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2-09 05:34
이상과 같은 원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외부의 타 종교인으로부터의 침략.
② 바라문 띳사의 반란과 12년간의 기근.
③ 무책임하고 무신앙적인 출가자의 증대.
④ 상가의 분열.
⑤ 송경자들의 감소로 합송의 어려움.
⑥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경전을 전승하려는 의지.
이 중에서 상가의 분열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말해집니다. 또한 무외산사파의 자유로운 경전 해석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염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기에, 왕이 무외산사파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는 수도 아누라다뿌라로부터 멀리 떨어진 알로까위하라 사원에서 경전을 문자화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자유로운 사고로 순수성을 잃어버린 부파의 발생과 그들과의 오랜 갈등은 테라와다를 더욱 단결시키는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또한 그런 상황 속에서 테라와다는 인도로부터 전래된 테라와다의 정법이 왜곡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암송에만 의존하던 불법의 전승을 문자로 남기겠다는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대립의 역사는 불교 최초의 경전 ‘패엽경’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낳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구전의 합송으로만 전승되어 오던 삼장을 비로소 문자로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현존하는 빨리 문헌의 원형 그대로입니다. 기록된 패엽경이 있을 때든 없을 때든 테라와다 스님들은 2600년간 변함없이 스승이 전해주는 가르침을 그대로 암송하여 전승했습니다. 경전 암송은 출가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수행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리랑카는 인도 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어, 자연, 풍토, 인종, 언어가 인도대륙 본토와 비슷하기에 다방면에서 대륙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한 스리랑카의 빅쿠들은 이 섬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불적을 순례하거나 인도로의 불교 전파에도 종사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비문을 통해 추정할 수 있고, 후대에 인도출신인 붓다고사, 붓다닷따, 아난다, 담마빨라 스님 등 기라성 같은 대가들이 스리랑카로 들어와서 정통 테라와다불교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런 사실만 봐도 인도 내의 테라와다와 스리랑카의 테라와다는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인도 테라와다에서도 스리랑카의 테라와다를 그 정통으로 인정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도에 불교가 미약해지면서 스리랑카는 테라와다 불교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인도의 부처님 성도지인 붓다가야에서 출토된 명문 중에 B.C 250년경 인도 숭가 왕조때 비문에는 ‘따하빠나(땀바빠나인 스리랑카를 지칭)의 주민 보디라키따가 보시함’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예부터 스리랑카 사람들이 인도의 불적을 순례하거나 왕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외의 명문들에 의해서도 스리랑카 테라와다의 빅쿠들이 남 인도를 비롯한 북 인도에까지도 교화 활동을 넓히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 알려져 있기에, 이것은 제4차 결집에 의해 필사된 경전이 아마 인도 본토에도 전해졌다고 봅니다.
또한 그 무렵부터 전통적으로 불교에서 계승되어져 온 사자 상속의 암기·합송에 의한 경전의 전승법을 유지하면서도, 교설의 수지·독송(vācana)을 강조하고, 필사(lekha)의 공덕을 말하며, 서적(potthaka)의 공양을 최상으로 하는 생각이 나타납니다.
대승 불교의 기원은 이런 필사에 의해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현존하고 있는 초기 대승경전의 주된 것은 필사본으로 필사의 공덕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빨리 경전은 구전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억을 위한 목록, 전형화한 문구, 동어 반복, 운문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 계승해온 사자상속의 암기·합송에 의한 경전의 전승에 대한 곤란을 타개하기 위해서 제4차 결집에서 경전을 필사한 것이므로, 결집의 본래 의미인 기억하고 있는 교법을 함께 합송하는 전통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 본래의 의미에 비추어 보면 제4차 결집은 다만 암기 하고 있던 내용을 문자화했을 뿐이지만, 문자화 된 것에 의해 경전은 보급되어지고, 재가 신자도 부처님의 가르침 전체를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합송에 의한 집단적, 조직적 신앙 형태로부터 경전을 필사·독송하는 개인적 신앙의 실천이 가능하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합송의 방식이 없어지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전통적인 합송의 방식을 상가에서는 따르고 있습니다.
스리랑카의 역사를 보면 헌신적인 승려나 재가 불자들이 부처님의 순수한 가르침에 신흥 종교나 다른 교의가 섞이지 않게 얼마나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원래의 상태를 보존 유지하기 위해서 애를 썼으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분투하며 용감하게 맞섰는지 알게 됩니다. 때로는 스스로의 생명을 희생한 사람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스리랑카에 존재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장 신빙성이 있는 원형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적어도 불교의 어떤 종류의 어느 종파보다도,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에 제일 가깝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역사를 봐도 입증할 수가 있습니다.
서구의 작가로 「오늘날의 불교(Buddhism for Today)」의 저자 모리스·오코넬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불교를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은 빨리 경전에 기록되고 있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빨리 경전은 근거 있는 확실한 것이며, 적어도 정자각자가 말한 진정한 가르침을 이해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빨리 경전을 실천하는 것, 이것이 어떤 불교냐고 이름을 붙인다면 「테라와다 불교」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빨리어로 정확하게 기록한 나라는 스리랑카였습니다. 이것은 기원전 84년에 시작하여 7년간 결집을 통해 진행한 일입니다. 또 빨리 삼장을 버마, 태국, 그리고 부처님의 탄생지인 인도에까지 전했습니다.
부처님이 입멸하시고 453년이 지난 후에 스리랑카에서 4번째의 경전 편찬회의(제4차 결집)가 개최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 제4차 결집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완전하게 숙지하고 있던 5백 명의 빅쿠들이 「빨리 경전의 내용이 원래의 가르침으로부터 변함없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관 유지하기 위해서 필사하여 남기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가한 빅쿠들은 일반적인 승려가 아니라, 전부 아라한(성자)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라한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성자이기에 보편적인 진리인 부처님의 가르침에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생각, 해석을 덧붙이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빨리 경전의 불교는 스리랑카 문화가 섞인 「스리랑카식 불교」가 아니라, 마힌다 장로가 인도에서 가져온 「순수한 부처님의 가르침」즉 「순수한 불교」인 것입니다.
제4차 결집은 담마가 오래도록 이 세상에 머물게 하기 위하여 빨리 삼장을 필사해 부처님의 순수한 가르침을 다른 것과 서로 섞이지 않게 노력한 결과물인 패엽경이라는 형태로 보존하기위한 경전 편찬회의였습니다.
11. 테라와다 불교의 빨리어와 주석서 문헌의 중요성
12. 동남아시아의 불교 전파
13. 중앙아시아의 불교 전파
14. 제 5차 결집 · 제6차 결집
15. 각국의 불교 개론
(시간적인 제약으로 11~15장은 추후에 교단 홈페이지에 올리겠습니다.)
작성일 : 13-12-09 05:34
이상과 같은 원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외부의 타 종교인으로부터의 침략.
② 바라문 띳사의 반란과 12년간의 기근.
③ 무책임하고 무신앙적인 출가자의 증대.
④ 상가의 분열.
⑤ 송경자들의 감소로 합송의 어려움.
⑥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경전을 전승하려는 의지.
이 중에서 상가의 분열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말해집니다. 또한 무외산사파의 자유로운 경전 해석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염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기에, 왕이 무외산사파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는 수도 아누라다뿌라로부터 멀리 떨어진 알로까위하라 사원에서 경전을 문자화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자유로운 사고로 순수성을 잃어버린 부파의 발생과 그들과의 오랜 갈등은 테라와다를 더욱 단결시키는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또한 그런 상황 속에서 테라와다는 인도로부터 전래된 테라와다의 정법이 왜곡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암송에만 의존하던 불법의 전승을 문자로 남기겠다는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대립의 역사는 불교 최초의 경전 ‘패엽경’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낳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구전의 합송으로만 전승되어 오던 삼장을 비로소 문자로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현존하는 빨리 문헌의 원형 그대로입니다. 기록된 패엽경이 있을 때든 없을 때든 테라와다 스님들은 2600년간 변함없이 스승이 전해주는 가르침을 그대로 암송하여 전승했습니다. 경전 암송은 출가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수행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리랑카는 인도 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어, 자연, 풍토, 인종, 언어가 인도대륙 본토와 비슷하기에 다방면에서 대륙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한 스리랑카의 빅쿠들은 이 섬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불적을 순례하거나 인도로의 불교 전파에도 종사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비문을 통해 추정할 수 있고, 후대에 인도출신인 붓다고사, 붓다닷따, 아난다, 담마빨라 스님 등 기라성 같은 대가들이 스리랑카로 들어와서 정통 테라와다불교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런 사실만 봐도 인도 내의 테라와다와 스리랑카의 테라와다는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인도 테라와다에서도 스리랑카의 테라와다를 그 정통으로 인정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도에 불교가 미약해지면서 스리랑카는 테라와다 불교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인도의 부처님 성도지인 붓다가야에서 출토된 명문 중에 B.C 250년경 인도 숭가 왕조때 비문에는 ‘따하빠나(땀바빠나인 스리랑카를 지칭)의 주민 보디라키따가 보시함’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예부터 스리랑카 사람들이 인도의 불적을 순례하거나 왕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외의 명문들에 의해서도 스리랑카 테라와다의 빅쿠들이 남 인도를 비롯한 북 인도에까지도 교화 활동을 넓히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 알려져 있기에, 이것은 제4차 결집에 의해 필사된 경전이 아마 인도 본토에도 전해졌다고 봅니다.
또한 그 무렵부터 전통적으로 불교에서 계승되어져 온 사자 상속의 암기·합송에 의한 경전의 전승법을 유지하면서도, 교설의 수지·독송(vācana)을 강조하고, 필사(lekha)의 공덕을 말하며, 서적(potthaka)의 공양을 최상으로 하는 생각이 나타납니다.
대승 불교의 기원은 이런 필사에 의해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현존하고 있는 초기 대승경전의 주된 것은 필사본으로 필사의 공덕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빨리 경전은 구전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억을 위한 목록, 전형화한 문구, 동어 반복, 운문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 계승해온 사자상속의 암기·합송에 의한 경전의 전승에 대한 곤란을 타개하기 위해서 제4차 결집에서 경전을 필사한 것이므로, 결집의 본래 의미인 기억하고 있는 교법을 함께 합송하는 전통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 본래의 의미에 비추어 보면 제4차 결집은 다만 암기 하고 있던 내용을 문자화했을 뿐이지만, 문자화 된 것에 의해 경전은 보급되어지고, 재가 신자도 부처님의 가르침 전체를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합송에 의한 집단적, 조직적 신앙 형태로부터 경전을 필사·독송하는 개인적 신앙의 실천이 가능하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합송의 방식이 없어지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전통적인 합송의 방식을 상가에서는 따르고 있습니다.
스리랑카의 역사를 보면 헌신적인 승려나 재가 불자들이 부처님의 순수한 가르침에 신흥 종교나 다른 교의가 섞이지 않게 얼마나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원래의 상태를 보존 유지하기 위해서 애를 썼으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분투하며 용감하게 맞섰는지 알게 됩니다. 때로는 스스로의 생명을 희생한 사람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스리랑카에 존재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장 신빙성이 있는 원형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적어도 불교의 어떤 종류의 어느 종파보다도,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에 제일 가깝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역사를 봐도 입증할 수가 있습니다.
서구의 작가로 「오늘날의 불교(Buddhism for Today)」의 저자 모리스·오코넬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불교를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은 빨리 경전에 기록되고 있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빨리 경전은 근거 있는 확실한 것이며, 적어도 정자각자가 말한 진정한 가르침을 이해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빨리 경전을 실천하는 것, 이것이 어떤 불교냐고 이름을 붙인다면 「테라와다 불교」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빨리어로 정확하게 기록한 나라는 스리랑카였습니다. 이것은 기원전 84년에 시작하여 7년간 결집을 통해 진행한 일입니다. 또 빨리 삼장을 버마, 태국, 그리고 부처님의 탄생지인 인도에까지 전했습니다.
부처님이 입멸하시고 453년이 지난 후에 스리랑카에서 4번째의 경전 편찬회의(제4차 결집)가 개최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 제4차 결집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완전하게 숙지하고 있던 5백 명의 빅쿠들이 「빨리 경전의 내용이 원래의 가르침으로부터 변함없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관 유지하기 위해서 필사하여 남기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가한 빅쿠들은 일반적인 승려가 아니라, 전부 아라한(성자)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라한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성자이기에 보편적인 진리인 부처님의 가르침에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생각, 해석을 덧붙이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빨리 경전의 불교는 스리랑카 문화가 섞인 「스리랑카식 불교」가 아니라, 마힌다 장로가 인도에서 가져온 「순수한 부처님의 가르침」즉 「순수한 불교」인 것입니다.
제4차 결집은 담마가 오래도록 이 세상에 머물게 하기 위하여 빨리 삼장을 필사해 부처님의 순수한 가르침을 다른 것과 서로 섞이지 않게 노력한 결과물인 패엽경이라는 형태로 보존하기위한 경전 편찬회의였습니다.
11. 테라와다 불교의 빨리어와 주석서 문헌의 중요성
12. 동남아시아의 불교 전파
13. 중앙아시아의 불교 전파
14. 제 5차 결집 · 제6차 결집
15. 각국의 불교 개론
(시간적인 제약으로 11~15장은 추후에 교단 홈페이지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