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진용 빤냐와로 마하테로 법문집」에 있는 내용입니다. - 대구 붓다야나 선원 선우회 발행 >
5. 예류과와 예류도의 차이
예류도에는 교법을 지혜(慧)에 의해 이해하는 지혜타입의 법수자와 여래에의 믿음(信)을 가지는 신심타입의 신수자의 두 종류의 성향이 있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류과에 도달하면 그 차이는 없어져 같은 하나의 예류과가 되는 것일까요?
예류도에서의 성향은 예류과가 되어도 남습니다. 깨달음의 단계를 선정체험의 유무에 의해 일곱 종류로 분류하는 설명이 경전의 곳곳에 보이나, 그 최초의 둘은 법수자와 신수자입니다. 한편 예류과 이상으로 선정체험이 없는 견도달자(見到達者)와 신해탈자(信解脫者)에게는 각각 법수자・신수자의 성향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중부70경 Kitāgiri-sutta(끼따기리경)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들 일곱 종류의 사람들이 있고 알려져 있다. 일곱 사람이란 양면해탈자(兩面解脫者), 혜해탈자(慧解脫者), 신증자(身證者), 견도달자(見到達者), 신해탈자(信解脫者), 법수자(法随者), 신수자(信随者)이다.
(ubhatobhāga-vimutto pańńāvimutto kāyasakkhi diţţhippatto saddhāvimutto
dhammānusāri saddhānusāri). 〔MN I, 477〕”
양면해탈자(兩面解脫者)와 혜해탈자(慧解脫者)는 아라한입니다. 양면해탈자는 선정지:止)을 체험하고(심해탈), 혜(관:觀)에 의해 번뇌를 멸진했으므로(혜해탈) 「양면탈자라 불립니다. 혜해탈자는 심해탈없이 아라한에 이른 자입니다.
이 둘은 번뇌를 소멸하고 수행을 완성했으므로 불방일(不放逸)이 될 수가 없으므로 부처님에게 「불방일에 힘쓸 것」이라는 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하의 다섯은 전부 아라한과를 향해 「불방일에 힘쓸 것」이라고 지도 받을 단계에 있습니다. 신증(身證), 견도달(見到達), 신해탈(信解脫)의 셋은 아라한향 이하 예류과 이상으로 깨달음의 일부에는 도달한 자입니다. 그 중 신증자(身證者)는 선정을 체험하고 (심해탈), 지혜(慧)에 의해 번뇌의 일부가 소멸한 자입니다.
견도달과 신해탈의 둘은 함께 무색계선정 또는 색계선정도 포함한 팔선정을 체험하지 않았으나, 함께 지혜(慧)에 의해 번뇌의 일부 (삼결 三結)가 소멸한 상태입니다. 양자의 성격의 차이는 그대로 수법, 수신의 둘의 차이에 대응합니다.
견도달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종류의 사람은 색을 초월한 무색의 해탈(vimokha)에 몸으로써 접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자는 지혜(慧)로서 보고 번뇌의 일부가 소멸한 상태이다(pańńāya c´ assa disvā ekacce āsavā parikkhinā honti). 또한 이 자에게는 여래에 의해 설해진 교법이 지혜(慧)에 의해 잘 간파되고 잘 통찰된다. 비구들이여! 이 자는 견도달자라고 불린다. 〔MN I, 477〕”
견도달자는 선정을 체험하진 않았지만, 지혜에 의해 번뇌의 일부(삼결)는 소멸한 상태이고 예류과 이상입니다. 그 특징은 여래의 교법을 지혜로 잘 간파하고 통찰한다는 것입니다.
신해탈자도 견도달자와 같이 선정을 체험하진 않았지만, 지혜에 의해 번뇌의 일부가 소멸한 상태이고 예류과 이상입니다.
신해탈자(saddhāvimutta)는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종류의 사람은 색을 초월한 무색의 해탈(vimokha)에 몸으로써 접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자에게는 여래에의 믿음(信)이 고정되고 뿌리가 생기고 확정되어 있다(tathāgate c´ assa saddhā niviţţhā hoti mūlajātā patiţţhitā). 비구들이여! 이 자는 신해탈자라고 불린다. 〔MN I, 477〕”
불법(佛法)을 지혜로 통찰하는 견도달자와는 달리 신해탈자는 부처님에의 신뢰가 확고부동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비교를 위해 계속해서 설명되는 법수자와 신수자를 고찰해 봅시다.
법수자는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종류의 사람은 색을 초월한 무색의 해탈(vimokha)에 몸으로써 접촉하지 않는다. 또한 이 자는 지혜(慧)로써 보고 번뇌가 소멸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자에게는 여래에 의해 설해진 교법이 지혜(慧)에 의해 조금은 이해되고 용인되어 있다. 게다가 이 자에게는 신근(信根), 정진근(精進根), 염근(念根), 정근(定根), 혜근(慧根)이라는 특질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 자는 법수자라고 불린다. 〔MN I, 477〕” 라고 설명됩니다.
여래의 교법을 지혜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지혜타입인 점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견도달자와 유사합니다. 양자의 다른 점은 삼결(三結)을 소멸하여 예류과 이상이 되었는지 아직 되지 않았는지의 차이일 뿐입니다.
신수자의 특징은 신해탈자와 대응합니다. 다른 부분만 고찰해보면,
“비구들이여! 여기에 ----- 그러나 이 자에게는 여래에게 조금의 믿음(信), 조금의 애락(愛樂)이 있다. 게다가 이 자에게는 신근(信根) 내지 혜근(慧根)이라는 특질이 있다. 이 자는 신수자라고 불린다. 〔MN I, 477〕”
이쪽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래에의 믿음・애락을 가진 신순(信順)타입인 것은 신해탈자와 유사합니다. 예류과 이상인가 그 이하의 예류향에 그치는 것인가가 다른 것입니다.
예류과에의 준비단계로서 교법을 지혜(慧)에 의해 이해하는 것, 또는 여래에게 믿음(信)을 가지는 것이 필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어느 타입이라도 예류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류과 현증(現證) 후에도 그 성향은 남습니다.
6. 예류과 현증(現證)에의 불퇴의 길
예류과 현증에의 길을 걷는 법수・신수자는 보시공양을 받을 만한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일원이지만, 예류과 이상인 자와 같이 아라한과를 이룰 때까지 불퇴전이 되어 있는 것일까요? 또는 아직 범부나 악도에 퇴전할 여지가 있는 깨달음이 불확정한 단계일까요?
수법・수신 단계의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떤 특별한 상태에 이른 법수자・신수자는 불퇴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예류과를 현증치 않고는 죽을 수 없는 자가 설명됩니다. 우선 특별한 상태의 신수자가 설명됩니다.
“비구들이여! 안(眼)은 무상, 변화하는 것, 변이하는 것이다. 〔이,비,설,신,의〕는 무상, 변화하는 것, 변이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누구라도 이 진리(dhamma)를 이 처럼 신순(信順)하고 신해(信解)하는 자는 이렇게 일컬어진다 : 바른 것에의 결정(決定)에 들어가고 선사(善士)의 경지에 들어가고 범부의 경지를 초월한 신수자이다. 지옥, 축생, 또는 아귀로 윤회해버리는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류과를 현증하지 않은 채 죽을 수는 없게 된다(abhabbo ca tāva kālam kātum yāva na sotāpattiphalam sacchikaroti). 〔AN Ⅲ, 225〕”
부처님 자신을 신순(信順)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신순((信順)・신해(信解)하는 즉 눈(眼) 등의 육근, 그리고 이 인용문 아래에 설명하고 있지만, 색(色)등의 육경, 더욱이 육식 등의 모든 현상이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하는 제행무상의 진실(dhamma)을 신순(信順)・신해(信解)하면, 그 자는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고 진리에 오입(悟入)하는 직전의 단계에 있는 특수한 신수자입니다.
이러한 상태의 신수자는 「바른 것의 결정에 들어가고, 선사(善士)의 경지에 들어가고 범부의 경지를 초월」한, 즉 언젠가 반드시 깨달음을 얻는 것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삼악도에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삼악도에 떨어질 정도의 악업만은 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신수자는 금생에서 이미 「예류과를 현증(現證)하지 않은 채 죽을 수 없게 되었기」때문입니다. 필연적으로 예류과에서 아라한까지의 길도 결정되어 있습니다.
특수한 상태의 법수자도 특수한 신수자도 같이 설명되어집니다.
“비구들이여! 안(眼)은 ----- 이 진리를 이처럼 지혜(慧)에 의해 조금은 이해하고 인용(認容)하는 자는 누구라도 이렇게 일컬어진다 : 바른 것의 결정에 들어가고, 선사(善士)의 경지에 들어가고 범부의 경지를 초월한 법수자이다. 지옥, 축생, 또는 아귀로 윤회해버리는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류과를 현증(現證)하지 않은 채 죽지는 못한다.〔 AN Ⅲ, 225〕”
법수자도 부처님이 설하는 여러 가지 교법(dhamma)이 아닌 바로 제행무상의 진리(dhamma) 그 자체를 지혜(慧)에 의해 조금이라도 이해・수용한다면 예류과를 현증(現證)할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 특수한 법수자가 됩니다.
이 특수한 수신・수법의 경지를 넘어서면 예류과에 달합니다.
“누구라도 (제행무상의) 진리를 이처럼 알고 보는 (jānāti passati) 자는 이렇게 일컬어진다 : 예류자이다.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자이다. 정각을 향하는 것이 결정된 자이다. 〔AN Ⅲ, 225〕”
7. 예류과 현증(現證)의 방법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예류과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예류과에 도달하기 위한 「진리를 알고 본다」란 어떠한 것일까요?
빨리 경전에서 한 예를 봅니다. 욱가거사는 재가자인 채로 불환과에 도달했지만, 어떤 비구에게 말한 그의 여덟 가지 희유미증유의 일 중에서 두 가지가 예류과 현증(現證)에 관한 것입니다.
“존자시여! 제가 처음으로 멀리서 세존을 뵈었을 때 뵙자마자 세존에 대하여 제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cittaṁ pasidi). 존자시여! 제게는 이 제일의 희유미증유의 일이 있습니다. 존자시여! 그러한 저는 마음이 청청해져 세존을 뵙고 공경했습니다. 세존은 그러한 나에게 보시의 말씀, 지계의 말씀, 천상의 말씀, 욕구(欲)의 불이익・해로움(害)・더러움, 이욕(離欲)에 있어서의 이익 등을 순차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AN IV, 209〕”
멀리서 보기만 해도 그 모습에 감명을 받아 부처님에게 신순(信順)했다는 것입니다. 거사자신이 희유미증유의 일을 설명하듯이 이것이 깨달음을 향하는 예류과에 들어간 순간입니다. 그러고 나서 교법을 순차로 배우고, 어느 날 단계를 하나 넘습니다.
“제가 건전한 마음, 유연한 마음, 장애를 벗어난(離障) 마음, 환희의 마음, 청청한 마음이 된 것을 아시고 세존은 여러 부처님의 최승의 교법(dhammadesanā)을 설해주셨습니다. 즉 고집멸도입니다. 예를 들면 흑점도 없는 깨끗한 천이 그대로 바르게 〔염〕색을 취하듯이, 제게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생한 것은 모두 소멸한다 (yaṁ kiñci samudayadhammaṁ sabbaṁ taṁ nirodhadhammaṁ)」라고 이진이구(離塵離垢)의 법안이 생겼습니다(dhammacakkhuṁ udapādi). 존자시여! 그러한 제가 진리를 보고 진리를 얻고, 진리를 발견하고 진리의 오도(悟道)에 들은 것입니다. 의심을 초월하고 의혹을 떨치고 평안을 얻은 것입니다. 스승의 가르침 이외의 것에는 의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불법승에 귀의하고, 범행(梵行)을 다섯 가지로 하는 학처(學處)를 지녔습니다. 존자시여! 제게는 이러한 두 번째의 희유미증유한 일이 있었습니다. 〔AN IV, 209〕”
「생한 것은 모두 소멸한다.」즉 「제행무상」의 진리를 스스로 보고 얻고 발견하고 오도(悟道)에 들어갔으므로 「영원불멸의 내가 있다」고 하는「유신견」이 사라졌습니다. 자신이 발견하고 오도(悟道) 에 들어갔으므로 교법에 대한 「의심」도 사라졌습니다. 스스로 삼귀의하고 오계를 지니고 다른 스승의 가르침이나 관례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계금취(戒禁取)」도 사라졌습니다. 즉 「이진이구(離塵離垢)의 법안이 생겼을 때 (dhammacakkhum udapādi)」〔정(正)〕견이 생김과 함께 (sahadassanuppādā) 유신견 ・의심・계금취의 삼결이 끊어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 최초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안냐 꼰단냐도 설법을 듣고 있을 때 그대로 법안이 생기고 예류과를 깨달아 그것을 부처님은 「꼰단냐는 잘 알았다 (aňňāsi vata bho Kondaňňo 〔SN V, 423〕」고 칭송하신 것과 같습니다. 갑자기 「아라한이 되었다」가 아니라, 선정에 들지 않고 듣고 있는 채로 진리를 이해・용인하여 예류과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 세 개의 번뇌(삼결:三結)가 소멸했으므로 예류과를 현증(現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예류과를 현증(現證)한 것일까요?
여기에서는 선정을 체험하고 무상을 발견했다고는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선정에 들지 않더라도 진리를 듣고 있는 채로 진리를 이해・용인하여 제행무상의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여 그것만으로 예류과에 도달한 것입니다.
「생한 것은 모두 소멸한다,」 즉 무상이라고 그냥 신순(信順)하는 것도 아니고, 지식으로서 배우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발견하여 납득하면 「영원불멸의 나」라고 하는「유신견」이 잘못된 것이라고 알고, 「의심」・「계금취」와 함께 사라져버리는 것이 필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일까요?
제행무상의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기 위해서는 찰라 때마다 그야말로 광속으로 변화생멸을 반복하는 미립자레벨의 신체와 변화자체를, 그리고 물질보다 빨리 생멸한다고 하는 마음의 변화 자체를, 생(生)하면 바로 소멸한다는 그 순간을 포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행의 끊임없는 생멸・무상을 스스로 발견하면, 제행은 무상하다고 싫어도 납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전이나 아비담마에 의하면 부처님의 시대라면 부처님의 교법에 의해 그 논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법수자・신수자의 단계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진리를, 사실을, 스스로 발견하고 체험하고 오도(悟道)에 들어가고 납득하여 「유신견」이 실제로 소멸하는 것은 그것을 초월한 예류과 단계입니다.
단계를 초월하는 방법, 광속이상으로 찰나 소멸하는 제행을 「소멸했다. 무상이다」라고 스스로 발견하는 방법은 위빳사나(vipassanā)이상은 없습니다. 위빳사나는 사마타(samatha)와 쌍벽을 이루는 불교 독자적인 「수행」입니다. 그것은 사마타수행처럼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여 다른 모든 정보를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찰나마다 변화생멸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지만 보통 그렇게 포착할 수 없는 눈앞에 나타나서는 사라지는 일상의 현상 하나하나를 매 순간마다 계속 확인(알아차림 sati)하는 것입니다.
집중하여 사띠를 계속함으로써 현상의 변화하는 순간을 포착하여, 지금 순간에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이나 자신은 확고한 실체가 아니라 찰나 소멸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스스로 체험하고 이해・납득하면 「제행무상」의 진리를 보고 얻고 발견하고 오도(悟道)에 들 수가 있습니다.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면 거기에서 제행의 무상을 파악하는 것은 비교적 용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 서술한 인용처럼 수행하고 있지 않아도 부처님의 진리 교법을 하나하나 진지하게 알아차림(sati)으로서 확인하면서 계속 듣고 설법을 들으면서 한 순간이라도 현상이 소멸하는 순간을 파악하고 「확실하게 소멸했다. 무상이다」라고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고 오도(悟道)들어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아짠 진용 빤냐와로 마하테로 법문집」에 있는 내용입니다. - 대구 붓다야나 선원 선우회 발행 >
5. 예류과와 예류도의 차이
예류도에는 교법을 지혜(慧)에 의해 이해하는 지혜타입의 법수자와 여래에의 믿음(信)을 가지는 신심타입의 신수자의 두 종류의 성향이 있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류과에 도달하면 그 차이는 없어져 같은 하나의 예류과가 되는 것일까요?
예류도에서의 성향은 예류과가 되어도 남습니다. 깨달음의 단계를 선정체험의 유무에 의해 일곱 종류로 분류하는 설명이 경전의 곳곳에 보이나, 그 최초의 둘은 법수자와 신수자입니다. 한편 예류과 이상으로 선정체험이 없는 견도달자(見到達者)와 신해탈자(信解脫者)에게는 각각 법수자・신수자의 성향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중부70경 Kitāgiri-sutta(끼따기리경)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들 일곱 종류의 사람들이 있고 알려져 있다. 일곱 사람이란 양면해탈자(兩面解脫者), 혜해탈자(慧解脫者), 신증자(身證者), 견도달자(見到達者), 신해탈자(信解脫者), 법수자(法随者), 신수자(信随者)이다.
(ubhatobhāga-vimutto pańńāvimutto kāyasakkhi diţţhippatto saddhāvimutto
dhammānusāri saddhānusāri). 〔MN I, 477〕”
양면해탈자(兩面解脫者)와 혜해탈자(慧解脫者)는 아라한입니다. 양면해탈자는 선정지:止)을 체험하고(심해탈), 혜(관:觀)에 의해 번뇌를 멸진했으므로(혜해탈) 「양면탈자라 불립니다. 혜해탈자는 심해탈없이 아라한에 이른 자입니다.
이 둘은 번뇌를 소멸하고 수행을 완성했으므로 불방일(不放逸)이 될 수가 없으므로 부처님에게 「불방일에 힘쓸 것」이라는 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하의 다섯은 전부 아라한과를 향해 「불방일에 힘쓸 것」이라고 지도 받을 단계에 있습니다. 신증(身證), 견도달(見到達), 신해탈(信解脫)의 셋은 아라한향 이하 예류과 이상으로 깨달음의 일부에는 도달한 자입니다. 그 중 신증자(身證者)는 선정을 체험하고 (심해탈), 지혜(慧)에 의해 번뇌의 일부가 소멸한 자입니다.
견도달과 신해탈의 둘은 함께 무색계선정 또는 색계선정도 포함한 팔선정을 체험하지 않았으나, 함께 지혜(慧)에 의해 번뇌의 일부 (삼결 三結)가 소멸한 상태입니다. 양자의 성격의 차이는 그대로 수법, 수신의 둘의 차이에 대응합니다.
견도달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종류의 사람은 색을 초월한 무색의 해탈(vimokha)에 몸으로써 접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자는 지혜(慧)로서 보고 번뇌의 일부가 소멸한 상태이다(pańńāya c´ assa disvā ekacce āsavā parikkhinā honti). 또한 이 자에게는 여래에 의해 설해진 교법이 지혜(慧)에 의해 잘 간파되고 잘 통찰된다. 비구들이여! 이 자는 견도달자라고 불린다. 〔MN I, 477〕”
견도달자는 선정을 체험하진 않았지만, 지혜에 의해 번뇌의 일부(삼결)는 소멸한 상태이고 예류과 이상입니다. 그 특징은 여래의 교법을 지혜로 잘 간파하고 통찰한다는 것입니다.
신해탈자도 견도달자와 같이 선정을 체험하진 않았지만, 지혜에 의해 번뇌의 일부가 소멸한 상태이고 예류과 이상입니다.
신해탈자(saddhāvimutta)는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종류의 사람은 색을 초월한 무색의 해탈(vimokha)에 몸으로써 접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자에게는 여래에의 믿음(信)이 고정되고 뿌리가 생기고 확정되어 있다(tathāgate c´ assa saddhā niviţţhā hoti mūlajātā patiţţhitā). 비구들이여! 이 자는 신해탈자라고 불린다. 〔MN I, 477〕”
불법(佛法)을 지혜로 통찰하는 견도달자와는 달리 신해탈자는 부처님에의 신뢰가 확고부동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비교를 위해 계속해서 설명되는 법수자와 신수자를 고찰해 봅시다.
법수자는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종류의 사람은 색을 초월한 무색의 해탈(vimokha)에 몸으로써 접촉하지 않는다. 또한 이 자는 지혜(慧)로써 보고 번뇌가 소멸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자에게는 여래에 의해 설해진 교법이 지혜(慧)에 의해 조금은 이해되고 용인되어 있다. 게다가 이 자에게는 신근(信根), 정진근(精進根), 염근(念根), 정근(定根), 혜근(慧根)이라는 특질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 자는 법수자라고 불린다. 〔MN I, 477〕” 라고 설명됩니다.
여래의 교법을 지혜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지혜타입인 점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견도달자와 유사합니다. 양자의 다른 점은 삼결(三結)을 소멸하여 예류과 이상이 되었는지 아직 되지 않았는지의 차이일 뿐입니다.
신수자의 특징은 신해탈자와 대응합니다. 다른 부분만 고찰해보면,
“비구들이여! 여기에 ----- 그러나 이 자에게는 여래에게 조금의 믿음(信), 조금의 애락(愛樂)이 있다. 게다가 이 자에게는 신근(信根) 내지 혜근(慧根)이라는 특질이 있다. 이 자는 신수자라고 불린다. 〔MN I, 477〕”
이쪽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래에의 믿음・애락을 가진 신순(信順)타입인 것은 신해탈자와 유사합니다. 예류과 이상인가 그 이하의 예류향에 그치는 것인가가 다른 것입니다.
예류과에의 준비단계로서 교법을 지혜(慧)에 의해 이해하는 것, 또는 여래에게 믿음(信)을 가지는 것이 필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어느 타입이라도 예류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류과 현증(現證) 후에도 그 성향은 남습니다.
6. 예류과 현증(現證)에의 불퇴의 길
예류과 현증에의 길을 걷는 법수・신수자는 보시공양을 받을 만한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일원이지만, 예류과 이상인 자와 같이 아라한과를 이룰 때까지 불퇴전이 되어 있는 것일까요? 또는 아직 범부나 악도에 퇴전할 여지가 있는 깨달음이 불확정한 단계일까요?
수법・수신 단계의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떤 특별한 상태에 이른 법수자・신수자는 불퇴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예류과를 현증치 않고는 죽을 수 없는 자가 설명됩니다. 우선 특별한 상태의 신수자가 설명됩니다.
“비구들이여! 안(眼)은 무상, 변화하는 것, 변이하는 것이다. 〔이,비,설,신,의〕는 무상, 변화하는 것, 변이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누구라도 이 진리(dhamma)를 이 처럼 신순(信順)하고 신해(信解)하는 자는 이렇게 일컬어진다 : 바른 것에의 결정(決定)에 들어가고 선사(善士)의 경지에 들어가고 범부의 경지를 초월한 신수자이다. 지옥, 축생, 또는 아귀로 윤회해버리는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류과를 현증하지 않은 채 죽을 수는 없게 된다(abhabbo ca tāva kālam kātum yāva na sotāpattiphalam sacchikaroti). 〔AN Ⅲ, 225〕”
부처님 자신을 신순(信順)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신순((信順)・신해(信解)하는 즉 눈(眼) 등의 육근, 그리고 이 인용문 아래에 설명하고 있지만, 색(色)등의 육경, 더욱이 육식 등의 모든 현상이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하는 제행무상의 진실(dhamma)을 신순(信順)・신해(信解)하면, 그 자는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고 진리에 오입(悟入)하는 직전의 단계에 있는 특수한 신수자입니다.
이러한 상태의 신수자는 「바른 것의 결정에 들어가고, 선사(善士)의 경지에 들어가고 범부의 경지를 초월」한, 즉 언젠가 반드시 깨달음을 얻는 것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삼악도에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삼악도에 떨어질 정도의 악업만은 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신수자는 금생에서 이미 「예류과를 현증(現證)하지 않은 채 죽을 수 없게 되었기」때문입니다. 필연적으로 예류과에서 아라한까지의 길도 결정되어 있습니다.
특수한 상태의 법수자도 특수한 신수자도 같이 설명되어집니다.
“비구들이여! 안(眼)은 ----- 이 진리를 이처럼 지혜(慧)에 의해 조금은 이해하고 인용(認容)하는 자는 누구라도 이렇게 일컬어진다 : 바른 것의 결정에 들어가고, 선사(善士)의 경지에 들어가고 범부의 경지를 초월한 법수자이다. 지옥, 축생, 또는 아귀로 윤회해버리는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류과를 현증(現證)하지 않은 채 죽지는 못한다.〔 AN Ⅲ, 225〕”
법수자도 부처님이 설하는 여러 가지 교법(dhamma)이 아닌 바로 제행무상의 진리(dhamma) 그 자체를 지혜(慧)에 의해 조금이라도 이해・수용한다면 예류과를 현증(現證)할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 특수한 법수자가 됩니다.
이 특수한 수신・수법의 경지를 넘어서면 예류과에 달합니다.
“누구라도 (제행무상의) 진리를 이처럼 알고 보는 (jānāti passati) 자는 이렇게 일컬어진다 : 예류자이다.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자이다. 정각을 향하는 것이 결정된 자이다. 〔AN Ⅲ, 225〕”
7. 예류과 현증(現證)의 방법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예류과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예류과에 도달하기 위한 「진리를 알고 본다」란 어떠한 것일까요?
빨리 경전에서 한 예를 봅니다. 욱가거사는 재가자인 채로 불환과에 도달했지만, 어떤 비구에게 말한 그의 여덟 가지 희유미증유의 일 중에서 두 가지가 예류과 현증(現證)에 관한 것입니다.
“존자시여! 제가 처음으로 멀리서 세존을 뵈었을 때 뵙자마자 세존에 대하여 제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cittaṁ pasidi). 존자시여! 제게는 이 제일의 희유미증유의 일이 있습니다. 존자시여! 그러한 저는 마음이 청청해져 세존을 뵙고 공경했습니다. 세존은 그러한 나에게 보시의 말씀, 지계의 말씀, 천상의 말씀, 욕구(欲)의 불이익・해로움(害)・더러움, 이욕(離欲)에 있어서의 이익 등을 순차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AN IV, 209〕”
멀리서 보기만 해도 그 모습에 감명을 받아 부처님에게 신순(信順)했다는 것입니다. 거사자신이 희유미증유의 일을 설명하듯이 이것이 깨달음을 향하는 예류과에 들어간 순간입니다. 그러고 나서 교법을 순차로 배우고, 어느 날 단계를 하나 넘습니다.
“제가 건전한 마음, 유연한 마음, 장애를 벗어난(離障) 마음, 환희의 마음, 청청한 마음이 된 것을 아시고 세존은 여러 부처님의 최승의 교법(dhammadesanā)을 설해주셨습니다. 즉 고집멸도입니다. 예를 들면 흑점도 없는 깨끗한 천이 그대로 바르게 〔염〕색을 취하듯이, 제게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생한 것은 모두 소멸한다 (yaṁ kiñci samudayadhammaṁ sabbaṁ taṁ nirodhadhammaṁ)」라고 이진이구(離塵離垢)의 법안이 생겼습니다(dhammacakkhuṁ udapādi). 존자시여! 그러한 제가 진리를 보고 진리를 얻고, 진리를 발견하고 진리의 오도(悟道)에 들은 것입니다. 의심을 초월하고 의혹을 떨치고 평안을 얻은 것입니다. 스승의 가르침 이외의 것에는 의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불법승에 귀의하고, 범행(梵行)을 다섯 가지로 하는 학처(學處)를 지녔습니다. 존자시여! 제게는 이러한 두 번째의 희유미증유한 일이 있었습니다. 〔AN IV, 209〕”
「생한 것은 모두 소멸한다.」즉 「제행무상」의 진리를 스스로 보고 얻고 발견하고 오도(悟道)에 들어갔으므로 「영원불멸의 내가 있다」고 하는「유신견」이 사라졌습니다. 자신이 발견하고 오도(悟道) 에 들어갔으므로 교법에 대한 「의심」도 사라졌습니다. 스스로 삼귀의하고 오계를 지니고 다른 스승의 가르침이나 관례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계금취(戒禁取)」도 사라졌습니다. 즉 「이진이구(離塵離垢)의 법안이 생겼을 때 (dhammacakkhum udapādi)」〔정(正)〕견이 생김과 함께 (sahadassanuppādā) 유신견 ・의심・계금취의 삼결이 끊어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 최초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안냐 꼰단냐도 설법을 듣고 있을 때 그대로 법안이 생기고 예류과를 깨달아 그것을 부처님은 「꼰단냐는 잘 알았다 (aňňāsi vata bho Kondaňňo 〔SN V, 423〕」고 칭송하신 것과 같습니다. 갑자기 「아라한이 되었다」가 아니라, 선정에 들지 않고 듣고 있는 채로 진리를 이해・용인하여 예류과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 세 개의 번뇌(삼결:三結)가 소멸했으므로 예류과를 현증(現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예류과를 현증(現證)한 것일까요?
여기에서는 선정을 체험하고 무상을 발견했다고는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선정에 들지 않더라도 진리를 듣고 있는 채로 진리를 이해・용인하여 제행무상의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여 그것만으로 예류과에 도달한 것입니다.
「생한 것은 모두 소멸한다,」 즉 무상이라고 그냥 신순(信順)하는 것도 아니고, 지식으로서 배우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발견하여 납득하면 「영원불멸의 나」라고 하는「유신견」이 잘못된 것이라고 알고, 「의심」・「계금취」와 함께 사라져버리는 것이 필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일까요?
제행무상의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기 위해서는 찰라 때마다 그야말로 광속으로 변화생멸을 반복하는 미립자레벨의 신체와 변화자체를, 그리고 물질보다 빨리 생멸한다고 하는 마음의 변화 자체를, 생(生)하면 바로 소멸한다는 그 순간을 포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행의 끊임없는 생멸・무상을 스스로 발견하면, 제행은 무상하다고 싫어도 납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전이나 아비담마에 의하면 부처님의 시대라면 부처님의 교법에 의해 그 논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법수자・신수자의 단계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진리를, 사실을, 스스로 발견하고 체험하고 오도(悟道)에 들어가고 납득하여 「유신견」이 실제로 소멸하는 것은 그것을 초월한 예류과 단계입니다.
단계를 초월하는 방법, 광속이상으로 찰나 소멸하는 제행을 「소멸했다. 무상이다」라고 스스로 발견하는 방법은 위빳사나(vipassanā)이상은 없습니다. 위빳사나는 사마타(samatha)와 쌍벽을 이루는 불교 독자적인 「수행」입니다. 그것은 사마타수행처럼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여 다른 모든 정보를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찰나마다 변화생멸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지만 보통 그렇게 포착할 수 없는 눈앞에 나타나서는 사라지는 일상의 현상 하나하나를 매 순간마다 계속 확인(알아차림 sati)하는 것입니다.
집중하여 사띠를 계속함으로써 현상의 변화하는 순간을 포착하여, 지금 순간에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이나 자신은 확고한 실체가 아니라 찰나 소멸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스스로 체험하고 이해・납득하면 「제행무상」의 진리를 보고 얻고 발견하고 오도(悟道)에 들 수가 있습니다.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면 거기에서 제행의 무상을 파악하는 것은 비교적 용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 서술한 인용처럼 수행하고 있지 않아도 부처님의 진리 교법을 하나하나 진지하게 알아차림(sati)으로서 확인하면서 계속 듣고 설법을 들으면서 한 순간이라도 현상이 소멸하는 순간을 파악하고 「확실하게 소멸했다. 무상이다」라고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고 오도(悟道)들어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