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


애착에 대하여 (5) / 빤냐완따 스님

관리자
2024-08-18
조회수 169


《 '애착'에 대하여 》5/5

              

                     [5]


         《 사례ㆍ3 》


이 승은 요즘 문서작업을 할 때 컴퓨터 자판 대신 폴더 스마트폰(2배화면) 노트기능을 이용하곤 합니다. 1달 전쯤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법문글 하나 만들기 위해 법문주제와 관련된 경ㆍ논서ㆍ인터넷자료 등을 구석구석 읽고 검색하고 숙고한 다음 타이핑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자료 검토까지 포함해 적어도 열흘동안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드디어 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원고가 90%쯤 마무리되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창밖은 어두워오는 춘삼월의 저녁 7시 무렵. 몸도 고단하지만 눈이 너무 침침하여 그날 작업은 그쯤에서 마무리짓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작업한 것을 다른 저장소에 옮겨놓기 위해 글 전체에 블럭을 설정했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블럭을 설정한 순간 공든탑이 무너졌습니다. 0.1초만에 공든탑이 사라졌습니다. 찰라지간이었습니다. 


글 전체에 블럭이 설정된 상태에서 새끼손가락 끝이 순간적으로 폴더폰 키보드의 자음 <ㄷ>을 스친 것입니다. 순식간에 글 전체가 날아갔습니다. 검지손가락이 화면 꼭데기에 있는 <복사>를 항해가던 중 함께 펼쳐져 있던 새끼손가락이 <ㄷ> 위를 떠서 <지나간 것>이 아니라 스치듯 <누르면서 지나간 것>입니다. 새끼손가락이 <ㄷ>을 스치자마자 블럭이 사라진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아~ 하고 탄식이 나왔었는데, <ㄷ>을 스치고 블럭이 사라지고  사고가 났음을 인식하는데 까지 걸린 시간은 약 1초. 


 1초동안 전개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마음을 다시한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키보드 하단위에 있던 검지손가락이 맨꼭데기에 있는 <복사>를 향해 올라가는 과정과 올라가다가 <ㄷ>을 스치는 과정, 그리고 블럭이 사라지는 장면까지는 시각인식과 함께 미약하게나마 자동적으로 알아차림이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알아차림이 명료하지 않았던 탓에 블럭이 사라지는 순간 그 미약한 알아차림마저도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곧바로 <사고라는 관념>에 휩싸이면서 상실감ㆍ당혹감이 아~ 하는 탄식과 함께 순간적으로 생겨났습니다. 


눈을 감았습니다. 약간 당혹해하는 모습, 약간 들뜬 호흡을 지켜보았습니다. 들뜸은 곧 가라앉았고, 당혹감은 이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 승의 글을 관리하고 있는 수행자께 전화해서 "내일중으로 밥값 좀 할려고 했는데 미안하게 됐습니다." 하고는 근황을 서로 묻고 마음관찰에 대한 얘기를 한 5분쯤 나눈 뒤 통화를 종료했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좌복위에 앉아 생각해 보았습니다. '죽고사는 일도 아닌데 없던 일로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못내 아쉬워하는 마음도 보였습니다. 


그 공든 탑이 지금 연재되고 있는 <'애착'에 대하여>입니다. 마음의 테입을 공든 탑이 무너지기 전으로 되돌려 보겠습니다. <갈애ㆍ집착>에 대한 글을 써내려가면서 문득문득 일어나는 글의 완성에 대한 욕구ㆍ집착, 그리고 접촉현상에 반응하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마음, 무상한 것인줄 알면서도 계속 달라붙으려는 마음, 계속  달라붙어 있는 마음, 가끔은 지겨워서 회피하려는 마음, 때로는 좋아서 즐기려는 마음, 붙잡은 채 놓지 않으려는 마음, 놓아버리려는 마음, 그런 마음을 관하는 마음, 관하는 마음이 함께할 때 드러나는 의식의 덧없는 흐름. 


블럭이 사라진 뒤의 순간적인 당혹, 그 당혹감 속에 달라붙어 있는 미세한 짜증, 부주의함에 대한 후회, 사라진 글에 대한 미련이라는 이름의 애착, 일어난 결과를 인과로 받아들임, 본래부터 없었던 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는 인식. 5분간의 전화통화. 통화 종료후의 숙고와 성찰, 그리고 마음관찰. 마침내 마음은 평온을 되찾았고, 사라진 글에 대한 애착을 내려놓는데 25분이 걸렸습니다.


매순간 분명한 앎과 함께 온전히 깨어있었다면 아마도 블럭이 사라지는 순간에 현상의 무상한 성품을 보면서 단지 <사라졌네> 하고 그 어떤 동요도 없이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글에 대한 강한 애착과 몰입 때문에 온전히 깨어있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당혹감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5분만에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평소의 무상에 대한 인식, 그리고 당혹감ㆍ후회ㆍ아쉬움이라는 이름으로 생겨난 심리현상에 대해 바르게 성찰하고 관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황은 이제 일단락되었지만 처음부터 글을 다시 쓰자니 기억도 잘 나지않고 그저 막막하기만 해서 <없었던 일로 하지 뭐>하고 포기할까 했습니다. 포기하려는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마음 속에는 꾸띠에 내려가 차나 마시며 푹 쉬거나 밖에 나가 산책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다시한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밑바닥에는 <게으름ㆍ나태함>라고 하는 불건전한 심리가 똬리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힘은 좀 들겠지만 무너진 탑 형체라도 복구해 놓으면 수행자들께 도움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니 쉬고 싶고 바람 쐬고 싶은 마음이 포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내려놓으니 <게으름ㆍ나태함>이라는 불건전한 심리가 흔적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사라진 그 자리에는 갈애가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밥값하려는 갈애, 탑을 복구하려는 갈애가 번갈아가며 끊임없이 달라붙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갈애는 바른사유와 성찰, 바른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에 의해 곧바로 제거되었습니다. 


잠시 꾸띠에 내려가 보이차 몇 잔 우려마신 뒤 다시 올라와 폴더폰을 펼쳤습니다.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화면을 터치하니 백색 화면 한복판에 조금전 공든탑을 무너뜨렸던 그 문제의 자음 <ㄷ>이 혼자 덩그러니 찍혀있었습니다. 지체없이 삭제한 다음 무너진 탑돌을 다시 주워 하나씩 하나씩 쌓아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사라진 문장들을 하나씩 하나씩 기억해냈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것들은 할수없이 새로운 글로 채워나갔습니다.


탑을 다시 쌓는 동안에도 문득문득 밖에 나가 밤바람이라도 쐬고 싶은 갈애가 일어났지만, 그 갈애는 분명한 알아차림에 의해 사라졌습니다. 탑은 한 층 두 층 재완성 되어갔고, 탑이 70%쯤 복구되었을 무렵 마침내 글쓰기 삼매에서 깨어났습니다. 창밖은 어느새 이튼날 아침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몸은 노곤하고 두 눈은 하염없이 침침했지만 마음만은 평온했습니다. 재완성 되어가는 석탑을 바라보니 흡족한 마음이 일어났고, 흡족한 마음을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여지없이 갈애가 끓고 있었습니다. 



          《 사례ㆍ4 》


이 승이 한때 조계종으로 출가하여 전남 장성 백양사의 서옹 큰스님 회상에서 공부한 적 있습니다 (백양사 시절 이후 남방으로 재출가하여 지금까지 줄곧 테라와다 비구로 살고 있습니다만). 그런 인연으로 2009년 5월 미얀마 불교대학교 난다말라 비왐사 총장스님을 모시고 여러 수행원들과 함께 1박2일 일정으로 백양사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합천 해인사 일정까지 포함하면 2박3일이 됩니다. 당시 총장스님을 수행하면서 겪었던 일화입니다. 


미얀마 큰스님께서 백양사 방문하신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여러 재가불자들이 곳곳에서 찾아와 큰스님께 공양을 올렸습니다. 불자들 중에는 거사님도 여럿 있었지만 주로 보살님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총장스님을 밀착수행하면서 안내를 맡았던 황거사라는 분이 있는데, 2박3일 일정을 모두 마친 뒤 총장스님을 공항까지 배웅해드리는 길에 황거사가 큰스님 뒤에서 이 승에게 한국말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제가 2박3일 동안 큰스님을 모시면서 느낀건데 큰스님께서는 백양사에서도 해인사에서도 보살님들과  두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대화하시는 것을 단 한번도 못 보았습니다. 큰스님께서 원래 수줍움이 많으셔서 그런걸까요?"


"아닙니다. 총장스님께서는 지계가 청정하신 분으로서 부처님의 계율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비구라면 누구라도 여성불자를 대할 때 삼가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가령 손끝 하나라도 신체의 일부가 상대방과 닿아서는 안되고, 방문이 닫힌 상태에서 여성과 마주보거나 대화를 나눠서도 안됩니다. 그것이 설령 어린아이거나 80살 넘은 노보살님일지라도. 사실 율장 그 어디에도 공개된 장소일 경우 여성불자를 똑바로 쳐다보지 말라는 조항은 없습니다. 그만큼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총장스님께서 여성불자와 눈을 안마주치는 것은 계율 때문만은 아닙니다. 수행자는 모름지기 6문을 잘 단속해야 합니다. 6문 가운데 특히 시각을 잘 단속해야 합니다. 시각은 6감각기관 가운데 가장 민감하고 강렬하게 접촉대상에 반응하는 감각기관입니다. 가장 민감하고 가장 강렬하다는 것은 시각접촉느낌에 대한 <갈애>가 그 어떤 감각접촉느낌에 대한 <갈애>보다 빠르게 달라붙고 강렬하게 들끓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좋은 시각대상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알아차림을 가지고 접촉한다면 집착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뛰어난 수행자라 할지라도 명료한 알아차림을 분명한 앎과 함께 매순간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접촉을 안하는 게 상책이고, 접촉해야 한다면 꼭 필요한 경우에만 접촉하는 것이 좋습니다. 접촉할 때는 반드시 알아차림을 가지고 접촉해야 합니다. 


시각접촉 가운데 실물을 대상으로 한 접촉도 있지만, 요즘같이 미디어 매체가 고도로 발달한 시대에는 영상이나 사진을 통한 시각접촉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특히 스마트폰에 탑재된 카메라기능으로 인해 누구라도 손쉽게 실물을 촬영하여 두고두고 볼 수 있고, 세상 어디라도 전송할 수 있습니다. 불자들 가운데는 꼭 필요한 사진을 작품성 있게 잘 찍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사진찍는 자체를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진을 찍어서 추억으로 남긴다든지 기록을 위해 사진을 찍는 행위 모두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의미있는 일입니다. 특히 법회나 행사 때 찍는 단체사진이나 행사장면은 기록이나 홍보를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간혹 비구스님의 모습을 비공식적으로 찍어가는 불자가 있습니다. 여성불자라면 비구스님의 독사진 혹은 두 비구사진은 개인적으로 찍어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꼭 필요한 용도로 써야 할 경우 스님께 분명하게 용도를 말씀드리고 승락을 받은 뒤 찍어야 합니다. 


왜일까요? 실물이 아닌 사진을 통한 시각접촉에 의해서도 <갈애> 와 <집착>이 달라붙기 때문입니다. 찍는 순간에도 <갈애> 와 <집착>이 생겨나고, 집으로 돌아가 찍은 사진을 확인할 때도 <갈애> 와 <집착>이 발생합니다. 시각접촉느낌에 대한 <갈애>는 그 어떤 접촉느낌보다도 뜨겁고 찰거머리 같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갈애>라 할지라도 그것은 필경 <취착>으로 이어지고, <존재>를 생겨나게 해서 아침내 그 존재는 한량없는 세월동안 생사윤회의 크나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


이제《 '애착'에 대하여 》를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마침은 단지 일단락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뿐, 이 승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애착>(갈애ㆍ집착)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수행대상이요, 법문주제가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단밴드와 연꽃필무렵 밴드에 게재된 대부분의 법문글은 바로 이 <애착>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성찰입니다. 가령 <무상관 수행법> <폭류를 건너는 법> <오온수행> <육처에 법이 있다> 등. 


이 중생계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번뇌의 먼지가 끊임없이 흩날리는 곳입니다. 그 번뇌의 먼지가 바로 <애착>입니다. <애착>으로 인해 태어남과 늙음과 병듬과 죽음을 겪게 됩니다. 나고 죽음을 되풀이하면서 슬퍼하고 탄식하고 번민하며 괴로워합니다. <애착>은 <오온ㆍ6처>에 대한 바른 관찰과 성찰을 통해서만 뿌리뽑을 수 있습니다. 분명한 앎에 의한 알아차림으로 오온의 참성품인 <무상ㆍ고ㆍ무아>를 통찰했을 때 비로소 고통의 근원인 <애착>의 연결고리가 끊어집니다. 


부디 이번생에 부처님의 가르침 <담마>(法) 따라서 <애착>의 사슬을 모두 끊고 둑카(苦)의 온전한 소멸, 궁극의 해탈ㆍ열반에 이르시길 바랍니다.


              ※ 


“ 생사(生死)의 고된 여행은 끝났다.

  슬픔과 오온의 현상으로부터 해탈하여

  모든 얽매임을 모두 파괴해버린 여래에게

  이제 더 이상의 괴로움은 없다.”


                             《Dhammapada》<법구경> 90번송


" Dukkhappattā ca niddukkhā

  Bhayappattā ca nibbhayā

  Sokappattā ca nissokā 

  Hontu sabbepi pāṇino."


 (둑캅빳따-  짜  닛둑카-

  바얍빳따-  짜  닙바야-

  소깝빳따-  짜  닛소-까-

  혼뚜  삽베-삐  빤-니노-)


"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

  위험에 처한 모든 중생들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

  근심걱정 있는 모든 중생들 모든 근심걱정에서 벗어나기를 ! "


               ※


    불멸 2568. 4.26

    천림산 기슭에서 

    메따와 함께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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