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청정한 계행의 실천을 통해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산란한 마음을 고요히 진정시켜 삼매를 이룬 뒤, 삼매의 힘을 바탕으로 통찰지혜를 개발해 나가는 것입니다.
통찰지혜는 사물의 본성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지혜입니다. 통찰지혜는 올바른 각성입니다. 올바른 각성은 잘못된 착각ㆍ환각으로부터 깨어나게 합니다. 자기 견해에 대한 강한 집착을 놓아버리고 올바른 견해를 갖게 합니다. 정견이 확립되었을 때라야 만이 모든 번뇌가 소멸한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통찰지의 계발은 집에서도 할 수 있고, 학교에서도 할 수 있고, 직장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앉아서도 할 수 있고, 서서도 할 수 있고, 누워서도 할 수 있고, 심지어 걸으면서도 할 있습니다. 통찰지의 계발은 자신의 몸 혹은 마음에 대한 관찰로부터 시작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관찰은 들숨 날숨에 대한 감각이며, 걷고 있을 때는 걸음의 감각입니다.
호흡의 감각ㆍ몸의 동작ㆍ느낌ㆍ의도 등을 관찰하다 보면 어느 순간 몸과 마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생겨납니다. 오온(색수상행식)에 대하여 나의 몸, 나의 마음이 아닌 오롯이 정신과 물질로만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납니다. 이때 비로소 '지각인식의 오류'로 부터 벗어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합니다.
오온에 대한 관찰수행을 계속해 나가다보면 통찰지는 점점 더 성숙하여 마침내 오온 속에서 오온의 무상한 성품을 여실히 보게 됩니다. 눈을 깜박일 때도, 팔을 들어올릴 때도, 몸을 구부리는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행위와 그 행위에 대한 앎이 생겨났가 사라집니다. 무상에 대한 인식이 더욱 정밀해지면서 차츰 '무아'에 대한 인식이 생겨납니다.
지속적인 관찰과 올바른 숙고에 의해 무아에 대한 인식이 명료해지면서 4가지의 고귀한 진리(사성제)를 깨닫게 됩니다. 오온의 다발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통찰의 지혜는 그 어떤 생멸현상에도 동요되지 않고 '지견(知見)의 청정' 즉, 알고 봄의 지극한 청정에 이르게 됩니다. 마음은 이미 오온을 떠나 열반을 향해 있습니다.
마침내 성자의 흐름에 들어섰습니다. 오온이 '나다' '나 자신이라' 라는 그릇된 견해와 '개체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잘못된 믿음으로부터 해방됩니다. 또한 악도에 떨어져 비참한 삶을 살게 하는 모든 부도덕한 행동들이 뿌리 뽑힙니다. 이윽고 감각적 욕망과 악의ㆍ분노라고 하는 족쇄에서 풀려나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이 세상으로는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성자의 과위에 들어섰습니다. 미세하게 남아있던 감각적 욕망과 악의ㆍ분노로부터 완전히 벗어납니다. 마침내 몸(물질)과 마음(정신)의 결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대자유인이 됩니다. 모든 고통, 모든 번뇌 소멸한 닙바나(열반)에 안착한 것입니다.
수많은 존재들이 생존을 위해 나무 꼭데기(천상)로 올라갑니다. 올라가 힘껏 나무를 끌어안아 보지만 힘이 달려 곧 땅바닥(인간세상)으로 추락하고 맙니다. 그들에겐 날개도 없고 의지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겐 '열반'이라는 의지처가 있고, '팔정도'라는 날개가 있습니다. 하루속히 착각ㆍ환각의 늪에서 벗어나 구경의 해탈열반에 이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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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마음 속에
허수아비 하나 서 있습니다.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과
빛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생각 사이
그 인식의 들녘에
허수아비 하나 서 있습니다.
썩은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듯
안개를 연기로 오인하듯
꿈속에서 우리는
허수아비를 부둥켜안고 웁니다.
허수아비를 얼싸안고 춤을 춤니다.
두려워서 뒷걸음질 치기도 하고
속상해서 잠 못 이룰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평생을
속고 또 속으며 살아갑니다.
일체는
이름을 빌려서 가상으로 존재하는 것.
산에서 내려온 고라니가
가상을 실재로 착각하듯
우리는 늘
덧없는 마음을 항상한 마음으로 보고
부정한 것을 청정한 것으로 인식하면서
나 아닌 것을 나의 자아
나의 것이라 집착하며 살아가나니,
만일 우리가 꿈이나 현실
가상과 실재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내 비록 사람의 형상은 갖추었으나
착각의 늪에 빠져사는 어리석은 고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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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2565(6).7.15
천림산 기슭에서
메따와 함께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