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와다불교 입문


'삼귀의'는 불교 신자의 출발점이자 귀결점 / 아짠 빤냐와로 마하테로

관리자
2025-02-02
조회수 48

삼귀의 삼창

 

부처님께서는 모든 생명에는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왜 괴로워하고 있는지를 발견하셨습니다. 그래서 없애는 방법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이제 해야 할 일을 전부 다 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이룹니다.


깨달음을 이루고 나니 기쁨이 솟아올라 아무것도 불만족함도 없고, 저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 관념도 없어서, 그대로 앉은 채로 일주일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또 일주일간은 보리수 옆에 서서 선 그대로 일주일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또 일주일간 선 장소와 앉아 있던 장소와의 사이를 경행하시며 보냈습니다.


4주째가 되자 보리수로부터 조금 떨어진 장소에 앉아 세상의 진리라는 것은 무엇인지 관찰했습니다. 부처님이 설법할 때의 그 거대한 철학이 언어가 된 것은 그 일주일간의 관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과 법칙, 인간의 마음 상태, 존재의 상태, 물질의 기능, 무엇으로 이런 기능이 일어나는지, 마음은 어떤 기능이 있는지, 몸은 또 어떤 기능이 있는지 그것을 전부 명확하게 관찰했습니다. 전통적으로 말하면 아비담마론을 그 때 처음으로 부처님이 생각해 냈습니다. 세상의 진리를 그 때 일단 정리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그처럼 7주간을 보내셨습니다. 7주간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49일간을 일부러 단식한 것이 아니라, 별로 그런 기분도 없었습니다. 채워져 있는 기분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힘든 단식을 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다고 야윈 것도 아니고, 아무 일도 없이, 아무튼 깨달음의 그 반응, 반동으로 7주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명상만 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발우를 하나 받았습니다. 출가자이기에 발우라고 해도 흙에서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발우를 받았으니, 그럼 이제 무얼 먹어도 괜찮다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 때 그 근처에 장사하러 가던 상인 두 사람이 부처님이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훌륭한 모습을 보고, 출가자에게 보시할 마음이 생겨 음식을 공양 올렸습니다. 음식이라고 해도 쌀을 볶은 팝콘같은 것에 벌꿀을 발라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붓다가 된 후에 최초로 받은 식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공양을 받은 보답으로 그 두 명에게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시 인도의 문화에서는 출가자에게 여러 가지 보시를 할 뿐이지, 그 보답으로 출가자로부터 가르침을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출가한 사람이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고, 아직 수행을 한참 할 때인지도 모르고, 때로는 수행을 통해 전혀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출가자는 여러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고, 여러 가지 종교가 있기에, 자신의 수행으로 인해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고 결정한 사람이면 이쪽이 여러 가지 보시를 했다고 해도, 식사를 하고 돌아갈 뿐이지 한 마디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실례입니다. 보시한 대가로 설법해 주기를, 축복해 주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 보시를 하고, 공양을 올립니다. 그 뿐입니다. 부처님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두 명은 굉장히 기뻐했습니다. 대단히 도움 되는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두 명은 이 진리를 납득하고, 그 자리에서 오늘부터 당신을 스승으로 하여 당신을 의지합니다. 오늘부터 당신의 가르침을 우리들의 삶의 방법으로 하여 우리들을 이끄는 법으로 삼아서 당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부처님을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이 가르침에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2행이 성립되었습니다.


그 두 명은 먼 곳에 있는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부처님을 매일같이 생각하고, 가르쳐 주신 고귀한 가르침을 실천하고 싶기에, 부처님을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달라고 했지만, 부처님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선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머리를 손대어 보니 이전에 굉장한 고행을 했기에 머리카락이 떨어졌습니다. 그 머리카락을 조금 취해서 이것이라도 가져가라고 머리카락을 살그머니 잡아 줬습니다. 그 두 명의 상인은 그 머리카락도 소중하게 보관하여 수완나부미라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수완나는 황금이라는 의미이고, 부미는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이 황금의 나라인 수완나부미가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버마인은 자신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태국인도 자신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도 자신들의 나라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빨리어 경전과 주석서에 불교가 전래된 장소 중에 수완나부미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어쨌든 기록이 사실이라면 수완나부미라는 나라가 있었고, 그곳에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안치하여 탑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각각의 지역에서는 수완나부미라고 주장할만한 탑과 유적지가 존재합니다.


어쨌든 전설적인 이야기같이 들리겠지만, 부처님이 두 명의 상인으로부터 공양을 받아 드시고 그 보답으로 머리카락을 주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들 나라에서는 그 이후로 부처님을 각별하게 친족같이 여기게 됩니다. 부처님께 처음으로 보시를 한 것은 자신들의 선조이기에 친근감을 가지고 불교를 몹시 소중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버마 사람들도, 태국 사람들도, 스리랑카 사람들도 불교라는 것을 소중하게 생명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스리랑카 사람들이 불교에 대해서 어째서 그렇게 지키려고 노력했는가하면,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제석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의 가르침이 번성하게 될 곳은 단바빤니라는 섬입니다. 그러기에 당신은 그 섬을 분명히 잘 지켜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리랑카 사람들은 부처님께서도 자신들에게 기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불교를 잘 지키려고 노력하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어느 나라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버마 사람들도, 태국 사람들도, 스리랑카 사람들도 자신들이 부처님과 제일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민족의 감정이기에 그대로 놓아두어야겠습니다.


다음으로 부처님께서 법을 설할 결심을 하시고, 바라나시로 가서 다섯 명의 수행자들에게 설법했습니다. 많은 날이 지나서 그 다섯 명도 깨달음을 이루었기에, 부처님도 즐거워졌습니다. 쭉 함께 지내온 이 다섯 명도 깨달았기에 밤에 잠을 자지 않고도 밖에서 이슬을 맞으며 앉아 수행하셨습니다. 그렇게 부처님은 당분간 편안한 삶의 방법을 하고 있었습니다. 잠을 자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도 없습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큰 일이다라든지, 그러한 소소한 스트레스도 압박감도 없습니다. 있으면 먹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루벨라라는 지방의 큰 부잣집 외아들이 가출을 해 버렸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구나! 이 형무소와 같은 삶의 방법으로는!」무서운 말입니다.


그에게는 굉장히 큰 집이 3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출가 전 부처님과 같이 계절에 맞추어 하나의 성에서 지내다가 계절이 바뀌면 그 계절에 맞는 다음의 성으로 가서 지내는 것인데, 여름용과 겨울용과 우기용으로 나누어 거기서 놀면서 생활합니다. 그런 생활에 이제는 완전히 질려 버린 것입니다. 물질은 불안정한 것이기에 아무리 사치를 부려도 질려 버립니다.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은 돈이 많아도, 영화를 누려도 행복하질 않습니다. 그 젊은이도 똑같이 질려 버렸습니다. 이런 삶의 방법은 아무 의미도 없어서 밤에 모두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살그머니 집을 나왔습니다.


한 밤중에 외아들이 없어진 사실에 큰 소란이 일어났고, 부친도 아들은 찾아다니다가 아들이 신던 짚신과 발자국을 발견합니다. 아침이 되면 볼 수 있겠거니 생각하고 부친은 그 발자국을 따라 나아갔습니다.


밤에 가출한 아들은 정처 없이 걸으며 「내가 살던 저 집이 불타고 있다. 나의 집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집이라고 하는 것, 가족이라고 하는 것이 산불과 같이 불타고 있는 곳에서 이제 도망칠 수밖에 없구나!」라고 읊조립니다. 그렇게 밤새 걸어 부처님이 계신 곳까지 갔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청년을 불렀습니다.「젊은이! 여기로 오시오」「이쪽에 오면 평온함이 있다오!」


그 이야기를 들은 청년은 부처님에게 갔습니다. 그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어준 후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는 그 말씀을 듣고 첫 번째 예류과 상태에 이릅니다. 진리를 발견했기에 마음의 불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근심 걱정으로 일어난 마음의 불이 사라지지 않은 부친도 아들의 발자국을 쫓아 부처님께서 계신 곳까지 옵니다. 아들이 사라져서 불타고 있는 부친의 눈에는 부처님 뒤에서 명상하고 있는 아들이 보일 리 없었습니다. 「이 근처에 젊은 사내 녀석이 오지 않았습니까? 그 녀석이 저의 아들입니다. 왔는지요?」그렇게 말하자 부처님께서는 「예! 그쪽에 앉으세요. 만나도록 해드릴 테니 침착하세요.」그렇게 말하자, 아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앉았습니다. 앉아서 부처님과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아버님이 너무 엄격한 것은 아닌지, 너무 호사스럽게 키운 것은 아닌지, 너무 귀하게만 여긴 것은 아닌지, 애정도 지나치면 지옥과 같고, 나라는 것이 없는데 나의 자식이 어디 있느냐고 그런 집착이 우리를 병들게 한다고 이야기하며 부친에게 설법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부친도 삶의 방법이 무엇인지 알아, 부친도 깨달아 버립니다. 예류과에 이릅니다.


그동안 부처님 뒤쪽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던 아들은 최종적인 깨달음까지 얻게 됩니다. 아라한이 되어 버립니다. 그제야 부처님이 아들을 불러 아버님과 대면시킵니다. 집으로 돌아가자는 부친의 말에 미소만 짓고 있는 아들을 보면서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은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진리를 완전하게 이해하여 번뇌가 없는 훌륭한 성자가 되었습니다.」「당신 아들은 이제 재가 생활에 어울리지가 않습니다.」그렇게 말하자 부친도 깨달은 바가 있어서 「나도 이제 나의 아들로 인해 받는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을 알았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저만 돌아가겠습니다.」라고.


그런 후「 나는 오늘부터 나의 지도자로서 선생님으로서 부처님에 귀의합니다.」「오늘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살아 보겠습니다.」「부처님의 제자들도 훌륭한 성자들이기에 그들로부터도 지도를 받겠습니다. 그러한 상가에도 귀의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삼보에 귀의했습니다. 그래서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강 사라낭 갓차미」라는 삼귀의에 의해 재가자가 되었습니다.


삼귀의가 성립된 것은 불교의 역사에서 이처럼 오래되었습니다. 부처님이 강제적으로 따르게 하신 것이 아니라, 재가자 스스로 자신의 의지에 의해 삼귀의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식 자유입니다. 명령하는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신이 명령합니다. 「내가 유일한 신이다. 나만 섬겨야 하고, 다른 신을 믿어서는 안 된다. 다른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부처님은 나에게 귀의하라고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귀의하지 않으면 낭패를 당할 것이라든지, 질투할 것이라든지,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말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에게 있어서는 믿고 싶어서 믿어도 좋고, 믿고 싶지 않으면 믿지 않아도 좋은 것, 아무래도 좋은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이것이 인간의 길이다」 「이 가르침이 진리다」 「이 사람들은 진리를 정말로 체험하고 있다」라고 이해해서 그러한 삼보에 귀의합니다.


그래서 불교의 세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자신의 의지로 삼귀의를 합니다. 삼귀의를 스님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은 나중에 생겨난 습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과 괴로움이 생기면

산이나 나무들이 우거진 숲

교원이나 무당집 등을 찾아

그곳을 의지처로 삼으려고 한다.


그런 곳은 안전한 의지처가 아니며

가장 훌륭한 의지처도 아니고

설사 그런 곳을 의지처로 삼더라도

우리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든지 붓다(부처님)와

담마(진리)와 상가(성자들)를 의지처로 삼으면

그는 올바른 지혜와 통찰력으로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깨달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의지처이며

가장 훌륭한 의지처이다.

비로소 이런 곳을 의지처로 삼을 때

우리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붓다 담마 상가는 그 비할 수 없는 청정함 때문에, 그리고 불교도들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대상이기 때문에 ‘세 가지 의지처’라고 불립니다. 불교도들이 삼보를 자신의 삶과 수행의 안내자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을 공인하고 다시금 확인하는 말을 통해서, 이 세 가지 보배는 불교도들의 ‘세 가지 의지처’가 됩니다.


이런 세 가지 보배에 의지처를 구함으로부터 불교도로서의 삶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모든 불교도는 마땅히 삼귀의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삼귀의는 출발점이며 동시에 귀결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빨리어로 된 삼귀의는 부처님 당시나 지금 이 시대나 여전히 똑같은 형식으로 암송되고 있습니다.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강 사라낭 갓차미.


붓다(부처님)를 의지처로 하여 나아가겠습니다.

담마(가르침)를 의지처로 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상가(성스러운 제자들)를 의지처로 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이 삼귀의를 세 번 암송하는 간단한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 불교도임을 천명합니다.


붓다, 담마, 상가의 삼보에 대해 귀의의 뜻을 표명하는 일, 즉 삼귀의가 불교교단의 의식으로서 채택된 것은 이와 같이 부처님이 법을 설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이제 저는 부처님을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담마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상가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를 재가신자로서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시작하여 이 목숨이 다 할 때까지 삼보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이것이 처음으로 삼귀의를 표명한 재가 신자의 게송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불교인의 가장 엄숙한 종교적 심성은 부처님 재세 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대해 진심으로 우러나 삼귀의를 부를 때처럼 잘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볼 때, 불교의 가장 종교적인 한 면은 이 삼귀의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 <테라와다 불교의범 및 신행생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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