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1. 고통스러운 괴로움(苦苦)
가.2. 변화에 따른 괴로움(壞苦)
우리가 존재에 대하여 즐거움을 느끼고, 그래서 그것을 얻고자 하고, 그래서 그것에 몰두하여 집착하려 하는 것은 그 존재가 영원하고 고정적으로 그렇게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의식에서 기인된 것이다. 그런데 그 존재가 항상하지 않고 순간순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안다면 이 무상한 존재의 성품에 대해서 괴로워 할 것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가 이와 같이 매순간 전광석화보다 더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다른 존재로 일어났다가 또 사라지고를 반복하고 있다면 그 존재의 덧없이 사무치게 가슴 안으로 파고들어 그 존재에 대해서 염오하며 너무나 넌덜머리나서 괴로움을 느낄 것이다.
가.3. 형성됨에서 기인된 괴로움(行苦)
우리가 존재를 볼 때, 그 존재는 그 자체로 그렇게 영원히 고정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요 실재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모든 존재는 앞에서 보았듯이 고정적이며 영원하지 않고 매순간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면, 그것이 실체 혹은 본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속에서 형성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하면 존재란 어떤 조건에 의해서 의존적으로 일어났다가 의존적으로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법은 예외가 없다. 열반마저 괴로움을 이루고 있는 조건이 다 사라진 결과로 찾아든 것이지, 열반이라는 어떤 실체가 그 자체로 존재되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가 실체로서의 자아로 존재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요, 다른 이와 완전히 차별되어 있는 독립된 개체ㆍ인격체로서의 개아도 없다는 것이요, 사후에도 어떤 존재로 ‘나’라는 근간을 이룰만한 영혼 같은 것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정적이고, 영원하고,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존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원인이 조건이 되면 발생할 수밖에 없거나 소멸되지 않을 수 없으니, 잡아둘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다. 괴로움의 종합
이상의 내용을 다시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고(苦)라는 말은 가벼운 불만족에서 절망과 통곡에 이르기까지, 가벼운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느낌에서 뼈저린 고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존재의 구조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의 정신적・물질적인 고통스러움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육체는 무상하지 않은 부분이 없으므로 불안정하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비실재’라는 본질적인 성품에서 오는 고이다. 마음 또한 항상 욕망, 불만, 성냄, 초조, 불안, 걱정스러움, 갈등 속에 있으므로 그것 자체로 괴로움이다. 그런데 우리가 ‘고(苦)’의 반대가 행복이라고 흔히 생각하는데 그 행복마저도 괴로움의 종자(種子)를 품고 있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 우리는 고따마 붓다께서 “일체가 다 괴로움이다”이라고 하셨을 때의 괴로움의 의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감각적인 느낌의 괴로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면에서의 괴로움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일지라도 그것은 ‘덧없는 것’이기 때문에, 마침내 변하여 가고 바뀌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거나, 번뇌하는 상태에 이르게 마련인 것이 삶이라고 할 때, ‘삶은 괴로움’이라는 단언은 반박할 여지가 없는 진리인 것이다,
열반을 제외한 모든 유위법들은 그 성질상 모두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문이 있다. 혹자는 불교는 괴로움을 말하기 때문에 염세적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만일 불교가 삶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변화될 수 없는 고정불변의 사실로 간주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런 비판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이처럼 괴로움을 강조하는 것은 삶 그자체가 괴로움인 것은 인식의 전제 속에서만 그렇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삶의 주체자가 인식을 전환하면 괴로움에서 괴로움이 해결된 경지요 궁극적 행복으로 표현되는 저 열반을 실현하면 괴로움으로 완전히 해방됨을 너무도 중시하기 때문이다.
2.5.2.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
두 번째 진리는 이러한 괴로움이 왜 일어나는가,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밝히는 진리인데 이를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세존께서는 초기불전의 여러 곳에서 이 괴로움의 일어남 즉 원인을 강조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바로 ‘갈애(渴愛, taṇhā)’이다. taṇhā의 문자적인 의미는 ‘목마름’이다. 경에서는 갈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빅쿠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환희와 탐욕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가 그것이다.”(S56:11)
이 갈애가 근본원인이 되어 중생들은 끝 모를 생사윤회를 거듭한다. 그리고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라는 것은 갈애는 환희와 탐욕과 뜻으로는 하나라는 뜻이다.(DA.ⅲ.799)
세존께서는 갈애를 욕애(慾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의 셋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주석서는 욕애를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의 동의어”로, 유애를 “존재를 열망함에 의해서 생긴 상견(常見)이 함께하는 색계와 무색계 존재에 대한 탐욕과 선(禪)을 갈망하는 것의 동의어”로, 무유애를 “단견(斷見)이 함께하는 탐욕의 동의어”(DA.ⅲ.800)로 설명하고 있다.
가.1. 고통스러운 괴로움(苦苦)
가.2. 변화에 따른 괴로움(壞苦)
우리가 존재에 대하여 즐거움을 느끼고, 그래서 그것을 얻고자 하고, 그래서 그것에 몰두하여 집착하려 하는 것은 그 존재가 영원하고 고정적으로 그렇게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의식에서 기인된 것이다. 그런데 그 존재가 항상하지 않고 순간순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안다면 이 무상한 존재의 성품에 대해서 괴로워 할 것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가 이와 같이 매순간 전광석화보다 더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다른 존재로 일어났다가 또 사라지고를 반복하고 있다면 그 존재의 덧없이 사무치게 가슴 안으로 파고들어 그 존재에 대해서 염오하며 너무나 넌덜머리나서 괴로움을 느낄 것이다.
가.3. 형성됨에서 기인된 괴로움(行苦)
우리가 존재를 볼 때, 그 존재는 그 자체로 그렇게 영원히 고정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요 실재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모든 존재는 앞에서 보았듯이 고정적이며 영원하지 않고 매순간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면, 그것이 실체 혹은 본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속에서 형성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하면 존재란 어떤 조건에 의해서 의존적으로 일어났다가 의존적으로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법은 예외가 없다. 열반마저 괴로움을 이루고 있는 조건이 다 사라진 결과로 찾아든 것이지, 열반이라는 어떤 실체가 그 자체로 존재되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가 실체로서의 자아로 존재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요, 다른 이와 완전히 차별되어 있는 독립된 개체ㆍ인격체로서의 개아도 없다는 것이요, 사후에도 어떤 존재로 ‘나’라는 근간을 이룰만한 영혼 같은 것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정적이고, 영원하고,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존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원인이 조건이 되면 발생할 수밖에 없거나 소멸되지 않을 수 없으니, 잡아둘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다. 괴로움의 종합
이상의 내용을 다시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고(苦)라는 말은 가벼운 불만족에서 절망과 통곡에 이르기까지, 가벼운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느낌에서 뼈저린 고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존재의 구조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의 정신적・물질적인 고통스러움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육체는 무상하지 않은 부분이 없으므로 불안정하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비실재’라는 본질적인 성품에서 오는 고이다. 마음 또한 항상 욕망, 불만, 성냄, 초조, 불안, 걱정스러움, 갈등 속에 있으므로 그것 자체로 괴로움이다. 그런데 우리가 ‘고(苦)’의 반대가 행복이라고 흔히 생각하는데 그 행복마저도 괴로움의 종자(種子)를 품고 있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 우리는 고따마 붓다께서 “일체가 다 괴로움이다”이라고 하셨을 때의 괴로움의 의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감각적인 느낌의 괴로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면에서의 괴로움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일지라도 그것은 ‘덧없는 것’이기 때문에, 마침내 변하여 가고 바뀌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거나, 번뇌하는 상태에 이르게 마련인 것이 삶이라고 할 때, ‘삶은 괴로움’이라는 단언은 반박할 여지가 없는 진리인 것이다,
열반을 제외한 모든 유위법들은 그 성질상 모두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문이 있다. 혹자는 불교는 괴로움을 말하기 때문에 염세적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만일 불교가 삶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변화될 수 없는 고정불변의 사실로 간주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런 비판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이처럼 괴로움을 강조하는 것은 삶 그자체가 괴로움인 것은 인식의 전제 속에서만 그렇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삶의 주체자가 인식을 전환하면 괴로움에서 괴로움이 해결된 경지요 궁극적 행복으로 표현되는 저 열반을 실현하면 괴로움으로 완전히 해방됨을 너무도 중시하기 때문이다.
2.5.2.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
두 번째 진리는 이러한 괴로움이 왜 일어나는가,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밝히는 진리인데 이를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세존께서는 초기불전의 여러 곳에서 이 괴로움의 일어남 즉 원인을 강조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바로 ‘갈애(渴愛, taṇhā)’이다. taṇhā의 문자적인 의미는 ‘목마름’이다. 경에서는 갈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빅쿠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환희와 탐욕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가 그것이다.”(S56:11)
이 갈애가 근본원인이 되어 중생들은 끝 모를 생사윤회를 거듭한다. 그리고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라는 것은 갈애는 환희와 탐욕과 뜻으로는 하나라는 뜻이다.(DA.ⅲ.799)
세존께서는 갈애를 욕애(慾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의 셋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주석서는 욕애를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의 동의어”로, 유애를 “존재를 열망함에 의해서 생긴 상견(常見)이 함께하는 색계와 무색계 존재에 대한 탐욕과 선(禪)을 갈망하는 것의 동의어”로, 무유애를 “단견(斷見)이 함께하는 탐욕의 동의어”(DA.ⅲ.800)로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