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류를 건너는 법ㆍ1 / 빤냐완따 스님 법문

Kusalo
2022-05-08
조회수 601


강물이나 계곡물이 격랑을 일으키며 세차게 흘러가는 것을 <폭류>라고 하지요. 지난 음력 정월부터 3월 초순까지 약 두 달 동안 이 승이 머물고 있는 초암에서 포말을 일으키며 무섭게 흘러가고 있는 어떤 <폭류>를 보았습니다.

여지껏 관념으로만 보아오던, 개념으로만 이해해왔던, '그래 일상의 삶이 모두 폭류인거지~' 하며 종종 혼잣말처럼 되뇌이던 그 <거센 물결>을 실감나게 보았습니다. 인간의 감정이 생사를 넘나들면서 무섭게 요동치며 흘러가는 것을 팔짱 낀 째 바라보았고, 마침내 이 승마저도 그 격랑속으로 뛰어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하였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격랑이 가라앉고, 거센 강물 위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휩쓸려 멀리 떠내려갈것만 같았던, 혹은 그냥 그대로 가라앉아 버릴것만 같았던 던 두 분(혹은 네 분)과 그분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던 이 승은 지금 따뜻한 차를 나누며 유유히 흘러가는 5월의 강물을 바라다보고 있습니다.


강건너 산기슭엔 온갖 식물들이 자생하고 있습니다. 덩굴식물도 있습니다. 덩굴식물은 대상을 휘감으며 뻗어나가는 특성을 지니고 있지요. 대표적인 것이 칡(갈)넝쿨과 등나무넝쿨입니다. 간혹 두 넝쿨이 서로 만나 뒤엉킬 때가 있습니다. 넝쿨과 넝쿨이 서로의 살속을 파고들며 생존경쟁을 합니다. 이를 갈등이라고 하지요.인류사는 이념, 종교, 패권,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의 대립 등 온갖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갈등은 일개인의 내적문제로부터 비롯되기도 하지만, 개인과 개인(부모자식 부부 고부갈등...),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의 견해ㆍ이익ㆍ자존심이 대립충돌하면서 온갖 갈등이 생겨납니다. 갈등은 해소될 때도 있지만 극한으로 치달아 파국을 맞기도 합니다.


인간의 보편적 특성중의 하나가 바로 갈등입니다. 갈등은 언제 어디서나 발생합니다. 화합의 상징인 승가 안에도 갈등이 있을 수 있고, 재가와 승가 사이에도, 재가자들 사이에도 갈등은 있습니다. 사찰의 주지나 선원장 소임을 맡고 있는 도반들이 있습니다. 가끔 만나 법담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갈등과 관련한 고민거리를 털어놓을 때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공양간의 신구(권력?)갈등입니다. 곳간에서 인심나듯이 절에서의 인심은 공양간에서 나는 법입니다. 음식을 정성껏 조리하여 대중들에게 공양 올리는 것은 10가지 물리적 공덕 가운데 하나이며, 경전이나 법문집을 나누는 공양 다음으로 수승한 공덕이 바로 굶주린 이에게 음식을 베푸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공양주는 고된 소임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맡으려 하였습니다.


한국의 경우 사원이나 선원의 안살림은 대부분 공양주(공양팀 혹은 원주)가 맡습니다. 작은 암자의 경우에는 주지와 대중의 신임을 얻어 통장까지 관리하기도 합니다. 20년 전쯤인가 이 승과 인연 있었던 어느 절에 한 젊은 스님이 여러 젊은 수행자들과 함께 신임주지로 발령받아 왔습니다. 새 주지스님은 젊은 수행자들에게 공양간일도 돕게 하고 재무관리도 맡게 하려고, 그간 안살림을 주관해오던 보살님께 통장을 내놓으라 했던 모양입니다. 보살님은 주지스님의 명인지라 마지 못해 통장을 내주기는 하였으나, 그날 저녁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가 보름만에 회복하여 다시 기존의 공양팀들과 함께 공양간일을 돕기 시작하였입니다.


그후 주지스님이 그 절을 떠날 때까지 수년동안 스님을 따르던 젊은 수행자들은 공양간에 출입한다거나 공양간에서 식사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때의 젊은 스님은 어느덧 귀밑머리에 서리가 내려앉은 초로의 큰스님이 되었으며, 그 보살님 역시 여법한 수행자가 되어 스님께 종종 안부전화 드리고 있고, 그 누구도 차별함 없이 존경하고 베풀면서 지금도 공양간일을 돕고 있습니다.


공양간의 열쇠나 집안의 곳간 열쇠는 공양주나 시어머니에게 있어 끝까지 지키고 싶은 자존심인 동시에 존재의 이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소유할 수는 없는 법. 새며느리가 들어오면 잠시 섭섭하긴 하겠지만 기꺼이 내주어야 하고, 연세 많은 공양주(팀)들도 젊은 팀들이 들어오면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거거나 이선으로 물러나 뒤에서 묵묵히 도울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어야 참다운 불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던 그런 일들이 최근 이 승이 머물고 있는 초암에도 있었습니다. 80대의 두 노보살님이 수십년 가까이 이 승을 뒷바라지 해오면서 일이 있을 때마다 공양주를 자처하며 헌신적으로 봉사하였습니다. 이 승 역시 속가의 노모처럼 극진히 대했고, 전국 각지의 사찰 초청법회에 참석할 때마다 두 분을 모시고 가다보니 두 분은 어느덧 많은 불자들로부터 칭송받는 유명한 노보살님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래의 시는 그 노보살님들을 소재로 한 것입니다.


< 십년 타령 >


십년만 더 젊었으면,

십년만 더 젊었으면,


때마다 절에 가서 봉사도 하고

스님들 법문도 더 많이 들으련만


십년만 더 젊었으면,

십년만 더 젊었으면,


공양간 일손도 자주 보태고

스님들 뒷바라지 좀 더 잘하련만


이렇게 십년십년 하는동안 십년세월 흘러가고

허리는 좀 굽었지만 오늘도 변함없이


공양미며 찬거리 배낭에 짊어진 채

법당길 올라가시는 노보살님들이여!


"보살님, 우리

십년타령 한 번 더 해볼까요?



무상한 세월과 함께 그토록 근력있고 꼿꼿했던 허리는 점점 굽어져갔고, 검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백발이 되었습니다. 특히 재작년 부터는 기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같아 미리 대책을 마련해 놓고 있었습니다. 올 정월부터 노보살님들은 이선으로 물러나 감독역할만 하도록 하고 60대 중반의 신심있는 불자 두 분을 투입시켜 그간의 노보살님 역할을 맡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올 정초행사 때는 젊은 두 보살님(사실 이분들은 집에서 손주들로부터 할머니 소리를 듣는 60대입니다)에게 일일 공양주 소임을 맡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승은 공양간일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애로우신 노보살님들과 성격 좋기로 소문난 두 젊은 보살님은 평소 서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터라 화목하고 재미있게 잘 지낼 줄만 알았습니다. 감정의 불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심 그렇게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불꽃을 처음 인지했을 때 박힌돌 굴러온돌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모가 다 달아서 둥글둥글한 돌들이라면 알박기하듯 텃세할 일도 없고, 박힌돌을 빼낼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굶주려 아사 직전인 뱀에게 뒷다리를 물린 채 바둥거리는 개구리 이야기를 떠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작대기를 두드려 개구리를 구할 것인가? 못 본 채 하고 뱀을 살릴 것인가? 애라 모르겠다. 각자의 업대로 살아라. 이 승은 가던 길 가련다. 이렇게 생각하며 팔짱 낀 채 먼 발치서 바라만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원보름 행사를 마치고 난 며칠뒤, 노보살님 한 분이 몸져 누우셨습니다. 몸속의 물이란 물은 남김없이 쏟아내고 거의 빈사상태가 되었습니다. 80대 중반이지만 골격이 단단하시고 평생 감기도 잘 안걸리시던 분이 초암에 다녀가신 뒤 저토록 드러누워 일어나질 못하시니, 그저 죄송하고 황망할 따름이었습니다. 이를 어쩔거나. 육중한 바위 하나가 굴러내려와 심장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노보살님에 대한 감사한 마음, 귀하게 여기는 마음 변함없는데, 젊은 보살님들의 등장으로 인하여 마치 며느리에게 곳간 열쇠를 넘겨준 것같은(빼앗긴 것같은) 상실감이 얼마나 컷기에, 저토록 혈변을 쏟으며 드러눕는단 말인가. 그리고 이 승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강렬했기에 사흘 밤낮 미음 한술 못넘긴 채 비몽사몽 허공에 손을 내저으며 저승 문턱을 넘으려 한단 말인가.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두 젊은 보살님은 걱정과 두려움으로 여러날 불면의 밤을 지새웠다고 하니 이러다 자칫하면 귀하디 귀한 노보살님 잃고 보물같은 두 젊은 보살님까지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의 잘못인가? 젊은 보살님들 잘못인가? 노보살님 잘못인가? 아니면 이 승의 잘못인가? 어떤 날은 젊은 보살님들을 완곡하게 나무랬고, 또 어떤 날은 앓고 계신 노보살님을 내심 탓하기도 하였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가장 큰 잘못은 결국 이 승에게 있었습니다. 평소 불자들에게 <시계생천>(보시와 지계를 실천하면 선처에 태어남), 그리고 <자비수행>을 통한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그토록 강조해 왔건만 공부점검을 제대로 하지 않다보니 쇠귀에 경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음수행의 본질적인 문제는 건들지 않고 주변을 맴돌면서 복이나 빌다보니 이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겨울이 다 끝나갈 무렵, 그토록 맑고 고요하던 초암의 하늘위에 먹구름이 일고, 천둥번개와 함께 차디찬 폭우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순식간에 불어난 계곡물은 초암마저 삼킬버릴 기세로 포말을 일으키며 주변의 온갖 것들을 휩쓸었습니다. <폭류>였습니다. 노보살님 한 분이 격랑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고, 낯익은 보살님 두 분이 온갖 부유물들과 함께 저만치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초암 툇마루에 걸터앉아 팔짱 낀 채 바라보고만 있던 승 하나가 돌연 밧줄 하나를 챙겨들고 그 거센 물결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문득, 초기경전 상윳따니까야의 첫번째 경 <폭류경>(Ogha sutta)이 생각났습니다. 어떤 한 천인이 한밤중에 부처님이 계신 사왓티의 기원정사를 환하게 비추면서 내려와 부처님께 예를 올린 뒤 여쭙기를, 세존이시여! 님께서는 어떻게 하여 <폭류>를 건넜습니까? 어떻게 하여 가라앉지 않고, 휩쓸리지 않고 그 거센 폭류를 건널 수 있었습니까? < 1부 끝 >


(<폭류를 건너는 법ㆍ2>에서는 초기경전은 <폭류>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으며, 고따마 붓다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폭류>를 건너셨는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을 어떻게 우리들 삶에 적용시켜 그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있는지에 대해서 숙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불멸 2566년 5월 어느날

천림산 기슭에서

메따와 함께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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