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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제일로 중요한 것 / 상가라자 뿐냐산또 큰스님

관리자
2025-04-07
조회수 40


*** 2012년 (사)한국테라와다 법석(法席) 개강법회 (20120309. 서울대원정사)

 

먼저 법회예불의식

12:14초부터 뿐냐산또 도성 큰스님 법문__우리의 제일로 중요한 것

27:04초부터 빤냐와로 진용 스님 법문__멋지게 산다는 것

51:55초부터 냐나로까 혜조 스님 법문_한국테라와다 불교 소개, 왜 초기불교인가?

 

-사회자 : 이제 테라와다 불교 상가라자이신 뿐냐산또 도성 큰 스님의 법문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 뿐냐산또 도성 큰스님 법문__우리의 제일로 중요한 것

<12:14초부터 법문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그 테라와다라는 교단을 만들어 놓은 지가 좀 세월이 지났습니다만 해도 한 번도 이렇게 조직적으로 이런 법회를 가져본다든가 저거를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개별적으로는 더러 있었지만 또 부분적으로 더러 있었어도 지속되지를 못하고 그랬는데, 요번에 이 대원정사에서 우리들에게 이 법회 장소를 보도록 해준데 대해서 대단히 감사하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이 대원정사를 예전에 이 일을 하기 전에 제가 한 번 어디서 만났던 일이 있느냐 이러면, 이 장경호 거사님을 어디서 만났느냐 이러면 저 팔공산에 파계사 위에 성전이라는 데 성철 스님이 거기 살아계실 적에 거기에서 좀 좌담 비스듯이 앞으로의 이제 전망을 말하는 소리에 “딱 한마디만 말씀을 드릴랍니다. 나는 돈이 있습니다. 돈 좀 쓸랍니다. 그런데 지금 쓸 데가 없어서 못 써요.” 이게 이 장거사님의 요점의 말씀이 됐습니다. 나는 돈은 있는데, 쓸 데가 없어서 못 쓴다고. 

 

지금으로부터 이제 한 40년 됐습니다. 이걸 만들어 놓고 많은 일을 했는데 그야말로 이 장거사님의 ‘돈 참 내가 좀 쓸데 있으면 써보겠다’고 한 그 말에 대가를 해줄 분들이 여러분이라고 그렇게 봅니다.

어디 뭐 절 짓는 데가 없어서 돈을 안 썼으며, 어디 법회 보는 데가 없어서 돈을 안 써버릴 일도 아니고, 어드른 공부를 그야말로 부처님 법을 바르게 하는 사람들이 있으믄 거기다가 썼으면 내가 좀 아깝지 않겠다고 한 말이거든요. 그 장거사님의 대가를 우리가 치뤄주도록 하는 게. 


흔히들 이 우리 불교계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다른 사람한테 말할 적에는 다 무슨 말을 하느냐 이러면 “그 욕심 좀 버리라”고, 쓸데없는 욕심 좀 버리라고 그러면서 결국은 이면에는 그 뒤에는 무엇이 있느냐 이러면, ‘돈 좀 갖다 주지 않겠느냐’ 하는 이 생각이 많이 들어간 저것이 보이도록 말씀을 하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 법회에 나온 여러 대중이나 이걸 지도하는 스님들이나 그런 생각을 싹 없애버리고 한번 부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한번 해봤으면 어떠냐 하는 겁니다. 

이게 결국은 우리나라에 테라와다가 들어와서 머물러야 될 일이고, 앞으로 우리가 이 참 예전에부터 우리나라는 앞으로 어드른 민족이라고 그랬느냐 하면 '백의민족'에, 또 그야말로 '예의지국의 사람'이라고 했거든요. 진정으로 우리 참 백의민족의 그 예의지국의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낼 수 있도록 지도할 분들이 여기에 앞에 앉은 스님네들이요, 여러분들이 이걸 따르면서레 결국은 지도하는 분이고, 그 정하기를 스님네는 법문을 하게 되어 있고 신도님은 법문을 듣게 되어 있으며, 결국은 법문하는 이도 법문을 하는 것이고, 듣는 이도 역시 법문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잘 들어주고 이것을 실천을 안 한다고 그러면 여기 있는 사람이 아무리 법문을 해봤댔자 이거는 쓸데가 없는 법문이요, 결국은 가치가 없는 사람이 되는 거에요. 그것이 그럼 어떻게 돼서 이게 효과가 없이 되고 저거 되느냐 이러면, 이면에는 무엇이 생겨서 그러느냐 이러면, 

그 법문과 같이 우리가 실천하는 첫째 생각이 모자라고 그에 행동이 뒤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벌써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을 하면서레 말을 해도 듣는 사람이 ‘너는 무슨 말을 해도 그 속에는 뭐이 들어 있구나’ 하는 걸 결국은 사람만 아는 게 아니고 이 세상 모든 이치 진리가 그거를 알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다시 예전에 테라와다 창립할 적에와 같이 오늘 다시 또 이 창립과 같은 기회라는 것을 가지고서레, 참말로 우리가 여기에서 법문을 할 수 있는 그 자격이 있는 분들이라는 소리가 나오고, 법문을 들을 수 있는 분이라고 ... 본다고 그러면은 뭐 그렇게 광고 안 해도 바른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알게 되고 실천할 수 있는 이런 기회가 옵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들이 법문보다도 더 앞서서 내 마음에 결국은 단정한 마음을 가지는 데에서 앞으로 우리가 이제 그 법문의 필요성을 알게 된다는 거죠. 그러면 이 법문을 스님이 해야 되는 게 아니라요, 다른 나라에서도 보고 여러 군데서 봐도 스님은 상징적으로 앉아 있고, 무엇이 법문이냐 이러면 이제 「삼귀의 하고 오계」가 법문입니다.


그 외에 다른 거 가리키는 거는 누가 가리키는 것이 제일로 좋으냐? 이 세상에 제일로 무서워하는 것도 뭐이냐? 이러면 똑 비슷한 사람이 제일로 무서워. 지금 학생들한테는 어느 학생이 제일로 무서우냐 이러면 1학년 학생한테는 2학년 학생한테는 선생님보다도 그게 더 무섭습니다. 그쪽 말을 그렇게 더 잘 듣습니다. 요새 우리나라에 신문에도 많이 나오는 거 있죠. 


그러면 이 법회도 또 역시 스님이 법문을 잘해야 되는 게 아니고 오늘 나왔던 사람이 내일은 선배가 되는데, 그 사람이 한 행동에 있어서 결국은 이 법회가 그야말로 잘 되고 잘못되고 효과가 있고 이게 결국은 가치 있는 이런 저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제일로 필요한 때에 우리가 모임을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우리나라는 금년에 이제 양대 선거가 있어가지고서레 좋은 사람을 뽑아내 가지고서레 우리나라가 앞으로 평화스러운 나라가 될 수 있는 이 기회에 여러분들이 거기에 이제 선봉을 설 수 있다는 거에요. 

어째서 선봉을 설 수 있느냐? 다른 사람이 못하는 걸 하게 돼 있거든요. 그럼 무엇을 못하는 걸 하게 돼 있느냐? 


우리는 결국은 이 법문이 가장 중요한 건 줄로만 생각을 하고 이 법문을 어떻게 하면 말을 곱게 하고 좋은 말을 해가지고서레 다른 신도들을 좀 많이 오게 하고 내가 인기가 올라가겠느냐 하는 거를 우리나라에서 지금 전부 그것만 하고 있어.

무엇이 제일로 가장 으뜸가는 것이냐? 복을 지을 수 있는 곳이 결국은 이 부처님 법이라는 거를 알아야 되고, 지혜를 결국은 얻어갈 수 있는 장소가 여기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지금 안 하고 있는 나라라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냐? 이 가사가 무슨 옷이라고 그러느냐 이러면 복전(福田)이라고 우리나라에서도 말이 있거든요.

복전(福田) 이거는 그 복밭이라 이거에요. 여러분들이 와서 '이 분에게 절을 하고 공양을 올리고 복을 받아가는 거고, 또 법문을 듣고서레 결국은 지혜와 복을 얻어가는 이런 분이다.' 이게 결국은 돼야 되는데 이것이 결국은 안 돼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늘 하는 말이 뭐라고 그러느냐 이러면, 

“스님은 두 가지를 거절해서는 안 되는 게 있다. 신도님이 복을 지으려고 공양을 가져오는 거를 공양을 올리는 걸 거절하는 게 그게 안 된 일이요, 또 하나는 신도님이 지혜를 얻어가려고 스님한테 와서 복을 빌며 절을 하고 그 스님을 배울라고 그러는데 거절하는 것이 그것이 안 된 일이다.”


왜 그러느냐? 복을 지으려고 그러는 걸 짓지 못하도록 하면 결국은 사람이 복전이 될 수가 없는 게고, 스님이 결국은 설법을 하고, 결국은 모든 신구의 삼업을 잘 다스리면서레 말 한마디 뜻 하나 몸 한 번 행동하는 이것이 굉장히 다른 사람에게 항상 지도할 수 있고 복을 줄 수 있고 지혜를 받아 갈 수 있는 이런 사람이 돼야 되는데, 결국은 조금만 큰 스님이 되면 자리에 들어앉아 가지고서레 안 만나는 게 무슨 1등으로 생각하고, 또 다른 사람이 무슨 신세를 안 진다고 그러면 그걸 안 받을라고 그러는 게 우리나라의 큰스님들이 돼서, 이거는 안 되는 법이올시다.


또 더 이상 더 말하고 싶은 게 있지만 뒤에 이제 나는 이거 사실 기초만 조금 말씀을 하는 거지 좋은 말은 우리 이제 스님네가 저거 할 테니 이것으로써 그야말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복을 지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지혜를 얻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이 세상에 얼마만큼 많은 사람들을 우리가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느냐 하는 이것이 결국은 우리의 제일로 중요한 거다."

이렇게 이것으로써 말씀을 끝마치겠습니다. 

 

-사회자 : 합장하시고 다함께 삼배를 올리겠습니다.

다음에 법문을 해주실 테라와다불교 이사장 스님이신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이 있겠습니다. 오늘은 상가라자 도성 큰스님과 그다음에 빤냐와로 진용 이사장 스님과 테라와다 운영위원장이신 냐나로까 혜조 스님, 세 분 스님의 법문을 차례대로 듣겠습니다.

 

 

* 빤냐와로 스님 법문__멋지게 산다는 것 

<27:04초부터 법문이 시작됩니다.>


반갑습니다. 지금 테라와다 법석을 마련을 해서 둘째 주, 넷째 주에 수행의 실제와 이론 부분을 담당을 하게 됐습니다. 이걸 맡으면서 곰곰히 한번 생각을 해봤어요. 

대부분 수행법들은 알죠? 그래서 수행법들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니 이건 내보다 더 많이 알 것 같고, 그렇다고 수행 외적인 부분에 대해서 말을 하자니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것 같고, 그래서 궁여지책을 생각해 낸 것이 지금은 어쨌든 정규 대학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이번 1년간은 스님들 법문을 통해서 테라와다 스님들과 여러분들이 좀 더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마련하기 위한 겁니다. 

 

그래서 1년 동안을 뭐할까 고민을 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일반재가자들이 원하는 것이 뭘까 하는 것을 먼저 스님이 알고자 했었어요. 그래서 재가자들이 예를 들어서 요즘은 내가 우울하다 그러면 이 우울한 것을 수행으로 어떻게 풀어낼 것이냐? 그게 뭐 사마타적인 방법도 있을 것이고, 위빳사나적인 방법도 있을 것이고, 또는 경전에 근거한 방법들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이번 1년간은 테마별로 한번 잡아가지고 해보자 하고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스님 그거 말고 대념처경 해주세요 하면 또 대념쳐경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오히려 실제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더 낫지않을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둘째 주, 넷째 주 수행지도는 그렇게 들어갈 거 같습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매주 못 오죠? 그래서 한동안 못 오다가 그 주에 오더라도 그 주에는 또다른 테마를 가지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 듣고 가도 이익이 안 생기겠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게 2주, 4주는 스님이 진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되도록이면 여러분들에게 가르칠려고 안 하고, 스님도 사실은 이렇게 테마를 잡아서 가르쳐 보지를 잘 안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도 여러분들하고 똑같은 초보자의 입장입니다.

 

단지 여러분보다 먼저 수행을 했고 먼저 경전을 접했다는 것뿐이기 때문에 조금 더 먼저 접한 입장에서 그래도 경전에 나오는 것들 수행을 통해서 이런 것들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하는 것들은 나눌 수가 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마음 편하게 와서 수행하십시요. 그러니까 뭐 괜히 와가지고 자기가 하는 수행법이 심념처인데 심념처 안 가르쳐준다고 내보고 뭐라 하지 말고, 그리고 마하시 방법으로 하는데 마하시 방법으로 안 하고 왜 이렇게 하느냐고 뭐라 하지 말고, 모든 것들을 다 아우를 수 있도록 그렇게 한번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사실은 입재법문이기 때문에 크게 법문할 수 있는 상황은 못됩니다. 그래도 주머니는 조금 채워가야 안 되겠어요? 여기까지 오셨는데, 그래서 채워가라는 의미에서 얘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을 지도할 때는 부처님이 보통 아난다 스님을 보냈어요.

아난다 스님은 상호가 굉장히 훌륭하거든요. 그래서 아난다 스님이 가면 비구니 스님들이 그냥 한마디로 말하면 뿅 가요. 하도 아름다워가지고, 예뻐가지고. 그런데다가 법문도 아주 미사여구를 써가지고 하거든요. 

아난다 스님은 어떤 마음으로 법문을 했을까?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저사람은 좋아하겠지' 

'내가 이렇게 법을 설해주면 저사람은 행복하겠지' 

이런 마음을 가지고 법을 설하거든. 그러니까 아픔 부분을 콕콕 꼬집어주고 좋은 말만 해주니까 자기 좋은 소리 해주는데 누가 안 좋아할 사람이 어디있어? 그런데다가 상호가 아주 아름답고 하니까, 그래서 비구니 스님들은 아난다 스님 외에 다른 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괜한 부처님인가? 아난다만 내내 가도록 하겠어요? 다른 스님들 보내기도 하죠. 그런데 가장 대조적인 스님이 누구냐면 마하깟사빠 스님이라. 마하깟사빠 스님은 비구니 스님들이 얼굴도 안 볼라 그래. 생긴 것도 이상하게 꼭 여기 있는 스님들 아마 여기 빤냐완따 스님을 제외한 나머지 스님들은 다 마하깟사빠 스님 과에 속할 거라. 다 못생겼어. 그렇게 못생겼는데 그런데다가 만날 누더기만 걸치고 있지, 그러니까 비구니 스님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 스님들도 마하깟사빠 스님이 법을 설하면 대부분 조분다고 그래요. 

 

마하깟사빠 스님은 법을 설할 때 어떻게 설했느냐 하면 아난다 스님하고는 대조적입니다. 

'부처님의 덕을 어떻게 하면 내가 드러내줄 수 있을까?'

'부처님 담마를 어떻게 가르쳐야만이 저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를까'

여기에 중점을 뒀다고 그럽니다. 깨달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지, 요만큼도 여러분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의 경지에 있는지 요만큼도 염두에 두지 않는 거라. 그러니까 자기 할 일만, 할 얘기만 실컷 떠들고 가버리니까, 근기가 안 되는 일반인들은 어떻게 돼요? 하나도 재미가 없는 거라. 그렇게 됐거든.

 

그런데 실제로는 "스님들은 마하깟사빠 스님 같이 법을 설하라" 하고 얘길합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스님뿐 아니라 다른 스님들도 특강 시간이나 아니면 다른 시간을 통해서든 아마 틀림없이 자기 자신을 드러낼려고 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이 대중들이 부처님 법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바르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하루 빨리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지고 아마 법을 설할 거라고 봅니다.

 

그게 바로 테라와다 스님이라는 겁니다. 

테라와다 스님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법을 잘 설하는 스님보다 여러분들은 눈높이가 더 높죠? 뭘 원해요? 

법문 잘하는 스님보다도 수행 잘하는 스님을 원합니다. 그렇죠?

또 수행 잘하는 스님보다도 청정하신 스님을 원합니다.

그리고 또 청정한 스님보다는 수다원과에서 아라한과에 이르른 성자인 스님들을 더 원합니다.

여기에 있는 테라와다의 스님들은 그래도 지금 얘기한 무리 속에는 다 들어있는 스님들입니다.

 

어떤 스님은 여러분들이 보기에 솔직하게 얘기해서 저녁을 가끔씩 먹기도 하고, 그런데 번뜩이는 지혜는 오히려 다른 스님들보다 더 뛰어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스님들은 수행만 열심히 할라고 하는 스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법문 해주라면 법문 하나도 못해. 잘 못해. 그런 스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모여야만이 이 상가(saṅgha)라는 게 구성이 됩니다.

 

상가에는 여러 스님들이 존재를 합니다. 이 존재하는 스님들이 어떤 모습으로 흘러갈 것이냐 하는 것을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 것이, 상가내에서도 중심을 잡아줘야 되겠지만, 여러분들이 중심을 잡아줘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하고 접할 수 있는 계기들이 뭐냐면 이렇게 매주 금요일날 만나서 법문을 설하고 또 그리고 여러분들하고 여러 가지 좌담을 하면서 속에 있는 것들을 드러내기도 하고 이런 과정들을 겪게 되는 겁니다.

 

스님은 한국에서 한국테라와다 불교가 성립되면서 참 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면 여기있는 스님들은 이 가사 옷을 입고 있습니다. 저쪽에 있는 스님들은 한국 승복을 입고 있습니다. 승복을 어떻게 입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여기 있는 스님이 이 옷을 입었을 때는 이 옷을 입을만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래도 나를 법의 눈을 뜨게 해줬고, 나를 중심을 잡아줬기 때문에, 나는 그래서 이 옷을 입고 있습니다. 차마 이 옷을 벗지 못해서.

여기 있는 스님들도 아마 거의 마찬가지 입장일 겁니다. 대승불교권에 있는 스님들은 대승불교권에서 그러한 것들을 받았기 때문에 그 옷을 입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옷을 어떤 걸 입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떻게 나를 이끌어 주느냐' 하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이 자리에 와서 법을 듣고 수행을 하고 하는 것은 그러한 확신들을 가지게끔 하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온 보람이 있구나, 여기 매주 법문 들으러 온 보람이 있구나 하는 것들은 생각들은 일으키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멋지게 한번 한국에 테라와다 불교가 들어서는 걸 보고 싶어합니다.

저만 그런게 아니고 여러분들도 다 마찬가지죠? 그래서 멋지게 한번 살아봅시다.

 

대학을 다닐 때는 그때는 출가하기 전이죠? 멋진 게 만날 데모하고, 남이 잘못한 게 있으면 막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이러는 것이 멋진 줄 알았어요. 그러다가 감방에 잡혀가기도 하고 그러다가 군에 가기도 하고 그러다가 출가를 했는데, 그런데 지나고 나서 그걸 돌아보니까 그건 별로 멋진 거 같지는 않아. 그 가치관이 멋지지 않다는 것이 아니고 그래도 나를 내세울려고 하고, 나도 화를 드러내고, 이런 것들이 그렇게 멋있어 보이지는 않아.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어차피 태어났으니까 어떻게 멋지게 살다 가실 겁니까?

물론 여러 가지 재산을 많이 모아서 멋지게 한평생 누리다 갈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명예가 높아져서 역사에 남기는 그런 분이 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방편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과연 부처님은 이 세상을 멋지게 살다 가는 사람들은 어떤 분을 그렇게 얘기했을까?

하루는 천신들이 모여가지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을 이렇게 내려다보니까 참 잘 사는 사람들도 있고 못사는 사람들도 있거든. 여러분들도 아마 그럴 겁니다. 나이드신 분들은 이렇게 젊은 사람들을 보면 '아이고, 저사람 참 잘살아간다' 하는 사람도 있고, '아이고, 저거는 어떻게 개망나니 같이 저렇게 사나' 생각이 들 때도 있고 그럴 겁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천신들이 우리들을 바라볼 때도 아마 그럴 겁니다. 

 

그래서 천신들이 잘 살아가는 사람들을 분류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 분류를 해놔놓고 나서 보니까, 제석천이 예를 표하거든. 그래서 옆에 있던 분이 제석천왕에게 그럽니다.

"신이 어떻게 인간에게 예를 표할 수 있습니까? 왜 예를 표합니까?" 하고 얘기하니까, 제석천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부모님 잘 모시고, 요즘은 떨어져 있는 경우들도 있죠? 그리하더라도 부모님을 잘 모실 마음들을 가지고 또 그런 조건이 되면 그것들을 열심히 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부모님 잘 모시고, 또 살아가면서 남에게 열심히 베풀려는 마음들을 가지고, 또는 사람들 간에 화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나는 예경합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어려운거 아니죠? 

 

그런 사람들이 멋있게 잘 살아가기 때문에 제석천이 예경한다고 그럽니다.

가장 쉬운 것들입니다. 여러분들 보고 어려운 위빳사나 수행법을 신념처부터 달달달달 외우라고 그러나? 아니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라고 그러나? 전혀 어려운 게 없습니다. 아주 쉽습니다. 천신들은 그런 인간들에게 예경을 올린다는 겁니다.

물론 천신들이 멋진 인간의 조건을 일곱 가지로 얘기한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사랑스러운 말을 하는 분들도 있고, 여러 가지 조건들은 있는데, 그 조건들을 대부분 보면 여러분들이 대부분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은 실제적인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실제적인 얘기들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대부분 한국에 있는 카페나 홈페이지가 있는 것들을 보면 가입할려고 할 것 같으면 정확하게 기재를 해야만이 가입이 허락이 떨어지죠! 그 조건이 뭡니까? 정어(正語)라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바른말 하지 않고 거짓말하는 경우에는 등업을 안 시켜 줍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집니다. 


멋지게 잘 살아가는 사람의 첫째 조건이 진실된 말을 하는 자.

두 번째 조건이 뭐냐면 아까 천신들과 마찬가지로, 거기 우리 정원 김재성 교수님이 하고 있는데가 멧따 명상의 집 그렇게 해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자애스러운 말을 하는 자. 그걸 보통 한문으로 애어(愛語) 라고 그럽니다. 사랑스러운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을 하면 자애스러운 말들입니다. 남을 대할 때 항상 미소지으면서 자비로운 말들을 하는 것. 

예를 들어서 내가 여기 이분을 내가 안단 말입니다. 그럼 이분하고 얘기할 때는 이분의 좋은점, 장점을 떠올리면서 '이분이 행복하기를', '이분이 괴로움이 없기를' 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이 분하고 얘기를 하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어떻게 되요? 내가 이분을 떠올리면서 항상 미소 짓게 되,고 말하는 것들은 자애로운 말을 하게 된다는 거라.

모든 대상을 대할 때, 그리고 나하고 관계없는 사람을 대할 때라도 자애로운 말들을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진짜 멋지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또 부처님이 뭘 멋지다고 얘기했을까? 4가지를 얘기했거든요.

세 번째는 한국에서도 그런 거 하던데 동사섭(同事攝)이라고 들어봤어요? 스님은 아직 동사섭을 안 가봐서 어떻게 하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동사, 항상 어떤 일들 어떤 대상을 만나더라도 평등한 마음을 가지도록 하는 자.

그런데 우리는 그거 참 잘 안되죠? 성질 바락바락 부릴 때도 있고, 또 욕심 부릴 때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가능한 경우가 있습니다. 항상 평등한 마음을 가질려고 하는 것들은 자꾸 훈련하면 됩니다.

 

처음에 태국가가지고 스님은 태국에서 오랫동안 있었는데, 태국에서 참 하기 힘들었던 게 뭐냐면 화를 안 내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스님들이 화를 요만큼이라도 내면 그다음부터는 탁발을 가도 탁발을 안 줄려고 그럽니다. 스님 된 자격이 없다고 그럽니다. 우리가 봤을 때는 그냥 화도 아니야. 그러니까 싫증을 내는 것, 싫어하는 마음을 내는 것, 아니면 남을 누가 얘기할 것 같으면 스님들한테 항상 좋은 얘기만 하는 게 아니고 뭐 이상한 얘기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내가 피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피할려고 하는 마음을 내는 것들도 다 화의 일종으로 봅니다. 

 

화를 내는 것은 4가지의 종류가 있는데, 그런 모습이 조금이라도 스님한테 보이면 신도들이 금방 압니다. 그래가지고 그다음부터는 탁발가면 밥을 안 줘. 중이 밥을 안 주면 우짤거고? 굶어야 되는 거라. 그마만큼 화를 안 내는 것이 조절하는 것이 굉장히 힘이 들어요. 그런데 우짤끼라? 내가 안 죽을라면 화를 안 내야 되는데. 길을 자꾸 들여가지고, 어쩔 수 없이 속에는 부글부글 끓어도 안 드러내는 거라.

그렇게 훈련을 해나가다가 나중에는 점점 더 하다보니까 화를 알게 되고, 화의 원인을 알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화를 자동적으로 안 내게 되고, 또 어떨 때는 화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걸 분명하게 다스릴 수 있게 되고, 이렇게 자꾸 만들어져나가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꼭 마찬가질 겁니다. 아마 여기 와서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또 수행을 하고 하면 자연스럽게 그 물이 배어나갈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거는 아마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습니다.

그래서 그게 화를 안 내는 것, 그뿐 아니라 욕심 부리지도 않는 것.

 

대부분 여기 있는 스님들이 단언합니다. 

우리가 회의할 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는 스님들 여비라도 주자 그래서 내가 반대를 했어요. 여비 없다, 자기 돈으로 다 올라오도록 하라. 그렇게 하자고 얘기를 했어요. 다 돈 없습니다. 그런데도 얼굴을 보든 아니면 행을 하는 것들을 보더라도 그렇게 불만족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만족하고 삽니다. 

만족하지 못한 게 이 속에 요만큼 있다고 하더라도 드러내질 않습니다. 드러내면 다른 스님들이 당장 그걸 지적을 합니다. 적어도 만족할 줄 모르는 스님들은 없습니다. 그것뿐입니까? 게으르지 않게끔 열심히 노력하고, 보통 탐·진·치가 없이 살아갈려고들 합니다. 그렇게 자꾸 노력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평등한 마음들을 어느 정도 가지게끔 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항상 어떤 상황이 되든 어떤 조건을 만나든 평등한 마음을 자꾸 가질려고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적어도 그렇게만해도 이 세상에서는 잘 살아가게 됩니다. 진짜 잘 살아가게 됩니다.

 

또 하나가 뭐나면 베푸는 것. 

그렇게 해가지고 4가지입니다. 부처님이 얘기를 해놓은게 4가지인데,

 

이 세상에 어차피 태어나서 살아가는데 되도록이면 멋지게 한번 살아가야 안 되겠어요? 그리돼야 부처님 제자답게 살아가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그냥 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보다 오히려 부처님 제자답게 잘 살아가서 이 세상에서 적어도 그래도 나중에 죽음에 임박해서 '멋지게 잘 살았구나' 하는 마음이 들도록 그렇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자! 간단하게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사회자 : 스님께 삼배의 예를 올리겠습니다.

그다음에 한국 테라와다불교 운영위원장이신 냐나로까 혜조 스님의 법문을 듣겠습니다.

 


* 냐나로까 혜조 스님 법문_한국테라와다 불교 소개, 왜 초기불교인가?

<51:55초부터 법문이 시작됩니다.>

 

자세 편히들 하십시요. 편하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여기 오신 분들이 의심치 아니하고 거의 대부분이 초기불교 내지는 테라와다불교에 지극한 관심과 사랑을 가진 분들이 모였으리라고 그래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반갑습니다.

 

먼저 오늘은 강의는 없는 날이고 강의를 위해서 오리엔테이션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날이기 때문에 두 가지를 좀 이야기하고 싶네요. 

첫 번째는 "사단법인 한국테라와다 불교가 지금까지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를 잠깐 좀 소개를 하고 싶구요, 또 하나는 "왜 하필이면 초기불교인가? 초기근본불교인가? 왜 그것을 우리는 공부해야 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잠깐 좀 이야기 해볼려고 합니다.


먼저 2009년도 10월달에 사단법인 한국테라와다 불교가 창립 법회 겸 까티나 법회를 가졌습니다. 그날은 억수같이 비가 내리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부지기수로 대중이 모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참 그날의 뜻깊은 의미를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에 제1회 학술 세미나를 가졌었습니다.

그리고는 잠수해버렸습니다. 근데 잠수라는 것은 잠수함이 물 밑에 들어가면 물 표면은 고요합니다. 그러나 잠수함은 진작 그 잠수함은 굉장히 바쁩니다. 밑에 환경조사도 해야 되고 오염의 정도도 찾아내야 되고, 또 요즘은 세상이 하도 수상해가지고 우리의 이 삶 자체의 터전을 없애는 식으로 이 지구촌은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사와 탐구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그래서 잠수함은 굉장히 바쁩니다. 그처럼 저희들은 굉장히 바빴습니다.

 

얼마 안 되는 테라와다 상가 스님네들이 월 1회 단 한 번도 빠지지 아니하고 모여가지고 우선 제일 먼저 뭐를 먼저 해야 되겠느냐라고 생각을 해보니까 '테라와다 예불', 그러니까 가장 붓다의 원음에 가까운 그런 예불, 그리고 '상가의범', 재가불자님들의 신행을 위한 어떤 의범, 이런 것들을 먼저 마련해야 되겠다. 그래서 그 작업을 빨리어 작업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을 3년에 걸쳐서 했습니다. 이제 그것이 끝났습니다. 곧 출판될 예정입니다. 말이 3년이지 3년 동안 그것을 했습니다. 적은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동안에 우리 스님들끼리 모여가지고, 스님네들도 그동안 각 스리랑카나 미얀마나 타일랜드 가가지고 주로 수행에만 주력을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여러 가지 상가의 의범이나 상가깜마나 이런 것에 대해서 (발전) 못했습니다. 

3년 동안 그것을 또 간간이 공부했고, 계율에 대한 구체적인 거에 대한 공부, 또 간간이 어떤 중요 주제에 대한 탁마, 이렇게 하면서 3년을 보냈습니다. 

이제 테라와다 예불문은 완성되었고, 곧 2차 교정까지도 끝냈고, 이제 출판 행위만 남았습니다.


그다음 번으로 이제는 우리가 잠수에서 일어나서 대외적으로 대중들에게 붓다의 원음을 부처님이 원음을 전달하는 이런 전법행위를 해야 되지 않느냐 라고 결정을 하고, 내년부터는 담마스쿨 2년 과정의 담마스쿨을 가지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금년은 그 예비단계로서 두 과목을 설정을 해서 일단 1년 동안 가동을 하자 라는 합의를 보았습니다. 

붓다께서는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두 길을 제시하고 있죠. 하나는 「이론 공부·교학」, 하나는 「수행의 실제」. 그래서 저희들도 1년 동안은 요 두 과목을 설정을 해서 「수행의 실제」는 우리 지금 사단법인 한국 테라와다 불교의 대표로 계시는 또 타일랜드에서 오랫동안 공부를 하시고 타일랜드에서 삼장법사 시험을 패스하신 지금 현 부산의 붓다의길따라 선원장으로 계시는 아짠 빤냐와로 스님이 두 번째, 네 번째 금요일 2시부터 4시까지 이 장소에서 여러분들에게 붓다의 실제 수행 방법을 전달하실 것입니다. 이론과 같이. 

 

또 하나 교학은 소승인 제가 맡게 되었는데요. 「초기불교」라고 해도 좋고 「근본불교」라고 칭해도 좋고, 「초기근본불교」라고 칭해도 좋고, 「테라와다」라고 칭해도 다 좋을 것입니다. 다 공통성과 연관성이 있는 언어이니깐요. 그러니까 「초기 근본불교 총론」 이라는 학과명으로 정해서 역시 첫 주와 3주 금요일 2시부터 4시까지 이 장소에서 할 것입니다.


이 정도가 이제 그동안 테라와다, 이 한국 테라와다 불교가 그동안에 여러분들 앞에 적나라하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속에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알림 정도가 되겠습니다. 

 

(빤냐와로 스님 : 변명이지.)

 

아울러서 본격적인 강의로 들어가기 전에 오늘은 여러분들한테 잠깐 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뭐냐면, 현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정말 삶에 있어서 수상합니다.

제도적인 모순 체제적인 모순, 뭐 이런 것에 의해서 어떤 문제점의 해결에 대한 대안이 지혜로운 대안이 사회적 측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항상 절망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심각한 시국에 과연 초기불교 근본불교를 배움으로써 구체적인 대안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 이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종교 그 자체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삶 그 자체가 우리한테는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종교 이전에 우리 앞에 놓여져있는 이런 삶이 불교라는 것을 통해서 구체적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우리가 배울 수 있느냐 없느냐?

만일 배울 수 없다면 공부할 필요가 없는 거죠. 예. 그렇게 생각되기 때문에 우리가 과연 초기 불교를 통해서 그것의 어떤 대안을 예상할 수 있겠느냐, 기대해도 좋겠느냐? 이 문제에 대해서 잠깐만 좀 언급을 하겠습니다. 이것이 언급되어야만이 여러분들이 ‘아, 그래 내가 초기불교를 공부를 해야 되겠다. 붓다의 원음을 공부해야 되겠다’라는 공부하고 싶은 그 마음이 사무치게 젖어 들어와야 이 강좌에 올 것입니다.


현대사회에 가지고 있는 문제점 이것을 이야기하려면 한이 없고, 그러니까 그건 대충 다 여러분들이 구체적인 언어를 통해서 표현을 할 수 없을는지는 모르겠지만도 대충 다 공감하고 있는 부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들을 생략하고. 

 

불교가 아닌 사회학자들의 주장들을 보면 진보적 입장에서 다양한 어떤 권리와 자유에 대한 성찰과 논쟁을 필요로 해서 "거기에 참여하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현대를 사는 사람들한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만이 대안이다. 또 "기본적인 노동운동을 공감하고 참여하라" 또 "시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 "민주적 통치의 구축을 위한 국민운동에 동참하라" 

이제 신자유주의는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지구촌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그것은 깊은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앞에서 말한 그런 얕은 대안 가지고는 오늘날의 우리 삶의 문제가 아주 속 시원하게 선선하게 해결될 수는 없을 것만 같습니다.


자, 그러면 불교 특히 그중에서 초기근본불교에서 이런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예상할 수 있겠느냐?

저는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불교는 타 종교나 철학과는 달라서 불교는 사실을 주장합니다. "지금 나의 삶에서 현재 나는 지금 괴롭다, 불만족스럽다, 그러니까 여기에서부터 벗어나야 하겠다, 그래서 행복을 찾아야겠다." 여기에서부터 불교는 출발합니다. 

 

자,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내가 고통스럽다, 불만족스럽다'라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 타 종교는 시작이 '믿음 신학'에서 출발을 합니다. 근데 불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까? 앎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 방석 위에 하얀 종이 한 장이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라는 문장과 '회색 방석 위에 하얀 종이 한 장이 있다 라는 것을 나는 지금 알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은 확연하게 다릅니다. 믿음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믿음을 중요시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앎을 강조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고통받고 내가 지금 불만족스럽다 라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을 해야 합니다. 

 

현대는 상위 5%가 부의 절대를 가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삶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가지고 있는 자는 삶이 고통스럽지 않느냐? 역시 외형적으로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게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삶은 만만치 않습니다. 왜 만만치 않은가? 우리 내면의 문제의 근본이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욕망에 대해서 이해하라. 욕망이 왜 일어나는가를 이해하라. 그걸 이해해야만이 벗어남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접근해야 될 방법은 이것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수많은 종교들은 다 윤리를 주장합니다. 

윤리를 부르짖지 않는 종교는 없습니다. 철학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현대의 이 자본주의 체제 속에 특히 그중에서도 신자유주의 체제, 이제는 기업윤리 이런 거 없습니다. 온 사회가 경쟁에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그 속에 도덕윤리, 어떤 면에서는 장애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왜 이럴까요? 이것의 근본적인 근원은 존재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원인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잘못된 이해는 어디에서 오느냐? 인식이 잘못돼서 온다! 그런데 이 인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때는 인식한 게 옳고 어떤 때는 인식한 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식은 전부 다 잘못됐습니다. 거짓을 참으로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그 인식이 반드시 관념을 통해서 인식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속에는 반드시 인식의 오류가 도사려져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바로 그 인식의 오류·관념을 벗겨낼 것을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초기불교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신자유주의가 이렇게 기승을 부렸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유입니다. 자본주의 체제가 성립된 밑에 근원은 자유입니다.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태어나기 이전의 용어가 뭡니까? 자유방임주의였습니다. 그죠. 자유는 정말 매력적입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형태로 살든 간에 정말 다 추구하고 있는 것이 뭡니까? 행복입니다. 행복을 다른 말로 하면 뭡니까? 자유입니다. 

근데 자유의 최고봉은 뭡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아무도 거리낄 게 없는 것, 제재를 받지 않는 것, 이런 자유를 누구나 다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근데 그런 자유가 가능하겠느냐는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혼자만 그렇습니까? 저 사람도 그렇게 요구하고 저 사람도 그렇게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충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이런 각자 각자의 자유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제한, 절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근데 절제 제재가 강압적으로 받는다면 이미 그거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죠? 그러면 어차피 제한과 절제를 받는다면 좀 자유롭게 받을 수 있는, 제한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 있다. 그거는 뭐냐? 그것을 우리는 '자율'이라고 합니다. 너에 의해서 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절제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이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룰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논리가 초기 불교에는 있다.


그다음은 현대에는 많은 전쟁이 있습니다. 그 전쟁에는 뭐 겉으로는 뭐 여러 이유들이 있습니다만은 조금 파고 들어가면 종교적인 문제가 내재되고 있고요. 더 파고들면 역시 몇몇 자들이 부를 소유적으로 쟁취하기 위한 욕망이 도사려져 있는 그것이 근본적인 원인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모든 종교와 철학들은 사랑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절대주의적 사랑입니다. 이데올로기와 어떤 의식구조와 가치관이 동일한 자들끼리의 성립되는 사랑은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는 자의 대상을 한 그런 사랑은 절대 실현하질 않습니다. 절대주의적 사랑, 소위 말하는 패거리 사랑만 우리 눈앞에 현실적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그걸 부정합니다. 왜? 무아를 주장하고 있으니까요. "형이상학적 실체라는 것은 없다. 자아란 것은 없다." 그러니까 나를 포기할 수 있습니다. 

절대주의라는 사고방식은 나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동일한 신을 가지고 있는 집단끼리는 사랑이 가능합니다. 근데 그러지 못한 대상은 원수에 가깝습니다. 근데 불교는 그렇지 않다. 왜? 자아에 대한 실체를 부정하니까! 그래서 진정한 사랑을 성사시킬 수 있습니다. 실현시킬 수 있습니다. 

 

다음은 우리 인류의 가치나 의미를 처음에는 철학이 담당했습니다. 이것이 곧 종교에게 바톤을 넘겨줍니다. 그래서 아주 철학적으로는 암흑기가 되죠. 중세. 

그러다가 이제 르네상스 시대가 오고 이렇게 해서 과학적 사고방식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자 점차 과학에 바톤을 넘겨줍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입니다.

근데 과학이라는 것은 뭡니까? 물질을 분석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그 물질의 본질을 규명해내는 작업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고방식 이런 행위, 이것이 현대 교육을 받는 우리 현대인에게는 전부 다 암암리에 이것이 밑에 다 깔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패턴 이런 의식구조 이것을 역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굉장히 과학적이다. 붓다께서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을 초기 불교는 그 방법을 분석·해체, 뭉쳐놓으면 전부 다 인식의 오류에 빠진다. 해체하라. 분석하고 해체해버려라. 그러면 거기에 있는 것은 전부 다 허위 허상일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아(無我)를 보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이 분석이라는 방법, 이것이 불교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너무나 잘 어필할 수 있습니다. 초기 불교는 이것을 너무나 진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또 우리 불교 안에서 이야기하자면 2500년 전에 고따마 부처님에 의해서 태동됐던 그 불교는 2500년을 흘러오면서 여러 형태로 변했죠. 그래서 불교 안에서도 굉장히 다양성이 있습니다. 

대승불교도 뭐 논리적으로 초기 불교와 충돌 사항이 사실은 철학적인 측면에서는 없습니다만 후기 대승불교에서는 상당히 문제가 많죠. 거기에다가 인도에서 불교가 힌두교한테 완전히 밀릴 그즈음에 일어난 밀교, 요즘이 아니라 꽤 오래전부터 우리 주변에 있는 책들 중에는 밀교가 무슨 불교의 최고봉인양 이렇게 암암리에 전달이 됐던 서적도 몇 번 봤습니다. 제가. 그래서 굉장히 불교가 다양해졌습니다.


이렇게 방편이 난무하는 이런 속에 과연 붓다의 원음을 어떻게 우리는 그 진짜를 골라서 알 수 있겠느냐? 간단한 문제가 아니죠. 근데 고를 방법이 있다. 

진짜냐, 가짜냐를 고를 수 있는 바로메타는 「사성제의 진리」 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초기불교로 돌아가야죠. 

뭐 이야기를 하려면 왜 초기 불교를 공부해야 되느냐?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자리에서 우리는 초기 불교로 돌아가야 합니다.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전부라고 이야기를 절대, 그것을 이야기할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데 이것을 생략해서는 아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대충 새삼스럽게 여러분 공감하시고, 이 한국 테라와다 불교에서 야심차게 계획하고 있던 이 강좌에 적극적으로 오셔서 사무치게 공부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 : 스님께 삼배의 예를 올리겠습니다.


-사회자 : 다음 순서는 스님들께 이제 보시를 올리는 게송이 있는데, 

··· ··· ···

'나모땃사'부터 같이 하고 나서 이렇게 한 분이 대표로 보시를 올리고 스님들의 축원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빤냐와로 스님 : 독송을 하기 전에 지금 공양을 올리는 것은 상가에 공양을 올리는 겁니다. 개인 스님들에게 올리는 것이 아니고 모든 스님들에게 다 올리는 것이고. 한 분이 대표로 해서 올리는 것이지, 여러분들이 다 같이 마음을 내어서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그런 다나(dāna)들을 한다고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지, 모든 공덕들 지금 현재의 스님들, 깨달음을 이룬 스님이든 예류과에 이른 스님이든 그분들에게 공양 올리는 공덕들을 여러분이 받는 것이고, 여기에 있는 스님들만 아니라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테라와다 스님들 모든 스님들에게 같이 공양을 올리기 때문에 그 공덕을 같이 받는 겁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이 세상에 앞으로 출가할 스님들까지 모두 다 그 공덕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항상 '내가 이러한 보시공덕으로 닙바나 열반에 이르길 바랍니다. 이러한 공덕으로 내가 행복하기를, 이러한 공덕으로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가기를’ 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게송을 읽어주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재가불자 다함께 : 보시를 올리는 게송 독송

 

-사회자 : 스님들께서 보시하신 여러분들에게 축원을 해주시겠습니다. 

 

-빤냐와로 스님 : 이렇게 보시 올리는 공덕들이 강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듯이 이 세상뿐 아니라 다음 윤회하는 세상까지 끊임없이 흘러가서 살아있는 분들은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고 몸도 마음도 부유로워지고, 이러한 공덕들이 돌아가신 뻬따천에 있는 조상님들에게도 같이 이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이러한 공덕으로 언젠가는 닙바나에 이르고, 이러한 공덕으로 모든 이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길 바라겠습니다.

스님들 축복 게송을 하겠습니다.

 

-상가 스님들께서 재가불자들에게 축원 게송 독송

 

-사회자 : 이제 우리 모두가 지은 공덕을 함께 회향하는 게송을 독송하겠습니다.

-재가불자 다함께 : 공덕회향 게송 독송

 


-사회자 : 이제 기본적인 법회 식순은 끝났습니다.

제가 오늘 오신 테라와다 상가의 스님들과 또 외국에서 한국에 활동하시러 오신 스님들 그리고 한국에 스님들을 잠깐 소개를 드리고, 그다음 순서로 진행하겠습니다. 

 

먼저 제일 먼저 법문을 해주신 테라와다불교 상가라자 뿐냐산또 도성 큰스님이십니다. 합장으로 반배하겠습니다. 

두 번째 법문을 해주신 테라와다불교 이사장이신 빤냐와로 진용 스님이십니다. 

세 번째 말씀을 해주신 테라와다불교 운영위원장이신 냐나로까 혜조 스님이십니다.

그 옆에 계신 스님 성남 성불사에서 법을 펴시는 빤냐완따 스님이십니다. 

연방죽 선원의 담마위하리 법주 스님이십니다. 

담마찌따또야 모임을 이끄는 사사나 스님이십니다. 

하동 신월정사의 가윗사라 스님이십니다. 

해피법당에서 법을 전하고 계신 뿐냐디빠 스님이십니다. 

마하보디 선원의 수마나 스님이십니다. 

 

다음은 태국의 담마까야 재단의 나롱 스님께서 오셨습니다.

다음엔 대만 불광정사, 불광산사의 한국도량인 불광정사의 의은 스님 오셨습니다. 

그리고 한국 스님들 소개를 해드리면요, 

세심정사에 만오 큰스님 오셨습니다. 뒤에 앉아계십니다. 

그다음에 밀양 동화사의 백운 스님 오셨습니다. 

그다음에 광진 스님 오셨습니다.

부산 태종사의 청명 스님 오셨습니다.

그다음에 인천 길성사의 혜명 스님 오셨습니다. 

공주 세종사의 만공 스님 오셨습니다.

그리고 한 두 분 스님이 계신데 제가 여기 법명이 없어서... 

 

이렇게 오늘 오신 스님들 같이 법석을 마련해 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이렇게 해서 대략 전체적인 일정을 마치고, 그다음에는 차담 시간과 함께 자유로운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 출처 원문: 붓다의 길따라 선원 카페

https://cafe.naver.com/buddhayana1/2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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