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출가하는가? (20150717)
(후편)
이 세상 부모님들이 자식들에 대해서 가지는 소원이 5가지가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들이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없다. 우리는 자식들에게 줄 뿐이다. 할 일을 할 뿐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부처님께서 일절지로 중생들의 마음을 살펴보니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바라고 있습니다. 자각하고 분명히 바라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는 남몰래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소원은 하나가 아니라 5가지나 있습니다(AN 5.39 Puttasuttaṁ).
“Bhato vā no bharissati(바또- 와- 노- 바릿사띠)”
우리가 늙어 쇠약해졌을 때, 어렸을 적부터 양팔에 안고 양어깨에 메고 길러 보살펴 온 자식들이 옆에 돌아와, 똑같이 우리를 보살피고 지켜 줄 것이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Kiccaṁ vā no karissati(낏짱 와- 노- 까릭사띠)”
우리가 일할 수 없게 되거나 죽게 되었을 때, 우리의 직업, 생계를 영위하는 가업을 자식들이 대신 계승해서 일해 줄 것이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Kulavaṁso ciraṁ tiṭṭhe(꿀라왕소- 찌랑 띳테-)”
우리의 유산이 없어지지 않게 지켜 줄 것이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도, 죽고 나서도, 친척이나 형제자매가 서로 왕래하고, 가깝게 지내며, 관계가 끊어지지 않게 될 것이고, 우리의 유산을 소중히 하여 유지해 줄 것이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Dāyajjaṁ paṭipajjati(다-얏장 빠띠빳자띠)”
우리의 세간·출세간의 유산을 제대로 계승해 줄 것이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세간의 유산이라고 하는 것은 재산, 금은보석 등의 유산입니다. 출세간의 유산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시를 하면 아이들도 보시를 할 것이다, 우리가 계를 지키면 아이들도 계를 지킬 것이다, 우리에게 설법을 듣는 습관이 있으면 아이들도 설법을 들을 것이다, 우리가 명상 센터에서 명상 하면 아이들도 명상 할 것이다, 우리가 세운 절의 탑과 가람을 우리의 아이나 손자가 대를 이어 수호해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간의 유산도 계승할 것이다, 출세간의 유산, 법의 유산, 선행의 유산도 계승할 것이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Atha vā pana petānaṁ dakkhiṇaṁ anupadassati(아타 와- 빠나 뻬-따-낭 닥키
낭 아누빠닷사띠)”
우리가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 우리에게 공덕을 널리 회향할 것이다. 우리를 위해서 공덕을 쌓아, 그 공덕을 널리 회향할 것이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모님의 소원은 5가지입니다.
이 출가의 특별한 공덕으로 생존중의 부모에게 특별한 기쁨을 주고, 특별한 보은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저세상에 다시 태어난 부모님에게도 특별한 회향을 할 수가 있어 그들에게도 특별한 공덕이 널리 퍼지게 됩니다. 출가로 부모님들의 소원을 실현한 것이 됩니다.
출가의 공덕은 다른 공덕과는 달라서 특별합니다. 갓 출가한 비구라도 불환자인 재가자가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출가자는 불환자인 재가 신자로부터 예배 받는 것에 적합한 사람, 공양 받는 것에 적합한 사람인 것입니다.
법의 입장에서 보면 불환자는 범부보다 매우 높은 지위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불환자인 재가 신자라도 오늘 새롭게 비구가 된 출가자에게는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중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앉을 자리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공양 올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불환자다. 그 사람은 방금 비구가 되었다. 깨닫지 않은 범부다. 번뇌가 가득하기 때문에 예배하거나 마중 나갈 수 없다.」이러한 완고한 태도를 취해도 괜찮을까요? 안됩니다.
정말로 불환자라면 이러한 마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불환자가 아니라, 자신을 불환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가짜는 이러한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귀한 불환자가 된 재가자의 예배 공양을 받는 것에 적합하다면, 일래자의 재가자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류자의 재가자라면 더욱더 그러하겠지요.
고귀한 덕, 도와 과의 덕을 가진 예류자·일래자·불환자의 재가 신자들은 고귀하면서 왜 오늘 출가하여 비구가 된 범부를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이 점을 제대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처럼 예배하는 주된 이유는 출가자의 모습이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이유는 많이 있지만, 그 첫 번째는 출가자의 고귀한 모습 때문입니다.
출가자의 모습은 어떠한 것입니까?
첫 번째, 출가자는....
① “Upagato so samaṇaliṅgaṁ(우빠가또- 소- 사마나링강)”
출가 사문은 조용하고 평안한 모습입니다. 링가는 형태, 외관, 특징입니다. 사문의 특징은 잘 갖춘 조용하고 평안한 모습을 지닙니다. 출가자는 조용하고 평안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특징은 2가지가 있습니다.
“bhandubhava(반두바와)”-머리카락을 깎고 있습니다. “kāsāvachādana(까-사-와차-다나)”-물들인 가사를 몸에 걸치고 있습니다. 즉, 머리카락을 깎고, 초목으로 물들인 가사를 몸에 걸치고 있는 외형이 사문의 상, 조용하고 평안한 모습이 됩니다.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인 재가자는 머리카락을 기르고, 양복을 몸에 걸치고 있어, 단순하고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불환자의 도와 과라는 특별하고 고귀한 법이 있지만, 외형은 평안하고 조용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사람들이 보아도 마음속이 평안하게 되지 않습니다.
범부의 비구들은 마음속에서 번뇌가 가득하지만, 그 모습을 사람들이 보면 마음이 가라앉고 평안해집니다. 예를 들어 사미나 비구가 명상하고 있다고 합시다. 시선을 아래로 향해 눈감고 명상하고 있으면, 본인은 무슨 근심 걱정거리에 시달리고 있는지 알 수 없고, 망상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릅니다. 번뇌가 가득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명상하고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은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해집니다. 내면의 법이 있지 않아도 그의 모습은 조용하고 평안한 모습입니다.
명상하고 있지 않는 때나,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을 때나, 멈춰 서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에, 율에 맞도록 신중함과 품위를 가지고 살고 있으면, 내면에는 특별하고 고귀한 법이 없어도, 그 모습을 본 사람의 마음은 조용하고 평안해집니다.
그래서 조용하고 평안한 외관을 가지고 있는 출가자를 소란스러운 외관을 한 재가 신자는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재가의 옷, 장식품은 조용한 것이 아닙니다. 출가자는 조용한 외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재가 불환자로부터 예배를 받는 것이 적합합니다. 예류자, 일래자도 당연히 포함되고, 범부 재가자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출가자들에게 예를 표해야 합니다.
출가 사문은 언제나 단정하여야 합니다. 출가자는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보름마다 머리카락을 깎으면서, 몸에 걸쳐진 물들인 가사를 추스를 때 마다 ‘나는 왜 출가하였는가!’라고 반문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 출가자는....
② “Buddhādhippāye ṭhito(붓다-딥빠-예- 티또-)”
그 모습은 부처님의 소망에 들어맞은 모습입니다. 재가자의 모습은 부처님이 바람직하다고 한, 부처님이 선호한 모습이 아닙니다. 머리카락을 깎고, 가사를 몸에 걸친 모습이 부처님이 바람직하다고 하고, 부처님이 선호한 모습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밝혀 놓은 진리를 끊임없이 배우고 실천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부처님의 소망에 들어맞는 모습입니다.
출가자의 모습은 부처님의 소망에 들어맞은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더욱 더 노력하여 완전하게 배우도록 하여야 하고, 완전하고 바르게 실천하여야 하고, 게으름피우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하고, 완전하게 진리를 깨닫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 번째, 출가자는....
③ “Khīṇāsavehi so samaṇaṁ upagato(키-나-사웨-히 소- 사마낭 우빠가또-)”
그 모습은 번뇌가 소멸한 자(루진자, 아라한)와 같은 모습입니다. 아라한의 모습도 비구와 같은 모습입니다.
재가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아라한은 없습니다. 재가자는 아라한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라한으로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면, 그 사람이 사미나 비구인 경우를 제외하면, 만약 출가하지 않는다면 다음날 날이 새기 전에 그 날 안에 닙바나에 들어간다고 주석서에서 말합니다.
아라한과라고 하는 덕을 재가의 모습으로는 계속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아라한과의 덕이 너무 광대하고 너무 고귀하기 때문에 재가의 모습이 아라한과의 덕을 유지하는 것에 견딜 수 있지 않습니다.
즉 아라한이 된 재가자는 그 날 중에 출가하든지, 출가하지 않으면 닙바나에 들어갑니다. 그 때문에 아라한이 되어 며칠, 몇 개월, 몇 년 재가자로 살아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진정한 아라한이라면 출가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라한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불환자의 재가 신자들은 출가자들을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출가자는 아라한과 같은 모습과 행실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모습에서 아라한이 행해서는 안 될 것은 행하지 말고, 아라한이 행할 것은 자신도 행하여야 합니다. 항상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경계하고, 번뇌가 소멸한 자의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네 번째, 출가자는....
④ “Aggaparisāṁ so upagato(악가빠리상- 소- 우빠가또-)”
고귀한 사람들, 아라한들의 모임 안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출가한 비구라도 고귀한 아라한들과 함께 한 식탁에서 식사할 수가 있습니다. 불환자의 재가가 「나는 불환자다. 스님과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아라한들과 함께 식사할 수가 있는 것은 범부라도 출가자뿐입니다.
출가자는 아라한과 같은 사원의 건물에서 생활하고, 침식을 모두 함께할 수 있습니다. 불환자라도 재가자는 불가능합니다.
그처럼 아라한이라는 고귀한 사람들 모임 안에 불환자의 재가자가 더해지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범부라도 출가자는 더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환자의 재가자는 범부라도 출가자를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출가자는 가장 뛰어나고 고귀한 아라한들과 함께 생활하는 자입니다. 아라한들과 함께 그 상가의 모임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입니다. 그 모임에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하며, 그 성스러운 부처님의 제자들인 상가의 일원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섯 번째, 출가자는....
⑤ “Labhati so patimokkhuddesaṁ sotuṁ(라바띠 소- 빠띠목쿳데-상 소-뚱)”
보름과 초하루의 포살일에 계단에서 율을 송출할 경우에 범부인 출가자라도 그 모임에 참여하여 율을 들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모든 출가자들은 빠띠목카 227계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불환자의 재가자가 「나는 불환자다」라고 말하며 빠띠목카를 송출하는 출가자 모임에 참가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환자의 재가자는 범부인 출가자라도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출가자는 보름과 초하루의 포살 일에 계단에서 율을 독송하는 자리에는 반드시 참가하여야 하고, 더불어 그 율을 암송하는 자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여섯 번째, 출가자는....
⑥ “So aññe pabbājeti upasampādeti jinasāsanaṁ vaḍḍheti(소- 안녜- 빱바-제-띠 우빠삼빠-데-띠 지나사-사낭 왓데-띠)”
범부의 출가자라도 정해진 법납에 이르면 다른 사람을 출가시켜 구족계를 줄 수가 있고, 그들에게 부처님(승리자)의 가르침을 교육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 사회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펼쳐나갈 의무가 있습니다.
불환자의 재가자가 「나는 불환자다」라고 말하며, 재가자의 머리카락을 깎고, 가사를 휘감아 주어, 출가시킬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불환자다」라고 말하며, 출가 수계작법(kammavācā)을 독송하여 출가자를 만들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출가자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범부라도 출가자뿐입니다. 그래서 불환자의 재가자는 범부라도 출가자를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출가자는 정해진 자격을 갖추면 수많은 사람들을 출가시킬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또한 출가자를 교육하고, 재가자들에게 법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 세월은 멀지 않으니 부지런히 닦아야 합니다.
일곱 번째, 출가자는....
⑦ “Appamāṇesu so sikkhāpadesu samattakari(압빠마-네-수 소- 식카-빠데-수 사맛따까리)”
출가자는 수많은 학처를 완전하게 갖출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환자의 재가자는 범부라도 출가자를 공양,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학과 수행을 몸에 익히는 것도 벅찬데, 수많은 학처를 완전하게 갖추고, 여러 갈마의식(kammavācā)들과 다양한 상가의 갈마법(saṅghakamma)들을 더불어 익히기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출가자들은 반드시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재가자는 그러한 일은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환자의 재가자도 오늘 갓 출가한 비구에게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수없이 많은 배울 것들을 남김없이 공부하여 완전하게 갖출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조그마한 성취에 머물러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덟 번째, 출가자는....
⑧ “bhikkhu sikkhapako vaṁsadharo(빅쿠 식카빠꼬- 왕사다로-)”
범부라도 출가자들은 불교를 오래도록 수호할 수가 있습니다. 계·정·혜 삼학을 지도할 수가 있습니다. 법통을 계승할 수가 있습니다.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게 지킬 수가 있습니다.
불환자의 재가자는 불교를 오래도록 수호할 수가 없습니다. 계·정·혜 삼학을 지도할 수가 없습니다. 법통을 계승할 수가 없습니다.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게 지킬 수가 없습니다.
불환자의 재가자조차 지킬 수 없는데, 천신들이 지킬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삼장을 지키는 것은 출가자입니다.
먼 옛날 스리랑카에는 심한 기근으로 먹을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출가자들은 굶주림을 감추기 위해서 물을 적신 모래주머니를 배 위에 올리고 삼장을 소리 내어 읽음으로써 배고픔을 달래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게 지켜 왔습니다.
현재도 사원의 학당이나 명상 센터에서는 출가자가 삼장을 암기하며, 계승하고, 지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게 지키고 있습니다.
삼장이라는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게 유지하여 지키고 있는 것은 오늘날도 사미나 비구를 포함한 출가자인 상가입니다.
먼 옛날부터 생명을 내려놓는 한이 있어도 삼장이 끊어지지 않게 지켜 온 것은 성스러운 상가인 출가자입니다.
그래서 삼장을 지키고 있는 것은 오늘 갓 출가한 비구, 성스러운 상가, 장로들인 출가자인 것입니다. 불환자의 재가자들이 지킬 수 없는 가르침을 범부인 출가자는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불환자의 재가자는 범부라도 출가자를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출가자는 계·정·혜 삼학을 완전하게 배우고, 수행을 가르칩니다.
재가 신자들이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출가자가 배우고 가르친 계·정·혜의 고귀한 삼학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정·혜의 고귀한 삼학을 배워 가르치고 있는 출가자들은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가 되어 있는 재가자들의 은사입니다.
직접 자신에게 지도하지 않은 출가자들도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수행법이 끊어지지 않게 유지하여 지켜 왔기 때문에, 그리고 현재도 유지하여 지키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은사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사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경의를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중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선인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출가자들이 가르쳐 준 계·정·혜의 실천법을 배워 수행했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재가자도 「아! 출가자들은 우리에게 계·정·혜의 실천을 가르쳐 준 스승이구나. 우리의 은사이구나! 」라고 가슴 속 깊이 새겨서, 은사인 출가자들이 비록 범부라도,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에게 직접 지도해 준 사람만이 은사인 것은 아닙니다. 자신에게 직접 지도해 준 사람의 가르침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출가자들로부터 왔습니다. 수행법이나 삼장을 지켜 온 근원은 출가자들입니다.
출가자들의 도움 없이는 어떤 재가자도 자신 혼자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직접 지도한 사람이 재가자였다고 해도 그 근원은 출가자이기 때문에 출가자의 은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출가자의 은혜 없이 깨달은 재가자는 오늘날까지 한사람도 없습니다. 미래에도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처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계·정·혜 삼학을 암송하여 전하고 수호한 사람은 출가자입니다. 그래서 범부라도 출가자를 예류자·일래자·불환자의 재가자는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출가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어서 오래도록 수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하여야 하는 것이지,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출가자는 부처님께서 정하지 않은 새로운 원칙을 만들지 말아야 하고(Apaññattaṁ na paññāpeyya), 부처님께서 이미 정하신 원칙을 없애지 말아야 하고(Paññattaṁ na samucchindeyya), 부처님께서 잘 설하신 행법에 따라 수행하는 것(Yathāpaññattesu sikkhāpadesu samādāya vatteyya)은 출가자의 의무입니다.
출가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원형 그대로 전해야 하는 것이지, 보태거나, 삭제하거나, 변형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대신하여 법을 전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부처님을 대신하여 부처님의 전령으로서 법을 설하여야 합니다.
아홉 번째, 출가자는....
⑨ “Āsavakkhayaṁ pana appatvā, ‘sukhisomhi'ti cittaṁ na uppadetabbaṁ
(아-사왁카양 빠나 압빠뜨와- 수키솜히띠 찟땅 나 웁빠데-땁방)”
번뇌가 아직 소멸한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으면, 자신이 행복하다고 상상조차 해서도 안 되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사위성의 기원정사에 오셨을 때입니다.
계를 잘 지키고 있던 비구들은 「나는 계를 엄수하고 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은 간단하다. 아무것도 어렵지는 않다.」 또, 탁발을 잘 실천하고 있던 비구들은 「나는 탁발행을 실천하고 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은 간단하다. 아무것도 어렵지는 않다.」 또, 교육과 학문의 지식을 갖춘 비구들은 「나는 교육과 학문에 정통하고 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은 간단하다. 아무것도 어렵지는 않다.」 또, 신통력을 가진 비구들은 「나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은 간단하다. 아무것도 어렵지는 않다.」 또, 숲이나 산에서 지내며 마을과 떨어져 혼자서 살고 있는 비구들은 「나는 한적한 장소에 살고 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은 간단하다. 아무것도 어렵지는 않다.」 그처럼 각각 실천하고 있는 것, 수행하고 있는 것, 이미 얻고 있는 것에 만족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노력하는 것 없이, 무심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계를 지키고 있던 비구들은 계를 지키는 것만으로 만족했습니다. 교육과 학문의 지식이 있는 비구들도 교육과 학문에 정통하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습니다. 신통력이 있는 비구들도 신통력이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습니다.
깨닫지 못한 범부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가 된 비구들도 그와 같았습니다. 「나는 예류자가 되었다」 「나는 일래자가 되었다」 「나는 불환자가 되었다」라고 하며 「아라한이 되는 것은 간단하다. 어떤 어려운 것도 없다.」 그렇게 믿고 잘라버려, 노력도 하지 않고, 조금 부족한 상태로 살고 있었습니다.
불방일한 것을 막아버리고, 방일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불방일을 막는다는 것은 아라한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띠를 완전하게 놓쳐버리고 있다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구들이 그러한 상태로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 예경 올리자, 부처님께서 물었습니다. 「출가한 목적은 이제 정점에 도달했느냐? 출가의 일은 끝났느냐?」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아라한이 되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비구들은 정직하게 대답했습니다. 계를 지키고 있던 사람은 「나의 계는 청정합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은 간단합니다. 굳이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아직 노력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부처님.」
불환자가 된 사람도 「나는 불환자가 되었습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은 간단합니다. 굳이 어려운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직 노력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부처님.」
부처님께서는 그 비구들 전원을 엄하게 혼을 내셨습니다. 「비구라는 것이 마지막에 불환자가 되는 것이냐? 불환자가 된 것으로 너희들의 윤회의 괴로움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대변, 소변, 고름, 침, 콧물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조금만 만나도 기분이 나쁘고, 꺼림칙한 것이듯이, 윤회도 또한 손가락을 올릴 정도의 짧은 시간이라도 기분이 나쁜 것이고, 꺼림칙한 것이다.
아직 아라한이 되지 않았다면 윤회는 계속되므로 그 사람에게 만족은 없다. 만족하는 자는 몹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직 아라한이 되어 있지 않은데 자신감을 가지고 안심하는 사람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그처럼 말씀하시고, 아래의 게송을 말씀하셨습니다.
“na sīlabbatamattena / bāhusaccena vā pana”
“atha vā samādhilābhena / vivittasayanena vā”
“phusāmi nekkhammasukkhaṁ / aputhujjanasevitaṁ”
“bhikku vissāsamāpādi / appatto āsavakkhayaṁ”
(나 실-랍바따맛떼-나, 바-후삿쩨-나 와- 빠나,
아타 와- 사마-딜라-베-나, 위윗따사야네-나 와-,
푸사-미 넥캄마숙캉, 아뿌툿자나세-위땅,
빅쿠 윗사-사마-빠-디, 압빳또- 아-사왁카양.)
“비구는 계를 지키고 의식을 익히는 것만으로 자신감을 가져 안심해서는 안 된다. 탁발행을 실천하고 있는 것만으로 자신감을 가져 안심해서는 안 된다. 교육과 학문의 지식이 풍부한 것만으로 자신감을 가져 안심해서는 안 된다. 신통력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자신감을 가져 안심해서는 안 된다. 조용한 숲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만으로 자신감을 가져 안심해서는 안 된다. 이제 불환자가 되었다고 해서 자신감을 가져 안심해서는 안 된다. 아라한이 되고 나서 비로소 안심하라.”
비구에는 외형적 비구와 내면적 비구의 2종류가 있습니다. 외형적 비구라고 하는 것은 비구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사를 입고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내면적 비구라고 하는 것은 “kilese bhindati'ti bhikku(낄레-세- 빈다띠띠 빅쿠)”라는 정의대로 번뇌를 부수어 무너뜨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재가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번뇌가 적게 되도록, 번뇌가 진정되도록 노력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모습은 내면적 비구를 닮았다고 할 것입니다.
외형적 비구이든 내면적 비구이든 진정한 비구라면 4루(욕구·유·견해·무명)의 멸진에 이르지 않고 「자신은 이제 충분하다」라고 믿어 안심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출가했는가」라는 출가의 목적이 이미 뚜렷한 사람이라도, 비구가 되었기에, 가사를 입은 것만으로 「악취의 문은 이미 닫혔다, 닙바나로 가는 것은 확실하다」라고 믿어 안심하면 안 됩니다.
아직 아라한이 되어 있지 않으면 자신감을 가지고 안심하면 안 됩니다. 계속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재가자들도 보시를 한 것만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항상 오계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팔계를 지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삼보의 덕을 자주 회상하고, 자비의 명상을 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경전을 읽고 공부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러한 일을 그만둘 필요는 없습니다. 항상 보시를 해 주십시오. 계도 없애지 않고 지켜 주십시오. 경전도 소리 내어 읽으십시오.
그리고 도와 과, 닙바나를 정말로 얻고 싶다면, 계속해서 위빳사나 수행도 노력해서 실천하십시오. 조그마한 경험을 한 것만으로, 예류자가 된 것만으로, 일래자가 된 것만으로, 불환자가 된 것만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아라한이 될 때까지 노력해 주십시오.
그때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난 보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번뇌가 아직 멸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행복하다고 상상조차 해서는 안 되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출가자는 계를 잘 지키는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탁발을 매일 실천하는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가르침을 배우는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신통력을 얻은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조용한 곳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불환과를 얻었다고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아라한이 되고 나서 안심하여야 합니다.
윤회하는 세상에서 만나기 지극히 어려운 테라와다 불교를 만났으면서, 위빳사나 명상 센터에도 가지 않고, 보시·지계·선정만으로 만족해 멈춰버린다면, 테라와다 불교를 만난 보람이 없습니다. 한편으로 보시, 지계, 선정 등을 실천하면서, 동시에 위빳사나 수행도 해서, 닙바나를 얻어야만, 불교를 만난 보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빳사나를 수행하는 방법을 가장 짧고 가장 완벽하게 나타낸 게송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생긴 순간,
생긴 채로 반드시 안다.
동작, 장소, 위의, 시간을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린다.
「몸과 마음이 생긴 순간」이라고 하는 말로 위빳사나는 무엇을 알아차림 하는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몸과 마음의 행위를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음이 뚜렷하면 마음, 몸이 뚜렷하면 몸, 가장 분명한 것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부러 몸의 현상을 알아차린다고 결정해서, 몸의 현상만을 알아차림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러 마음의 현상을 알아차린다고 결정해서, 마음의 현상만을 알아차림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러 몸의 현상만, 마음의 현상만 알아차리면 법을 얻지 못하고, 도와 과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을 동시에 함께 알아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뚜렷한 한가지만을 알아차려 알았다면 됩니다.
알아차릴 몸과 마음도, 이미 생겨 버린 과거의 몸과 마음, 아직 생기지 않은 미래의 몸과 마음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생긴 순간」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확실히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몸과 마음만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과거의 몸과 마음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미래의 몸과 마음도 아직 생기지 않은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면, 올바른 위빳사나의 지혜는 생기지 않습니다. “bhūtaṁ bhūtato passati(부-땅 부-따또- 빳사띠)”라고 하듯이, 현재 분명히 생겨난 몸과 마음을 그 생긴 순간에 알아차려야만, 올바른 위빳사나의 지혜가 생깁니다.
「생긴 채로」라는 말로 위빳사나 수행의 방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경전이나 아비담마의 구절, 불탑이나 불상의 모습을 특별히 기억해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처럼 기억하고 알아차렸다면, sutamayañāṇa(수따마야냐-나, 문소성, 들어서 아는 지혜), cintāmayañāṇa(찐따-마야냐-나, 사소성, 생각해서 안 지혜) 밖에 생기지 않습니다. bhāvanāmayañāṇa(바-와나-마야냐-나, 수소성, 실천해서 깨달은 지혜)는 생기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몸의 행위(색) 마음의 행위(명)를 생긴 채로, 그대로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몸의 행위라면 걷고 있으면 「걷는다」, 멈춰 서면 「멈춘다」, 앉으면 「앉는다」, 가로놓이면 「가로놓인다」, 굽히면 「굽힌다」, 늘리면 「늘린다」라고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gacchanto vā gacchāmi ti pajānāti(갓찬또- 와- 갓차-미띠 빠자-나-띠)” 「걷고 있을 때는 걷고 있다고 안다」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수행법입니다.
마음의 행위라면, 무엇인가를 갖고 싶어 하고 있으면 「갖고 싶다」, 바라고 있으면 「바라고 있다」, 화나 있으면 「화나 있다」, 생각하고 있으면 「생각하고 있다」, 질리고 있으면 「질리고 있다」라고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도 “sarāgaṁ vā cittaṁ sarāgaṁ cittaṁ ti pajānāti(사라-강 와- 찟땅 사라- 강 찟땅띠 빠자-나-띠)”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안다」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수행법입니다.
게송에서 「동작」이라고 하는 것은 동작을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위빳사나는 동작을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어떤 동작을 하고 있어도 위빳사나로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요리를 하든, 식사를 하든, 세탁을 하든, 옷을 갈아입든, 이야기하든, 듣고 있든, 쇼핑을 하든, 차를 운전하든, 어떤 동작을 하고 있어도, 알아차림을 한다면, 그것은 위빳사나입니다.
알아차리는 방법도 어렵지 않습니다. 「생긴 채로」라는 대로, 자신이 가고 있는 동작을, 가고 있는 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밥을 씹고 있다면 「씹은다」, 물을 마시고 있다면 「마신다」, 옷을 입고 있다면 「입는다」라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장소」라고 하는 것은 장소를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위빳사나는 장소를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어떤 장소에 있어도 위빳사나로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버스 안에서, 길가에서, 직장에서, 시장에서, 파티에서, 어떤 장소에서든 알아차린다면 위빳사나가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선원과 같이 조용하고 깨끗한 장소에서 밖에 할 수 없는 수행법이 아닙니다. 화장실과 같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 장소에서조차 수행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스스로, “uccārapassāvakamme sampajānakārī hoti(웃짜-라빳사-와깜메- 삼빠자-나까-리- 호-띠)” 「대소변을 할 경우에도 잘 알아차리며 실천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장실에 가면서도 공덕을 쌓을 수가 있습니다. 일을 보고 싶으면 「일을 보고 싶다」, 일을 보고 있을 때는 「일을 보고 있다」, 냄새난다면 「냄새나고 있다」, 배가 아프면 「배가 아프다」 등으로 알아차리며 알 뿐입니다.
간단하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위빳사나입니다. 실천한다면 어떤 장소라도 공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화장실에 가면서조차 위빳사나의 공덕을 쌓을 수 있기에 다른 장소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위의」라는 것은 위의를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위빳사나는 위의를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어떤 위의라도 위빳사나로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행주좌와, 이 4개의 위의 가운데, 걷고 있으면 「걷는다」, 멈춰 서면 「멈춘다」, 앉으면 「앉는다」, 가로놓이면 「가로놓인다」라고 알아차릴뿐입니다.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간을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린다.」라는 것은 의미가 뚜렷합니다. 시간을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위빳사나는 시간을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언제라도 위빳사나로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로부터 밤에 침대에 들어가 잘 때까지, 언제라도 알아차림을 따르게 할 수 있다면 위빳사나가 됩니다.
깨어났을 때에는 「깨어났다」라고 알아차린 후 하루를 시작해 주십시오. 그 후로도 하루 종일, 보이고 있을 때는 「보인다」, 들릴 때는 「들린다」, 수상할 때는 「수상하다」, 구수할 때는 「구수하다」, 먹고 있을 때는 「먹고 있다」, 접하고 있을 때는 「접하고 있다」, 알고 있을 때는 「알고 있다」라고 알아차리며 하루를 보내 주십시오. 밤에 침대에 들어갔을 때에도 「자고 있다」라고 알아차리면서 하루를 끝내 주십시오.
그처럼 위빳사나는 앞의 알아차림과 뒤의 알아차림, 앞의 사마디와 뒤의 사마디, 앞의 지혜와 뒤의 지혜가, 사이를 두지 않고 연속하듯이 알아차림이 생긴다면, 매시간 위빳사나 지혜가 성숙해지고 날카로워집니다.
가장 성숙한 위빳사나 지혜, 가장 날카로운 위빳사나 지혜의 끝에, 도의 지혜·과의 지혜를 얻을 수 있기에, 모든 괴로움은 다하여, 진실로 행복한 닙바나을 깨닫게 됩니다.
닙바나의 행복을 손에 넣었다면 테라와다 불교의 시대에 태어난 숙원을 이루게 됩니다. 예류자가 되었을 경우도 악취의 문이 완전하게 닫힙니다. 그러나 거기서 만족하지 마십시오. 예류자가 되면 일래자가 되도록, 일래자가 되면 불환자가 되도록, 불환자가 되면 아라한이 되도록 위빳사나 수행을 계속해야 합니다. 아라한이 되어 닙바나의 행복을 깨닫는 것은 새로운 생을 반복하지 않고, 괴로움은 완전하게 소멸해서, 테라와다 불교의 시대에 태어난 보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난 보람이 있도록, 테라와다 불교를 만난 보람이 있도록 수행하여 닙바나의 행복을 얻기를 바랍니다.
“appamādena sampādetha(압빠마-데-나 삼빠-데-타)”
방일하지 말고 확고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으로, 계·정·혜 삼학을 완성할 수 있도록 힘쓰길 바랍니다.
* 왜 출가하는가? (20150717)
(후편)
이 세상 부모님들이 자식들에 대해서 가지는 소원이 5가지가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들이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없다. 우리는 자식들에게 줄 뿐이다. 할 일을 할 뿐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부처님께서 일절지로 중생들의 마음을 살펴보니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바라고 있습니다. 자각하고 분명히 바라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는 남몰래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소원은 하나가 아니라 5가지나 있습니다(AN 5.39 Puttasuttaṁ).
“Bhato vā no bharissati(바또- 와- 노- 바릿사띠)”
우리가 늙어 쇠약해졌을 때, 어렸을 적부터 양팔에 안고 양어깨에 메고 길러 보살펴 온 자식들이 옆에 돌아와, 똑같이 우리를 보살피고 지켜 줄 것이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Kiccaṁ vā no karissati(낏짱 와- 노- 까릭사띠)”
우리가 일할 수 없게 되거나 죽게 되었을 때, 우리의 직업, 생계를 영위하는 가업을 자식들이 대신 계승해서 일해 줄 것이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Kulavaṁso ciraṁ tiṭṭhe(꿀라왕소- 찌랑 띳테-)”
우리의 유산이 없어지지 않게 지켜 줄 것이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도, 죽고 나서도, 친척이나 형제자매가 서로 왕래하고, 가깝게 지내며, 관계가 끊어지지 않게 될 것이고, 우리의 유산을 소중히 하여 유지해 줄 것이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Dāyajjaṁ paṭipajjati(다-얏장 빠띠빳자띠)”
우리의 세간·출세간의 유산을 제대로 계승해 줄 것이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세간의 유산이라고 하는 것은 재산, 금은보석 등의 유산입니다. 출세간의 유산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시를 하면 아이들도 보시를 할 것이다, 우리가 계를 지키면 아이들도 계를 지킬 것이다, 우리에게 설법을 듣는 습관이 있으면 아이들도 설법을 들을 것이다, 우리가 명상 센터에서 명상 하면 아이들도 명상 할 것이다, 우리가 세운 절의 탑과 가람을 우리의 아이나 손자가 대를 이어 수호해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간의 유산도 계승할 것이다, 출세간의 유산, 법의 유산, 선행의 유산도 계승할 것이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Atha vā pana petānaṁ dakkhiṇaṁ anupadassati(아타 와- 빠나 뻬-따-낭 닥키
낭 아누빠닷사띠)”
우리가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 우리에게 공덕을 널리 회향할 것이다. 우리를 위해서 공덕을 쌓아, 그 공덕을 널리 회향할 것이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모님의 소원은 5가지입니다.
이 출가의 특별한 공덕으로 생존중의 부모에게 특별한 기쁨을 주고, 특별한 보은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저세상에 다시 태어난 부모님에게도 특별한 회향을 할 수가 있어 그들에게도 특별한 공덕이 널리 퍼지게 됩니다. 출가로 부모님들의 소원을 실현한 것이 됩니다.
출가의 공덕은 다른 공덕과는 달라서 특별합니다. 갓 출가한 비구라도 불환자인 재가자가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출가자는 불환자인 재가 신자로부터 예배 받는 것에 적합한 사람, 공양 받는 것에 적합한 사람인 것입니다.
법의 입장에서 보면 불환자는 범부보다 매우 높은 지위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불환자인 재가 신자라도 오늘 새롭게 비구가 된 출가자에게는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중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앉을 자리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공양 올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불환자다. 그 사람은 방금 비구가 되었다. 깨닫지 않은 범부다. 번뇌가 가득하기 때문에 예배하거나 마중 나갈 수 없다.」이러한 완고한 태도를 취해도 괜찮을까요? 안됩니다.
정말로 불환자라면 이러한 마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불환자가 아니라, 자신을 불환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가짜는 이러한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귀한 불환자가 된 재가자의 예배 공양을 받는 것에 적합하다면, 일래자의 재가자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류자의 재가자라면 더욱더 그러하겠지요.
고귀한 덕, 도와 과의 덕을 가진 예류자·일래자·불환자의 재가 신자들은 고귀하면서 왜 오늘 출가하여 비구가 된 범부를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이 점을 제대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처럼 예배하는 주된 이유는 출가자의 모습이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이유는 많이 있지만, 그 첫 번째는 출가자의 고귀한 모습 때문입니다.
출가자의 모습은 어떠한 것입니까?
첫 번째, 출가자는....
① “Upagato so samaṇaliṅgaṁ(우빠가또- 소- 사마나링강)”
출가 사문은 조용하고 평안한 모습입니다. 링가는 형태, 외관, 특징입니다. 사문의 특징은 잘 갖춘 조용하고 평안한 모습을 지닙니다. 출가자는 조용하고 평안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특징은 2가지가 있습니다.
“bhandubhava(반두바와)”-머리카락을 깎고 있습니다. “kāsāvachādana(까-사-와차-다나)”-물들인 가사를 몸에 걸치고 있습니다. 즉, 머리카락을 깎고, 초목으로 물들인 가사를 몸에 걸치고 있는 외형이 사문의 상, 조용하고 평안한 모습이 됩니다.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인 재가자는 머리카락을 기르고, 양복을 몸에 걸치고 있어, 단순하고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불환자의 도와 과라는 특별하고 고귀한 법이 있지만, 외형은 평안하고 조용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사람들이 보아도 마음속이 평안하게 되지 않습니다.
범부의 비구들은 마음속에서 번뇌가 가득하지만, 그 모습을 사람들이 보면 마음이 가라앉고 평안해집니다. 예를 들어 사미나 비구가 명상하고 있다고 합시다. 시선을 아래로 향해 눈감고 명상하고 있으면, 본인은 무슨 근심 걱정거리에 시달리고 있는지 알 수 없고, 망상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릅니다. 번뇌가 가득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명상하고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은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해집니다. 내면의 법이 있지 않아도 그의 모습은 조용하고 평안한 모습입니다.
명상하고 있지 않는 때나,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을 때나, 멈춰 서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에, 율에 맞도록 신중함과 품위를 가지고 살고 있으면, 내면에는 특별하고 고귀한 법이 없어도, 그 모습을 본 사람의 마음은 조용하고 평안해집니다.
그래서 조용하고 평안한 외관을 가지고 있는 출가자를 소란스러운 외관을 한 재가 신자는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재가의 옷, 장식품은 조용한 것이 아닙니다. 출가자는 조용한 외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재가 불환자로부터 예배를 받는 것이 적합합니다. 예류자, 일래자도 당연히 포함되고, 범부 재가자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출가자들에게 예를 표해야 합니다.
출가 사문은 언제나 단정하여야 합니다. 출가자는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보름마다 머리카락을 깎으면서, 몸에 걸쳐진 물들인 가사를 추스를 때 마다 ‘나는 왜 출가하였는가!’라고 반문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 출가자는....
② “Buddhādhippāye ṭhito(붓다-딥빠-예- 티또-)”
그 모습은 부처님의 소망에 들어맞은 모습입니다. 재가자의 모습은 부처님이 바람직하다고 한, 부처님이 선호한 모습이 아닙니다. 머리카락을 깎고, 가사를 몸에 걸친 모습이 부처님이 바람직하다고 하고, 부처님이 선호한 모습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밝혀 놓은 진리를 끊임없이 배우고 실천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부처님의 소망에 들어맞는 모습입니다.
출가자의 모습은 부처님의 소망에 들어맞은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더욱 더 노력하여 완전하게 배우도록 하여야 하고, 완전하고 바르게 실천하여야 하고, 게으름피우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하고, 완전하게 진리를 깨닫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 번째, 출가자는....
③ “Khīṇāsavehi so samaṇaṁ upagato(키-나-사웨-히 소- 사마낭 우빠가또-)”
그 모습은 번뇌가 소멸한 자(루진자, 아라한)와 같은 모습입니다. 아라한의 모습도 비구와 같은 모습입니다.
재가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아라한은 없습니다. 재가자는 아라한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라한으로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면, 그 사람이 사미나 비구인 경우를 제외하면, 만약 출가하지 않는다면 다음날 날이 새기 전에 그 날 안에 닙바나에 들어간다고 주석서에서 말합니다.
아라한과라고 하는 덕을 재가의 모습으로는 계속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아라한과의 덕이 너무 광대하고 너무 고귀하기 때문에 재가의 모습이 아라한과의 덕을 유지하는 것에 견딜 수 있지 않습니다.
즉 아라한이 된 재가자는 그 날 중에 출가하든지, 출가하지 않으면 닙바나에 들어갑니다. 그 때문에 아라한이 되어 며칠, 몇 개월, 몇 년 재가자로 살아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진정한 아라한이라면 출가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라한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불환자의 재가 신자들은 출가자들을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출가자는 아라한과 같은 모습과 행실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모습에서 아라한이 행해서는 안 될 것은 행하지 말고, 아라한이 행할 것은 자신도 행하여야 합니다. 항상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경계하고, 번뇌가 소멸한 자의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네 번째, 출가자는....
④ “Aggaparisāṁ so upagato(악가빠리상- 소- 우빠가또-)”
고귀한 사람들, 아라한들의 모임 안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출가한 비구라도 고귀한 아라한들과 함께 한 식탁에서 식사할 수가 있습니다. 불환자의 재가가 「나는 불환자다. 스님과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아라한들과 함께 식사할 수가 있는 것은 범부라도 출가자뿐입니다.
출가자는 아라한과 같은 사원의 건물에서 생활하고, 침식을 모두 함께할 수 있습니다. 불환자라도 재가자는 불가능합니다.
그처럼 아라한이라는 고귀한 사람들 모임 안에 불환자의 재가자가 더해지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범부라도 출가자는 더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환자의 재가자는 범부라도 출가자를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출가자는 가장 뛰어나고 고귀한 아라한들과 함께 생활하는 자입니다. 아라한들과 함께 그 상가의 모임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입니다. 그 모임에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하며, 그 성스러운 부처님의 제자들인 상가의 일원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섯 번째, 출가자는....
⑤ “Labhati so patimokkhuddesaṁ sotuṁ(라바띠 소- 빠띠목쿳데-상 소-뚱)”
보름과 초하루의 포살일에 계단에서 율을 송출할 경우에 범부인 출가자라도 그 모임에 참여하여 율을 들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모든 출가자들은 빠띠목카 227계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불환자의 재가자가 「나는 불환자다」라고 말하며 빠띠목카를 송출하는 출가자 모임에 참가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환자의 재가자는 범부인 출가자라도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출가자는 보름과 초하루의 포살 일에 계단에서 율을 독송하는 자리에는 반드시 참가하여야 하고, 더불어 그 율을 암송하는 자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여섯 번째, 출가자는....
⑥ “So aññe pabbājeti upasampādeti jinasāsanaṁ vaḍḍheti(소- 안녜- 빱바-제-띠 우빠삼빠-데-띠 지나사-사낭 왓데-띠)”
범부의 출가자라도 정해진 법납에 이르면 다른 사람을 출가시켜 구족계를 줄 수가 있고, 그들에게 부처님(승리자)의 가르침을 교육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 사회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펼쳐나갈 의무가 있습니다.
불환자의 재가자가 「나는 불환자다」라고 말하며, 재가자의 머리카락을 깎고, 가사를 휘감아 주어, 출가시킬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불환자다」라고 말하며, 출가 수계작법(kammavācā)을 독송하여 출가자를 만들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출가자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범부라도 출가자뿐입니다. 그래서 불환자의 재가자는 범부라도 출가자를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출가자는 정해진 자격을 갖추면 수많은 사람들을 출가시킬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또한 출가자를 교육하고, 재가자들에게 법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 세월은 멀지 않으니 부지런히 닦아야 합니다.
일곱 번째, 출가자는....
⑦ “Appamāṇesu so sikkhāpadesu samattakari(압빠마-네-수 소- 식카-빠데-수 사맛따까리)”
출가자는 수많은 학처를 완전하게 갖출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환자의 재가자는 범부라도 출가자를 공양,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학과 수행을 몸에 익히는 것도 벅찬데, 수많은 학처를 완전하게 갖추고, 여러 갈마의식(kammavācā)들과 다양한 상가의 갈마법(saṅghakamma)들을 더불어 익히기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출가자들은 반드시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재가자는 그러한 일은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환자의 재가자도 오늘 갓 출가한 비구에게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수없이 많은 배울 것들을 남김없이 공부하여 완전하게 갖출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조그마한 성취에 머물러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덟 번째, 출가자는....
⑧ “bhikkhu sikkhapako vaṁsadharo(빅쿠 식카빠꼬- 왕사다로-)”
범부라도 출가자들은 불교를 오래도록 수호할 수가 있습니다. 계·정·혜 삼학을 지도할 수가 있습니다. 법통을 계승할 수가 있습니다.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게 지킬 수가 있습니다.
불환자의 재가자는 불교를 오래도록 수호할 수가 없습니다. 계·정·혜 삼학을 지도할 수가 없습니다. 법통을 계승할 수가 없습니다.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게 지킬 수가 없습니다.
불환자의 재가자조차 지킬 수 없는데, 천신들이 지킬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삼장을 지키는 것은 출가자입니다.
먼 옛날 스리랑카에는 심한 기근으로 먹을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출가자들은 굶주림을 감추기 위해서 물을 적신 모래주머니를 배 위에 올리고 삼장을 소리 내어 읽음으로써 배고픔을 달래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게 지켜 왔습니다.
현재도 사원의 학당이나 명상 센터에서는 출가자가 삼장을 암기하며, 계승하고, 지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게 지키고 있습니다.
삼장이라는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게 유지하여 지키고 있는 것은 오늘날도 사미나 비구를 포함한 출가자인 상가입니다.
먼 옛날부터 생명을 내려놓는 한이 있어도 삼장이 끊어지지 않게 지켜 온 것은 성스러운 상가인 출가자입니다.
그래서 삼장을 지키고 있는 것은 오늘 갓 출가한 비구, 성스러운 상가, 장로들인 출가자인 것입니다. 불환자의 재가자들이 지킬 수 없는 가르침을 범부인 출가자는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불환자의 재가자는 범부라도 출가자를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출가자는 계·정·혜 삼학을 완전하게 배우고, 수행을 가르칩니다.
재가 신자들이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출가자가 배우고 가르친 계·정·혜의 고귀한 삼학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정·혜의 고귀한 삼학을 배워 가르치고 있는 출가자들은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가 되어 있는 재가자들의 은사입니다.
직접 자신에게 지도하지 않은 출가자들도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수행법이 끊어지지 않게 유지하여 지켜 왔기 때문에, 그리고 현재도 유지하여 지키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은사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사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경의를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중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선인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출가자들이 가르쳐 준 계·정·혜의 실천법을 배워 수행했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재가자도 「아! 출가자들은 우리에게 계·정·혜의 실천을 가르쳐 준 스승이구나. 우리의 은사이구나! 」라고 가슴 속 깊이 새겨서, 은사인 출가자들이 비록 범부라도,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에게 직접 지도해 준 사람만이 은사인 것은 아닙니다. 자신에게 직접 지도해 준 사람의 가르침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출가자들로부터 왔습니다. 수행법이나 삼장을 지켜 온 근원은 출가자들입니다.
출가자들의 도움 없이는 어떤 재가자도 자신 혼자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직접 지도한 사람이 재가자였다고 해도 그 근원은 출가자이기 때문에 출가자의 은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출가자의 은혜 없이 깨달은 재가자는 오늘날까지 한사람도 없습니다. 미래에도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처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계·정·혜 삼학을 암송하여 전하고 수호한 사람은 출가자입니다. 그래서 범부라도 출가자를 예류자·일래자·불환자의 재가자는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출가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어서 오래도록 수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하여야 하는 것이지,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출가자는 부처님께서 정하지 않은 새로운 원칙을 만들지 말아야 하고(Apaññattaṁ na paññāpeyya), 부처님께서 이미 정하신 원칙을 없애지 말아야 하고(Paññattaṁ na samucchindeyya), 부처님께서 잘 설하신 행법에 따라 수행하는 것(Yathāpaññattesu sikkhāpadesu samādāya vatteyya)은 출가자의 의무입니다.
출가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원형 그대로 전해야 하는 것이지, 보태거나, 삭제하거나, 변형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대신하여 법을 전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부처님을 대신하여 부처님의 전령으로서 법을 설하여야 합니다.
아홉 번째, 출가자는....
⑨ “Āsavakkhayaṁ pana appatvā, ‘sukhisomhi'ti cittaṁ na uppadetabbaṁ
(아-사왁카양 빠나 압빠뜨와- 수키솜히띠 찟땅 나 웁빠데-땁방)”
번뇌가 아직 소멸한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으면, 자신이 행복하다고 상상조차 해서도 안 되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사위성의 기원정사에 오셨을 때입니다.
계를 잘 지키고 있던 비구들은 「나는 계를 엄수하고 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은 간단하다. 아무것도 어렵지는 않다.」 또, 탁발을 잘 실천하고 있던 비구들은 「나는 탁발행을 실천하고 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은 간단하다. 아무것도 어렵지는 않다.」 또, 교육과 학문의 지식을 갖춘 비구들은 「나는 교육과 학문에 정통하고 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은 간단하다. 아무것도 어렵지는 않다.」 또, 신통력을 가진 비구들은 「나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은 간단하다. 아무것도 어렵지는 않다.」 또, 숲이나 산에서 지내며 마을과 떨어져 혼자서 살고 있는 비구들은 「나는 한적한 장소에 살고 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은 간단하다. 아무것도 어렵지는 않다.」 그처럼 각각 실천하고 있는 것, 수행하고 있는 것, 이미 얻고 있는 것에 만족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노력하는 것 없이, 무심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계를 지키고 있던 비구들은 계를 지키는 것만으로 만족했습니다. 교육과 학문의 지식이 있는 비구들도 교육과 학문에 정통하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습니다. 신통력이 있는 비구들도 신통력이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습니다.
깨닫지 못한 범부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가 된 비구들도 그와 같았습니다. 「나는 예류자가 되었다」 「나는 일래자가 되었다」 「나는 불환자가 되었다」라고 하며 「아라한이 되는 것은 간단하다. 어떤 어려운 것도 없다.」 그렇게 믿고 잘라버려, 노력도 하지 않고, 조금 부족한 상태로 살고 있었습니다.
불방일한 것을 막아버리고, 방일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불방일을 막는다는 것은 아라한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띠를 완전하게 놓쳐버리고 있다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구들이 그러한 상태로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 예경 올리자, 부처님께서 물었습니다. 「출가한 목적은 이제 정점에 도달했느냐? 출가의 일은 끝났느냐?」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아라한이 되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비구들은 정직하게 대답했습니다. 계를 지키고 있던 사람은 「나의 계는 청정합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은 간단합니다. 굳이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아직 노력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부처님.」
불환자가 된 사람도 「나는 불환자가 되었습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은 간단합니다. 굳이 어려운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직 노력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부처님.」
부처님께서는 그 비구들 전원을 엄하게 혼을 내셨습니다. 「비구라는 것이 마지막에 불환자가 되는 것이냐? 불환자가 된 것으로 너희들의 윤회의 괴로움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대변, 소변, 고름, 침, 콧물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조금만 만나도 기분이 나쁘고, 꺼림칙한 것이듯이, 윤회도 또한 손가락을 올릴 정도의 짧은 시간이라도 기분이 나쁜 것이고, 꺼림칙한 것이다.
아직 아라한이 되지 않았다면 윤회는 계속되므로 그 사람에게 만족은 없다. 만족하는 자는 몹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직 아라한이 되어 있지 않은데 자신감을 가지고 안심하는 사람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그처럼 말씀하시고, 아래의 게송을 말씀하셨습니다.
“na sīlabbatamattena / bāhusaccena vā pana”
“atha vā samādhilābhena / vivittasayanena vā”
“phusāmi nekkhammasukkhaṁ / aputhujjanasevitaṁ”
“bhikku vissāsamāpādi / appatto āsavakkhayaṁ”
(나 실-랍바따맛떼-나, 바-후삿쩨-나 와- 빠나,
아타 와- 사마-딜라-베-나, 위윗따사야네-나 와-,
푸사-미 넥캄마숙캉, 아뿌툿자나세-위땅,
빅쿠 윗사-사마-빠-디, 압빳또- 아-사왁카양.)
“비구는 계를 지키고 의식을 익히는 것만으로 자신감을 가져 안심해서는 안 된다. 탁발행을 실천하고 있는 것만으로 자신감을 가져 안심해서는 안 된다. 교육과 학문의 지식이 풍부한 것만으로 자신감을 가져 안심해서는 안 된다. 신통력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자신감을 가져 안심해서는 안 된다. 조용한 숲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만으로 자신감을 가져 안심해서는 안 된다. 이제 불환자가 되었다고 해서 자신감을 가져 안심해서는 안 된다. 아라한이 되고 나서 비로소 안심하라.”
비구에는 외형적 비구와 내면적 비구의 2종류가 있습니다. 외형적 비구라고 하는 것은 비구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사를 입고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내면적 비구라고 하는 것은 “kilese bhindati'ti bhikku(낄레-세- 빈다띠띠 빅쿠)”라는 정의대로 번뇌를 부수어 무너뜨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재가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번뇌가 적게 되도록, 번뇌가 진정되도록 노력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모습은 내면적 비구를 닮았다고 할 것입니다.
외형적 비구이든 내면적 비구이든 진정한 비구라면 4루(욕구·유·견해·무명)의 멸진에 이르지 않고 「자신은 이제 충분하다」라고 믿어 안심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출가했는가」라는 출가의 목적이 이미 뚜렷한 사람이라도, 비구가 되었기에, 가사를 입은 것만으로 「악취의 문은 이미 닫혔다, 닙바나로 가는 것은 확실하다」라고 믿어 안심하면 안 됩니다.
아직 아라한이 되어 있지 않으면 자신감을 가지고 안심하면 안 됩니다. 계속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재가자들도 보시를 한 것만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항상 오계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팔계를 지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삼보의 덕을 자주 회상하고, 자비의 명상을 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경전을 읽고 공부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러한 일을 그만둘 필요는 없습니다. 항상 보시를 해 주십시오. 계도 없애지 않고 지켜 주십시오. 경전도 소리 내어 읽으십시오.
그리고 도와 과, 닙바나를 정말로 얻고 싶다면, 계속해서 위빳사나 수행도 노력해서 실천하십시오. 조그마한 경험을 한 것만으로, 예류자가 된 것만으로, 일래자가 된 것만으로, 불환자가 된 것만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아라한이 될 때까지 노력해 주십시오.
그때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난 보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번뇌가 아직 멸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행복하다고 상상조차 해서는 안 되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출가자는 계를 잘 지키는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탁발을 매일 실천하는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가르침을 배우는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신통력을 얻은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조용한 곳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불환과를 얻었다고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아라한이 되고 나서 안심하여야 합니다.
윤회하는 세상에서 만나기 지극히 어려운 테라와다 불교를 만났으면서, 위빳사나 명상 센터에도 가지 않고, 보시·지계·선정만으로 만족해 멈춰버린다면, 테라와다 불교를 만난 보람이 없습니다. 한편으로 보시, 지계, 선정 등을 실천하면서, 동시에 위빳사나 수행도 해서, 닙바나를 얻어야만, 불교를 만난 보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빳사나를 수행하는 방법을 가장 짧고 가장 완벽하게 나타낸 게송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생긴 순간,
생긴 채로 반드시 안다.
동작, 장소, 위의, 시간을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린다.
「몸과 마음이 생긴 순간」이라고 하는 말로 위빳사나는 무엇을 알아차림 하는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몸과 마음의 행위를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음이 뚜렷하면 마음, 몸이 뚜렷하면 몸, 가장 분명한 것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부러 몸의 현상을 알아차린다고 결정해서, 몸의 현상만을 알아차림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러 마음의 현상을 알아차린다고 결정해서, 마음의 현상만을 알아차림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러 몸의 현상만, 마음의 현상만 알아차리면 법을 얻지 못하고, 도와 과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을 동시에 함께 알아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뚜렷한 한가지만을 알아차려 알았다면 됩니다.
알아차릴 몸과 마음도, 이미 생겨 버린 과거의 몸과 마음, 아직 생기지 않은 미래의 몸과 마음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생긴 순간」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확실히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몸과 마음만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과거의 몸과 마음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미래의 몸과 마음도 아직 생기지 않은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면, 올바른 위빳사나의 지혜는 생기지 않습니다. “bhūtaṁ bhūtato passati(부-땅 부-따또- 빳사띠)”라고 하듯이, 현재 분명히 생겨난 몸과 마음을 그 생긴 순간에 알아차려야만, 올바른 위빳사나의 지혜가 생깁니다.
「생긴 채로」라는 말로 위빳사나 수행의 방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경전이나 아비담마의 구절, 불탑이나 불상의 모습을 특별히 기억해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처럼 기억하고 알아차렸다면, sutamayañāṇa(수따마야냐-나, 문소성, 들어서 아는 지혜), cintāmayañāṇa(찐따-마야냐-나, 사소성, 생각해서 안 지혜) 밖에 생기지 않습니다. bhāvanāmayañāṇa(바-와나-마야냐-나, 수소성, 실천해서 깨달은 지혜)는 생기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몸의 행위(색) 마음의 행위(명)를 생긴 채로, 그대로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몸의 행위라면 걷고 있으면 「걷는다」, 멈춰 서면 「멈춘다」, 앉으면 「앉는다」, 가로놓이면 「가로놓인다」, 굽히면 「굽힌다」, 늘리면 「늘린다」라고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gacchanto vā gacchāmi ti pajānāti(갓찬또- 와- 갓차-미띠 빠자-나-띠)” 「걷고 있을 때는 걷고 있다고 안다」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수행법입니다.
마음의 행위라면, 무엇인가를 갖고 싶어 하고 있으면 「갖고 싶다」, 바라고 있으면 「바라고 있다」, 화나 있으면 「화나 있다」, 생각하고 있으면 「생각하고 있다」, 질리고 있으면 「질리고 있다」라고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도 “sarāgaṁ vā cittaṁ sarāgaṁ cittaṁ ti pajānāti(사라-강 와- 찟땅 사라- 강 찟땅띠 빠자-나-띠)”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안다」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수행법입니다.
게송에서 「동작」이라고 하는 것은 동작을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위빳사나는 동작을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어떤 동작을 하고 있어도 위빳사나로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요리를 하든, 식사를 하든, 세탁을 하든, 옷을 갈아입든, 이야기하든, 듣고 있든, 쇼핑을 하든, 차를 운전하든, 어떤 동작을 하고 있어도, 알아차림을 한다면, 그것은 위빳사나입니다.
알아차리는 방법도 어렵지 않습니다. 「생긴 채로」라는 대로, 자신이 가고 있는 동작을, 가고 있는 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밥을 씹고 있다면 「씹은다」, 물을 마시고 있다면 「마신다」, 옷을 입고 있다면 「입는다」라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장소」라고 하는 것은 장소를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위빳사나는 장소를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어떤 장소에 있어도 위빳사나로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버스 안에서, 길가에서, 직장에서, 시장에서, 파티에서, 어떤 장소에서든 알아차린다면 위빳사나가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선원과 같이 조용하고 깨끗한 장소에서 밖에 할 수 없는 수행법이 아닙니다. 화장실과 같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 장소에서조차 수행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스스로, “uccārapassāvakamme sampajānakārī hoti(웃짜-라빳사-와깜메- 삼빠자-나까-리- 호-띠)” 「대소변을 할 경우에도 잘 알아차리며 실천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장실에 가면서도 공덕을 쌓을 수가 있습니다. 일을 보고 싶으면 「일을 보고 싶다」, 일을 보고 있을 때는 「일을 보고 있다」, 냄새난다면 「냄새나고 있다」, 배가 아프면 「배가 아프다」 등으로 알아차리며 알 뿐입니다.
간단하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위빳사나입니다. 실천한다면 어떤 장소라도 공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화장실에 가면서조차 위빳사나의 공덕을 쌓을 수 있기에 다른 장소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위의」라는 것은 위의를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위빳사나는 위의를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어떤 위의라도 위빳사나로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행주좌와, 이 4개의 위의 가운데, 걷고 있으면 「걷는다」, 멈춰 서면 「멈춘다」, 앉으면 「앉는다」, 가로놓이면 「가로놓인다」라고 알아차릴뿐입니다.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간을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린다.」라는 것은 의미가 뚜렷합니다. 시간을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위빳사나는 시간을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언제라도 위빳사나로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로부터 밤에 침대에 들어가 잘 때까지, 언제라도 알아차림을 따르게 할 수 있다면 위빳사나가 됩니다.
깨어났을 때에는 「깨어났다」라고 알아차린 후 하루를 시작해 주십시오. 그 후로도 하루 종일, 보이고 있을 때는 「보인다」, 들릴 때는 「들린다」, 수상할 때는 「수상하다」, 구수할 때는 「구수하다」, 먹고 있을 때는 「먹고 있다」, 접하고 있을 때는 「접하고 있다」, 알고 있을 때는 「알고 있다」라고 알아차리며 하루를 보내 주십시오. 밤에 침대에 들어갔을 때에도 「자고 있다」라고 알아차리면서 하루를 끝내 주십시오.
그처럼 위빳사나는 앞의 알아차림과 뒤의 알아차림, 앞의 사마디와 뒤의 사마디, 앞의 지혜와 뒤의 지혜가, 사이를 두지 않고 연속하듯이 알아차림이 생긴다면, 매시간 위빳사나 지혜가 성숙해지고 날카로워집니다.
가장 성숙한 위빳사나 지혜, 가장 날카로운 위빳사나 지혜의 끝에, 도의 지혜·과의 지혜를 얻을 수 있기에, 모든 괴로움은 다하여, 진실로 행복한 닙바나을 깨닫게 됩니다.
닙바나의 행복을 손에 넣었다면 테라와다 불교의 시대에 태어난 숙원을 이루게 됩니다. 예류자가 되었을 경우도 악취의 문이 완전하게 닫힙니다. 그러나 거기서 만족하지 마십시오. 예류자가 되면 일래자가 되도록, 일래자가 되면 불환자가 되도록, 불환자가 되면 아라한이 되도록 위빳사나 수행을 계속해야 합니다. 아라한이 되어 닙바나의 행복을 깨닫는 것은 새로운 생을 반복하지 않고, 괴로움은 완전하게 소멸해서, 테라와다 불교의 시대에 태어난 보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난 보람이 있도록, 테라와다 불교를 만난 보람이 있도록 수행하여 닙바나의 행복을 얻기를 바랍니다.
“appamādena sampādetha(압빠마-데-나 삼빠-데-타)”
방일하지 말고 확고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으로, 계·정·혜 삼학을 완성할 수 있도록 힘쓰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