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2-03 07:39
7. 제 3차 불교 결집
모처럼 빈틈없이 확정한 성전도 바꾸려고 하고 자신들의 주장대로 펼쳐 나가려고 하면서 제2차 결집으로부터 아소까왕이 나올 때까지의 근 백년간 부파의 분열은 원래대로 돌아가기는커녕 더욱 더 분열해 버렸습니다. 대중부는 한층 더 몇 개의 부파로 분열되고, 북서 인도에서는 설일체유부가 생겨나 남서 인도의 원 줄기인 테라와다로부터 분리되어 헤어져 버렸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원래의 테라와다란 한 줄기로부터 17개의 부파로 분리된 것입니다. 디빠왕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테라와다는 거대한 니그로다 나무와 같이 가장 뛰어나다.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은 최고의 승리자의 가르침이다. 마치 나무에 있는 가시와 같이 나머지 17개 부파들이 생겨난 것일 뿐이다.”
중요한 부파의 이름이 몇 개 있습니다. Sarvāstivāda(설일체유부), Sautrāntika(경량부), Śalia(산주부), Prajñāptivāda(설가부), Vetulya(Vedula, Vedala, 방광부)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 만의 경전을 갖고 있는 부파들입니다. 테라와다는 유일하게 암송에 의해 전승돼 온 빨리어 경전 삼장 전체를 갖고 있습니다. 다른 부파들은 산스크리트어로 경전을 보존하고 다른 언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빨리어, 산스크리트어, 티벳어, 중국어 같은 5, 6개의 다른 언어로 된 율장과 경들이 현재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입멸 218년 후에 즉위한 아소까 왕은 갠지스와 인더스의 양대 강을 포함한 인도 북부를 정복하고 마우리야 왕조의 제3대 왕이 되어 데칸 산맥의 인도 남부까지 정복하여 인도 전 국토를 지배했습니다. 아소까 왕의 시대는 정치,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 비교적 안정되었던 시기여서, 이것이 종교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상가의 구성원들은 함께 지켜야 할 오직 하나의 율장이 존재하는데, 출가자는 이 공통의 율을 지키는 것으로 같은 소속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역적인 확장에 의한 지방적 특성이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일어난 현실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각각의 지역에서 각각의 율장을 가지게 되면서, 각기 다른 부파로서의 자각을 갖게 되고, 다른 집단으로서 독립된 행위를 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즉,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끼리 각 지역을 중심으로 상가를 구성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분열하지 않은 하나의 테라와다와 제각기 분열한 17개의 분파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아소까왕은 스스로 깊이 불교에 귀의하였지만 교단이 점점 부파로 분열하고, 많은 부파에서 경이나 율이 자의적으로 편찬되어, 불교가 서서히 쇠퇴해 가는 상태를 걱정하여 마우리야 왕조의 수도 빠딸리뿟따에서 부처님의 바른 말씀을 따르는 종파를 찾아내기 위하여 BC 3세기에 제3차 결집을 소집할 것을 상가에 권유하였습니다.
제3차 결집은 불교교단 내부의 교리적 분쟁을 원인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불교교단 내부에 들어온 외도들에 의해 생겨난 혼란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즉 아소까 왕의 불교귀의 이후 왕가의 후원이 불교에 집중되자 많은 외도들이 왕가의 후원을 얻기 위해 불교에 귀의하게 되면서 교단에 내부적으로 교리적 계율적 혼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빅쿠들은 승려인 척 행동하는 외도들과 함께 포살하는 것을 거부하게 되어 7년 동안 아소까라마(Asokārāma) 사원 등에서는 포살이 중단되었습니다.
이에 장로들은 아소까왕의 이 권유가 시기에 맞고 이치에 맞아, 적어도 남서 인도의 테라와다는 제3차 결집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의 사서에 이 제3차 결집의 기사가 자세히 기록됩니다.
대조적으로 대중부를 비롯한 부파 계통의 사서에는 제2차 결집의 기사는 실려 있지만, 이 제3차 결집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율을 바꾸고 불교의 정신과 빅쿠의 출가 생활을 어지럽혀 아소까왕의 권유와 후원에 의해 실시된 제3차 결집에서 배척되어 버렸기에 나쁜 것을 기록하고 싶지 않았던지, 대중부계를 비롯한 각각의 부파가 이 후에 급속히 쇠약해져서 기록하는 여력조차 없어졌든지 이 3차 결집이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소까왕 시대에 남서 인도의 테라와다에서 분열했던 북서 인도의 설일체유부도 자파의 사서에 아소까왕의 사적을 많이 싣고 있지 않습니다. 그 뿐 아니라 앞의 제2차 결집과 아소까왕의 제3차 결집을 함께 적어 「불멸 백년 후 아소까왕의 시대에 제2차 결집을 실시하여 테라와다와 대중부의 2개파로 분열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설일체유부도 아소까왕과 견해가 맞지 않았던 것인지 기록의 실수인지 설일체유부가 없어진 지금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붓다왕사(Buddhavaṁsa, 불종성경)와 마하왕사(Mahāvaṁsa, 대사, 대왕통사)에 의하면, 아소까 왕은 당대의 가장 탁월한 빅쿠 스님인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는 왕에게 상가의 이상적인 형태로서 위밧자와다(Vibhajjavāda)라는 분별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기준점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은 각 부파의 대표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부처님은 어떻게 담마를 설하였는가를 물어, 부처님은 담마를 분별하여 가르친 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 질문을 했습니다. 예라고 답한 사람들만 교단에 머물게 하고, 그렇지 못하고 단멸론이나 상주설 등 삿된 견해를 지니고 이설을 주장하는 자에게는 빅쿠가 아니라고 선언한 후 흰옷을 입혀 환속시켰습니다. 그 수가 무려 6만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단은 다시금 통합되고 교설은 청정해지게 되었기에 상가는 모여서 포살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는 이렇게 승인된 수많은 빅쿠 중에서 오랜 경험으로 확신에 차있고, 여섯 종류의 신통력을 갖추었으며, 삼장에 능통하고, 무애해도를 갖추고, 삼명을 구족한 천명의 빅쿠들을 선발하여 법과 율을 다시 확인하고, 모든 이설을 까타왓투(Kathāvatthu)라는 논서를 설하여 논파하고 청정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천명의 빅쿠들에 의해 빠딸리뿟따의 아소까라마에서 불멸 후 236년 음력 9월 보름 안거해제일인 자자(Pavāraṇā)날까지 9개월에 걸쳐 법의 결집을 행하였습니다. 이 결집을 제3차 결집이라고 합니다.
한편 설일체유부의 승려들은 이 결정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은 과거 현재 미래(sabbaṁ asti; atthi)에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테라와다는 현재의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을 유일하게 입증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후에 대승불교에서 나가르주나(Nagarjuna, 용수)는 설일체유부의 그릇된 관점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연기법에 뿌리를 둔 공(sunyatā) 사상에서 나가르주나는 아무것도 스스로에 의존해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견해의 사람들을 소승(Hinayana)이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소승(Hinayana)이라는 말은 설일체유부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존재를 주장한 유일한 부파였기 때문입니다.
테라와다의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를 의장으로 한 이 제3차 결집의 특징은 경장과 율장의 재확인뿐만 아니라, 이 때 처음으로 논장 아비담마의 편찬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빨리 아비담마 7론의 마지막 「논사」이므로 이때까지 논장도 거의 정리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빨리 성전의 논장인 아비담마는 경전의 엣센스를 분류하여 집성한 것으로 경전의 가르침을 한 발자국도 바꾸는 것이 아니지만, 주로 제자들의 손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경장이나 율장과 달리 부처님의 직설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면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 제3차 결집까지는 어느 논장도 이름마저 기록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논사」성립의 사정이 특수하기 때문인지 여기에 이름이 나왔습니다. 이 논장은 부처님 이래의 성전으로부터 빗나간 여러 가지 이견·사악한 견해를 한 개씩 비판하며 논파한 논문입니다. 그 견해의 수가 216가지에 이릅니다. 이것은 불멸이후로부터 2백여년이란 기간 동안 그만큼 많은 이설이 배출되고 성전이 삐뚤어져 제자들이 여러 가지 부파로 분열해 버렸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제2차, 제3차 결집까지 부파가 계속 분열했고, 많은 부파에서 성전도 자의적으로 개편되고 있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빨리 성전도 시대와 함께 상당한 변천을 거쳐 왔을 것이다」라고 학계에서는 잘못되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서 기록을 읽어 보면 대부분의 부파가 성전을 개편하는 중에도, 단 1줄도 경장과 율장을 바꾸는 일 없이 완고하게 지켜온 파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파는 남서 인도의 테라와다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빨리 성전을 계속 보관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떠한 개편을 받은 흔적도 없으니 당연히 제3차 결집 때에도 전혀 개편된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빨리 성전도 개편되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어떤 증거에 근거하는 올바른 추측이 아니라 단순한 억측이라는 것이 됩니다.
제3차 결집에서 아소까 왕은 담마를 전 세계에 전파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아소까 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는 앞으로 또 다시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혼란이 없기를 바라며 포교승을 파견할 9개국을 선택하였습니다.
서쪽으로는 요나까(Yonaka, 지금의 그리스 지방) 사람인 담마락키따(Dhammarakkhita) 장로를 아빠란따까(Aparantaka, 인도 서해안) 지역에, 더 아래 서쪽으로는 마하담마락키따(Mahādhammarakkhita) 장로를 마하랏타(Mahāraṭṭha, 데칸산맥 서북부) 지역에, 더 나아간 서쪽으로는 마하락키따(Mahārakkhita) 장로를 요나까 지방(Yonakaloka, 서북쪽 인도 국경지역)에 보내었고,
북쪽으로는 맛지마(Majjhima) 장로를 히마완따(Himavanta, 히말라야 지방인 지금의 네팔) 지역에 보내었고, 동쪽으로는 소나까(Sonaka) 장로와 웃따라(Uttara) 장로를 수완나부미(Suvaṇṇabhūmi, 지금의 캄보디아, 태국, 인도네시아, 버마 남부)에 파견하였습니다.
남쪽으로는 마하데와(Mahādeva) 장로를 마히사까만달라(Mahisakamaṇḍala, 데칸산맥 동남부) 지역에, 더 아래 남쪽으로는 자신의 동주(Saddhivihārika)제자인 마힌다(Mahinda) 장로와 잇디야(Iddhiya) 장로와 웃띠야(Uttiya) 장로와 삼발라(Sambala) 장로와 밧다살라(Bhaddasāla) 장로를 땀바빤니(Tambapaṇṇi, 스리랑카)에 보내었고, 서남쪽으로는 락키따(Rakkhita) 장로를 와나와시(Vanavāsi, 데칸산맥 서남부)지역에, 서북쪽으로는 맛잔띠까(Majjhantika) 장로를 까슈미라 간다라(Kasmīragandhāra, 지금의 페샤와르와 라왈삔디 지역)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립하여 전파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의 제안으로 상가에서 결정하여 각 지역에 파견된 장로들은 각각 다른 4명의 동료들과 함께 그곳에 도착하여 중생들의 깨달음을 위하여, 그리고 각 지역에 부처님 가르침의 확립을 위해 힘썼습니다.
그러므로 제 3차 결집의 중요성은 분열된 상가의 단일 교단으로의 정화와 불교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의 영역을 넘어 포교단을 파견한 일입니다. 이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작성일 : 13-12-03 07:39
7. 제 3차 불교 결집
모처럼 빈틈없이 확정한 성전도 바꾸려고 하고 자신들의 주장대로 펼쳐 나가려고 하면서 제2차 결집으로부터 아소까왕이 나올 때까지의 근 백년간 부파의 분열은 원래대로 돌아가기는커녕 더욱 더 분열해 버렸습니다. 대중부는 한층 더 몇 개의 부파로 분열되고, 북서 인도에서는 설일체유부가 생겨나 남서 인도의 원 줄기인 테라와다로부터 분리되어 헤어져 버렸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원래의 테라와다란 한 줄기로부터 17개의 부파로 분리된 것입니다. 디빠왕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테라와다는 거대한 니그로다 나무와 같이 가장 뛰어나다.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은 최고의 승리자의 가르침이다. 마치 나무에 있는 가시와 같이 나머지 17개 부파들이 생겨난 것일 뿐이다.”
중요한 부파의 이름이 몇 개 있습니다. Sarvāstivāda(설일체유부), Sautrāntika(경량부), Śalia(산주부), Prajñāptivāda(설가부), Vetulya(Vedula, Vedala, 방광부)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 만의 경전을 갖고 있는 부파들입니다. 테라와다는 유일하게 암송에 의해 전승돼 온 빨리어 경전 삼장 전체를 갖고 있습니다. 다른 부파들은 산스크리트어로 경전을 보존하고 다른 언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빨리어, 산스크리트어, 티벳어, 중국어 같은 5, 6개의 다른 언어로 된 율장과 경들이 현재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입멸 218년 후에 즉위한 아소까 왕은 갠지스와 인더스의 양대 강을 포함한 인도 북부를 정복하고 마우리야 왕조의 제3대 왕이 되어 데칸 산맥의 인도 남부까지 정복하여 인도 전 국토를 지배했습니다. 아소까 왕의 시대는 정치,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 비교적 안정되었던 시기여서, 이것이 종교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상가의 구성원들은 함께 지켜야 할 오직 하나의 율장이 존재하는데, 출가자는 이 공통의 율을 지키는 것으로 같은 소속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역적인 확장에 의한 지방적 특성이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일어난 현실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각각의 지역에서 각각의 율장을 가지게 되면서, 각기 다른 부파로서의 자각을 갖게 되고, 다른 집단으로서 독립된 행위를 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즉,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끼리 각 지역을 중심으로 상가를 구성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분열하지 않은 하나의 테라와다와 제각기 분열한 17개의 분파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아소까왕은 스스로 깊이 불교에 귀의하였지만 교단이 점점 부파로 분열하고, 많은 부파에서 경이나 율이 자의적으로 편찬되어, 불교가 서서히 쇠퇴해 가는 상태를 걱정하여 마우리야 왕조의 수도 빠딸리뿟따에서 부처님의 바른 말씀을 따르는 종파를 찾아내기 위하여 BC 3세기에 제3차 결집을 소집할 것을 상가에 권유하였습니다.
제3차 결집은 불교교단 내부의 교리적 분쟁을 원인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불교교단 내부에 들어온 외도들에 의해 생겨난 혼란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즉 아소까 왕의 불교귀의 이후 왕가의 후원이 불교에 집중되자 많은 외도들이 왕가의 후원을 얻기 위해 불교에 귀의하게 되면서 교단에 내부적으로 교리적 계율적 혼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빅쿠들은 승려인 척 행동하는 외도들과 함께 포살하는 것을 거부하게 되어 7년 동안 아소까라마(Asokārāma) 사원 등에서는 포살이 중단되었습니다.
이에 장로들은 아소까왕의 이 권유가 시기에 맞고 이치에 맞아, 적어도 남서 인도의 테라와다는 제3차 결집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의 사서에 이 제3차 결집의 기사가 자세히 기록됩니다.
대조적으로 대중부를 비롯한 부파 계통의 사서에는 제2차 결집의 기사는 실려 있지만, 이 제3차 결집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율을 바꾸고 불교의 정신과 빅쿠의 출가 생활을 어지럽혀 아소까왕의 권유와 후원에 의해 실시된 제3차 결집에서 배척되어 버렸기에 나쁜 것을 기록하고 싶지 않았던지, 대중부계를 비롯한 각각의 부파가 이 후에 급속히 쇠약해져서 기록하는 여력조차 없어졌든지 이 3차 결집이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소까왕 시대에 남서 인도의 테라와다에서 분열했던 북서 인도의 설일체유부도 자파의 사서에 아소까왕의 사적을 많이 싣고 있지 않습니다. 그 뿐 아니라 앞의 제2차 결집과 아소까왕의 제3차 결집을 함께 적어 「불멸 백년 후 아소까왕의 시대에 제2차 결집을 실시하여 테라와다와 대중부의 2개파로 분열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설일체유부도 아소까왕과 견해가 맞지 않았던 것인지 기록의 실수인지 설일체유부가 없어진 지금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붓다왕사(Buddhavaṁsa, 불종성경)와 마하왕사(Mahāvaṁsa, 대사, 대왕통사)에 의하면, 아소까 왕은 당대의 가장 탁월한 빅쿠 스님인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는 왕에게 상가의 이상적인 형태로서 위밧자와다(Vibhajjavāda)라는 분별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기준점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은 각 부파의 대표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부처님은 어떻게 담마를 설하였는가를 물어, 부처님은 담마를 분별하여 가르친 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 질문을 했습니다. 예라고 답한 사람들만 교단에 머물게 하고, 그렇지 못하고 단멸론이나 상주설 등 삿된 견해를 지니고 이설을 주장하는 자에게는 빅쿠가 아니라고 선언한 후 흰옷을 입혀 환속시켰습니다. 그 수가 무려 6만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단은 다시금 통합되고 교설은 청정해지게 되었기에 상가는 모여서 포살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는 이렇게 승인된 수많은 빅쿠 중에서 오랜 경험으로 확신에 차있고, 여섯 종류의 신통력을 갖추었으며, 삼장에 능통하고, 무애해도를 갖추고, 삼명을 구족한 천명의 빅쿠들을 선발하여 법과 율을 다시 확인하고, 모든 이설을 까타왓투(Kathāvatthu)라는 논서를 설하여 논파하고 청정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천명의 빅쿠들에 의해 빠딸리뿟따의 아소까라마에서 불멸 후 236년 음력 9월 보름 안거해제일인 자자(Pavāraṇā)날까지 9개월에 걸쳐 법의 결집을 행하였습니다. 이 결집을 제3차 결집이라고 합니다.
한편 설일체유부의 승려들은 이 결정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은 과거 현재 미래(sabbaṁ asti; atthi)에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테라와다는 현재의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을 유일하게 입증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후에 대승불교에서 나가르주나(Nagarjuna, 용수)는 설일체유부의 그릇된 관점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연기법에 뿌리를 둔 공(sunyatā) 사상에서 나가르주나는 아무것도 스스로에 의존해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견해의 사람들을 소승(Hinayana)이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소승(Hinayana)이라는 말은 설일체유부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존재를 주장한 유일한 부파였기 때문입니다.
테라와다의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를 의장으로 한 이 제3차 결집의 특징은 경장과 율장의 재확인뿐만 아니라, 이 때 처음으로 논장 아비담마의 편찬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빨리 아비담마 7론의 마지막 「논사」이므로 이때까지 논장도 거의 정리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빨리 성전의 논장인 아비담마는 경전의 엣센스를 분류하여 집성한 것으로 경전의 가르침을 한 발자국도 바꾸는 것이 아니지만, 주로 제자들의 손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경장이나 율장과 달리 부처님의 직설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면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 제3차 결집까지는 어느 논장도 이름마저 기록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논사」성립의 사정이 특수하기 때문인지 여기에 이름이 나왔습니다. 이 논장은 부처님 이래의 성전으로부터 빗나간 여러 가지 이견·사악한 견해를 한 개씩 비판하며 논파한 논문입니다. 그 견해의 수가 216가지에 이릅니다. 이것은 불멸이후로부터 2백여년이란 기간 동안 그만큼 많은 이설이 배출되고 성전이 삐뚤어져 제자들이 여러 가지 부파로 분열해 버렸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제2차, 제3차 결집까지 부파가 계속 분열했고, 많은 부파에서 성전도 자의적으로 개편되고 있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빨리 성전도 시대와 함께 상당한 변천을 거쳐 왔을 것이다」라고 학계에서는 잘못되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서 기록을 읽어 보면 대부분의 부파가 성전을 개편하는 중에도, 단 1줄도 경장과 율장을 바꾸는 일 없이 완고하게 지켜온 파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파는 남서 인도의 테라와다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빨리 성전을 계속 보관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떠한 개편을 받은 흔적도 없으니 당연히 제3차 결집 때에도 전혀 개편된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빨리 성전도 개편되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어떤 증거에 근거하는 올바른 추측이 아니라 단순한 억측이라는 것이 됩니다.
제3차 결집에서 아소까 왕은 담마를 전 세계에 전파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아소까 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는 앞으로 또 다시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혼란이 없기를 바라며 포교승을 파견할 9개국을 선택하였습니다.
서쪽으로는 요나까(Yonaka, 지금의 그리스 지방) 사람인 담마락키따(Dhammarakkhita) 장로를 아빠란따까(Aparantaka, 인도 서해안) 지역에, 더 아래 서쪽으로는 마하담마락키따(Mahādhammarakkhita) 장로를 마하랏타(Mahāraṭṭha, 데칸산맥 서북부) 지역에, 더 나아간 서쪽으로는 마하락키따(Mahārakkhita) 장로를 요나까 지방(Yonakaloka, 서북쪽 인도 국경지역)에 보내었고,
북쪽으로는 맛지마(Majjhima) 장로를 히마완따(Himavanta, 히말라야 지방인 지금의 네팔) 지역에 보내었고, 동쪽으로는 소나까(Sonaka) 장로와 웃따라(Uttara) 장로를 수완나부미(Suvaṇṇabhūmi, 지금의 캄보디아, 태국, 인도네시아, 버마 남부)에 파견하였습니다.
남쪽으로는 마하데와(Mahādeva) 장로를 마히사까만달라(Mahisakamaṇḍala, 데칸산맥 동남부) 지역에, 더 아래 남쪽으로는 자신의 동주(Saddhivihārika)제자인 마힌다(Mahinda) 장로와 잇디야(Iddhiya) 장로와 웃띠야(Uttiya) 장로와 삼발라(Sambala) 장로와 밧다살라(Bhaddasāla) 장로를 땀바빤니(Tambapaṇṇi, 스리랑카)에 보내었고, 서남쪽으로는 락키따(Rakkhita) 장로를 와나와시(Vanavāsi, 데칸산맥 서남부)지역에, 서북쪽으로는 맛잔띠까(Majjhantika) 장로를 까슈미라 간다라(Kasmīragandhāra, 지금의 페샤와르와 라왈삔디 지역)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립하여 전파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의 제안으로 상가에서 결정하여 각 지역에 파견된 장로들은 각각 다른 4명의 동료들과 함께 그곳에 도착하여 중생들의 깨달음을 위하여, 그리고 각 지역에 부처님 가르침의 확립을 위해 힘썼습니다.
그러므로 제 3차 결집의 중요성은 분열된 상가의 단일 교단으로의 정화와 불교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의 영역을 넘어 포교단을 파견한 일입니다. 이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