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상은 확립된 정견(sammadiṭṭhi,正見)이 여지없이 실천되고 있는 곳이다. ‘나’라고 하는 구조물 속에서 대들보와 석가래가 전소된 곳이다. 번뇌의 불이 완전히 꺼진 곳이다. ‘나’라고 하는 산이 흔적없이 사라진 곳이다. 괴로움이 모두 소멸된 곳이다.
8. 맺는 말
‘깨달음’ 은 견성 ‧ 확철대오 ‧ 열반 ‧ 지혜의 완성 ‧ 생사해탈 등과 함께 불교가 지향하는 바 그 정점에 놓여있는 개념인 동시에 여전히 한국의 수행자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우리는 수행의 정점 ‧ 궁극의 지향점에 대한 경도된 인식을 감지할 수 있다.
붓다께서는 ‘깨달음’보다는 오히려 현상을 바른 견해로써 올바르게 바라본다는 의미를 지닌 ‘삼마딧티(sammadiṭṭhi,正見)’를 강조했다. 삼마딧티는 지식이나 정보에 대한 단순한 분석과 이해, 혹은 추론이나 사유에 의한 알음알이가 아니다. 형성된 모든 것들의 본래성품을 착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다. 삼마딧티(sammadiṭṭhi,正見)는 지혜 ‧ 깨달음 이라는 용어와 함께 사성제, 삼법인, 연기법이라고 하는 명확한 담마에 대한 통찰을 둘러싼 개념일 뿐 그 본질은 다 같은 것이다.
모든 존재들의 완전한 행복을 위해 설해진 붓다의 가르침은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하다. 이 가르침들이 구경열반, 생사해탈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수행자들이 목표물 혹은 결과물로서의 개념이 강한 ‘깨달음’이라고 하는 한정된 어휘에 천착하다보면 자칫 지금 이 순간의 지혜, 올바른 이해, 혹은 작은 깨달음으로 점철된 수행의 여정을 가볍게 여기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과정을 건너뛰고서는 결코 지혜의 완성,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하는 산정에 도달할 수 없다.
과녁을 향한 응시가 정확해야 지향점을 향해 바르게 나아갈 수 있지만 지나치게 궁극의 지향점을 부각시키다 보면, 발로 뛰고 가슴으로 다가가기도 전에 이미 궁극을 향한 화살이 뇌리 속에 관념으로 들어와 박혀 수행의 행보를 제대로 옮기지 못하게 된다. 도달해보지 못한 수행자에게 목표지점이나 과녁은 여전히 관념일 뿐이다.
수행자들에게 깨달음은 여전히 저 머나먼 하늘의 빛나는 별과 같이 인식되어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특별한’ 혹은 ‘결정적 계기’ 라는 수식어를 붙어야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붓다께서 가셨던 길이고, 확인된 길이며, 그 분의 가르침을 따라 몸소 증험하는 일이다. 그것은 목숨 걸고 미지의 신대륙을 발견하는 일도 아니고, 로켓트를 타고 지구궤도를 벗어나는 일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몸과 마음 안에서 이해되고 증험되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시작이 반이다. 오늘부터라도 주의를 기울여 붓다께서 하신 말씀을 잘 읽어보시기 바란다. 한글번역이 잘 돼 있으니 시작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읽고 묻고 바르게 이해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말과 생각과 행동을 통해 실천수행해 나가간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고통의 끝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이상)
산정상은 확립된 정견(sammadiṭṭhi,正見)이 여지없이 실천되고 있는 곳이다. ‘나’라고 하는 구조물 속에서 대들보와 석가래가 전소된 곳이다. 번뇌의 불이 완전히 꺼진 곳이다. ‘나’라고 하는 산이 흔적없이 사라진 곳이다. 괴로움이 모두 소멸된 곳이다.
8. 맺는 말
‘깨달음’ 은 견성 ‧ 확철대오 ‧ 열반 ‧ 지혜의 완성 ‧ 생사해탈 등과 함께 불교가 지향하는 바 그 정점에 놓여있는 개념인 동시에 여전히 한국의 수행자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우리는 수행의 정점 ‧ 궁극의 지향점에 대한 경도된 인식을 감지할 수 있다.
붓다께서는 ‘깨달음’보다는 오히려 현상을 바른 견해로써 올바르게 바라본다는 의미를 지닌 ‘삼마딧티(sammadiṭṭhi,正見)’를 강조했다. 삼마딧티는 지식이나 정보에 대한 단순한 분석과 이해, 혹은 추론이나 사유에 의한 알음알이가 아니다. 형성된 모든 것들의 본래성품을 착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다. 삼마딧티(sammadiṭṭhi,正見)는 지혜 ‧ 깨달음 이라는 용어와 함께 사성제, 삼법인, 연기법이라고 하는 명확한 담마에 대한 통찰을 둘러싼 개념일 뿐 그 본질은 다 같은 것이다.
모든 존재들의 완전한 행복을 위해 설해진 붓다의 가르침은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하다. 이 가르침들이 구경열반, 생사해탈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수행자들이 목표물 혹은 결과물로서의 개념이 강한 ‘깨달음’이라고 하는 한정된 어휘에 천착하다보면 자칫 지금 이 순간의 지혜, 올바른 이해, 혹은 작은 깨달음으로 점철된 수행의 여정을 가볍게 여기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과정을 건너뛰고서는 결코 지혜의 완성,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하는 산정에 도달할 수 없다.
과녁을 향한 응시가 정확해야 지향점을 향해 바르게 나아갈 수 있지만 지나치게 궁극의 지향점을 부각시키다 보면, 발로 뛰고 가슴으로 다가가기도 전에 이미 궁극을 향한 화살이 뇌리 속에 관념으로 들어와 박혀 수행의 행보를 제대로 옮기지 못하게 된다. 도달해보지 못한 수행자에게 목표지점이나 과녁은 여전히 관념일 뿐이다.
수행자들에게 깨달음은 여전히 저 머나먼 하늘의 빛나는 별과 같이 인식되어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특별한’ 혹은 ‘결정적 계기’ 라는 수식어를 붙어야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붓다께서 가셨던 길이고, 확인된 길이며, 그 분의 가르침을 따라 몸소 증험하는 일이다. 그것은 목숨 걸고 미지의 신대륙을 발견하는 일도 아니고, 로켓트를 타고 지구궤도를 벗어나는 일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몸과 마음 안에서 이해되고 증험되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시작이 반이다. 오늘부터라도 주의를 기울여 붓다께서 하신 말씀을 잘 읽어보시기 바란다. 한글번역이 잘 돼 있으니 시작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읽고 묻고 바르게 이해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말과 생각과 행동을 통해 실천수행해 나가간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고통의 끝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