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앙가 마가다 왕국의 빔비사라 왕
서문
마하왕사의 복주석서에 의하면 빔비사라 왕의 아버지 이름은 바띠이고 어머니 이름은 빔비였습니다. 티벳 구전에서는 빔비사라 왕의 아버지는 마하파두마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겨우 15살이던 빔비사라에게 왕위를 양위했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그의 대관식 16년 후에 부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숫따니빠따(경집)의 빱밧자 수따(출가경)에 의하면 수행자 싯닷따는 최초의 탁발을 알가 마가다의 수도인 라자가하에서 행했는데 그곳은 빔비사라 왕이 통치하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빔비사라 왕이 빤다와 언덕에서 29살의 고행자 싯닷따를 처음 만났을 때가 왕의 나이 겨우 24살이었습니다. 마하왕사는 두 사람의 아버지인 숫도다나 왕과 바띠 왕이 그랬던 것처럼 부처님과 빔비사라 왕은 우정이 깊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 만나기 이전부터 서로 호감을 키워 왔는지도 모릅니다. 최초의 만남에서 싯닷따 수행자의 인격에 호감을 느낀 빔비사라 왕은 그를 자신의 왕국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리고는 왕국의 절반을 그에게 주려하자 싯닷따 수행자는 왕에게 설명했습니다. 부처님 자신은 완전한 깨달음을 통해 고통의 바다에서 허덕이는 인류를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려는 고귀한 목적으로 세속적인 삶을 포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빔비사라 왕은 싯닷따 왕자가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얘기를 몇 년 전에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싯닷따 수행자에게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후에 라자가하를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탁월한 전술과 전장에서의 용기로 인하여 세니야 빔비사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앙가 마가다 왕국의 수도 라자가하에는 8만 가구가 있었습니다. 왕국의 전체 크기는 300 요자나에 달했습니다. 수도에는 상업 중심지가 있었고 도시 둘레에는 64개의 작은 문과 32개의 주 대문이 있었습니다. 수도 라자가하에는 18개의 대사원이 있었습니다.
가문(가족)
빔비사라 왕은 마하 꼬살라 왕의 딸인 꼬살라 공주와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빠세나디 꼬살라 왕의 여동생이었습니다. 마하 꼬살라 왕은 까시국을 결혼 선물로 딸에게 주었습니다. 까시국은 앙가 마가다왕국과 꼬살라왕국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10만 금화의 수입이 있었습니다. 아자따삿뚜 왕자를 낳은 것이 바로 이 딸이었습니다. 아자따삿뚜는 부왕 빔비사라 왕을 살해한 후 죽었습니다. 당시 꼬살라의 왕이었던 빠세나디 왕은 여동생 꼬살라 공주에게 주었던 선물인 까시국을 되찾기로 결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까시국이 부왕 살해자인 아자따삿뚜의 소유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끊임없는 전쟁이 이어졌습니다.
빔비사라 왕의 두 번째 왕비 케마는 맛다국의 수도인 사갈라의 왕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에 자만하고 있었으므로 부처님을 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녀는 빔비사라 왕의 요청으로 부처님에게 예경하러 갔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그녀를 자만심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 주었습니다. 후에 그녀는 빔비사라 왕의 허락을 얻어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비구니스님이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자손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빨리어 경전 어디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16년의 통치 기간 동안 빔비사라 왕은 그의 궁전에 있는 수많은 여인들의 소생 말고도 심지어 창녀들로부터도 자손을 얻었습니다.
아바야 왕자는 웃제나이라는 도시의 창녀 빠드마와띠로부터 태어났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빠드마와띠의 미모에 대단히 매료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하루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없어 그녀와 하루 밤을 지내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빠드마와띠가 자신이 임신했다고 왕에게 알려 주었을 때 왕은 만일 아들이 태어나면 궁으로 데려다가 키우겠노라 굳게 약속을 했습니다. 빠드마와띠는 아들을 낳았고 아들이 7살이 되었을 때 빔비사라 왕이 아버지임을 밝히면서 아들을 왕에게로 보냈습니다. 왕은 많은 사랑과 호의를 가지고 아바야 왕자를 왕족의 관습에 따라 키웠습니다.
아바야 왕자는 결국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빔비사라 왕이 아자따삿뚜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당함으로서 몹시 위축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빠드마와띠 역시 아들 아바야 왕자의 권유로 출가를 했습니다. 두 사람 다 후에 아라한이 됩니다. 아바야 왕자가 출가하기 전에 변방의 접경지대 마을에서 봉기를 진압했습니다. 그의 영웅적 성취를 기뻐하면서 빔비사라 왕은 7일 동안 나라의 통치권을 그에게 양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하루는 빔비사라 왕이 웨살리의 궁중 무희인 암바빨리라는 미인에 대하여 듣고 매우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완벽한 변장을 하고 친구 몇 명과 더불어 그녀를 찾아가 하루 밤을 같이 지냈습니다. 그녀는 머지않아 임신하게 되었고 그는 그녀를 경제적으로 지원했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낳았고 이름을 위말라라고 했습니다. 위말라가 청년이 되자 당시 웨살리를 방문하고 계셨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하게 됩니다. 후에 고행자의 삶을 산 위말라는 위말라 꼰단냐로 알려졌습니다. 궁중무희인 암바빨리는 아들의 법문을 듣고서 세속을 버리고 출가하여 비구니스님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 다 후에 아라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에게는 실라와라는 또 다른 아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빨리어 경전에서는 그에 대한 언급을 찾아 볼 수 없지만 테라가타 주석서에는 그를 빔비사라 왕의 아들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아자따삿뚜가 실라와의 삶에 있어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고 전해지는 것은 바로 이 주석서에 쓰여 있습니다. 스님이 되고 나서까지도 아자따삿뚜가 그를 죽이려는 시도는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공범자들은 실라와의 법문을 들은 후 출가하여 승복을 입고 말았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실라와 왕자가 왕위 계승자였다는 사실을 이런 저런 방법으로 암시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빨리어 경전의 해석자인 아짜리야 붓다고사는 중부경전의 단따부미 숫따(안전한 장소 경)에 대한 해석을 쓰면서, 자야세나 왕자를 빔비사라 왕의 아들로, 그리고 부미자 스님을 자나세나 왕자의 모계 쪽 숙부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자나세나 왕자의 어머니라는 인물에 대한 언급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빔비사라 왕의 그 밖의 아들과 딸들의 이름은 상응부경전의 쭌디 숫따(쭌디 경)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쭌디 공주에 대한 언급은 위에 언급한 경전에 있습니다. 부처님은 당시 웰루와나(죽림정사)의 깔란다까니와빠(죽림정사안의 공원)에서 쉬고 계셨는데, 그녀는 자신의 오빠인 쭌다 왕자에 의하여 그녀에게 언급된 여러 가지 사실에 관한 질문을 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500대의 마차를 거느리고 부처님에게로 갔습니다. 주석서에 의하면 왕자와 공주는 빔비사라 왕의 아들과 딸이었다고 합니다. 쭌디 공주의 이름 역시 상응부경전 수행자품에 있는 중요한 재가 신자들의 이름들과 함께 발견되고 있습니다.
(2) 앙가 마가다 왕국의 빔비사라 왕
서문
마하왕사의 복주석서에 의하면 빔비사라 왕의 아버지 이름은 바띠이고 어머니 이름은 빔비였습니다. 티벳 구전에서는 빔비사라 왕의 아버지는 마하파두마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겨우 15살이던 빔비사라에게 왕위를 양위했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그의 대관식 16년 후에 부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숫따니빠따(경집)의 빱밧자 수따(출가경)에 의하면 수행자 싯닷따는 최초의 탁발을 알가 마가다의 수도인 라자가하에서 행했는데 그곳은 빔비사라 왕이 통치하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빔비사라 왕이 빤다와 언덕에서 29살의 고행자 싯닷따를 처음 만났을 때가 왕의 나이 겨우 24살이었습니다. 마하왕사는 두 사람의 아버지인 숫도다나 왕과 바띠 왕이 그랬던 것처럼 부처님과 빔비사라 왕은 우정이 깊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 만나기 이전부터 서로 호감을 키워 왔는지도 모릅니다. 최초의 만남에서 싯닷따 수행자의 인격에 호감을 느낀 빔비사라 왕은 그를 자신의 왕국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리고는 왕국의 절반을 그에게 주려하자 싯닷따 수행자는 왕에게 설명했습니다. 부처님 자신은 완전한 깨달음을 통해 고통의 바다에서 허덕이는 인류를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려는 고귀한 목적으로 세속적인 삶을 포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빔비사라 왕은 싯닷따 왕자가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얘기를 몇 년 전에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싯닷따 수행자에게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후에 라자가하를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탁월한 전술과 전장에서의 용기로 인하여 세니야 빔비사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앙가 마가다 왕국의 수도 라자가하에는 8만 가구가 있었습니다. 왕국의 전체 크기는 300 요자나에 달했습니다. 수도에는 상업 중심지가 있었고 도시 둘레에는 64개의 작은 문과 32개의 주 대문이 있었습니다. 수도 라자가하에는 18개의 대사원이 있었습니다.
가문(가족)
빔비사라 왕은 마하 꼬살라 왕의 딸인 꼬살라 공주와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빠세나디 꼬살라 왕의 여동생이었습니다. 마하 꼬살라 왕은 까시국을 결혼 선물로 딸에게 주었습니다. 까시국은 앙가 마가다왕국과 꼬살라왕국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10만 금화의 수입이 있었습니다. 아자따삿뚜 왕자를 낳은 것이 바로 이 딸이었습니다. 아자따삿뚜는 부왕 빔비사라 왕을 살해한 후 죽었습니다. 당시 꼬살라의 왕이었던 빠세나디 왕은 여동생 꼬살라 공주에게 주었던 선물인 까시국을 되찾기로 결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까시국이 부왕 살해자인 아자따삿뚜의 소유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끊임없는 전쟁이 이어졌습니다.
빔비사라 왕의 두 번째 왕비 케마는 맛다국의 수도인 사갈라의 왕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에 자만하고 있었으므로 부처님을 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녀는 빔비사라 왕의 요청으로 부처님에게 예경하러 갔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그녀를 자만심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 주었습니다. 후에 그녀는 빔비사라 왕의 허락을 얻어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비구니스님이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자손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빨리어 경전 어디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16년의 통치 기간 동안 빔비사라 왕은 그의 궁전에 있는 수많은 여인들의 소생 말고도 심지어 창녀들로부터도 자손을 얻었습니다.
아바야 왕자는 웃제나이라는 도시의 창녀 빠드마와띠로부터 태어났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빠드마와띠의 미모에 대단히 매료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하루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없어 그녀와 하루 밤을 지내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빠드마와띠가 자신이 임신했다고 왕에게 알려 주었을 때 왕은 만일 아들이 태어나면 궁으로 데려다가 키우겠노라 굳게 약속을 했습니다. 빠드마와띠는 아들을 낳았고 아들이 7살이 되었을 때 빔비사라 왕이 아버지임을 밝히면서 아들을 왕에게로 보냈습니다. 왕은 많은 사랑과 호의를 가지고 아바야 왕자를 왕족의 관습에 따라 키웠습니다.
아바야 왕자는 결국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빔비사라 왕이 아자따삿뚜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당함으로서 몹시 위축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빠드마와띠 역시 아들 아바야 왕자의 권유로 출가를 했습니다. 두 사람 다 후에 아라한이 됩니다. 아바야 왕자가 출가하기 전에 변방의 접경지대 마을에서 봉기를 진압했습니다. 그의 영웅적 성취를 기뻐하면서 빔비사라 왕은 7일 동안 나라의 통치권을 그에게 양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하루는 빔비사라 왕이 웨살리의 궁중 무희인 암바빨리라는 미인에 대하여 듣고 매우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완벽한 변장을 하고 친구 몇 명과 더불어 그녀를 찾아가 하루 밤을 같이 지냈습니다. 그녀는 머지않아 임신하게 되었고 그는 그녀를 경제적으로 지원했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낳았고 이름을 위말라라고 했습니다. 위말라가 청년이 되자 당시 웨살리를 방문하고 계셨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하게 됩니다. 후에 고행자의 삶을 산 위말라는 위말라 꼰단냐로 알려졌습니다. 궁중무희인 암바빨리는 아들의 법문을 듣고서 세속을 버리고 출가하여 비구니스님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 다 후에 아라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에게는 실라와라는 또 다른 아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빨리어 경전에서는 그에 대한 언급을 찾아 볼 수 없지만 테라가타 주석서에는 그를 빔비사라 왕의 아들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아자따삿뚜가 실라와의 삶에 있어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고 전해지는 것은 바로 이 주석서에 쓰여 있습니다. 스님이 되고 나서까지도 아자따삿뚜가 그를 죽이려는 시도는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공범자들은 실라와의 법문을 들은 후 출가하여 승복을 입고 말았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실라와 왕자가 왕위 계승자였다는 사실을 이런 저런 방법으로 암시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빨리어 경전의 해석자인 아짜리야 붓다고사는 중부경전의 단따부미 숫따(안전한 장소 경)에 대한 해석을 쓰면서, 자야세나 왕자를 빔비사라 왕의 아들로, 그리고 부미자 스님을 자나세나 왕자의 모계 쪽 숙부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자나세나 왕자의 어머니라는 인물에 대한 언급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빔비사라 왕의 그 밖의 아들과 딸들의 이름은 상응부경전의 쭌디 숫따(쭌디 경)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쭌디 공주에 대한 언급은 위에 언급한 경전에 있습니다. 부처님은 당시 웰루와나(죽림정사)의 깔란다까니와빠(죽림정사안의 공원)에서 쉬고 계셨는데, 그녀는 자신의 오빠인 쭌다 왕자에 의하여 그녀에게 언급된 여러 가지 사실에 관한 질문을 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500대의 마차를 거느리고 부처님에게로 갔습니다. 주석서에 의하면 왕자와 공주는 빔비사라 왕의 아들과 딸이었다고 합니다. 쭌디 공주의 이름 역시 상응부경전 수행자품에 있는 중요한 재가 신자들의 이름들과 함께 발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