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졸음은 싫다’는 번뇌를 끊을 수 있는 방법 (20210403)
옛날에 느낌에 대한 관찰을 하면서 좋다 싫다 하는 것에 대해서 관찰하는 법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수행하다 보면 졸리죠? 인제는 봄이라서 더더구나 잘 졸릴 겁니다. 졸음을 극복하는 법에 대한 거는 몇번 법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졸음은 싫다’ 하는 것에 대한 번뇌, 성냄이죠? ‘졸음은 싫다’는 번뇌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졸음이 오면 가장 먼저 뭐가 먼저 생길까? 수행해야 되는데 수행이 잘 될 거 아니라. 그럼 성내는 마음이 불쑥 일어나겠죠? 성내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다음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 싫어’ 하는 마음입니다. 졸음이 싫다는 마음, 졸리면 사띠하는 것이 힘들고 노력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그래서 사고가 작용을 하게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망상을 한다는 겁니다. 졸음이 오면 ‘졸리는 것이 싫은데’ 그게 에너지가 돼서 성냄은 더욱더 커지게 되는 겁니다.
어디서 끊어버려야 졸음은 싫다는 번뇌를 끊을 수가 있을까? 어디가 약한 고리일 거 같애? 왜 졸음이 올까? 지금까지는 마음의 작용이잖아. 마음의 작용인데, 졸리는 것은 몸의 작용이잖아. 상호 연관성이 있죠? 아비담마 같은 경우에는 몸의 물질의 4분의 1을 마음이 만든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졸리는 현상도 마음이 만들어서 몸이 졸려지고 나른해지고 하는 상태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 졸려지고 하면은 당연히 마음은 또 둔해지게 되는 거고, 둔해지면 당연히 사띠하는 것은 사라져 버리고 졸음에 빠지든지 그렇지 않으면은 ‘아, 졸리는 게 싫은데’ 하는 감정으로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전에 그런 얘기를 했죠? 졸음이 오면 어디서 끊으라고 그랬어요? 졸음이 오면 졸음이 오는 길이 분명히 있다고 그랬죠? 그냥 졸리면 졸린다 ‘졸음’ ‘졸음’ ‘졸음’ 해가지고는 졸음은 안 달아나집니다.
졸음이 오는 길은 반드시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거움이 오든지 그렇지 않으면은 뭔가 떼떼 쑤시는 느낌이 있든지 실재적인 느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위로 누르는 느낌이 있든지 합니다.
이런 실재적인 느낌이 있을 때 실재적인 느낌이 가장 약한 부분, 가장 강하지 않는 부분을 알아차리면 졸음은 달아난다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경전상에는 졸음이 올 때는 경행을 하든지, 경행을 하다가도 졸음이 오면은 눈을 비비든지 햇빛에 눈을 강하게 쪼이든지 이런 식으로 졸음이 달아나도록 만들어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근데 수행하면서 그렇게 계속할 순 없는 거니까 졸음이 오면 졸음이 오는 길을 분명히 보아서 그 길에서 ‘쑤심’이 있으면 ‘졸음’이라고 관찰하지 말고, 졸음은 ‘관념’이기 때문에 ‘쑤신다’고 분명히 관찰을 해야 됩니다.
송곳이 두 개 맞닿는 느낌이 있으면 송곳이 두 개가 맞닿으면서 일어나는 느낌을 분명하게 관찰을 하라는 거라. 그게 끝나고 나야 그다음에 다른 느낌이 있고, 또 다른 느낌이 있고 이런 식으로 하다가 결국에는 느낌이 아주 강해지면서 졸음에 툭 떨어지는 거라.
마찬가지로 ‘졸음이 싫다’는 것도 길이 있다는 거라. 왜 이걸, 졸음은 싫다는 것들을 관찰을 해야 될까? 좋고 싫은 것은 선한 겁니까, 불선한 겁니까? 불선한 거죠.!사띠는 선한 겁니까, 불선한 겁니까? 선한 거죠! 그러면 불선한 것으로는 어떤 경우든지 사띠를 정확하게 할 수도 없고, 사띠를 지속해나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할 것 같으면 불선한 것들을 마음으로부터 일단은 몰아내야 됩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몰아내든지, 아니면 다른 대상을 관찰하면서 몰아내든지, 어떤 식으로든 몰아내야 만이 사띠를 지속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가끔씩 앉아서 좌선을 하다가 졸음이 오는 사람(스님)들을 보면, 그 사람들에게 불어봅니다. 어떤 식으로 해서 그 졸음을 물리치느냐? 하고 물어봅니다.
“일단 가장 먼저 만드는 것이 싫다는 느낌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어라.”
싫어해버리고 나면 사띠는 안된다는 거라. 그거하고 싸울려고 하는 거니까. 여러분이 졸음하고 싸워가 이길 수 있을 거 같애요? 못 이깁니다. 그건 절대 이길 수 없는 대상이라.
싫다는 느낌은 일단 안 들도록 만들어야 되기 때문에, 차라리 스님을 생각한다든지 부처님을 생각한다든지 정 안되면 자애명상을 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그 싫다는 마음을 일단은 선한 마음으로 바꿔주면 되는 거라. 그렇게 하고 나면 훨씬 수월하다는 거라.
그러고 나면 어, 대상이 어딨지 하고 알아차리다 보면 대상이 보인다는 거라. 그러면 그냥 편안하게 다시 대상을 알아차리면 된다는 거라. 호흡이면 호흡, 코끝이면 코끝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싫다는 것도 수행에서는 망상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것은 이게 지금 선한 작용을 하는 건지 불선한 작용을 하는 건지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사띠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된다는 거라. 사띠를 안 하고 싫다는 마음에 자꾸 사띠를 할려고 한다면은 이미 사띠를 안하고 있다는 거라. 그럼 그거부터 먼저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본인이 사띠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마음에서 탐·진·치가 일어나고 있다면 일단은 사띠를 안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거 먼저 알아차리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요.
어떤 사람은 그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싫다는 마음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싫다는 마음은 관찰함과 동시에 ‘싫다는 마음’은 이미 없어져버리고 ‘사띠하는 마음’이 자리잡아 버려야 되는 거라. 그걸 지속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그거는 수행을 엉터리로 하고 있다는 얘기라. 어떤 경우든지 탐진치가 일어났으면 탐진치가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리고 ‘아, 내가 사띠를 놓쳤네’ 하고 알아차리고, 사띠하는 마음으로 빨리 바꾸어야 되는 거라.
그러고 나서 두 번째로 해야 되는 게 아까 뭐라고 했어요? 그 스님들이 하듯이 선한 마음으로 바꿔주는 거라. 왜 그렇게 해야 될까?
이게 지금 나를 해탈로 이끄는지 아니면 해탈이 아닌 방향으로 이끄는 건지,
행복한 것으로 이끌어 주는 건지 아니면 행복하지 않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건지,
지금 이 시간을 유익하게 보내는 건지 유익하게 보내지 않는 건지,
이게 지금 나한테 도움이 되는 건지 도움이 되지 않는 건지를 분명하게 구분을 해야 된다는 거라.
싫은 마음을 관찰하는데 나한테 도움이 안된다는 거라. 왜 그러냐 하면 싫다는 마음은 한번 일어나면 괜찮은데 한번 일어나는 게 아니고 지속적으로 계속 일어나지게 됩니다. 오히려 증폭을 시키게 돼버립니다. 항상 롤러코스터를 타게 됩니다. 그럼 그때는 그게 없어졌다 치자. 다음에는 또 다른 반응으로 인해가지고 자극으로 인해서 또 일어나게끔 됩니다.
이게 습관이 될 거 같으면 뭔 대상을 만나면 먼저 싫다는 마음이 먼저 불쑥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왜? 자기하고 의견이 틀리고, 자기의 견해와 맞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안 될 거 같으면 싫다는 게 먼저 일어나게 됩니다. 이게 습관이 되면은 이걸 못고쳐. 안 고쳐져요. 무조건 대상을 만나면 자신하고 부딪치는 게 있으면 ‘싫다’가 돼고, 자신하고 맞는 게 있으면 ‘좋다’가 돼버리는 거라.
습관적으로 그렇게 돼버리면 나중에는 수행을 해도, 수행을 하면 장애들이 굉장히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졸음부터 해가지고 통증, 여러 가지들이 일어나는데 이게 그거부터 일어나는 게 아니고 무조건 먼저 ‘좋다’ ‘싫다’ 부터 먼저 일어나지게 되는 거라.
그래서 분명하게 본인이 체크를 해봐야 됩니다.
이게 지금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나를 편안하고 고요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건지 아니면 반대 방향으로 이끄는 건지,
이게 지금 나에게 이 시간에 해야되는데 나에게 이익이 있는 건지 그렇지 않고 그냥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지 분명하게 따져라는 거라.
그래서 아니다 싶을 때는 지금 내가 그 ‘졸음이 싫다’는 감정이 계속적으로 해가지고 쌓여가지고 빨리 몰아내기가 힘들다 할 것 같으면 그건 놓아버려야 되는 거라. 그걸 가지고 수행대상으로 해서 ‘아, 나는 싫다는 마음을 관찰하고 있다’ 그건 아니라는 거라. 놔버리고 아까 같이 부처님을 회상한다든지, 자애수행을 한다든지, 선한 사고로 빨리 바꾸라는 거라.
습관드는 거는 빨리 막아줘야 되는 거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마음이 선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나면은, 사띠 하는 것은 똑같은 선한 마음이기 때문에 하기가 쉬워진다는 거라. 대상을 알아차리기가 쉬워진다는 거라.
나중에는 의심까지 듭니다. ‘어, 내가 이거 계속해가 되나?’ 그게 도가 지나치게 되면 결국은 수행 포기해버립니다. 졸릴 바에야 그냥 내가 수행 안 하고 다른 거 하지. 졸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졸리는 것이 싫다는 마음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이미 수행에 대한 의심이 강해져 버려서 그냥 수행을 포기해 버리는 거라.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졸리는 것은 몸의 반응인데, 졸리는 것이 싫다는 것은 마음의 반응입니다. 여러분이 수행을 그만두는 것은 몸의 반응으로 인해서 그만두어지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반응으로 인해서 그만두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라는 거라. 어쩔 수 없이 많이 피곤해가지고 몸이 도저히 못 따라올 때는 그거는 어쩔 수 없는 거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대부분은 습관적으로 그렇게 바뀌어버린다는 거라.
나른해지고, 무거워져와지고, 딱딱해져와지고, 유연성도 없어지고, 아픔도 와진다는 거라. 그게 졸음이 싫다는 감정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변화들입니다. 그러면서 의심까지 해서 나중에는 포기를 해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게 졸음이 싫다는 감정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길들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마음을 둔하게 해서 사띠하는 것들을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졸음에도 약한 고리를 끊어버려야 되듯이 졸음이 싫다는 번뇌도 약한 고리에서 여러분들이 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어디가 약한 고리일까? 나른해질 때? 아니면 무거워질 때? 딱딱해질 때? 사띠가 강하면 그 어떤 부분에서도 졸음은 싫다는 감정을 끊을 수가 있습니다. 근데 대부분은 거기서 잘 안 끊어집니다.
왜 그럴까? 육체적인 현상들은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끊기가 쉽습니다. 근데 마음의 현상은 이미 그것들이 일어났을 때는 그것들을 끊기에는 참 힘이 든다는 거라. 그마만큼 더 관리하기가 힘든 게 이 마음입니다.
거기서 대부분 끊어지는 게 아니고 그 전에서 끊어야 됩니다. 혹시 수행 중에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뭉게구름 혹시 잡아본 적이 있어요? 수행하다가? 대상은 보이지는 않고 대상이 마치 생각이 뭉게뭉게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싫다는 마음이 일어나는 전조단계입니다.
마음에서 뭔가 지금은 알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이 탁 일어나면은 마음에서 그다음에 일어나는 것이 마음에서 뭔가 뭉게뭉게 생각이 일어나는 것들이 보여집니다.
그때 ‘아, 이게 싫다는 마음이구나. 싫다는 감정이구나’ 하고 탁 거기서 끊어야 되는 거라. 그러면은 ‘졸음은 싫다’는 마음은 금방 확 달아납니다. 뒤통수에서 바람이 확 구멍이 뜷려서 통과하듯이 정신이 반짝 맑아지게 되는 거라. 그래서 졸음이 싫다는 감정이 일어났을 때는 그 감정이 일어나는 전조단계, 뭔가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오를 때 그때 그것들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게 수행할 때 ‘좋다’ ‘싫다’ 하는 느낌들이 일어날 때 관찰하는 방법 중에 하납니다.
또 하나는 가끔 여러분들 중에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 중에 손주들이 있다고 칩시다. 손주들 걸어가면서 조부는 거 봤어요? 봤죠? 근데 여러분들은 걸어가면서 조분 적이 있어요? 군에 갔다 온 사람들은 군에 행군하면서 조부는 경우들이 있을 거라.
그때 회상들을 잘 한번 해보십시오. 의지가 강했던가? 졸음을 이길려고 하는 의지가 강했는지, 아마 대부분은 그 의지가 약해져 있는 상태라. 그랬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걸어가면서도 조분다는 것들이 성립된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어른들은 이미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어린아이와 다릅니다.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걸어가면서 조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왜 그럴까?
대상에 집중하기 가장 좋을 때는, 걸어갈 때 대상에 집중하기가 가장 쉽습니다.
앉아서 호흡을 관찰한다? 이게 집중하는 힘이 클까, 아니면 걸어갈 때 집중하는 힘이 클까? 걸어갈 때가 훨씬 큽니다. 집중하는 힘이 약해져 있고 의지력이 약해져 있을 때는 조불 수가 있다고 착각을 한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하기 싫다는 겁니다. 그냥 ‘앞 사람만 보고 따라가면 되니까’ 하는 생각을 하고, 내가 스스로 걸어갈 생각을 안 한다는 거라.
그래서 집중의 힘이 약할 때는 졸음이 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은 뭐냐 하면 수행을 할 때의 기본을 항상 기억을 해야 됩니다. 수행은 어떻게 한다고 그랬어요?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하고 가볍게 대상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누가 여러분들하고 줄잡아 당기는 거 겨루기하라고 한 거는 아니잖아 수행할 때.
왜 대상하고 힘겨루기를 하는데? 싫다는 느낌하고 여러분들이 힘겨루기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라. 그럴 이유도 없고 그게 안 되면, 싫다는 마음이 일어나기 전에 차라리 경행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대상을 자주 옮겨주라는 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안되면, 일어나고 사라지고 앉고 닿음 1포인트, 일어나고 사라지고 앉고 닿음 2포인트 해서 닿는 포인트를 여러 가지로 늘려주면 된다는 거라. 대상을 많이 옮겨주면은 집중력도 커지고, 그리고 그 대상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힘겨루기를 하지 않게 됩니다.
근데 왜 굳이 꼭 그 싫다는 마음하고 힘겨루기를 하느냐는 거라. 수행은 절대 대상과 힘겨루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태국 같은 경우에는 철길에 기차가 자주 다니지 않기 때문에 스님이 머무르는 절에는 조금만 가면 기찻길이 있어요. 그러면 가끔씩 그 기찻길 위에 올라가서 이렇게 경행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안 떨어지고 경행할 수 있어요? 그 한 길로?
쭉 가면 편안하게 해가지고 가면 그냥 좌측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우측으로도 치우치지도 않고 편안하게 가집니다. 그러면 목적한 데까지 그냥 걸음걸이를 알아차리면서 떨어지지도 않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고 목적지에 도달을 한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 한번 본인이 생각을 해보십시오. 물론 몸의 균형감각이 좀 무너진 사람들은 아예 처음부터 안됩니다. 일반 정상적인 사람들은 거의 가능해집니다.
편안하게 목적지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한발 한발 왼발 오른발만 집중해서 하나씩 하나씩 하고 ‘왼발’ 다음에 ‘오른발’ 했을 때 왼발 잊어버리고 오른발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금방 놔버리고 지금 현재 있는 것에다가 집중을 하면 양쪽으로 쏠리지도 않고 그대로 편안하게 걷게 되는 거라. 그대신 전제조건이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하고 가벼워야 된다는 것.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그와 같습니다. 사띠의 마음은 그와 같다는 거라. 근데 그렇게 하지 못하면 몸이 갸우뚱하면서 왼쪽으로 떨어지든지 오른쪽으로 떨어지듯이, 불선한 마음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싫다는 마음들이나 좋다는 마음들이 분명하게 일어나는 거라. 탐진치의 마음이 일어나면은 그쪽으로 떨어져버린다는 거라. 짧은 찰나지만은 몸이 완전히 기울기 전에 처음에 기울 때 탁 알아차려서 바로잡아버리면 편안하게 다시 제자리로 와집니다.
‘졸음은 싫다’는 마음도 처음에 일어나는감정을 탁 잡아야 만이 바로 제자리에 와진다는 거라. 나중에 뒤에 무겁고 딱딱하고 하는 거, 그거 일어났을 때는 몸이 이미 완전히 기울어져서 떨어지는 상태라는 거라. 잡기가 힘들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관찰하게 될 때는 여러분들은 좀 더 사띠를 강하게 해야 되고, 좀 더 노력을 많이 해야 되는 거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몸보다도 훨씬 그 마음에 좌우돼버리게 됩니다. 지배당해버립니다.
그래서 ‘졸음은 싫다’는 감정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에서는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불선한 마음이라는 거라. 어느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그것이 습관이 되면은 조그만한 자극에도 불선한 마음이 금방 반응을 하게 됩니다.
레일을 타고 갈 때 편안하게 그 레일을 한발 한발 옮기는 거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일상생활에서는 항상 팔정도를 염두에 둬야됩니다.
내가 계율이 부족한지, 편안하고 고요한 마음들을 가지는 것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대상을 알아차리는 사띠가 부족한 건지, 집중하는 것들이 부족한 건지를 분명하게자꾸 알아차려야 됩니다.
팔정도가 균형이 딱 맞아질 때 레일을 편안하고 가볍게 목적지까지 걸어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이 항상 그런 중도의 마음들을 가지게 될 때 ‘졸음은 싫다’는 마음에 휩싸이지 않고 편안하게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수행들을 좀 더 열심히 하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 오늘 붓다의 길따라 선원장 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녹취한 것입니다.
스님 법문 녹음하고 사진자료들을 남겨주신 대구 법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_()()()_
게시자 :
담마마-마까(김은희)
모두 평온하기를
Apr 3, 2021, 7:28 PM
* ‘졸음은 싫다’는 번뇌를 끊을 수 있는 방법 (20210403)
옛날에 느낌에 대한 관찰을 하면서 좋다 싫다 하는 것에 대해서 관찰하는 법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수행하다 보면 졸리죠? 인제는 봄이라서 더더구나 잘 졸릴 겁니다. 졸음을 극복하는 법에 대한 거는 몇번 법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졸음은 싫다’ 하는 것에 대한 번뇌, 성냄이죠? ‘졸음은 싫다’는 번뇌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졸음이 오면 가장 먼저 뭐가 먼저 생길까? 수행해야 되는데 수행이 잘 될 거 아니라. 그럼 성내는 마음이 불쑥 일어나겠죠? 성내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다음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 싫어’ 하는 마음입니다. 졸음이 싫다는 마음, 졸리면 사띠하는 것이 힘들고 노력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그래서 사고가 작용을 하게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망상을 한다는 겁니다. 졸음이 오면 ‘졸리는 것이 싫은데’ 그게 에너지가 돼서 성냄은 더욱더 커지게 되는 겁니다.
어디서 끊어버려야 졸음은 싫다는 번뇌를 끊을 수가 있을까? 어디가 약한 고리일 거 같애? 왜 졸음이 올까? 지금까지는 마음의 작용이잖아. 마음의 작용인데, 졸리는 것은 몸의 작용이잖아. 상호 연관성이 있죠? 아비담마 같은 경우에는 몸의 물질의 4분의 1을 마음이 만든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졸리는 현상도 마음이 만들어서 몸이 졸려지고 나른해지고 하는 상태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 졸려지고 하면은 당연히 마음은 또 둔해지게 되는 거고, 둔해지면 당연히 사띠하는 것은 사라져 버리고 졸음에 빠지든지 그렇지 않으면은 ‘아, 졸리는 게 싫은데’ 하는 감정으로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전에 그런 얘기를 했죠? 졸음이 오면 어디서 끊으라고 그랬어요? 졸음이 오면 졸음이 오는 길이 분명히 있다고 그랬죠? 그냥 졸리면 졸린다 ‘졸음’ ‘졸음’ ‘졸음’ 해가지고는 졸음은 안 달아나집니다.
졸음이 오는 길은 반드시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거움이 오든지 그렇지 않으면은 뭔가 떼떼 쑤시는 느낌이 있든지 실재적인 느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위로 누르는 느낌이 있든지 합니다.
이런 실재적인 느낌이 있을 때 실재적인 느낌이 가장 약한 부분, 가장 강하지 않는 부분을 알아차리면 졸음은 달아난다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경전상에는 졸음이 올 때는 경행을 하든지, 경행을 하다가도 졸음이 오면은 눈을 비비든지 햇빛에 눈을 강하게 쪼이든지 이런 식으로 졸음이 달아나도록 만들어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근데 수행하면서 그렇게 계속할 순 없는 거니까 졸음이 오면 졸음이 오는 길을 분명히 보아서 그 길에서 ‘쑤심’이 있으면 ‘졸음’이라고 관찰하지 말고, 졸음은 ‘관념’이기 때문에 ‘쑤신다’고 분명히 관찰을 해야 됩니다.
송곳이 두 개 맞닿는 느낌이 있으면 송곳이 두 개가 맞닿으면서 일어나는 느낌을 분명하게 관찰을 하라는 거라. 그게 끝나고 나야 그다음에 다른 느낌이 있고, 또 다른 느낌이 있고 이런 식으로 하다가 결국에는 느낌이 아주 강해지면서 졸음에 툭 떨어지는 거라.
마찬가지로 ‘졸음이 싫다’는 것도 길이 있다는 거라. 왜 이걸, 졸음은 싫다는 것들을 관찰을 해야 될까? 좋고 싫은 것은 선한 겁니까, 불선한 겁니까? 불선한 거죠.!사띠는 선한 겁니까, 불선한 겁니까? 선한 거죠! 그러면 불선한 것으로는 어떤 경우든지 사띠를 정확하게 할 수도 없고, 사띠를 지속해나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할 것 같으면 불선한 것들을 마음으로부터 일단은 몰아내야 됩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몰아내든지, 아니면 다른 대상을 관찰하면서 몰아내든지, 어떤 식으로든 몰아내야 만이 사띠를 지속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가끔씩 앉아서 좌선을 하다가 졸음이 오는 사람(스님)들을 보면, 그 사람들에게 불어봅니다. 어떤 식으로 해서 그 졸음을 물리치느냐? 하고 물어봅니다.
“일단 가장 먼저 만드는 것이 싫다는 느낌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어라.”
싫어해버리고 나면 사띠는 안된다는 거라. 그거하고 싸울려고 하는 거니까. 여러분이 졸음하고 싸워가 이길 수 있을 거 같애요? 못 이깁니다. 그건 절대 이길 수 없는 대상이라.
싫다는 느낌은 일단 안 들도록 만들어야 되기 때문에, 차라리 스님을 생각한다든지 부처님을 생각한다든지 정 안되면 자애명상을 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그 싫다는 마음을 일단은 선한 마음으로 바꿔주면 되는 거라. 그렇게 하고 나면 훨씬 수월하다는 거라.
그러고 나면 어, 대상이 어딨지 하고 알아차리다 보면 대상이 보인다는 거라. 그러면 그냥 편안하게 다시 대상을 알아차리면 된다는 거라. 호흡이면 호흡, 코끝이면 코끝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싫다는 것도 수행에서는 망상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것은 이게 지금 선한 작용을 하는 건지 불선한 작용을 하는 건지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사띠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된다는 거라. 사띠를 안 하고 싫다는 마음에 자꾸 사띠를 할려고 한다면은 이미 사띠를 안하고 있다는 거라. 그럼 그거부터 먼저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본인이 사띠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마음에서 탐·진·치가 일어나고 있다면 일단은 사띠를 안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거 먼저 알아차리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요.
어떤 사람은 그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싫다는 마음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싫다는 마음은 관찰함과 동시에 ‘싫다는 마음’은 이미 없어져버리고 ‘사띠하는 마음’이 자리잡아 버려야 되는 거라. 그걸 지속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그거는 수행을 엉터리로 하고 있다는 얘기라. 어떤 경우든지 탐진치가 일어났으면 탐진치가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리고 ‘아, 내가 사띠를 놓쳤네’ 하고 알아차리고, 사띠하는 마음으로 빨리 바꾸어야 되는 거라.
그러고 나서 두 번째로 해야 되는 게 아까 뭐라고 했어요? 그 스님들이 하듯이 선한 마음으로 바꿔주는 거라. 왜 그렇게 해야 될까?
이게 지금 나를 해탈로 이끄는지 아니면 해탈이 아닌 방향으로 이끄는 건지,
행복한 것으로 이끌어 주는 건지 아니면 행복하지 않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건지,
지금 이 시간을 유익하게 보내는 건지 유익하게 보내지 않는 건지,
이게 지금 나한테 도움이 되는 건지 도움이 되지 않는 건지를 분명하게 구분을 해야 된다는 거라.
싫은 마음을 관찰하는데 나한테 도움이 안된다는 거라. 왜 그러냐 하면 싫다는 마음은 한번 일어나면 괜찮은데 한번 일어나는 게 아니고 지속적으로 계속 일어나지게 됩니다. 오히려 증폭을 시키게 돼버립니다. 항상 롤러코스터를 타게 됩니다. 그럼 그때는 그게 없어졌다 치자. 다음에는 또 다른 반응으로 인해가지고 자극으로 인해서 또 일어나게끔 됩니다.
이게 습관이 될 거 같으면 뭔 대상을 만나면 먼저 싫다는 마음이 먼저 불쑥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왜? 자기하고 의견이 틀리고, 자기의 견해와 맞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안 될 거 같으면 싫다는 게 먼저 일어나게 됩니다. 이게 습관이 되면은 이걸 못고쳐. 안 고쳐져요. 무조건 대상을 만나면 자신하고 부딪치는 게 있으면 ‘싫다’가 돼고, 자신하고 맞는 게 있으면 ‘좋다’가 돼버리는 거라.
습관적으로 그렇게 돼버리면 나중에는 수행을 해도, 수행을 하면 장애들이 굉장히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졸음부터 해가지고 통증, 여러 가지들이 일어나는데 이게 그거부터 일어나는 게 아니고 무조건 먼저 ‘좋다’ ‘싫다’ 부터 먼저 일어나지게 되는 거라.
그래서 분명하게 본인이 체크를 해봐야 됩니다.
이게 지금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나를 편안하고 고요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건지 아니면 반대 방향으로 이끄는 건지,
이게 지금 나에게 이 시간에 해야되는데 나에게 이익이 있는 건지 그렇지 않고 그냥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지 분명하게 따져라는 거라.
그래서 아니다 싶을 때는 지금 내가 그 ‘졸음이 싫다’는 감정이 계속적으로 해가지고 쌓여가지고 빨리 몰아내기가 힘들다 할 것 같으면 그건 놓아버려야 되는 거라. 그걸 가지고 수행대상으로 해서 ‘아, 나는 싫다는 마음을 관찰하고 있다’ 그건 아니라는 거라. 놔버리고 아까 같이 부처님을 회상한다든지, 자애수행을 한다든지, 선한 사고로 빨리 바꾸라는 거라.
습관드는 거는 빨리 막아줘야 되는 거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마음이 선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나면은, 사띠 하는 것은 똑같은 선한 마음이기 때문에 하기가 쉬워진다는 거라. 대상을 알아차리기가 쉬워진다는 거라.
나중에는 의심까지 듭니다. ‘어, 내가 이거 계속해가 되나?’ 그게 도가 지나치게 되면 결국은 수행 포기해버립니다. 졸릴 바에야 그냥 내가 수행 안 하고 다른 거 하지. 졸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졸리는 것이 싫다는 마음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이미 수행에 대한 의심이 강해져 버려서 그냥 수행을 포기해 버리는 거라.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졸리는 것은 몸의 반응인데, 졸리는 것이 싫다는 것은 마음의 반응입니다. 여러분이 수행을 그만두는 것은 몸의 반응으로 인해서 그만두어지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반응으로 인해서 그만두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라는 거라. 어쩔 수 없이 많이 피곤해가지고 몸이 도저히 못 따라올 때는 그거는 어쩔 수 없는 거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대부분은 습관적으로 그렇게 바뀌어버린다는 거라.
나른해지고, 무거워져와지고, 딱딱해져와지고, 유연성도 없어지고, 아픔도 와진다는 거라. 그게 졸음이 싫다는 감정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변화들입니다. 그러면서 의심까지 해서 나중에는 포기를 해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게 졸음이 싫다는 감정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길들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마음을 둔하게 해서 사띠하는 것들을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졸음에도 약한 고리를 끊어버려야 되듯이 졸음이 싫다는 번뇌도 약한 고리에서 여러분들이 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어디가 약한 고리일까? 나른해질 때? 아니면 무거워질 때? 딱딱해질 때? 사띠가 강하면 그 어떤 부분에서도 졸음은 싫다는 감정을 끊을 수가 있습니다. 근데 대부분은 거기서 잘 안 끊어집니다.
왜 그럴까? 육체적인 현상들은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끊기가 쉽습니다. 근데 마음의 현상은 이미 그것들이 일어났을 때는 그것들을 끊기에는 참 힘이 든다는 거라. 그마만큼 더 관리하기가 힘든 게 이 마음입니다.
거기서 대부분 끊어지는 게 아니고 그 전에서 끊어야 됩니다. 혹시 수행 중에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뭉게구름 혹시 잡아본 적이 있어요? 수행하다가? 대상은 보이지는 않고 대상이 마치 생각이 뭉게뭉게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싫다는 마음이 일어나는 전조단계입니다.
마음에서 뭔가 지금은 알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이 탁 일어나면은 마음에서 그다음에 일어나는 것이 마음에서 뭔가 뭉게뭉게 생각이 일어나는 것들이 보여집니다.
그때 ‘아, 이게 싫다는 마음이구나. 싫다는 감정이구나’ 하고 탁 거기서 끊어야 되는 거라. 그러면은 ‘졸음은 싫다’는 마음은 금방 확 달아납니다. 뒤통수에서 바람이 확 구멍이 뜷려서 통과하듯이 정신이 반짝 맑아지게 되는 거라. 그래서 졸음이 싫다는 감정이 일어났을 때는 그 감정이 일어나는 전조단계, 뭔가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오를 때 그때 그것들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게 수행할 때 ‘좋다’ ‘싫다’ 하는 느낌들이 일어날 때 관찰하는 방법 중에 하납니다.
또 하나는 가끔 여러분들 중에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 중에 손주들이 있다고 칩시다. 손주들 걸어가면서 조부는 거 봤어요? 봤죠? 근데 여러분들은 걸어가면서 조분 적이 있어요? 군에 갔다 온 사람들은 군에 행군하면서 조부는 경우들이 있을 거라.
그때 회상들을 잘 한번 해보십시오. 의지가 강했던가? 졸음을 이길려고 하는 의지가 강했는지, 아마 대부분은 그 의지가 약해져 있는 상태라. 그랬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걸어가면서도 조분다는 것들이 성립된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어른들은 이미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어린아이와 다릅니다.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걸어가면서 조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왜 그럴까?
대상에 집중하기 가장 좋을 때는, 걸어갈 때 대상에 집중하기가 가장 쉽습니다.
앉아서 호흡을 관찰한다? 이게 집중하는 힘이 클까, 아니면 걸어갈 때 집중하는 힘이 클까? 걸어갈 때가 훨씬 큽니다. 집중하는 힘이 약해져 있고 의지력이 약해져 있을 때는 조불 수가 있다고 착각을 한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하기 싫다는 겁니다. 그냥 ‘앞 사람만 보고 따라가면 되니까’ 하는 생각을 하고, 내가 스스로 걸어갈 생각을 안 한다는 거라.
그래서 집중의 힘이 약할 때는 졸음이 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은 뭐냐 하면 수행을 할 때의 기본을 항상 기억을 해야 됩니다. 수행은 어떻게 한다고 그랬어요?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하고 가볍게 대상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누가 여러분들하고 줄잡아 당기는 거 겨루기하라고 한 거는 아니잖아 수행할 때.
왜 대상하고 힘겨루기를 하는데? 싫다는 느낌하고 여러분들이 힘겨루기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라. 그럴 이유도 없고 그게 안 되면, 싫다는 마음이 일어나기 전에 차라리 경행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대상을 자주 옮겨주라는 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안되면, 일어나고 사라지고 앉고 닿음 1포인트, 일어나고 사라지고 앉고 닿음 2포인트 해서 닿는 포인트를 여러 가지로 늘려주면 된다는 거라. 대상을 많이 옮겨주면은 집중력도 커지고, 그리고 그 대상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힘겨루기를 하지 않게 됩니다.
근데 왜 굳이 꼭 그 싫다는 마음하고 힘겨루기를 하느냐는 거라. 수행은 절대 대상과 힘겨루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태국 같은 경우에는 철길에 기차가 자주 다니지 않기 때문에 스님이 머무르는 절에는 조금만 가면 기찻길이 있어요. 그러면 가끔씩 그 기찻길 위에 올라가서 이렇게 경행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안 떨어지고 경행할 수 있어요? 그 한 길로?
쭉 가면 편안하게 해가지고 가면 그냥 좌측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우측으로도 치우치지도 않고 편안하게 가집니다. 그러면 목적한 데까지 그냥 걸음걸이를 알아차리면서 떨어지지도 않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고 목적지에 도달을 한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 한번 본인이 생각을 해보십시오. 물론 몸의 균형감각이 좀 무너진 사람들은 아예 처음부터 안됩니다. 일반 정상적인 사람들은 거의 가능해집니다.
편안하게 목적지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한발 한발 왼발 오른발만 집중해서 하나씩 하나씩 하고 ‘왼발’ 다음에 ‘오른발’ 했을 때 왼발 잊어버리고 오른발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금방 놔버리고 지금 현재 있는 것에다가 집중을 하면 양쪽으로 쏠리지도 않고 그대로 편안하게 걷게 되는 거라. 그대신 전제조건이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하고 가벼워야 된다는 것.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그와 같습니다. 사띠의 마음은 그와 같다는 거라. 근데 그렇게 하지 못하면 몸이 갸우뚱하면서 왼쪽으로 떨어지든지 오른쪽으로 떨어지듯이, 불선한 마음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싫다는 마음들이나 좋다는 마음들이 분명하게 일어나는 거라. 탐진치의 마음이 일어나면은 그쪽으로 떨어져버린다는 거라. 짧은 찰나지만은 몸이 완전히 기울기 전에 처음에 기울 때 탁 알아차려서 바로잡아버리면 편안하게 다시 제자리로 와집니다.
‘졸음은 싫다’는 마음도 처음에 일어나는감정을 탁 잡아야 만이 바로 제자리에 와진다는 거라. 나중에 뒤에 무겁고 딱딱하고 하는 거, 그거 일어났을 때는 몸이 이미 완전히 기울어져서 떨어지는 상태라는 거라. 잡기가 힘들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관찰하게 될 때는 여러분들은 좀 더 사띠를 강하게 해야 되고, 좀 더 노력을 많이 해야 되는 거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몸보다도 훨씬 그 마음에 좌우돼버리게 됩니다. 지배당해버립니다.
그래서 ‘졸음은 싫다’는 감정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에서는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불선한 마음이라는 거라. 어느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그것이 습관이 되면은 조그만한 자극에도 불선한 마음이 금방 반응을 하게 됩니다.
레일을 타고 갈 때 편안하게 그 레일을 한발 한발 옮기는 거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일상생활에서는 항상 팔정도를 염두에 둬야됩니다.
내가 계율이 부족한지, 편안하고 고요한 마음들을 가지는 것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대상을 알아차리는 사띠가 부족한 건지, 집중하는 것들이 부족한 건지를 분명하게자꾸 알아차려야 됩니다.
팔정도가 균형이 딱 맞아질 때 레일을 편안하고 가볍게 목적지까지 걸어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이 항상 그런 중도의 마음들을 가지게 될 때 ‘졸음은 싫다’는 마음에 휩싸이지 않고 편안하게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수행들을 좀 더 열심히 하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 오늘 붓다의 길따라 선원장 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녹취한 것입니다.
스님 법문 녹음하고 사진자료들을 남겨주신 대구 법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