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일하지 말라는 붓다의 최후의 말씀 (20170602)
pamāda는 「게으름, 방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반인이 이해하는 게으름과 부처님이 말씀하신 게으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은「appamādena sampadetha」~방일하지 말고 해야 할 바를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Appamāda는 불교의 실천, 수행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불도 = appamāda 입니다. 도의 길은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테라와다 불교의 정의입니다. 대승 불교의 정의가 아닙니다.) 괴로움은 마음의 더러움(번뇌)이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음의 더러움을 끊기 위한 수단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appamāda인 것입니다. 보시를 하는 것도, 자애를 지니는 당연한 행위도, 계율을 지켜 도덕을 존중하는 일도, 명상하는 일도 appamāda인 것입니다. 깨닫기 위한 노력은 appamāda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순간순간을 알아차리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어떠한 순간이라도 사띠하고 있도록 노력하게 되면 더러움이 들어가지 않게 됩니다. 알아차리는 것(sati)이 진짜 apamāda입니다.
Vipassanā를 실천하는 것이 sati의 실천 그 자체인 것입니다.
Dhammapada에 이러한 문장이 있습니다.
Appamādo amata padaṁ - 불방일은 불사의 길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padaṁ은 길(道), 다리, 방법, 또는 말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불사에의 길은 불방일이다고 번역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불사란 「죽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불사」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불사는 열반입니다. 해탈입니다. 깨달음입니다. 괴로움의 마지막입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깨달음에의 길은 불방일입니다. 그 길을 걷지 않는 사람은 방일한 게으름뱅이가 됩니다.
그래서 사회의 일반인이 목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장사에 힘써도 불방일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불교로부터 보면 방일한 게으름뱅이가 됩니다.
appamāda는 mad라고 하는 어간으로부터 만들어진 말입니다. mad는 취하는 것입니다. 무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지한 삶의 방법(괴로움, 번뇌가 증가하는 삶의 방법)은 pamāda입니다.
마음을 고요하고 바르게 유지하고, 순간순간을 알아차려서,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힘쓰는 것은 appamāda입니다.
일반적인 세속에서 어떻게 해석해도, 법화경에 무어라고 쓰여 있어도, 선방 스님들이 선문답으로 기뻐하고 있어도, 개인이 자신 취향대로 어떠한 해석을 해도, pamāda / appamāda의 불교적인 정의는 위에 설명한 대로입니다.
* 불방일은 불사의 길이다 *
Appamādo amatapadam, pamādo maccuno padam;
Appamatta na miyanti, ye pamatta yatha mata.
불방일은 불사의 길이고, 방일은 죽음의 길이다.
불방일을 실천하는 사람은 죽지 않고, 방일한 사람은 이미 죽어 있는 것과 같다.
방일(pamāda)은 「죽음」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 반대의 불방일(appamāda)이 「불사」의 길입니다. 「방일=죽음」이며, 「불방일=불사」에의 길입니다.
「불방일을 실천하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불사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방일한 사람」은 이미 죽어 있는 것과 동일합니다.
불방일하다고 하는 것은 사띠를 실천하는 사람에게 사용합니다. 위빳사나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은 실황중계하고 있습니다. 실황중계가 사띠(sati)는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말을 계속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말을 계속하면 현재의 현상에 대한 사띠가 일어납니다. 「손을 듦, 올림, 내림」이라고 하는 경우 손이라고 하는 물체가 이동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 알아차리는 것이 불방일입니다.
그런데 망상은 대단히 방일적인 삶의 방법입니다. 이른바 「지금」의 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순간에서 뛰쳐나가 과거나 미래에 마음이 가면 부처님은 그 사람은 「죽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반인은 「지금을 알아차린다.」고 하는 것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으로부터 보면 모두 죽은 사람 투성이 인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방일한 인간은 죽은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인해 사띠의 실천, 알아차림을 실천하고 있는 경우는 불방일합니다. 그 순간 살아 있습니다.
「손을 듦, 올림, 올림」 「내림, 내림, 내림,」 「오른발 올림, 옮김, 내림」 「왼발 올림, 옮김, 내림」이라고 실제 상황을 사띠하는 그 순간 확실히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신수심법에 대해 사띠의 실천이 성공하면 불사의 경지입니다. 소위 깨달음에 이른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말하면, 항상 지금의 순간에 있는 것이 불사이며, 시간이 어긋나면 죽은 사람이 됩니다.
* 붓다의 「움켜쥔 주먹」은 없다 *
부처님의 유언을 아십니까? 45년간 쉬는 일 없이 80세에 꾸시나라 사라쌍수에서 반열반에 들어가실 때까지 우리 중생들을 연민히 여기시어 진리·도덕·해탈과 해탈에 이르는 길을 계속 말씀하신 부처님입니다.
그 말의 여러 가지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방대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붓다는 각자의 성격·이해 능력 등에 따라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사건을 주제로 해서 말씀하신 가르침도 있습니다. 출가자에게 직접 훈계로서 말씀하신 경전도 또 많이 있습니다. 경전의 내용은 매우 폭이 넓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보통 사람의 기분으로 「부처님의 유언은 무엇인가?」라고 알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특히 북방불교에서는 「불 유교경」 「대승 열반경」등의 경전이 중시된 것으로부터 그것들을 배운 사람들 사이에서 이것이 붓다의 유언이다, 라고 하는 것이 강조되어 온 것 같습니다.
유언은 「사후를 위해서 말을 남겨 두는 것, 또는 그 말」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 어의에 비추어보면 실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유언」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빨리 경전의 「Mahāparinibbānasuttanta(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의 「마지막 여행」을 기록한 경전입니다. 그중에는 부처님의 최후의 말이 명확하게 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언」은 아닙니다. 부처님은 「진리(dhamma)와 도덕(vinaya)의 모든 것을 분명히 말했다. 손바닥에 움켜쥔 채로 숨긴 가르침은 전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붓다가 유언으로서 발표해야 할 일등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유언이라는 말에 걸리면 문제가 일어납니다.
1. 지금까지 이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2.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완전하지 않았다.
이 양쪽 모두의 포인트에 대해 부처님은 단언적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불설은 비록 하나여도 완전하게 말해진 것입니다. 붓다는 스승으로서 모든 것을 가르친 것이며, 여래에 「움켜쥔 주먹은 없다」라고 명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것이 부처님의 유언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여래는 완전하게 말하지 않았다」라고 붓다를 모독하게 됩니다.
* 부처님의 최후의 말씀 *
그러한 뜻으로 유감스럽지만 부처님의 유언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최후의 말이라면 있습니다. 45년간 계속 말한 가운데 부처님의 최후의 말입니다. 그것은 유언이 아니라, 45년간에 걸쳐서 설법하신 부처님이 그 가르침을 모두 집약해서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경고한 말인 것입니다.
「Mahāparinibbānasuttanta(대반열반경)」에 의하면 그 말은 「너희들에게 고하노니 모든 현상은 사라지는 것이다. 방일하지 말고 해야 할 바를 완성하라(appamādena sampādetha)」입니다.
Sampādetha는 「힘쓰세요」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힘쓴다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무언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나름대로 정진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세상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노력하세요 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힘쓴다」란 appamāda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불방일」이라고 번역하지만, 그 의미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사띠」입니다. 사띠의 실천은 붓다의 명상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지금까지 말씀하신 여러 가지 수행을 하나의 단어로 정리했습니다. Appamāda란 불도의 키워드이며, 불도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 아무도 「혁명」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는다. *
인간이 사는 충동은 탐·진·치입니다. 탐·진·치에게 조종되는 대로 살아갑니다. 탐·진·치의 충동으로 살 때, 희망·소망 등의 당근을 뒤쫓아 살아갈 때, 우리는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여유가 없어집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살아 있기 때문에」일어나는 것이라고 하는 단순한 일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우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무엇을 해선 안 되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알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두 「나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일까요?」 「나에게 적합한 학문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맞는 일은 무엇입니까?」등등의 의문을 만들어 망상에 빠집니다. 그래서 속세가 추구하고 있는 행복에 달하는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실패한」인생이 됩니다.
* 현실과의 거리와 망상 중독 *
탐·진·치·희망 등의 충동으로 살면 일어나는 다음의 문제는 「현실과의 거리」입니다. 마음이 과거의 일에 신경이 쓰여 방법이 없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꿈은 끝없이 부풀어 올라 버립니다. 과거도 미래도 결코 현실이 아닙니다. 머릿속에 빙빙 도는 개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실적이지 않은 것, 증거가 필요 없는 것은 얼마든지 머리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코끼리나 용, 유니콘, 현자의 돌, 신, 천사, 요정 등은 매우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 탐·진·치가 자극되므로 푹 빠집니다. 「망상 중독」이 되어버립니다.
계획을 세우는 것도, 꿈을 그리는 것도 자유지만, 실현할 의지도, 전망도 없는 꿈은 의존증의 일종입니다. 실현될 수 있는 계획이라도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실행한다는 것은 현실적인 기능인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말하면 지금·현재에 실행합니다.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실행에 있어서는 아무 관계도 없는 개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현재를 소중히 하는 현실적인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성공을 거둡니다. 부처님은 속된 말로 하면 현실주의자요, 실행주의자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보다, 미래보다, 「지금·현재」라고 하는 포인트를 강조하셨습니다. 「과거에 끌리는 것, 미래를 기대하는 것, 과거는 지나가 버린 것(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은 것(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현재의 현실을 순간순간 나날이 관찰하라」라고 말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머리는 과거를 걱정하는 것, 미래에 기대를 거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현실에 짬이 없습니다. 과거를 생각해 내거나 과거에 고민하거나 하는 것은 끝없이 할 수 있습니다. 장래를 꿈꾸는 일도 끝없이 할 수 있습니다. 평상시도 모든 것을 판단하는 구별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과거의 개념·미래의 개념이 무제한적으로 비집고 들어가면 펑크나 버립니다. 미쳐 버립니다. 오른쪽이나 왼쪽도, 선도 악도 모르게 되어버립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 빠져 버립니다.
이것이 세상의 삶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매우 위험한 삶의 방법입니다. 정신 상태가 언제 망가져 버리는지 모르는 삶의 방법인 것입니다. 탐·진·치에 끌리는 삶의 방법은 방일입니다. 희망·소망 등만을 쫓는 삶의 방법도 방일입니다. 모두 행복하게 되기는커녕, 고민·괴로움·실망·애별리고·원증회고 등의 수렁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 불방일의 실천 *
부처님은 불방일의 실천을 말하셨습니다. 지금·현재의 현실만을 보고 헤아리는 것을 추천했습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현재의 자신을 관찰하는 것으로 각자 발견하라고 말하셨습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하면,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애매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살아 보면 시간이 경과합니다. 순간순간 시간이 경과합니다. 순간에는 어떤 사람이라도 대단한 것은 할 수 없습니다. 손을 드는, 눈꺼풀을 닫는, 다리를 올리는, 다리를 내리는 등의 지극히 단순한 행위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 행위의 연속을 한 다발에 정리하면, 일반적으로 말하는 「산다」라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단어를 사용하게 되면 과거에 일어나 지금 존재하지 않는 대량의 데이터와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념적인 데이터만을 포함하게 됩니다. 현재의 데이터는 없습니다.
현재는 순간뿐이므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지금의 순간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말하는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주 간단하게 「산다는 것은 괴로움의 연속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발견합니다.
「지금까지 무지의 충동으로 살아 있었는데, 사는 것에 고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산다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발견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해탈로 향해서, 순간에 해탈을 체험합니다. 이 삶의 방법이 「불방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appamāda를 힘쓰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최후의 말로 우리에게 「해탈에 이르는 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담마빠다에 이와 같이 말이 있습니다.
「방일해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은 갈애가 말루와 덩굴처럼 증가한다.」
Māluvā라고 하는 덩쿨성 식물은 거대한 수목에 기생하며 삽니다.
순식간에 성장해서 기생하며 사는 나무의 영양분을 다 빨아들여 그 나무를 넘어뜨립니다. 거대한 수목은 마음, 말루와는 갈애입니다.
탐·진·치의 충동으로 사는 사람의 마음은 열매를 구해서 가지에서 가지로 뛰어다니는 원숭이와 같이 안정되지 않습니다.
또한 「욕구·갈애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욕구가 있어도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라고 생각해서 탐·진·치를 가볍게 보는 사람은 괴로움이 서서히 늘어납니다. 그러나 끊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갈애를 끊는 사람은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됩니다. 그 사람들은 이 세상을 괴롭히고 있는 생로병사의 괴로움,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불득고, 5취온고에 골치를 썩이는 것이 없습니다. 괴로움은 연꽃의 잎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과 같이 그 사람에게서 진심으로 떨어집니다. 「불방일」에 힘씁시다.
● 이번 포인트
· 부처님에 감추어진 비밀스런 것은 없습니다.
· 부처님의 유언은 없습니다.
· 부처님은 최후의 말로 불도의 모든 것을 말했습니다.
· 불방일하다는 것은 불도의 키워드입니다.
· 지금을 사띠하는 것이 불방일입니다.
* 방일하지 말라는 붓다의 최후의 말씀 (20170602)
pamāda는 「게으름, 방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반인이 이해하는 게으름과 부처님이 말씀하신 게으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은「appamādena sampadetha」~방일하지 말고 해야 할 바를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Appamāda는 불교의 실천, 수행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불도 = appamāda 입니다. 도의 길은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테라와다 불교의 정의입니다. 대승 불교의 정의가 아닙니다.) 괴로움은 마음의 더러움(번뇌)이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음의 더러움을 끊기 위한 수단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appamāda인 것입니다. 보시를 하는 것도, 자애를 지니는 당연한 행위도, 계율을 지켜 도덕을 존중하는 일도, 명상하는 일도 appamāda인 것입니다. 깨닫기 위한 노력은 appamāda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순간순간을 알아차리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어떠한 순간이라도 사띠하고 있도록 노력하게 되면 더러움이 들어가지 않게 됩니다. 알아차리는 것(sati)이 진짜 apamāda입니다.
Vipassanā를 실천하는 것이 sati의 실천 그 자체인 것입니다.
Dhammapada에 이러한 문장이 있습니다.
Appamādo amata padaṁ - 불방일은 불사의 길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padaṁ은 길(道), 다리, 방법, 또는 말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불사에의 길은 불방일이다고 번역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불사란 「죽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불사」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불사는 열반입니다. 해탈입니다. 깨달음입니다. 괴로움의 마지막입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깨달음에의 길은 불방일입니다. 그 길을 걷지 않는 사람은 방일한 게으름뱅이가 됩니다.
그래서 사회의 일반인이 목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장사에 힘써도 불방일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불교로부터 보면 방일한 게으름뱅이가 됩니다.
appamāda는 mad라고 하는 어간으로부터 만들어진 말입니다. mad는 취하는 것입니다. 무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지한 삶의 방법(괴로움, 번뇌가 증가하는 삶의 방법)은 pamāda입니다.
마음을 고요하고 바르게 유지하고, 순간순간을 알아차려서,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힘쓰는 것은 appamāda입니다.
일반적인 세속에서 어떻게 해석해도, 법화경에 무어라고 쓰여 있어도, 선방 스님들이 선문답으로 기뻐하고 있어도, 개인이 자신 취향대로 어떠한 해석을 해도, pamāda / appamāda의 불교적인 정의는 위에 설명한 대로입니다.
* 불방일은 불사의 길이다 *
Appamādo amatapadam, pamādo maccuno padam;
Appamatta na miyanti, ye pamatta yatha mata.
불방일은 불사의 길이고, 방일은 죽음의 길이다.
불방일을 실천하는 사람은 죽지 않고, 방일한 사람은 이미 죽어 있는 것과 같다.
방일(pamāda)은 「죽음」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 반대의 불방일(appamāda)이 「불사」의 길입니다. 「방일=죽음」이며, 「불방일=불사」에의 길입니다.
「불방일을 실천하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불사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방일한 사람」은 이미 죽어 있는 것과 동일합니다.
불방일하다고 하는 것은 사띠를 실천하는 사람에게 사용합니다. 위빳사나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은 실황중계하고 있습니다. 실황중계가 사띠(sati)는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말을 계속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말을 계속하면 현재의 현상에 대한 사띠가 일어납니다. 「손을 듦, 올림, 내림」이라고 하는 경우 손이라고 하는 물체가 이동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 알아차리는 것이 불방일입니다.
그런데 망상은 대단히 방일적인 삶의 방법입니다. 이른바 「지금」의 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순간에서 뛰쳐나가 과거나 미래에 마음이 가면 부처님은 그 사람은 「죽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반인은 「지금을 알아차린다.」고 하는 것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으로부터 보면 모두 죽은 사람 투성이 인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방일한 인간은 죽은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인해 사띠의 실천, 알아차림을 실천하고 있는 경우는 불방일합니다. 그 순간 살아 있습니다.
「손을 듦, 올림, 올림」 「내림, 내림, 내림,」 「오른발 올림, 옮김, 내림」 「왼발 올림, 옮김, 내림」이라고 실제 상황을 사띠하는 그 순간 확실히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신수심법에 대해 사띠의 실천이 성공하면 불사의 경지입니다. 소위 깨달음에 이른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말하면, 항상 지금의 순간에 있는 것이 불사이며, 시간이 어긋나면 죽은 사람이 됩니다.
* 붓다의 「움켜쥔 주먹」은 없다 *
부처님의 유언을 아십니까? 45년간 쉬는 일 없이 80세에 꾸시나라 사라쌍수에서 반열반에 들어가실 때까지 우리 중생들을 연민히 여기시어 진리·도덕·해탈과 해탈에 이르는 길을 계속 말씀하신 부처님입니다.
그 말의 여러 가지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방대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붓다는 각자의 성격·이해 능력 등에 따라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사건을 주제로 해서 말씀하신 가르침도 있습니다. 출가자에게 직접 훈계로서 말씀하신 경전도 또 많이 있습니다. 경전의 내용은 매우 폭이 넓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보통 사람의 기분으로 「부처님의 유언은 무엇인가?」라고 알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특히 북방불교에서는 「불 유교경」 「대승 열반경」등의 경전이 중시된 것으로부터 그것들을 배운 사람들 사이에서 이것이 붓다의 유언이다, 라고 하는 것이 강조되어 온 것 같습니다.
유언은 「사후를 위해서 말을 남겨 두는 것, 또는 그 말」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 어의에 비추어보면 실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유언」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빨리 경전의 「Mahāparinibbānasuttanta(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의 「마지막 여행」을 기록한 경전입니다. 그중에는 부처님의 최후의 말이 명확하게 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언」은 아닙니다. 부처님은 「진리(dhamma)와 도덕(vinaya)의 모든 것을 분명히 말했다. 손바닥에 움켜쥔 채로 숨긴 가르침은 전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붓다가 유언으로서 발표해야 할 일등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유언이라는 말에 걸리면 문제가 일어납니다.
1. 지금까지 이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2.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완전하지 않았다.
이 양쪽 모두의 포인트에 대해 부처님은 단언적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불설은 비록 하나여도 완전하게 말해진 것입니다. 붓다는 스승으로서 모든 것을 가르친 것이며, 여래에 「움켜쥔 주먹은 없다」라고 명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것이 부처님의 유언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여래는 완전하게 말하지 않았다」라고 붓다를 모독하게 됩니다.
* 부처님의 최후의 말씀 *
그러한 뜻으로 유감스럽지만 부처님의 유언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최후의 말이라면 있습니다. 45년간 계속 말한 가운데 부처님의 최후의 말입니다. 그것은 유언이 아니라, 45년간에 걸쳐서 설법하신 부처님이 그 가르침을 모두 집약해서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경고한 말인 것입니다.
「Mahāparinibbānasuttanta(대반열반경)」에 의하면 그 말은 「너희들에게 고하노니 모든 현상은 사라지는 것이다. 방일하지 말고 해야 할 바를 완성하라(appamādena sampādetha)」입니다.
Sampādetha는 「힘쓰세요」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힘쓴다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무언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나름대로 정진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세상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노력하세요 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힘쓴다」란 appamāda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불방일」이라고 번역하지만, 그 의미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사띠」입니다. 사띠의 실천은 붓다의 명상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지금까지 말씀하신 여러 가지 수행을 하나의 단어로 정리했습니다. Appamāda란 불도의 키워드이며, 불도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 아무도 「혁명」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는다. *
인간이 사는 충동은 탐·진·치입니다. 탐·진·치에게 조종되는 대로 살아갑니다. 탐·진·치의 충동으로 살 때, 희망·소망 등의 당근을 뒤쫓아 살아갈 때, 우리는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여유가 없어집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살아 있기 때문에」일어나는 것이라고 하는 단순한 일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우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무엇을 해선 안 되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알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두 「나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일까요?」 「나에게 적합한 학문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맞는 일은 무엇입니까?」등등의 의문을 만들어 망상에 빠집니다. 그래서 속세가 추구하고 있는 행복에 달하는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실패한」인생이 됩니다.
* 현실과의 거리와 망상 중독 *
탐·진·치·희망 등의 충동으로 살면 일어나는 다음의 문제는 「현실과의 거리」입니다. 마음이 과거의 일에 신경이 쓰여 방법이 없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꿈은 끝없이 부풀어 올라 버립니다. 과거도 미래도 결코 현실이 아닙니다. 머릿속에 빙빙 도는 개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실적이지 않은 것, 증거가 필요 없는 것은 얼마든지 머리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코끼리나 용, 유니콘, 현자의 돌, 신, 천사, 요정 등은 매우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 탐·진·치가 자극되므로 푹 빠집니다. 「망상 중독」이 되어버립니다.
계획을 세우는 것도, 꿈을 그리는 것도 자유지만, 실현할 의지도, 전망도 없는 꿈은 의존증의 일종입니다. 실현될 수 있는 계획이라도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실행한다는 것은 현실적인 기능인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말하면 지금·현재에 실행합니다.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실행에 있어서는 아무 관계도 없는 개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현재를 소중히 하는 현실적인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성공을 거둡니다. 부처님은 속된 말로 하면 현실주의자요, 실행주의자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보다, 미래보다, 「지금·현재」라고 하는 포인트를 강조하셨습니다. 「과거에 끌리는 것, 미래를 기대하는 것, 과거는 지나가 버린 것(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은 것(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현재의 현실을 순간순간 나날이 관찰하라」라고 말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머리는 과거를 걱정하는 것, 미래에 기대를 거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현실에 짬이 없습니다. 과거를 생각해 내거나 과거에 고민하거나 하는 것은 끝없이 할 수 있습니다. 장래를 꿈꾸는 일도 끝없이 할 수 있습니다. 평상시도 모든 것을 판단하는 구별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과거의 개념·미래의 개념이 무제한적으로 비집고 들어가면 펑크나 버립니다. 미쳐 버립니다. 오른쪽이나 왼쪽도, 선도 악도 모르게 되어버립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 빠져 버립니다.
이것이 세상의 삶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매우 위험한 삶의 방법입니다. 정신 상태가 언제 망가져 버리는지 모르는 삶의 방법인 것입니다. 탐·진·치에 끌리는 삶의 방법은 방일입니다. 희망·소망 등만을 쫓는 삶의 방법도 방일입니다. 모두 행복하게 되기는커녕, 고민·괴로움·실망·애별리고·원증회고 등의 수렁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 불방일의 실천 *
부처님은 불방일의 실천을 말하셨습니다. 지금·현재의 현실만을 보고 헤아리는 것을 추천했습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현재의 자신을 관찰하는 것으로 각자 발견하라고 말하셨습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하면,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애매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살아 보면 시간이 경과합니다. 순간순간 시간이 경과합니다. 순간에는 어떤 사람이라도 대단한 것은 할 수 없습니다. 손을 드는, 눈꺼풀을 닫는, 다리를 올리는, 다리를 내리는 등의 지극히 단순한 행위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 행위의 연속을 한 다발에 정리하면, 일반적으로 말하는 「산다」라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단어를 사용하게 되면 과거에 일어나 지금 존재하지 않는 대량의 데이터와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념적인 데이터만을 포함하게 됩니다. 현재의 데이터는 없습니다.
현재는 순간뿐이므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지금의 순간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말하는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주 간단하게 「산다는 것은 괴로움의 연속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발견합니다.
「지금까지 무지의 충동으로 살아 있었는데, 사는 것에 고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산다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발견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해탈로 향해서, 순간에 해탈을 체험합니다. 이 삶의 방법이 「불방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appamāda를 힘쓰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최후의 말로 우리에게 「해탈에 이르는 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담마빠다에 이와 같이 말이 있습니다.
「방일해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은 갈애가 말루와 덩굴처럼 증가한다.」
Māluvā라고 하는 덩쿨성 식물은 거대한 수목에 기생하며 삽니다.
순식간에 성장해서 기생하며 사는 나무의 영양분을 다 빨아들여 그 나무를 넘어뜨립니다. 거대한 수목은 마음, 말루와는 갈애입니다.
탐·진·치의 충동으로 사는 사람의 마음은 열매를 구해서 가지에서 가지로 뛰어다니는 원숭이와 같이 안정되지 않습니다.
또한 「욕구·갈애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욕구가 있어도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라고 생각해서 탐·진·치를 가볍게 보는 사람은 괴로움이 서서히 늘어납니다. 그러나 끊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갈애를 끊는 사람은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됩니다. 그 사람들은 이 세상을 괴롭히고 있는 생로병사의 괴로움,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불득고, 5취온고에 골치를 썩이는 것이 없습니다. 괴로움은 연꽃의 잎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과 같이 그 사람에게서 진심으로 떨어집니다. 「불방일」에 힘씁시다.
● 이번 포인트
· 부처님에 감추어진 비밀스런 것은 없습니다.
· 부처님의 유언은 없습니다.
· 부처님은 최후의 말로 불도의 모든 것을 말했습니다.
· 불방일하다는 것은 불도의 키워드입니다.
· 지금을 사띠하는 것이 불방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