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


테라와다불교사(33)/이사장 빤냐와로스님

관리자
2021-04-21
조회수 849

작성일 : 13-12-03 07:42 


테라와다라는 말은 제3차 결집 후에 대중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렇다고 제3차 결집 이후를 테라와다의 시작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테라와다 사람들은 그들의 기원은 적어도 제2차 결집을 주도했던 Sthaviravāda(장로의 견해)까지 거슬러 올라가므로 부처님 시대까지 이른다고 말합니다.


한편 대승불교는 우리가 이용 가능한 어떤 역사적 자료에 의하든, 지금까지 대승(Mahayana)의 존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북전의 자료에서 설일체유부는 3차 불교 결집 이후 인도의 북쪽 지방을 행동의 중심지로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결국에는 대승(Mahayana)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설일체유부는 불교 사상을 확장하고, 마지막으로 대승이 일어난 곳으로 확장하는데 기여했습니다.  


불교역사는 이때부터 테라와다의 중심지가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테라와다 불교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인도에서 고사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인도에 남아 있었습니다.  

인도의 테라와다 사람들의 활동에 대한 증거들은 약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 입멸 후 인도에서 쓴 유명한 3권의 책이 기원전 3세기에 스리랑카에 소개되었습니다. 그 책들의 이름은 (1)Nettipakarāṇa(수행 안내서, 指導論) (2)Peṭakopadesa(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입문서, 藏釋論) (3)Milindapañhā(밀린다왕문경)입니다. 이 경전들은 현재 빨리어 문헌에 포함되어 있으며 ‘후 빨리어경전’ 텍스트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처음 두 책은 기원전 1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밀린다왕문경(1~88 pp. PTS본)의 처음 부분 역시 기원전 1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 그 책의 두 번째 부분(90~420 pp.)은 아마도 기원후 1세기에 테라와다 사람들에 의해 덧붙여졌을 것입니다. 밀린다왕문경의 앞부분은 중국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아소까 왕의 공헌은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에 의해 시작된 포교활동을 후원한 것입니다. 포교단들은 스리랑카, 캄보디아, 버마를 포함하여 9개국에 보내졌습니다. 그 중 가장 성공적인 경우는 스리랑카였습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마하왕사와 붓다왕사 같은 스리랑카 역사의 기술가들은 불교가 스리랑카에서 꽃피우도록 운명 지어진 이유를 입증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마하왕사에 의하면 부처님은 스리랑카를 몸소 3번 방문하셨으며, 제석천(Sakka deva)에게 스리랑카의 Vijayā(승리, 영광)를 지키도록 요청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예지력은 스리랑카라는 땅이 불교의 땅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하왕사에 따르면 부처님 살아계실 때 보리수나무 가지가 스리랑카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연대기의 기술가들이 얼마나 불교와 스리랑카의 연결고리를 확립하려고 했나를 보여줍니다.  


테라와다는 제3차 결집 후에 아소까왕의 추천에 따라 왕의 친족인 마힌다 장로를 필두로 불교를 스리랑카에 전하여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제3 결집 뒤에 마힌다 장로를 시작으로 테라와다가 스리랑카에서 포교를 시작한 경위는 「디빠왕사(도사)」 「마하왕사(대사)」 등 스리랑카의 사서에 상세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테라와다는 스리랑카에 건너가서는 다른 부파와 거의 관련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부파가 인도에서 소멸되었어도 테라와다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스스로의 경위를 세세하게 적고 있기 때문에 스리랑카 테라와다의 역사나 사적은 현대의 학계에서도 의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중에 빨리 성전에 관해서는 스리랑카에 건너가고 나서 현재까지 어떤 변경도 없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학계에서도 거의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의문시되고 있는 것은 「스리랑카에 건너가고 나서나 혹은 남서 인도에 있었을 무렵에 이미 테라와다의 성전이 부처님 당시의 마가다어로부터 현존하는 빨리어로 번역된 것은 아닌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서 등에 전혀 기록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의문이 일어나는 「근거」로 2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인도에 남은 제 부파의 경이나 율이 현지의 방언으로 번역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본은 이미 없어졌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역된 문헌의 원어가 마가다어 혹은 「빨리어」가 아니라, 예를 들면 북서 인도의 간다라어 등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부터 학계에서는 「역시 제 부파는 성전을 현지의 언어로 번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빨리어도 그럴 것이다.」라고 추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아무 증거도 없는데 다른 부파의 것이 그렇다고, 어째서 테라와다의 빨리 성전도 그럴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현재의 빨리 성전 언어가 부처님 당시의 마가다국에서 사용되고 있었을 「반마가다어」라는 것입니다.  

「반마가다어」는 부처님과 동시대에 마가다국 등에서 활동하고 있던 자이나교의 조사나 제자들에 의한 문언에 남은 것입니다. 마가다어도 빨리어도 지금은 사어(死語)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자이나교의 문헌은 부처님 당시 마가다어의 흔적을 더듬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러나 「반마가다어」는 「반」이 붙듯이 완전한 마가다어라고 할 수 없는 방언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과 빨리 성전의 언어가 일부 다르다고 해도 빨리어가 완전한 마가다어일 가능성은 당연히 남습니다.  

불멸 2백여년 후 아소까 왕에 의한 법칙비문으로부터 빨리 성전의 언어 문제가 추정되고 있습니다. 아소까 왕은 인도 각처에 그 지방의 언어로 비문을 세웠고 테라와다가 활동하고 있던 남서 인도의 피샤체어와 마가다 지방의 「마가다어」로도 법칙문을 새겼습니다.  


그렇지만 「빨리어」는 그 어느 쪽과도 조금씩 다릅니다. 「아소까 왕 비문의 「마가다어」와 빨리 성전의 언어가 조금 다르기 때문에 「성전은 마가다어로부터 빨리어로 번역되었을 것이다」라고 학계에서는 말하지만, 부처님의 시대로부터 2백년이나 후의 「마가다어」가 부처님 당시의 마가다어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한글과 현대의 한글을 비교해 보면 상상할 수 있겠지요.  

빨리 성전의 언어는 아소까 왕 당시의 남서 인도 피샤체어와도 조금 다르기 때문에 피샤체어이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양자 간에 닮은 점이 있다고 해도 빨리 성전이 남서 인도의 피샤체어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빨리 성전의 언어는 그것을 말하는 장로들과 함께 2백년간이나 그곳 사람들의 종교 생활의 지침이 되고 있었으니까요.  


이와 같이 「성전어가 마가다어로부터 빨리어로 번역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로부터 살펴봐도, 사서 등의 문헌 자료로부터 살펴봐도, 그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다른 부파의 성전은 번역되었을지 모르지만, 빨리 성전만은 어떤 다른 언어로부터 「빨리어」로 번역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빨리 성전은 처음부터 그 언어로 말해졌고 그것이 그대로 어떤 변형도 받지 않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원래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의 성전을 전혀 바꾸지 않고 계속 보관 유지해 온 테라와다가 설혹 어떤 이유가 있어도, 언어가 비슷해도, 그 금언을 다른 현지의 언어로 번역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번역 자체가 성전을 변경하는 큰 문제이기 때문에 변경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테라와다는 스리랑카에서 글로 남길 때에도 빨리 성전을 스리랑카의 싱하라어로 번역하여 적지 않고 빨리어 그대로의 발음을 적었습니다. 빨리 성전은 빨리어인 채입니다.  

아소까 왕의 시대에 테라와다는 스리랑카에 전해졌지만, 인도에서는 테라와다가 일정기간 유지되다가 서서히 사라진 것 같습니다. 아니면 마힌다 장로의 포교단이 정착한 이후에 서서히 스리랑카로 이동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도에 남은 다른 대중부의 부파도 똑같이 사라져 버립니다. 계율까지 바꾸어 버린 대중부 여러 부파는 아소까 왕에 의해 배척되고 나서 2~3백년 내에 그 성전과 함께 역사의 저 멀리로 사라졌습니다.  

그 중 설일체유부는 부파 중에서 끝까지 남아 인도 북서부의 바라문교와 대항하면서 기원 전∙후부터의 산스크리트(Sanskrit)어 붐을 타고 자파의 논문(대승의 「논장(아비다르마)」이라고 하는 「불교에 관한 개인의 논문」)을 산스크리트어로 써서 대승불교와 같이 중국이나 티벳으로 이동합니다.  

그 후 기원후 3~4 세기에는 설일체유부의 아비다르마와 대승의 「중관파」가 합쳐져서 「유식파」도 나타나면서 그것과 대항하다가 유부 자신도 기원후 7세기 무렵에는 결국 멸망해 버립니다.  

이와 같이 원어를 버려 버리고 번역한 것을 포함하여 부처님의 성전을 조금이라도 바꾼 부파는 모두 멸망해 버렸습니다. 제1차 결집으로 확정한 성전을 전혀 바꾸지 않고 그 후에도 계속 보관 유지해온 테라와다만이 스리랑카나 동남아시아를 거쳐 온 세상에 지금도 맥을 같이하며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테라와다의 빨리 성전을 최초 결집부터 말도 내용도 변함없이 이어서 전승하여 온 부처님의 말씀(Buddhavacana) 그 자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현존 빨리 성전이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인가를 확실하게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란 빨리 성전을 스스로 읽고 말해진 내용을 스스로 실천하여 이해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가르침의 내용에 직접적으로 접하다 보면 그것이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라는 것을 스스로 분명히 압니다.  

스스로 깨달아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것이 부처님이 말한 가르침인가 하는 것은 거기에 깨달음의 길이 나타나고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확인하면 압니다.  


누구에게나 분명하게 나타내 보인 불변의 가르침은 요구하기만 하면 금방 손에 넣을 수가 있습니다. 성전은 지금도 여기에 그대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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