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0-21 15:37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이 오늘날의 비구 스님과 비구니 스님의 조직인 상가를 만드신 목적을 주목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의도는 다른 계급 출신의 사람이라도 평등하게 참여하여, 아라한이 되기 위한 담마 수행에 좀 더 편한 환경을 제공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처님은 인도 역사상 여자(비구니)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한 최초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당시의 지배적인 사회규범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연장자 아라한 비구니라 할지라도 가장 나이 어린 비구 스님에게 절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어찌 되었건 부처님께서는 이상적인 공동체인 상가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아직 살아계시는 동안에도 상가 안에서는 많은 다툼이 있었습니다. 다툼이 생기면 스님들은 부처님께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은 그들의 길잡이로서 법(dhamma)와 율(vinaya)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제1차 결집에서 경(sutta)과 율(vinaya)의 다섯 가지 길잡이(보호자)가 생겼습니다.
우빨리(Upāli)는 율(vinaya)의 보호자가 되었고,
아난다(Ānanda)는 장부 경전(Dīgha-nikāya),
사리뿟따(Sāriputta)의 제자들은 중부 경전(Majjhima-nikāya),
마하깟사빠(Mahākassapa)는 상응부 경전(Saṁyuṭṭa-nikāya),
아누룻다(Anuruddha)는 증지부 경전(Aṅguttara-nikāya)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제자들은 경과 율을 암기하고 보존하는 일을 계속 해왔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주요 가르침을 모든 다른 경전(nikāya)들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장부 경전(dīgha-nikāya)의 34경, 중부경전(Majjhima-nikāya)의 154경, 상응부 경전(Saṁyutta-nikāya)의 대응 경들과 증지부 경전(Aṅguttara-nikāya)의 번호로 정리된 경들이 그것들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담마를 이해하는 그릇에 따라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가르침을 다른 방법으로 전함에도, 점진적 가르침(Ānupubbīkathā)이란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일반인들에게 연기(paṭiccasamuppāda)에 대하여 설명할 때, 보시(dāna) 와 지계(sīla)를 함으로써 천상(sagga)에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에서 보시와 지계는 원인을 가리키며, 반면 천상은 그것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이런 식으로 보시에 관한 이야기(dānakathā), 지계에 관한 이야기(sīlakathā) 그리고 천상에 관한 이야기(saggakathā)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일반인들에게 알기 쉽게, 그러나 매우 효과적으로 근본 가르침을 전하셨습니다.
제 1차 불교 결집의 성과는 경장(sutta piṭaka)과 율장(vinaya piṭaka)의 편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동일한 장경(piṭaka)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주석서는 훗날 불자들 스스로가 덧붙인 것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장부 경전(Dīgha-nikāya)에 있는 유명한 경전인 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 sutta)의 끝부분에서 부처님의 시신은 다비 후에 여덟 부분(aṭṭhadoṇa)으로 나누어졌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 sutta)에 대한 주석서에 의하면, 유골이 여덟 부분으로 나누어졌다는 이 언급은 스리랑카에서 덧붙여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장부경전(Dīgha-nikāya)에 있는 대반열반경이 BC 3세기에 마힌다 장로(thera mahinda)에 의해서 인도로부터 스리랑카로 전해 진 후에, 스리랑카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뒷부분이 첨가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비구 스님들은 대사(MahāŒvihara)파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에 이 부분은 대사파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경전 끝에 덧붙여졌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대반열반경은 마힌다 장로에 의해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전해진 경전의 정확한 부분이 아니라, 인도로부터 전해진 원래의 부분에 스리랑카에서 만든 추가분을 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경장(sutta piṭaka)이 제1차 결집에서 낭송된 경전과 정확히 같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다른 예로는, 불종성경(Buddhavaṁsa)은 28장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주석서는 26장까지 뿐입니다. 이것은 불종성경에 대한 주석서가 인도에서 써졌을 때까지는 불종성경도 27, 28장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불종성경을 바탕으로 그 주석서를 쓴 사람은 26장 이외에 27장, 28장의 주석서는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불종성경은 28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27장, 28장이 스리랑카에서 대사파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추가되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삼장(tripiṭaka)이 제1차 결집에서 합송되었던 그 삼장과 똑 같은 것일 수는 없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제1차 결집에서 합송되었던 그 삼장과 똑같다고도 이해해야 합니다.
제1차 결집에서 500명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경과 율이 완성된 후에, 마하깟사빠 존자는 오늘날 우리가 “부처님의 말씀(붓다와짜나, Buddhavacana)”이라고 부르는 이 경전들을 보존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세 번째 모음집인 논장(Abhidhamma piṭaka)은 제1차 결집에서 편찬되지 않았습니다. 훨씬 후에 편찬되었습니다. BC 3세기 아소까왕 시절에 열린 제3차 불교결집에서 회의의 의장이 된 목갈리뿟따 띳사(Moggaliputta-Tissa) 비구 스님이 논장(Abhidhamma piṭaka) 7권 중에서 가장 중요한 논사(KathāŒvatthu)라는 책을 썼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것으로 논장(Abhidhamma piṭaka) 7권은 불교 합송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경·률·론의 삼장 중에서 경장과 율장은 이 제1차 결집 때 확정한 것입니다. 논장에 대해서는 사서에는 제3차 결집 때까지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제1차 결집으로 정해진 경전이 어떤 것이었는지 현대의 학계에서는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경전을 정리했지만 필기 용구나 종이 등으로 써서 기록하는 고대 중국이나 고대 서양의 문화와 달리 고대 인도에서는 말해진 말을 통째로 귀로 기억해서, 사람에게 전할 때도 들어 기억한 그대로를 입으로 주창하는 구두 전승의 문화였기 때문에 글로 쓰여진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모른다」에 머물지 않고 현대 우리의 기준을 적용시켜 「구전에서는 기억에 실수가 있을 수 있고, 들은 것은 잊어버리는 실수가 반드시 있을 것이므로 부처님의 설법을 그대로 올바르게 보존했을 리가 없다. 현존하는 빨리 경전은 기원 전 후에 스리랑카에서 필기되어 이후의 것으로 거기서부터는 실수가 거의 없을지 모르지만 그때까지의 약 5백년간은 잊거나 잘못하거나하여 경전의 내용이 없어졌거나 덧붙여졌거나 이것저것 혼합되어 있을 것이므로 현존하는 빨리 경전은 결국 부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잘못입니다.
우리 현대인은 기억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누가 해도 기억에 의한 전달은 신용할 수 없다고 생각해 버리지만, 고대 인도인이 필기가 아니고 암기를 전달·보존 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서 암기가 필기보다 정확했기 때문입니다.
구두 전승 문화의 인도에서는 긴 이야기도 기억하기 쉽게 여러 가지로 궁리하여 전해지고 있습니다. 빨리 경전도 이와 같이 시의 형식으로 말해지거나, 교설의 테마가 처음에 열거할 수 있는 목차가 되어 있거나, 수를 맞추거나, 정해진 리듬으로 암송되도록 소리의 수를 조절하거나, 소중한 문장은 반복해 나오거나, 여러 가지 궁리를 해서 즐겁고 확실히 배우면서 기억할 수 있도록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기억하기 쉽게 구성되어진 빨리 경전은 진지하게 말씀한 부처님과 진지하게 듣고, 익히고, 전해 온 제자들의 끊임없는 전통 가운데에서 비록 3천년, 1만년이 지나도, 어설픈 기억이 되거나 내용이 애매하게 되어 버리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전통을 계승해서 경전을 계속 전하고 있는 동남아시아의 스님들이 산 증인이니 확인해 보면 잘 알 것입니다.
한편 필기에 의한 한역 불전은 모처럼의 역본이 전란으로 불타거나, 베껴 쓸 때에도 결함이나 추가 기입이나 한자의 실수 등이 상당히 있기 때문에 제대로 번역하여 빈틈없이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학계에서는 「한역 불전도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는 없을 것이다」라고 보고 있지만, 그것은 필기에 의한 전달의 문제가 아니라 번역하기 전의 원본이 구두 전승이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현존 빨리 경전이 제1차 결집으로 확정된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인 것입니다. 실제로 현존 빨리 경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결코 1구 1언도 바꿀 수 없다.」라고 규정지은 테라와다가 지켜 전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전한 상태로 전해 내려올 수 있었다고 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쓰는 것에 의지한 한역 경전이 어느 부파의 것도 완전한 상태로 전하는 것 없고 그 내용도 많이 개편된 자취를 볼 수 있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작성일 : 13-10-21 15:37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이 오늘날의 비구 스님과 비구니 스님의 조직인 상가를 만드신 목적을 주목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의도는 다른 계급 출신의 사람이라도 평등하게 참여하여, 아라한이 되기 위한 담마 수행에 좀 더 편한 환경을 제공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처님은 인도 역사상 여자(비구니)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한 최초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당시의 지배적인 사회규범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연장자 아라한 비구니라 할지라도 가장 나이 어린 비구 스님에게 절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어찌 되었건 부처님께서는 이상적인 공동체인 상가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아직 살아계시는 동안에도 상가 안에서는 많은 다툼이 있었습니다. 다툼이 생기면 스님들은 부처님께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은 그들의 길잡이로서 법(dhamma)와 율(vinaya)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제1차 결집에서 경(sutta)과 율(vinaya)의 다섯 가지 길잡이(보호자)가 생겼습니다.
우빨리(Upāli)는 율(vinaya)의 보호자가 되었고,
아난다(Ānanda)는 장부 경전(Dīgha-nikāya),
사리뿟따(Sāriputta)의 제자들은 중부 경전(Majjhima-nikāya),
마하깟사빠(Mahākassapa)는 상응부 경전(Saṁyuṭṭa-nikāya),
아누룻다(Anuruddha)는 증지부 경전(Aṅguttara-nikāya)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제자들은 경과 율을 암기하고 보존하는 일을 계속 해왔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주요 가르침을 모든 다른 경전(nikāya)들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장부 경전(dīgha-nikāya)의 34경, 중부경전(Majjhima-nikāya)의 154경, 상응부 경전(Saṁyutta-nikāya)의 대응 경들과 증지부 경전(Aṅguttara-nikāya)의 번호로 정리된 경들이 그것들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담마를 이해하는 그릇에 따라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가르침을 다른 방법으로 전함에도, 점진적 가르침(Ānupubbīkathā)이란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일반인들에게 연기(paṭiccasamuppāda)에 대하여 설명할 때, 보시(dāna) 와 지계(sīla)를 함으로써 천상(sagga)에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에서 보시와 지계는 원인을 가리키며, 반면 천상은 그것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이런 식으로 보시에 관한 이야기(dānakathā), 지계에 관한 이야기(sīlakathā) 그리고 천상에 관한 이야기(saggakathā)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일반인들에게 알기 쉽게, 그러나 매우 효과적으로 근본 가르침을 전하셨습니다.
제 1차 불교 결집의 성과는 경장(sutta piṭaka)과 율장(vinaya piṭaka)의 편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동일한 장경(piṭaka)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주석서는 훗날 불자들 스스로가 덧붙인 것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장부 경전(Dīgha-nikāya)에 있는 유명한 경전인 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 sutta)의 끝부분에서 부처님의 시신은 다비 후에 여덟 부분(aṭṭhadoṇa)으로 나누어졌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 sutta)에 대한 주석서에 의하면, 유골이 여덟 부분으로 나누어졌다는 이 언급은 스리랑카에서 덧붙여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장부경전(Dīgha-nikāya)에 있는 대반열반경이 BC 3세기에 마힌다 장로(thera mahinda)에 의해서 인도로부터 스리랑카로 전해 진 후에, 스리랑카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뒷부분이 첨가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비구 스님들은 대사(MahāŒvihara)파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에 이 부분은 대사파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경전 끝에 덧붙여졌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대반열반경은 마힌다 장로에 의해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전해진 경전의 정확한 부분이 아니라, 인도로부터 전해진 원래의 부분에 스리랑카에서 만든 추가분을 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경장(sutta piṭaka)이 제1차 결집에서 낭송된 경전과 정확히 같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다른 예로는, 불종성경(Buddhavaṁsa)은 28장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주석서는 26장까지 뿐입니다. 이것은 불종성경에 대한 주석서가 인도에서 써졌을 때까지는 불종성경도 27, 28장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불종성경을 바탕으로 그 주석서를 쓴 사람은 26장 이외에 27장, 28장의 주석서는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불종성경은 28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27장, 28장이 스리랑카에서 대사파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추가되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삼장(tripiṭaka)이 제1차 결집에서 합송되었던 그 삼장과 똑 같은 것일 수는 없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제1차 결집에서 합송되었던 그 삼장과 똑같다고도 이해해야 합니다.
제1차 결집에서 500명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경과 율이 완성된 후에, 마하깟사빠 존자는 오늘날 우리가 “부처님의 말씀(붓다와짜나, Buddhavacana)”이라고 부르는 이 경전들을 보존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세 번째 모음집인 논장(Abhidhamma piṭaka)은 제1차 결집에서 편찬되지 않았습니다. 훨씬 후에 편찬되었습니다. BC 3세기 아소까왕 시절에 열린 제3차 불교결집에서 회의의 의장이 된 목갈리뿟따 띳사(Moggaliputta-Tissa) 비구 스님이 논장(Abhidhamma piṭaka) 7권 중에서 가장 중요한 논사(KathāŒvatthu)라는 책을 썼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것으로 논장(Abhidhamma piṭaka) 7권은 불교 합송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경·률·론의 삼장 중에서 경장과 율장은 이 제1차 결집 때 확정한 것입니다. 논장에 대해서는 사서에는 제3차 결집 때까지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제1차 결집으로 정해진 경전이 어떤 것이었는지 현대의 학계에서는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경전을 정리했지만 필기 용구나 종이 등으로 써서 기록하는 고대 중국이나 고대 서양의 문화와 달리 고대 인도에서는 말해진 말을 통째로 귀로 기억해서, 사람에게 전할 때도 들어 기억한 그대로를 입으로 주창하는 구두 전승의 문화였기 때문에 글로 쓰여진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모른다」에 머물지 않고 현대 우리의 기준을 적용시켜 「구전에서는 기억에 실수가 있을 수 있고, 들은 것은 잊어버리는 실수가 반드시 있을 것이므로 부처님의 설법을 그대로 올바르게 보존했을 리가 없다. 현존하는 빨리 경전은 기원 전 후에 스리랑카에서 필기되어 이후의 것으로 거기서부터는 실수가 거의 없을지 모르지만 그때까지의 약 5백년간은 잊거나 잘못하거나하여 경전의 내용이 없어졌거나 덧붙여졌거나 이것저것 혼합되어 있을 것이므로 현존하는 빨리 경전은 결국 부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잘못입니다.
우리 현대인은 기억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누가 해도 기억에 의한 전달은 신용할 수 없다고 생각해 버리지만, 고대 인도인이 필기가 아니고 암기를 전달·보존 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서 암기가 필기보다 정확했기 때문입니다.
구두 전승 문화의 인도에서는 긴 이야기도 기억하기 쉽게 여러 가지로 궁리하여 전해지고 있습니다. 빨리 경전도 이와 같이 시의 형식으로 말해지거나, 교설의 테마가 처음에 열거할 수 있는 목차가 되어 있거나, 수를 맞추거나, 정해진 리듬으로 암송되도록 소리의 수를 조절하거나, 소중한 문장은 반복해 나오거나, 여러 가지 궁리를 해서 즐겁고 확실히 배우면서 기억할 수 있도록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기억하기 쉽게 구성되어진 빨리 경전은 진지하게 말씀한 부처님과 진지하게 듣고, 익히고, 전해 온 제자들의 끊임없는 전통 가운데에서 비록 3천년, 1만년이 지나도, 어설픈 기억이 되거나 내용이 애매하게 되어 버리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전통을 계승해서 경전을 계속 전하고 있는 동남아시아의 스님들이 산 증인이니 확인해 보면 잘 알 것입니다.
한편 필기에 의한 한역 불전은 모처럼의 역본이 전란으로 불타거나, 베껴 쓸 때에도 결함이나 추가 기입이나 한자의 실수 등이 상당히 있기 때문에 제대로 번역하여 빈틈없이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학계에서는 「한역 불전도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는 없을 것이다」라고 보고 있지만, 그것은 필기에 의한 전달의 문제가 아니라 번역하기 전의 원본이 구두 전승이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현존 빨리 경전이 제1차 결집으로 확정된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인 것입니다. 실제로 현존 빨리 경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결코 1구 1언도 바꿀 수 없다.」라고 규정지은 테라와다가 지켜 전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전한 상태로 전해 내려올 수 있었다고 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쓰는 것에 의지한 한역 경전이 어느 부파의 것도 완전한 상태로 전하는 것 없고 그 내용도 많이 개편된 자취를 볼 수 있는 것과 대조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