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뿐냐산또 도성 큰스님 추모법회_테라와다불교의 제례의식_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 (20250419)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e7uOeNC9Gu0?si=YPcgQkIcBC1_pOwr
오늘은 입멸하신 상가라자 뿐냐산또 큰스님 추모법회입니다.
보통 이런 추모법회를 '뿝바 뻬따 발리'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뻬따(peta)', 뻬따는 어딥니까? 아귀. 모든 아귀계에 살고 있는 분들한테 공양물을 올립니다. 그런 의식을 행합니다.
우리 큰스님이 아귀계에 태어났을까? 아닌 것 같죠? 그러면 오늘 이거 의미가 없네? 아귀계에 태어나야 우리가 올리는 공양 올릴 때의 마음을 받아들여서 ‘아, 그래 내가 좀 좋은 일 많이 하고 태어날 것을 갖다가 나쁜 마음에 이렇게 아귀계에 태어났구나. 남들한테 인색하게 산 것이 참 후회되네’ 하는 마음이 들어서 빨리 그 몸을 버리든지, 아니면 본인이 ‘아, 이제 내가 좀 행복해지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들면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평상시 큰 스님을 봐왔던 상좌로서는 큰 스님이 그렇게 인색한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 그러니 아귀계에는 안 태어나신 것 같애. 그렇죠?
보통 여러분들은 그 경제 활동들을 하고 있으니까 돈이 10원이 생겼다, 그러면 어디다 씁니까?
첫 번째 국가에 세금을 내죠. 안 낼 수 없죠. 그래서 세금 내는 것이 하나고.
또 하나는 뭐 있어요? 가족들이나 자기 직계 가족이 또 아니더라도 남편이나 신랑의 가족들을 챙기는 일들을 해야 됩니다. 그런 가족 친지들을 챙기는 것.
또 하나는 뭘 할까? 법을 듣고 해야 되기 때문에 법을 설해주는 스님께 공양을 올리고 보시하는 일들을 해야 되고.
또 하나는 뭐할까? 집에 누가 찾아왔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물이라도 하나 먹이고 과자라도 하나 먹여야겠죠. 그래서 집에 찾아온 손님이나 이런 분들에게 공양을 하는 것.
그다음에 마지막이 조금 전에 얘기했던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공양물을 올리는 것.
보통 테라와다 의식은 '발리(bali)'라고 하는 공양물(bali)을 올리는 것의 다섯 종류 중에 하나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분께는 딱 하나밖에 없죠? 그것도 아귀계에 태어나야만이 가능한 것들입니다. 근데 왜 아귀계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 같은 큰 스님께 공양물을 올릴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공양을 올리면서 ‘이 공양물로 인해서 돌아가신 큰 스님께서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을 냈다. 그럼 그 마음은 어디에 닿을까?
여기에 천신들이 있다고 하면은 천신들은 그걸 알아들을까? 여러분들 말은 못 알아 듣는데 여러분들 마음은 받아들입니다. 그럼 ‘저놈 공부 열심히 하고 있네. 수행도 열심히 하고 있나? 나쁜 일 안 하고 착한 일 하고 있나?’ 하고 이렇게 보면은 그게 어느 정도 보인다고 그래요.
그럼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천신은 어떻게 할까? 그 여러분들에게 "잘했습니다!" 하면서 "싸두 싸두 싸두" 하면서 여러분들을 보호한다고 그럽니다. 꼭 아귀계에 닿지 않다고 하더라도 천신에게도 실제로 유용하게 쓰여지게 되고,
또 나는 분명히 뿐냐산또 스님한테 공양물을 올린다고 해서 회향을 했는데, 실제로는 뿐냐산또 스님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모르는 과거생부터 무수하게 지어왔던 인연 닿았던 사람들 중에서 아귀계에 태어난 사람들 그 사람들은 여러분들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 나에게 이렇게 행복한 음식을 주었네. 나는 참 행복하다. 나에게 이렇게 공양을 올리는 사람이 있네’ 하고 받아먹을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중에서 가족 중에서 돌아가신 분 있죠? 어디에 태어났는지 알아요? 모르죠? 스님도 모릅니다. 스님도 은사 스님이 돌아가셨지만 어디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근데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돌아가시기 전에 가서 뵈었는데 얼굴이 너무 평온했어요. 그전까지 사람을 잘 못 알아볼 정도였는데 근데 귀신같이 스님 목소리를 알아들어요.
“스님 저 왔습니다.” 하니까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면서 “진용 스님 왔어?” 이러시는 거라. 그러면서 얼굴에 환하게 미소를 짓더라고.
그래서 “이제 스님, 그만 이생에서의 인연은 버려버리고 편안하게 열반에 드십시오.” 이렇게 하니까 “알았어” 하면서 싸악 미소 지으시더라고.
그 모습을 보면서 적어도 그래도, 여러분들 혹시 큰 스님 돌아가시고 나서 얼굴 못 봤죠? 스님은 직접 봤거든. 그런데 굉장히 맑아요. 그 얘기는 뭐냐면 돌아가실 때 나쁜 상태로 죽기 싫어갖고 막 발버둥치면서 죽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라. 편안하게 그래도 잠 드시듯이 열반에 드셨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스님은 큰스님께서 어디에 다시 태어났는지는 모릅니다. 그건 스님뿐 아니라 모든 분들은, 부처님을 제외한 모든 분들은 다음에 태어나는 것들을 모릅니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그래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이러한 의식들을 행합니다.
그게 보통 빨리어로 '빳띠다나(pattidāna)' '빳띠 아누모다나(patti anumodanā)'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공양을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공양물을 회향한다"는 뜻입니다. 테라와다의 의식은 회향하는 것이 없으면 그것은, 그걸 뭐라 그래요? ‘팥(팥빵)에 앙꼬가 빠졌다’ 그렇게 합니다. 그거와 마찬가지일 겁니다. 실제 알맹이는 빠진 상태가 돼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회향하는 의식들을 갖추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안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공덕을 회향하기 위한 조건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은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청정하고 깨끗한 자질을 갖춘 사람들에게 공양물을 올림으로 인해서, 그것들로 올린 사람들이 깨끗한 마음이 돼서 그것으로 인해서 그 공양물들이 풍요롭게 되고, 그 공덕들이 나를 비롯한 돌아가신 분들께 회향된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그래서 회향을 하지 않으면은 그것은 본인 것 밖에는 안 됩니다. 자기가 지은 공덕들은 자기가 받는 거기 때문에. 근데 회향함으로 인해서 이것이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 것도 같이 그 공덕이 나누어진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부처님은 이 '발리(bali)'라고 하는 다섯 가지를 정해서 "다섯 가지는 반드시 회향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한 경우에는 그 공덕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진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물질적인 것들을 물론 얘기를 하는 거지만은 꼭 물질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정신적인 회향을 충분히 할 수가 있습니다. 스님들은 뭘로 가지고 회향합니까?
법을 설하는 것, 수행을 가르치고 하는 것, 그리고 공양물을 받고 보시를 받았을 때 항상 회향 게송을 합니다. ‘이와 같은 공덕으로 어떻게 되기를’ 하면서 공덕회향 게송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이 공덕 회향할 수 있는 것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헌혈할 때, 그다음에 책을 만들어내고 출판하고 할 때, 그다음에 오늘 우리 선원도 아마 미얀마에 기부를 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게 그런 단체들이나 필요한 곳에 기부를 할 때, 그다음에 자원봉사 할 때, 오늘 행사를 위해서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안 보는 사이에 누군가는 틀림없이 준비들을 했을 겁니다. 그런 자원봉사를 했을 때,
그다음에 좀 있으면 저 꽃을, 여기 앞에 있는 게 큰 스님 바리때거든. 원래 이 바리때는 사자상속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이 다음 상좌에게 전해주는 게 이 딱 바리때 하나입니다. 가사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이 바리때는 반드시 사자상속하게끔 돼있습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바리때가 큰 스님이라 생각하고 공양물을 올리도록 합니다.
그래서 꽃이나 여러 가지들을 공양 올리고 할 때, 그다음에 오늘 여러분은 오계 지켰죠. 오계를 지키고 할 때, 그다음에 경전을 독송할 때, 그다음에 법을 들을 때, 물론 법을 설할 때도 마찬가지고, 그다음에 태국 같은 데서는 이런 때 방생을 합니다. 새를 날려주거나 물고기를 놓아주게 됩니다. 그런 경우를 할 때, 그다음에 수행을 할 때.
이럴 때는 반드시 그게 끝나고 나면 마음속에서 회향하는 마음들을 가져야 됩니다.
‘이러한 공덕들로 인해서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아니면 특정한 사람을 들면서 ‘돌아가신 큰스님께서 행복하시기를’ 하는 그런 마음들을 반드시 내야 됩니다.
그걸 내야만이 부처님은 "완전하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테라와다 의식에서는 조금 전에 의식문을 쭉 했는데, 이게 이것만 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여러 가지들을 같이 하거나 아니면 다르게 그걸 경전 독송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언제 하게 될까? 돌아가신 분께는?
아까 다섯 가지 중에서 하나가 '뿝바뻬따 발리(pubbapeta bali)'라고 그랬죠? '돌아가신 분들께 회향하는 의식'이라고 했는데, 언제 하게 될까? 한국에는 49재를 지내죠? 테라와다에도 그게 있을까?
테라와다에는 그거는 없습니다. 그 대신에 돌아가신 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돌아가시기 전에 살아있을 때 스님을 한 번 더 초청해서, 그 돌아가시기 전에 있는 그분에게 좀 더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호흡을 관찰하면서 돌아갈 수 있게끔, 스님을 초청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게 잘 안되죠? 대부분 막 임종하고 나면 스님 부릅니다. “스님 와서 염불 좀 해주십시오.” 아무 의미 없습니다. 가서 해주라 하면 해주긴 하겠지만, 돌아가신 분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살아있는 분들한테 마음의 안정을 가지고
“봐라. 너도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너도 하루빨리 공덕 짓고 수행해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라” 하고 얘기하는 수밖에는 없는 거라.
그런데 테라와다에도 이런 의식이 세 종류로 나눠져 있습니다.
크게 나누면 돌아가시고 나서 일주일째 될 때, 그다음에 두 번째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 달째 될 때, 나라마다 조금 틀립니다. 3주째 될 때라고 하는 나라도 있고, 1달째 될 때라고 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대부분이 3주나 1달이나 거의 비슷하게 칩니다.
그다음에 매년 기일 때. 이럴 때는 스님들을 초청해서 공양을 올리든지 어떤 행사하고 추모하는 행사들을 합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은 뭐 했죠? 세 가지를 다 했습니다.
스님들께 탁발 공양 올렸죠. 그다음에 스님들께 가사를 올렸죠. 또 스님들께 법문을 청했습니다. 이 세 가지입니다.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추모제 때 할 수 있는 것은 날짜가 그게 1주일이 됐든 1달이 됐든 1년이 됐든 간에 관계 없이 이 3가지 중에 하나는 반드시 하게끔 돼있습니다. 그냥 와서 스님한테 염불을 하라고 해서 염불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큰 의미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건 테라와다적이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럴 때는 스님께 보시를 올리고 법문을 청해 들어야 되는 거라.
가사는 우리는 오늘은 한 달째 되는 때이기 때문에 스님에게 직접 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지 하루, 이틀, 3일 이내에는 이 가사를 돌아가신 분께 올립니다. 그래서 스님이 아까 "아닛짜 와따 상카라 웁빠다 와야 담미노" 하는 게송이 있죠?
그걸 여기서 하는 것이 아니고 돌아가신 분 위에 올려져 있는 가사를 잡고 그 게송을 올리게 됩니다. 그것만 차이 나는 것뿐이지, 돌아가신 분께 올리느냐 아니면 살아있는 스님들께 올리느냐 그 차이만 있을 뿐이지, 가사를 공양 올리는 것도 좋은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쨌든 여러분들이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하면서 경전독송을 같이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직 여러분들은 살아있죠? 안 죽었죠?
뭘로 가지고 살아있다고 압니까? 뭔가 생각을 하고 뭔가 움직이고 하죠. 그래서 의사들이 죽은 이와 살아있는 이를 갖다가 구분하는 거는 보통 호흡이든 맥박이든 심장 소리든 이게 움직이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판단합니다. 생물학적인 방법이죠.
그런데 테라와다에서는 물론 그 방법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지 쉽게 말하면 의식을 하고 있는지, 삼매에 든 사람은 몸이 안 움직입니다. 호흡도 안 하고. 근데 그것도 죽었다고 얘기는 안 하죠. 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마음이 이미 떠나버린 사람인지 아닌지, 이렇게 해서 마음이 움직이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움직이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여러분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왜 살아있는 사람들은 움직일까?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끊임없이. 왜 그럴까? 숨을 한번 안 움직이도록 코를 딱 잡고 1분만 한번 참아보십시요. 고통스러워서 못 참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게 이 고통스러운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움직인다는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 실제로 그렇습니다.
안 움직이고 있으면 고통스러워서 못 견딥니다. 여러분들 마음이 가만히 있다. 아니면 여러분들이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마만큼 괴로운 일이 없습니다. 호흡과 마찬가지로 1분을 견딜 수가 없을 상태가 됩니다. 살아있는 것 자체는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리했든 어쨌든 여러분들은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죽음을 맞습니다.
발버둥치고 움직이는데 움직이면 반드시 따르는 게 뭡니까? 행위에 대해서 결과들이 따릅니다.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들은 많지가 않습니다. 자연스러운 호흡이나 자연스럽게 걷고 있는 거나 이런 것들이나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지, 여러분들이 마음을 내서 하는 움직이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나쁜 결과가 여러분들에게 영향을 미칠지, 그것이 다음 생을 좌우할지, 아니면 좋은 것들이 영향을 미칠지, 그건 여러분들이 결정을 해야 됩니다.
움직여야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 움직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마음을 내더라도 싫어하는 마음이나 욕심부릴 마음을 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베푸는 마음들이나 자애의 마음들을 내야 되는 거고, 움직이고 있더라도 탐욕이나 그다음에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움직이려고 하지 말고 뭔가를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그 움직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그 결과들이 여러분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왜? 여러분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죽을 때 영향을 미치는 거는 그것밖에 없거든.
여러분이 지은 그 결과밖에. -그게 담마(dhamma)입니다.- 그 담마 밖에 여러분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게 없다는 거라.
그런데 하나 다행스러운 것은 여러분들이 언제 죽을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건 어떤 경우도 결정되지를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지금 현재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들을 관찰을 하든지, 지금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먹고 하는 것들을 선한 마음들을 선한 바라밀들을 많이 쌓도록 해서 그 공덕들이 영향을 받도록 하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해야 된다는 거라.
죽음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해가지고 죽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죽을 때는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그 담마가 여러분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라.
그럼 결정되지 않은 살아있을 동안에 바르게 살아야 된다 하는 겁니다.
큰 스님을 추모하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나도 언젠가는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일으켜서 죽음이 나한테 찾아오고, 그 죽음으로 내 삶이 결정되기 전에 나는 하루빨리 이 세상으로부터 이 윤회로부터 벗어나든지, 아니면 선한 공덕을 많이 쌓아서 다음 생이 결정이 되도록 하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하도록 자꾸 해라는 거라.
호흡을 끊임없이 한번 보십시오.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호흡이 끊임없이 일어나집니다. 죽을 때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보더라도, 보고 죽어도 다음 생이 적어도 좋은 상황을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호흡을 보다가,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이 점점 더 희미해지면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이 느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탁 들면, 그 사람은 그 길로 열반으로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물론 많은 시간 동안 쌓고 닦아야만이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이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그 길 외에는 없는데 어떡하나.
호흡의 느낌을 분명하게 관찰하라.
그래서 그 호흡을 느낌이 열반으로 대체가 되는 상태가 되도록 만들면 여러분들은 이제는 죽음이 와도 두렵지가 않습니다. 설혹 나에게 죽음이 닥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 인제 나는 죽을 때 됐지’ 하면서 그냥 편안하게 죽음을 맞을 수가 있는 겁니다.
왜? 나는 이제 다시 안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다시는 나쁜 데는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행을 하려면 그렇게까지 열심히 해야 됩니다.
또 수행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공덕 쌓는 일들에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분명하게 권장될 만하고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하는 것을 다섯 가지 발리(bali로써 정리를 해놓은 겁니다.
그것들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하고, 그러한 일을 했을 때 반드시 공덕을 회향하는 마음들을 자꾸 가질 수 있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아래는 「테라와다 불교의 제사의례」 관련 법문들입니다.
https://cafe.naver.com/buddhayana1/241
https://cafe.naver.com/buddhayana1/242
https://cafe.naver.com/buddhayana1/2518
* 출처 원문: 붓다의길따라선원 밴드
https://band.us/band/47743538/post/429568483
* 뿐냐산또 도성 큰스님 추모법회_테라와다불교의 제례의식_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 (20250419)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e7uOeNC9Gu0?si=YPcgQkIcBC1_pOwr
오늘은 입멸하신 상가라자 뿐냐산또 큰스님 추모법회입니다.
보통 이런 추모법회를 '뿝바 뻬따 발리'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뻬따(peta)', 뻬따는 어딥니까? 아귀. 모든 아귀계에 살고 있는 분들한테 공양물을 올립니다. 그런 의식을 행합니다.
우리 큰스님이 아귀계에 태어났을까? 아닌 것 같죠? 그러면 오늘 이거 의미가 없네? 아귀계에 태어나야 우리가 올리는 공양 올릴 때의 마음을 받아들여서 ‘아, 그래 내가 좀 좋은 일 많이 하고 태어날 것을 갖다가 나쁜 마음에 이렇게 아귀계에 태어났구나. 남들한테 인색하게 산 것이 참 후회되네’ 하는 마음이 들어서 빨리 그 몸을 버리든지, 아니면 본인이 ‘아, 이제 내가 좀 행복해지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들면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평상시 큰 스님을 봐왔던 상좌로서는 큰 스님이 그렇게 인색한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 그러니 아귀계에는 안 태어나신 것 같애. 그렇죠?
보통 여러분들은 그 경제 활동들을 하고 있으니까 돈이 10원이 생겼다, 그러면 어디다 씁니까?
첫 번째 국가에 세금을 내죠. 안 낼 수 없죠. 그래서 세금 내는 것이 하나고.
또 하나는 뭐 있어요? 가족들이나 자기 직계 가족이 또 아니더라도 남편이나 신랑의 가족들을 챙기는 일들을 해야 됩니다. 그런 가족 친지들을 챙기는 것.
또 하나는 뭘 할까? 법을 듣고 해야 되기 때문에 법을 설해주는 스님께 공양을 올리고 보시하는 일들을 해야 되고.
또 하나는 뭐할까? 집에 누가 찾아왔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물이라도 하나 먹이고 과자라도 하나 먹여야겠죠. 그래서 집에 찾아온 손님이나 이런 분들에게 공양을 하는 것.
그다음에 마지막이 조금 전에 얘기했던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공양물을 올리는 것.
보통 테라와다 의식은 '발리(bali)'라고 하는 공양물(bali)을 올리는 것의 다섯 종류 중에 하나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분께는 딱 하나밖에 없죠? 그것도 아귀계에 태어나야만이 가능한 것들입니다. 근데 왜 아귀계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 같은 큰 스님께 공양물을 올릴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공양을 올리면서 ‘이 공양물로 인해서 돌아가신 큰 스님께서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을 냈다. 그럼 그 마음은 어디에 닿을까?
여기에 천신들이 있다고 하면은 천신들은 그걸 알아들을까? 여러분들 말은 못 알아 듣는데 여러분들 마음은 받아들입니다. 그럼 ‘저놈 공부 열심히 하고 있네. 수행도 열심히 하고 있나? 나쁜 일 안 하고 착한 일 하고 있나?’ 하고 이렇게 보면은 그게 어느 정도 보인다고 그래요.
그럼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천신은 어떻게 할까? 그 여러분들에게 "잘했습니다!" 하면서 "싸두 싸두 싸두" 하면서 여러분들을 보호한다고 그럽니다. 꼭 아귀계에 닿지 않다고 하더라도 천신에게도 실제로 유용하게 쓰여지게 되고,
또 나는 분명히 뿐냐산또 스님한테 공양물을 올린다고 해서 회향을 했는데, 실제로는 뿐냐산또 스님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모르는 과거생부터 무수하게 지어왔던 인연 닿았던 사람들 중에서 아귀계에 태어난 사람들 그 사람들은 여러분들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 나에게 이렇게 행복한 음식을 주었네. 나는 참 행복하다. 나에게 이렇게 공양을 올리는 사람이 있네’ 하고 받아먹을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중에서 가족 중에서 돌아가신 분 있죠? 어디에 태어났는지 알아요? 모르죠? 스님도 모릅니다. 스님도 은사 스님이 돌아가셨지만 어디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근데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돌아가시기 전에 가서 뵈었는데 얼굴이 너무 평온했어요. 그전까지 사람을 잘 못 알아볼 정도였는데 근데 귀신같이 스님 목소리를 알아들어요.
“스님 저 왔습니다.” 하니까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면서 “진용 스님 왔어?” 이러시는 거라. 그러면서 얼굴에 환하게 미소를 짓더라고.
그래서 “이제 스님, 그만 이생에서의 인연은 버려버리고 편안하게 열반에 드십시오.” 이렇게 하니까 “알았어” 하면서 싸악 미소 지으시더라고.
그 모습을 보면서 적어도 그래도, 여러분들 혹시 큰 스님 돌아가시고 나서 얼굴 못 봤죠? 스님은 직접 봤거든. 그런데 굉장히 맑아요. 그 얘기는 뭐냐면 돌아가실 때 나쁜 상태로 죽기 싫어갖고 막 발버둥치면서 죽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라. 편안하게 그래도 잠 드시듯이 열반에 드셨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스님은 큰스님께서 어디에 다시 태어났는지는 모릅니다. 그건 스님뿐 아니라 모든 분들은, 부처님을 제외한 모든 분들은 다음에 태어나는 것들을 모릅니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그래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이러한 의식들을 행합니다.
그게 보통 빨리어로 '빳띠다나(pattidāna)' '빳띠 아누모다나(patti anumodanā)'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공양을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공양물을 회향한다"는 뜻입니다. 테라와다의 의식은 회향하는 것이 없으면 그것은, 그걸 뭐라 그래요? ‘팥(팥빵)에 앙꼬가 빠졌다’ 그렇게 합니다. 그거와 마찬가지일 겁니다. 실제 알맹이는 빠진 상태가 돼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회향하는 의식들을 갖추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안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공덕을 회향하기 위한 조건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은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청정하고 깨끗한 자질을 갖춘 사람들에게 공양물을 올림으로 인해서, 그것들로 올린 사람들이 깨끗한 마음이 돼서 그것으로 인해서 그 공양물들이 풍요롭게 되고, 그 공덕들이 나를 비롯한 돌아가신 분들께 회향된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그래서 회향을 하지 않으면은 그것은 본인 것 밖에는 안 됩니다. 자기가 지은 공덕들은 자기가 받는 거기 때문에. 근데 회향함으로 인해서 이것이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 것도 같이 그 공덕이 나누어진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부처님은 이 '발리(bali)'라고 하는 다섯 가지를 정해서 "다섯 가지는 반드시 회향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한 경우에는 그 공덕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진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물질적인 것들을 물론 얘기를 하는 거지만은 꼭 물질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정신적인 회향을 충분히 할 수가 있습니다. 스님들은 뭘로 가지고 회향합니까?
법을 설하는 것, 수행을 가르치고 하는 것, 그리고 공양물을 받고 보시를 받았을 때 항상 회향 게송을 합니다. ‘이와 같은 공덕으로 어떻게 되기를’ 하면서 공덕회향 게송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이 공덕 회향할 수 있는 것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헌혈할 때, 그다음에 책을 만들어내고 출판하고 할 때, 그다음에 오늘 우리 선원도 아마 미얀마에 기부를 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게 그런 단체들이나 필요한 곳에 기부를 할 때, 그다음에 자원봉사 할 때, 오늘 행사를 위해서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안 보는 사이에 누군가는 틀림없이 준비들을 했을 겁니다. 그런 자원봉사를 했을 때,
그다음에 좀 있으면 저 꽃을, 여기 앞에 있는 게 큰 스님 바리때거든. 원래 이 바리때는 사자상속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이 다음 상좌에게 전해주는 게 이 딱 바리때 하나입니다. 가사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이 바리때는 반드시 사자상속하게끔 돼있습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바리때가 큰 스님이라 생각하고 공양물을 올리도록 합니다.
그래서 꽃이나 여러 가지들을 공양 올리고 할 때, 그다음에 오늘 여러분은 오계 지켰죠. 오계를 지키고 할 때, 그다음에 경전을 독송할 때, 그다음에 법을 들을 때, 물론 법을 설할 때도 마찬가지고, 그다음에 태국 같은 데서는 이런 때 방생을 합니다. 새를 날려주거나 물고기를 놓아주게 됩니다. 그런 경우를 할 때, 그다음에 수행을 할 때.
이럴 때는 반드시 그게 끝나고 나면 마음속에서 회향하는 마음들을 가져야 됩니다.
‘이러한 공덕들로 인해서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아니면 특정한 사람을 들면서 ‘돌아가신 큰스님께서 행복하시기를’ 하는 그런 마음들을 반드시 내야 됩니다.
그걸 내야만이 부처님은 "완전하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테라와다 의식에서는 조금 전에 의식문을 쭉 했는데, 이게 이것만 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여러 가지들을 같이 하거나 아니면 다르게 그걸 경전 독송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언제 하게 될까? 돌아가신 분께는?
아까 다섯 가지 중에서 하나가 '뿝바뻬따 발리(pubbapeta bali)'라고 그랬죠? '돌아가신 분들께 회향하는 의식'이라고 했는데, 언제 하게 될까? 한국에는 49재를 지내죠? 테라와다에도 그게 있을까?
테라와다에는 그거는 없습니다. 그 대신에 돌아가신 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돌아가시기 전에 살아있을 때 스님을 한 번 더 초청해서, 그 돌아가시기 전에 있는 그분에게 좀 더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호흡을 관찰하면서 돌아갈 수 있게끔, 스님을 초청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게 잘 안되죠? 대부분 막 임종하고 나면 스님 부릅니다. “스님 와서 염불 좀 해주십시오.” 아무 의미 없습니다. 가서 해주라 하면 해주긴 하겠지만, 돌아가신 분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살아있는 분들한테 마음의 안정을 가지고
“봐라. 너도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너도 하루빨리 공덕 짓고 수행해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라” 하고 얘기하는 수밖에는 없는 거라.
그런데 테라와다에도 이런 의식이 세 종류로 나눠져 있습니다.
크게 나누면 돌아가시고 나서 일주일째 될 때, 그다음에 두 번째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 달째 될 때, 나라마다 조금 틀립니다. 3주째 될 때라고 하는 나라도 있고, 1달째 될 때라고 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대부분이 3주나 1달이나 거의 비슷하게 칩니다.
그다음에 매년 기일 때. 이럴 때는 스님들을 초청해서 공양을 올리든지 어떤 행사하고 추모하는 행사들을 합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은 뭐 했죠? 세 가지를 다 했습니다.
스님들께 탁발 공양 올렸죠. 그다음에 스님들께 가사를 올렸죠. 또 스님들께 법문을 청했습니다. 이 세 가지입니다.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추모제 때 할 수 있는 것은 날짜가 그게 1주일이 됐든 1달이 됐든 1년이 됐든 간에 관계 없이 이 3가지 중에 하나는 반드시 하게끔 돼있습니다. 그냥 와서 스님한테 염불을 하라고 해서 염불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큰 의미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건 테라와다적이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럴 때는 스님께 보시를 올리고 법문을 청해 들어야 되는 거라.
가사는 우리는 오늘은 한 달째 되는 때이기 때문에 스님에게 직접 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지 하루, 이틀, 3일 이내에는 이 가사를 돌아가신 분께 올립니다. 그래서 스님이 아까 "아닛짜 와따 상카라 웁빠다 와야 담미노" 하는 게송이 있죠?
그걸 여기서 하는 것이 아니고 돌아가신 분 위에 올려져 있는 가사를 잡고 그 게송을 올리게 됩니다. 그것만 차이 나는 것뿐이지, 돌아가신 분께 올리느냐 아니면 살아있는 스님들께 올리느냐 그 차이만 있을 뿐이지, 가사를 공양 올리는 것도 좋은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쨌든 여러분들이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하면서 경전독송을 같이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직 여러분들은 살아있죠? 안 죽었죠?
뭘로 가지고 살아있다고 압니까? 뭔가 생각을 하고 뭔가 움직이고 하죠. 그래서 의사들이 죽은 이와 살아있는 이를 갖다가 구분하는 거는 보통 호흡이든 맥박이든 심장 소리든 이게 움직이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판단합니다. 생물학적인 방법이죠.
그런데 테라와다에서는 물론 그 방법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지 쉽게 말하면 의식을 하고 있는지, 삼매에 든 사람은 몸이 안 움직입니다. 호흡도 안 하고. 근데 그것도 죽었다고 얘기는 안 하죠. 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마음이 이미 떠나버린 사람인지 아닌지, 이렇게 해서 마음이 움직이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움직이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여러분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왜 살아있는 사람들은 움직일까?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끊임없이. 왜 그럴까? 숨을 한번 안 움직이도록 코를 딱 잡고 1분만 한번 참아보십시요. 고통스러워서 못 참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게 이 고통스러운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움직인다는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 실제로 그렇습니다.
안 움직이고 있으면 고통스러워서 못 견딥니다. 여러분들 마음이 가만히 있다. 아니면 여러분들이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마만큼 괴로운 일이 없습니다. 호흡과 마찬가지로 1분을 견딜 수가 없을 상태가 됩니다. 살아있는 것 자체는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리했든 어쨌든 여러분들은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죽음을 맞습니다.
발버둥치고 움직이는데 움직이면 반드시 따르는 게 뭡니까? 행위에 대해서 결과들이 따릅니다.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들은 많지가 않습니다. 자연스러운 호흡이나 자연스럽게 걷고 있는 거나 이런 것들이나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지, 여러분들이 마음을 내서 하는 움직이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나쁜 결과가 여러분들에게 영향을 미칠지, 그것이 다음 생을 좌우할지, 아니면 좋은 것들이 영향을 미칠지, 그건 여러분들이 결정을 해야 됩니다.
움직여야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 움직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마음을 내더라도 싫어하는 마음이나 욕심부릴 마음을 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베푸는 마음들이나 자애의 마음들을 내야 되는 거고, 움직이고 있더라도 탐욕이나 그다음에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움직이려고 하지 말고 뭔가를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그 움직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그 결과들이 여러분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왜? 여러분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죽을 때 영향을 미치는 거는 그것밖에 없거든.
여러분이 지은 그 결과밖에. -그게 담마(dhamma)입니다.- 그 담마 밖에 여러분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게 없다는 거라.
그런데 하나 다행스러운 것은 여러분들이 언제 죽을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건 어떤 경우도 결정되지를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지금 현재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들을 관찰을 하든지, 지금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먹고 하는 것들을 선한 마음들을 선한 바라밀들을 많이 쌓도록 해서 그 공덕들이 영향을 받도록 하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해야 된다는 거라.
죽음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해가지고 죽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죽을 때는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그 담마가 여러분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라.
그럼 결정되지 않은 살아있을 동안에 바르게 살아야 된다 하는 겁니다.
큰 스님을 추모하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나도 언젠가는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일으켜서 죽음이 나한테 찾아오고, 그 죽음으로 내 삶이 결정되기 전에 나는 하루빨리 이 세상으로부터 이 윤회로부터 벗어나든지, 아니면 선한 공덕을 많이 쌓아서 다음 생이 결정이 되도록 하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하도록 자꾸 해라는 거라.
호흡을 끊임없이 한번 보십시오.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호흡이 끊임없이 일어나집니다. 죽을 때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보더라도, 보고 죽어도 다음 생이 적어도 좋은 상황을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호흡을 보다가,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이 점점 더 희미해지면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이 느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탁 들면, 그 사람은 그 길로 열반으로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물론 많은 시간 동안 쌓고 닦아야만이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이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그 길 외에는 없는데 어떡하나.
호흡의 느낌을 분명하게 관찰하라.
그래서 그 호흡을 느낌이 열반으로 대체가 되는 상태가 되도록 만들면 여러분들은 이제는 죽음이 와도 두렵지가 않습니다. 설혹 나에게 죽음이 닥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 인제 나는 죽을 때 됐지’ 하면서 그냥 편안하게 죽음을 맞을 수가 있는 겁니다.
왜? 나는 이제 다시 안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다시는 나쁜 데는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행을 하려면 그렇게까지 열심히 해야 됩니다.
또 수행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공덕 쌓는 일들에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분명하게 권장될 만하고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하는 것을 다섯 가지 발리(bali로써 정리를 해놓은 겁니다.
그것들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하고, 그러한 일을 했을 때 반드시 공덕을 회향하는 마음들을 자꾸 가질 수 있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아래는 「테라와다 불교의 제사의례」 관련 법문들입니다.
https://cafe.naver.com/buddhayana1/241
https://cafe.naver.com/buddhayana1/242
https://cafe.naver.com/buddhayana1/2518
* 출처 원문: 붓다의길따라선원 밴드
https://band.us/band/47743538/post/4295684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