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런 기념일의 연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아소까왕(재위 B.C. 268~232 년)의 연대는 거의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불멸연도가 아소까왕의 재위보다 백 년 전인지, 2백 년 전인지의 문제는 미묘한 부분입니다.
테라와다의 기록에도, 설일체유부계의 기록에도 문헌 이상의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주변의 여러 상황을 고려해보면 테라와다의 「불멸 2백년 후의 아소까왕」이 압도적으로 진실에 가깝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선 기록 자체의 신빙성을 생각하면 테라와다의 것은 지금도 전통이 계속되고 있는 당시 언어의 기록이고, 그 문헌이 도중에 개편된 흔적도 볼 수 없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전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하나의 사서인 「도사」의 두 문장에서만 불멸 2백년을 백년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 사서를 제외한 다른 테라와다의 자료는 모두 불멸 2백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그 사서는 필기했을 때의 실수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필기의 기록은 신용할 수 없습니다. 덧붙여서 쭉 암기에 의한 구두 전승을 계속해 온 테라와다도 스리랑카에 들어간 후 2백년 남짓 지난 기원전 일세기에 만약을 위해 필기에 의해 경전을 남기게 됩니다. 기록하는 김에 경전 이외의 사서 등도 기록했습니다. 이것으로 경전 이외의 문헌을 필사적으로 암기할 필요는 없어졌지만 대신에 기록 특유의 문제도 생깁니다.
한편 인도에 남은 설일체유부계의 기록은 부파 자체도 이미 없어졌고 기록도 한역된 것 밖에 남아있지 않으며 게다가 그것은 한문의 번역 탓인지 아니면 번역 전의 원문이 불완전했던 탓인지 불멸 백년 혹은 2백년 모두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국이나 티베트의 기록은 그 같은 인도의 원자료를 바탕으로 쓰인 이차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료로서의 가치는 높게 두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의 배경을 고려해도 테라와다는 「성전을 결코 바꾸지 않은 채 보관 유지한다.」는 것을 모토로 하고 있고, 거기에 불교 교단의 타락을 걱정한 아소까왕의 교단 정화를 요구하는 제3차 결집의 의뢰가 이루어져 테라와다는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다른 파의 잘못된 이해·사악한 견해를 묻는 「논사」까지 작성합니다. 테라와다와 아소까왕은 서로의 기대가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테라와다의 기록에서는 아소까왕의 사적을 행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했다고 생각됩니다.
한편 인도에 남은 부파 중에 아소까왕이 배척한 대중부 제 파는 물론, 논장에 관해서는 독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던 설일체유부 조차도 「성전을 결코 바꾸지 않는다」는 테라와다와 그것을 옳다고 지지하는 아소까왕의 태도는 곱게 느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제 기록의 자료로서의 신빙성이나 그것을 보관 유지한 제 부파의 배경으로 이러한 사정이 있기 때문에 빨리 성전에 따라 아소까왕을 불멸 약2백년 후의 사람으로 역산해보면 부처님은 기원전 483년경에 입멸했다고 보는 연대가 보다 정확하다고 생각됩니다.
덧붙여서 현대의 테라와다의 전승에서는 이것보다 더 60년 전인 기원전 544년을 불멸연도로 보고 거기서부터 불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연대는 스리랑카 왕의 연대를 기준으로 인도의 것과 합해 역산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60년의 차이는 적지 않지만 스리랑카가 불기를 처음으로 사용한 이후로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불기(佛紀)는 올해(서기 2013년)가 2556년입니다. 이는 테라와다 불교권으로부터 유래합니다. 부처님의 탄생을 기원전 624년, 입멸을 기원전 544년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테라와다 불교권인 스리랑카 불교역사서에 근거한 것입니다. 1956년에 세계 불교도 협의회(WFB)는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에서 부처님의 입멸 2500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였습니다. 이때 불기가 세계 불교도 협의회의 동의로 통일되게 됩니다. 불기는 이때부터 전 세계에서 부처님의 입멸로 제자들과 함께하지 못한 안거횟수를 계산한 연대기입니다. 때문에 불기는 ‘불멸기원(佛滅紀元)’의 약자로 보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한국은 북방 전승의 기록에 따라 불탄일과 열반일을 기념하였다가, 테라와다 불교권의 불기를 청담스님이 종정으로 취임한 해인 1966년 8월 「제13회 임시종회」에서 수용한 이래 1967년부터 공식적으로 세계 불교도 협의회(WFB)의 불기를 명시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일대기를 정리해보면
BC 624년 - 보살의 탄생
미래의 붓다이신 보살이 싯닷타(Siddhattha)란 이름으로 석가족의 왕자로서 현재 네팔의 룸비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때가 웨사카(Vesakha)달의 보름이었습니다.(음력 4월 15일 금요일). 부처님의 탄생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아소까왕의 석주가 19세기 말에 룸비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석가족의 성자, 붓다, 여기서 탄생하셨도다.' (hida budhe jāte Sākyamuni)」
BC 595년 - 보살의 출가
보살의 나이 29세에 노인, 병자, 죽은 자, 그리고 출가사문을 만난 후 진정한 행복을 찾기를 결심하고 출가합니다. 그 때가 아살라하(āsāḷhā)달의 보름이었습니다.(음력 6월 15일 월요일).
BC 589년 - 깨달음의 성취
출가하여 6년 10개월 동안 고행과 여러 수행을 한 뒤, 그의 나이 35세에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합니다.
그 때가 웨사카(Vesakha)달의 보름이었습니다.(음력 4월 15일 수요일)
BC 589년 - 최초의 설법
깨달음을 성취하신 붓다는 약 18유순(yojana, 1유순은 약 14km이므로 18유순은 약 250km)을 걸어가 현재 인도의 바라나시부근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법의 수레바퀴를 굴렸습니다.(Dhammacakkappavattana, 초전법륜). 그 때가 우안거(vassavaso) 시작하는 달인 아살라하(āsāḷhā)달의 보름날 저녁 무렵이었습니다.(음력 6월 15일 토요일). 꼰단냐가 성인의 길의 첫 번째인 수다원(Sotapatti)에 이르렀습니다.
BC 589년 - 두 번째의 설법
첫 번째의 설법 후 다섯 명의 수행자는 날을 달리하여 차례대로 수다원에 이르렀고, 5일후에 부처님의 출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다섯 명이 출가한 음력 6월 20일에 부처님께서 무아상응경(Anattalakkhana Sutta)을 설하시자, 다섯 명의 수행자는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부처님을 비롯한 6명의 아라한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고, 부처님의 가르침따라 수행하면 누구든지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그 때가 성도 후 첫 번째 안거기간중인 아살라하(āsāḷhā)달 20일입니다.(음력 6월 20일 목요일)
이제 이런 기념일의 연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아소까왕(재위 B.C. 268~232 년)의 연대는 거의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불멸연도가 아소까왕의 재위보다 백 년 전인지, 2백 년 전인지의 문제는 미묘한 부분입니다.
테라와다의 기록에도, 설일체유부계의 기록에도 문헌 이상의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주변의 여러 상황을 고려해보면 테라와다의 「불멸 2백년 후의 아소까왕」이 압도적으로 진실에 가깝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선 기록 자체의 신빙성을 생각하면 테라와다의 것은 지금도 전통이 계속되고 있는 당시 언어의 기록이고, 그 문헌이 도중에 개편된 흔적도 볼 수 없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전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하나의 사서인 「도사」의 두 문장에서만 불멸 2백년을 백년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 사서를 제외한 다른 테라와다의 자료는 모두 불멸 2백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그 사서는 필기했을 때의 실수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필기의 기록은 신용할 수 없습니다. 덧붙여서 쭉 암기에 의한 구두 전승을 계속해 온 테라와다도 스리랑카에 들어간 후 2백년 남짓 지난 기원전 일세기에 만약을 위해 필기에 의해 경전을 남기게 됩니다. 기록하는 김에 경전 이외의 사서 등도 기록했습니다. 이것으로 경전 이외의 문헌을 필사적으로 암기할 필요는 없어졌지만 대신에 기록 특유의 문제도 생깁니다.
한편 인도에 남은 설일체유부계의 기록은 부파 자체도 이미 없어졌고 기록도 한역된 것 밖에 남아있지 않으며 게다가 그것은 한문의 번역 탓인지 아니면 번역 전의 원문이 불완전했던 탓인지 불멸 백년 혹은 2백년 모두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국이나 티베트의 기록은 그 같은 인도의 원자료를 바탕으로 쓰인 이차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료로서의 가치는 높게 두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의 배경을 고려해도 테라와다는 「성전을 결코 바꾸지 않은 채 보관 유지한다.」는 것을 모토로 하고 있고, 거기에 불교 교단의 타락을 걱정한 아소까왕의 교단 정화를 요구하는 제3차 결집의 의뢰가 이루어져 테라와다는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다른 파의 잘못된 이해·사악한 견해를 묻는 「논사」까지 작성합니다. 테라와다와 아소까왕은 서로의 기대가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테라와다의 기록에서는 아소까왕의 사적을 행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했다고 생각됩니다.
한편 인도에 남은 부파 중에 아소까왕이 배척한 대중부 제 파는 물론, 논장에 관해서는 독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던 설일체유부 조차도 「성전을 결코 바꾸지 않는다」는 테라와다와 그것을 옳다고 지지하는 아소까왕의 태도는 곱게 느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제 기록의 자료로서의 신빙성이나 그것을 보관 유지한 제 부파의 배경으로 이러한 사정이 있기 때문에 빨리 성전에 따라 아소까왕을 불멸 약2백년 후의 사람으로 역산해보면 부처님은 기원전 483년경에 입멸했다고 보는 연대가 보다 정확하다고 생각됩니다.
덧붙여서 현대의 테라와다의 전승에서는 이것보다 더 60년 전인 기원전 544년을 불멸연도로 보고 거기서부터 불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연대는 스리랑카 왕의 연대를 기준으로 인도의 것과 합해 역산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60년의 차이는 적지 않지만 스리랑카가 불기를 처음으로 사용한 이후로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불기(佛紀)는 올해(서기 2013년)가 2556년입니다. 이는 테라와다 불교권으로부터 유래합니다. 부처님의 탄생을 기원전 624년, 입멸을 기원전 544년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테라와다 불교권인 스리랑카 불교역사서에 근거한 것입니다. 1956년에 세계 불교도 협의회(WFB)는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에서 부처님의 입멸 2500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였습니다. 이때 불기가 세계 불교도 협의회의 동의로 통일되게 됩니다. 불기는 이때부터 전 세계에서 부처님의 입멸로 제자들과 함께하지 못한 안거횟수를 계산한 연대기입니다. 때문에 불기는 ‘불멸기원(佛滅紀元)’의 약자로 보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한국은 북방 전승의 기록에 따라 불탄일과 열반일을 기념하였다가, 테라와다 불교권의 불기를 청담스님이 종정으로 취임한 해인 1966년 8월 「제13회 임시종회」에서 수용한 이래 1967년부터 공식적으로 세계 불교도 협의회(WFB)의 불기를 명시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일대기를 정리해보면
BC 624년 - 보살의 탄생
미래의 붓다이신 보살이 싯닷타(Siddhattha)란 이름으로 석가족의 왕자로서 현재 네팔의 룸비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때가 웨사카(Vesakha)달의 보름이었습니다.(음력 4월 15일 금요일). 부처님의 탄생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아소까왕의 석주가 19세기 말에 룸비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석가족의 성자, 붓다, 여기서 탄생하셨도다.' (hida budhe jāte Sākyamuni)」
BC 595년 - 보살의 출가
보살의 나이 29세에 노인, 병자, 죽은 자, 그리고 출가사문을 만난 후 진정한 행복을 찾기를 결심하고 출가합니다. 그 때가 아살라하(āsāḷhā)달의 보름이었습니다.(음력 6월 15일 월요일).
BC 589년 - 깨달음의 성취
출가하여 6년 10개월 동안 고행과 여러 수행을 한 뒤, 그의 나이 35세에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합니다.
그 때가 웨사카(Vesakha)달의 보름이었습니다.(음력 4월 15일 수요일)
BC 589년 - 최초의 설법
깨달음을 성취하신 붓다는 약 18유순(yojana, 1유순은 약 14km이므로 18유순은 약 250km)을 걸어가 현재 인도의 바라나시부근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법의 수레바퀴를 굴렸습니다.(Dhammacakkappavattana, 초전법륜). 그 때가 우안거(vassavaso) 시작하는 달인 아살라하(āsāḷhā)달의 보름날 저녁 무렵이었습니다.(음력 6월 15일 토요일). 꼰단냐가 성인의 길의 첫 번째인 수다원(Sotapatti)에 이르렀습니다.
BC 589년 - 두 번째의 설법
첫 번째의 설법 후 다섯 명의 수행자는 날을 달리하여 차례대로 수다원에 이르렀고, 5일후에 부처님의 출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다섯 명이 출가한 음력 6월 20일에 부처님께서 무아상응경(Anattalakkhana Sutta)을 설하시자, 다섯 명의 수행자는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부처님을 비롯한 6명의 아라한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고, 부처님의 가르침따라 수행하면 누구든지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그 때가 성도 후 첫 번째 안거기간중인 아살라하(āsāḷhā)달 20일입니다.(음력 6월 20일 목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