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설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 상가라자 뿐냐산또 큰스님

관리자
2024-08-31
조회수 221

부처님께서 사위성에 계실 때 일입니다.

 

부처님의 하루 일과를 볼 것 같으면 새벽에 탁발을 나가시게 됩니다. 경전 상에는 ‘손을 폈을 때 손바닥에 손금이 보일 때부터 막대기를 세워놨을 때 해가 정중앙에 오는 시간을 넘기지 말고 탁발을 끝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동트는 무렵부터 해서 정오 그때까지 탁발도 끝내고 공양도 끝내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 후에는 탁발을 못 합니다. 그래서 그 이후 나머지 시간을 비시(非時)라고 합니다. ‘때가 아닌 때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때 부처님께서 탁발을 나가셨다가 돌아와서 공양을 잡수시고, 공양을 절로 가져온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들을 위해서 법을 설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오후 나절에 대해서는 경전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아난다여, 누가 부처님이 무얼 하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여라.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여래께서는 고요한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나무 아래 양다리를 포개서 결가부좌를 하고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을 관찰하고 머물고 또 경행처 주위를 왔다갔다하면서 사물의 실상을 파악하면서 머문다.’”

 

이와 같이 오후 시간에도 부처님께서는 수행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다가 저녁에는 또 출가한 스님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십니다. 또 초경 무렵이 되면 신도들이 법을 들으러 부처님께 옵니다. 그때 또 법을 설하고 나서 이경 무렵이 될 것 같으면 천상에 있는 천인들에게 법을 설했습니다. 그래서 삼경 무렵에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누워서 ‘내일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누군가’ 하고 관찰을 하시다가 딱 한 시간 취침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내시는 게 부처님의 일과이셨는데, 그러한 날들 중의 어느 오후였는가 봅니다.

 

부처님께서 저쪽 나무 아래에서 수행을 하시다가 갑자기 나무 아래에 있는 흙 한 줌 손에 쥐시고는 옆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에게 물으셨지요.

 

“비구들이여! 내 손바닥 안에 있는 것이 보이느냐?”

“예,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는 흙이 보입니다.”

 

스님들이 부처님께서 흙을 가지고 왜 저러시나, 궁금해합니다.

 

“그럼, 이 손바닥 안에 있는 흙이 많으냐. 히말라야 산에 있느 흙이 많으냐?”

“히말라야에 있는 흙이 많지요.”

 

“그러면 내가 법을 설하여 깨달음을 이루는 사람이 많겠느냐?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많겠느냐?”

“당연히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많겠지요. 인도대륙이 얼마나 넓습니까. 그리고 이 세상의 많은 사람이 있지만,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부처님 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습니다. 많은 이들은 법을 듣지만 깨닫지 못하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깨달음에 이르는 이들은 이 손 안에 있는 흙과 같이 미세하다. 그리고 내 법을 듣기는 더욱 힘들다. 그러니 너희들은 하루 빨리 도를 이루도록 스스로 노력하여라.”

 

부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아무리 부처님이라 하시더라도 내가 법을 설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부처님 법을 만났을 때 열심히 노력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해야 한다’는 질책이었나 봅니다.

 

요즘, 세상이 아주 힘들다 합니다. 그렇지만, 부처님께서 얘기 안 한 일은 힘든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 바르게 부처님 법을 따라 살아갈 것 같으면 그것은 하등의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싸움질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들이지 내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바르게 마음을 조절해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내게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라도 자기 스스로 노력해서 개척해나갈 수 있습니다. 부처님 법을 아무리 듣더라도 깨달음을 이룰 수 없는 사람이 있듯이 주변 상황에 자주 휩쓸리게 되면 스스로도 망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책을 보니, 독일의 한 심리학자가 이런 말을 했더군요. 결혼생활에 장애를 가져오는 다섯 가지 요인이라 해서 ‘욕심, 나태, 게으름, 화내는 것, 의심하는 것’을 꼽았는데, 그 가운데 의심이 왜 생깁니까? 부부간의 의심, 아이에 대한 의심 등 내가 마음의 문을 열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히 이럴 것이다’ 하고 짐작했는데, 다른 행동을 하니 의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역으로 생각할 것 같으면 내가 마음의 문을 열면 의심이라는 게 없어지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저 스님의 말씀이 바로 부처님의 말씀일까? 내가 하고 있는 게 불제자로서 올바른가?’ 등을 의심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 선사들이 말씀하시길, ‘깨달음에 이를 것 같으면 세 가지를 구비하여라’고 했습니다. 즉 ‘대신심·대분심·대의심, 세 가지를 키워라’ 했습니다. 여기서 ‘크게 의심하여라’라고 했습니다.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점점 더 마음을 좁혀라’라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나는 요즘 ‘그런 세 가지를 다 없애라’ 이렇게 말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일단 마음의 문을 열어 놓지 않은 상태에서는 누구든지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부부간의 문제, 자식간의 문제를 터놓고 대화로써 풀어가면 그런 의심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열어놓고 깨어서 살아갑시다.

 


- <조건 따라 생겨난 것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 中, 도성(뿐냐산또) 큰스님, 삼각형 프레스,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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