둑카(DUKKHA, 苦, 괴로움, 불만족) (1) / 아짠 빤냐와로 마하테로

담마마-마까
2022-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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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둑카(DUKKHA, 苦, 괴로움, 불만족) (20091002)

 

모든 생명들은 언제나 행복이라 불리는 무엇을 추구해 왔습니다. 과거에 추구한 것도 같은 목표인 행복이며 또한 현재에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존재들이 추구하는 것이 욕망의 충족과 즐거운 감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래에도 우리는 가장 붙잡기 어려운 행복을 계속해서 추구하리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계속적인 추구는 모두의 가장 기본적인 추구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좋은 것만 경험하려 하며, 불쾌하고 싫은 것은 피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될 수 있으면 경험하고 싶어하는 '행복'을 빨리어로는 'sukha'(수카)라고 부르며 이는 근본적으로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즐거운 감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정신적이건 육체적이건 모든 존재가 피하려고 하는 원하지 않는 괴로운 경험을 통틀어서 'dukkha'(둑카)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는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불만족스러운 모든 경험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번역하지 않고 빨리어 그대로 남겨둘 것이며 그것의 의미는 앞으로 둑카의 여러 측면을 설명하면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둑카라는 단어는 모든 불교도들이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적을 피하거나 정복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적의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행복의 적인 둑카에 있어서도 우리가 그것을 피하려거나 열렬한 노력을 통해 정복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그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둑카를 철저히 바라보아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낸 다음 그것의 원인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밝혀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나 다른 이들에게 둑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또는 그것은 별 문제가 안 되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타조가 적을 피하는 방식처럼 매우 비효율적입니다.(타조는 궁지에 몰리면 머리를 모래에 쳐박습니다) 우리는 눈을 뜨고 우리가 왜 가지각색으로 고통받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고통과 슬픔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니고 다니는 것이 피곤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그리고 나서야 우리는 그것을 내려놓고 홀가분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려는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세상의 방식을 통해,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으로 향할 수 있을는지를 함께 생각해봅시다. 대개, 사람들은 광고 등을 보고 경제력을 통해 물건을 갖게 됩니다.

그들은 물건을 소유하고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욕망의 충족을 느끼며 계속 이런 방식을 반복함으로서 행복한 상태에 도달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단지 당나귀 앞의 당근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이런저런 것을 소유하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소유물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은 단지 일시적인 즐거움일 뿐인 것입니다. 만일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둑카가 됩니다.

 

물질적인 방식으로는 둑카의 끝을 보장할 수 없으며 더욱 증가할 뿐입니다. '감각적인 욕망이 증가하면, 둑카도 증가한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인류의 역사를 모른다면 그는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깨닫는 지적능력이 하위 생명체보다 더욱 뛰어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모든 끔찍한 고통은 지진, 홍수, 화재, 태풍, 질병과 같은 자연재해보다 탐욕적이고 잔혹하며, 어리석은 인간에 의해 수천 배나 더 많이 발생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는 둑카를 없애는 길을 보여준 훌륭하고 성스러운 사람도 많이 있었다고 반박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은 종교적인 박해로 고통을 받아서 도주하고 은신하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기에 언제나 악한 마음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게다가 인간은 세계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 된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거기에는 고문과 다른 증오심에 뿌리를 둔 행위, 경멸하는 말과 모욕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행복을 찾고 있으니! 남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의도도 매우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분 전환 삼아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즐기며,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해 잘못된 성행위를 하고, 행복을 얻기 위해 거짓말과 비방을 하며, 감각과 인식을 흔들어 희열을 얻기 위해 술과 마약을 먹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계에 반하는 행동방식은 확실히 불행으로 향하는 길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요?

 

이제 둑카를 자세히 바라보고 다양한 방식으로 그에 부딪쳐 보기로 합시다. 붓다의 말씀을 기록한 책(경전)에서, 우리는 둑카의 범위에 대해 설명한 구절이 수없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Jātipi dukkhā, Jarāpi dukkhā, vyādipi dukkhā, maraṇampi dukkhaṁ,

soka parideva dukkha domanassu-payasa pi dukkhā,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 piccaṁ na labhati tampi dukkhaṁ,

saṁkhittena pancupādanakkhandā dukkhā.

 

자-띠삐 둑카-, 자라-삐 둑카-, 브야-디삐 둑카-, 마라남삐 둑캉,

소-까빠리데-와 둑카도-마낫수빠-야-사-삐 둑카-,

압삐예-히 삼빠요-고- 둑코-, 삐예-히 윕빠요-고- 둑코-,

얌삣창 나 라바띠 땀삐 둑캉

상킷떼-나 빤쭈빠-다-낙칸다- 둑카-.

 

태어남은 둑카이다, 늙음은 둑카이다, 병듦은 둑카이다, 죽음은 둑카이다.

슬픔, 비탄, 고통, 절망은 둑카이다.

싫어하는 것을 만나는 것은 둑카이다. 좋아하는 것과 헤어짐은 둑카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둑카이다.

즉 오온에 대한 집착은 둑카이다."

 

이는 이론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근본적인 우리 삶의 경험과 관련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누구나 아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좀 더 선명하게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각각의 구절들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로 인해 삶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한 지혜가 일어나서 어느 정도의 행복을 얻는 이익이 있습니다. 삶에 대해 스스로 속이는 것은 더욱 괴로워지는 방법일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두려움 없이 둑카와 직면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방식으로 보일지 모르나 이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스스로 둑카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우울하며 염세적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불교 국가를 방문한 많은 사람들은 불교인들이 행복하고 침착하다고 말합니다.

 

 

1. 둑카(dukkha)

 

• 네 가지 커다란 둑카의 원인

 

과거의 어느 때인가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태어남(jati)은 불교인의 관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일반적으로 태어남이란 출산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붓다가 "태어남은 둑카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태에 들 때부터 출산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약 9개월간의 전 과정 동안 계속적인 둑카를 경험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궁은 편안하고 안전한, 아늑한 작은 집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자궁은 우리가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도피처로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 경전에서는 매우 다르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청정도론' 16장 37~40구절에서 자궁은 결코 즐거운 곳이 아니라고 붓다고사 장로는 말합니다.

'...어떤 존재가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간다는 것은 파랑이나, 빨강, 흰색 연꽃 등 아름다움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불쾌한 관의 무더기(힘줄, 혈관 등)와 피부로 덮인 덩어리 같은 기관(내장)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소화물과 배설물로 가득 찬 배 안의 한 부분입니다. 만일 이전에 살았던 적이 없던 존재가 태어났다면 자궁은 즐거운 곳으로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만일 서구의 종교 이론처럼 사람의 인생은 신이 불어넣은 영혼과 부모로부터 계승된 유전형질이 합쳐져 자궁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거나, 또는 서구 심리학의 이론처럼 단지 유전형질로 시작될 뿐이라면, 자궁은 그런대로 견딜 만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불교와 맞지 않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존재는 과거 업에 따라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 지적이고 교양 있는 어떤 사람이 갑자기 죽었고, 그의 정신의 연속체가 과거 업으로 인해 자궁에 들어가 태어나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아주 드문 경우이겠지만, 만일 과거생의 기억이 남아 있다면 자신이 들어가 있는 곳이 좁은 감옥처럼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얼마나 무력감을 느끼겠습니까! 만일 인간 세상보다 더욱 순수한 존재로 있다가 입태한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그의 곤혹스러움은 더욱 심할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광채 나는 미묘한 몸, 생각만으로 곧바로 이동할 수 있고 원하는 대로 감각적인 즐거움도 경험할 수 있는 편리함에 익숙해져 있는 전생의 천인(天人)은 탁하고 거친 살, 마음대로 이동하지도 못하고, 더럽고 고통스런 감각으로 제한된 존재로서 어떤 느낌을 일으키겠습니까?

'그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는 열에 의해 자루 속에 들어있는 과자처럼 구워지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이렇게 자궁에 감금되어 있다가 10개월 후 해방이 오고 아기는 세상으로 나오게 됩니다.

 

출산의 과정은 아이와 어머니 모두에게 고통스럽습니다. 붓다고사 장로는 다시 말합니다.

'자궁으로부터 지옥구덩이 같이 가장 무시무시한 통로인 자궁 입구를 통해 끄집어내어지는데, 그 자궁 입구는 극심하게 좁아서 마치 코끼리가 열쇠 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새로 태어날 때 아기가 내는 첫 울음소리는 당연하게 생각되어지지만 그것은 고통의 울부짖음입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는 소리 내어 웃지 않을 뿐 아니라 미소조차 짓지 않습니다. '청정도론'은 이렇게 말합니다.

 

'태어난 후 그에게는 고통이 일어난다. 민감한 상처부위처럼 섬세한 그의 몸은 손 위에 올려지고, 목욕시켜지고, 닦여지고, 수건으로 문질러지게 된다.

그리고 그때의 고통은 바늘 끝에 찔리는 것처럼, 면도날로 베이는 것처럼 따끔거리며 아프다. 이것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밖으로 나오면서 겪는 고통이다.'

 

게다가 요즘은 의사나 산파가 아기를 격려하기 위해 손바닥으로 찰싹 때리는 것도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 대한 전주곡으로서 더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아기는 울부짖습니다.

특히 우리가 담마의 분명한 빛을 통해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존재가 태어나면 반드시 '태어남은 둑카이다.'로 시작되는 공식의 나머지 모든 부분의 고통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모두가 똑같은 방식이나 똑같은 크기로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누가 태어남을 받던지, 몇몇 종류의 고통이 꼭 따른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상당한 정도의 행복이 있는 '선취(善趣,sugati)'라고 불리는 인간 세상에 태어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태어남을 잊어버립니다.(그 과정에 대한 기억은 빠르게 덮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기억하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육체적, 정신적인 커다란 둑카로 가득 차 있는 사건입니다.

 

누구나 태어나면 반드시 늙어갑니다. 이는 참으로 당연한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즐거움의 추구에 방해가 될 늙음의 여러 측면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 않으며, 그러는 동안 어느새 늙음에 붙잡혀서 그것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jara'라는 단어는 단지 늙음만을 의미하지 않고 숙성 또는 쇠퇴함이라는 넓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태어나면서 늙음은 시작됩니다. 성장하는 과정도 늙어가는 과정이 모습을 바꾸면서 다시 새로워지는 것일 뿐입니다.

 

늙음의 과정은 보통 나이가 들어갈 때처럼 그것이 뚜렷하게 진행될 때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늙음은 사람이 나이 먹기 전에도 질병이나 다른 요소로 인해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급하게 늙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든 그것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늙음은 둑카(苦)이다.' 늙음은 달갑지 않은 변화입니다. 그것은 악화되는 것이며 쇠약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반드시 쇠퇴하고 결국에는 파괴됩니다. 특히, 가지가지 요소로 만들어진 이 몸은 반드시 변질됩니다. 몸을 '나',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것은 둑카입니다. 이 둑카는 세 가지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의 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사지가 더 이상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내장기관이 고장 나서 소화, 배설을 못 시키는 등의 수많은 늙음의 징후들이 있습니다.

 

두 번째 측면은 다섯 감각기관, 특히 시력과 청력이 쇠약해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마음의 쇠퇴입니다. 기억력은 약해지고, 정신은 오락가락해지며, 마음은 더 이상 사물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지와 내장이 쇠약해지고 감각기관이 쇠퇴해지는 경우, 육체적인 고통은 있을지 모르나 그로인해 사람이 비참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둑카에서 벗어나는 담마(法)의 길을 선택하는 마음의 능력이 제한되고 이해력이 결핍되는 경우 둑카를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늙음은 둑카이다.'라는 사실은 우리 자신과 주변을 통해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증거를 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둑카의 측면을 언급했을까요?

그 까닭은, 비록 우리는 늙음을 맞이하게 되지만(늙음이 나타나기 전에 죽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그 사실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젊을 동안 자신의 젊음에 대한 자신감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늙음은 둑카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우리의 혼란스러운 마음은 그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늙음이라는 서곡이 울려 퍼진 후 오게 되는 죽음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평등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지금 젊거나 늙었거나 또는 그 중간이거나 우리는 질병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어떠한 형태의 질병이든지 그것은 반드시 둑카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는 100년이나 되는 삶의 기간을 육체적인 질병없이 살 수는 있지만, 단 한순간이라도 정신적인 질병에서 자유로운 자를 찾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육체적인 질병도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것이지만, 탐욕․성냄․어리석음이라는 악의 뿌리로부터 생기는 마음의 질병은 우리가 스스로 완전히 담마(法)를 보지 않는 한, 항상 모두에게 공통되는 것입니다.

'건강은 최상의 얻음이다.'(법구경 204) 우리의 스승께서는 이렇게 건강을 예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이 또한 정신적인 질병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진정한 예찬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단순히 육체적인 질병만을 의미하는 것일지라도, 여전히 건강은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고 자비로운 행동을 하는 등의 선업을 많이 쌓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얻음입니다.

 

그런데 빨리어 'byadhi'의 의미에는 가벼운 병까지도 포함이 됩니다. 인생을 살면서 이러한 둑카를 겪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여기 다시 '질병은 둑카이다.'를 강조하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 마음은 질병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꺼려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건강은 대화를 할 때 부드러운 이야기꺼리가 되지만 질병을 겪고 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싫어합니다. 이것은 좋아하는 것을 잡으려고 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싫어하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입니다.

 

다른 경우를 보면 탄생과 젊음에 대해서는 좋아하고 죽음과 늙음에 대해선 그 반대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우리 스스로 더욱 많은 둑카를 만들 뿐입니다. 질병은 감추어야 할 것이 아니라 더욱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지금 나의 몸은 건강하다. 그리고 많은 방식으로 담마를 수행할 수 있다. 만일 질병이 온다면 나는 그렇게 수행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해서 담마(法)를 수행해야 한다.'

 

둑카의 과정은 인생 전체에 걸쳐서(태어남, 늙음, 질병) 진행되며 사람들은 감각의 즐거움을 통해 둑카를 견뎌내면서 죽음으로 향해갑니다. 이러한 위협은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커다란 둑카로 다가오는데 이는 우리가 그에 대해 잘못된 방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죽음이란 것은 우리가 걷고 있는 외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괴물이 아니라 단지 몸과 마음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정상적으로 겪게 되는 커다란 변화의 현상일 뿐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나의 자아', '나의 영혼'에 속해 있어서 상점에 앉아 있는 주인처럼 몸과 마음 안에 '나'가 앉아 있다는 믿음을 고집하는 한, 우리는 많은 둑카를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몸과 마음에 대한 갈망을 줄일 수 있다면, 그것들은 다만 서로 연관된 흐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육체적 고통은 여전히 경험하게 되더라도 정신적 고통인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정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시작은 태어남이며 그 끝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이 몸과 마음을 통해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마음은 바로 앞의 마음과 뒤의 마음이 서로 의지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순간적인 경험의 연속물입니다.

매우 예리한 관찰력을 지닌 사람은 이러한 관찰력을 이용해 마음의 태어남(生)과 사라짐(滅)을 관찰하도록 권고받습니다. 몸에도 태어남과 죽음은 있습니다. 그리고 태어남이 더 강할 때 몸은 자라고 낡은 부분은 새로워집니다.

그러나 죽음이 더 강할 때는 늙음이 나타납니다. 몸의 늙음의 과정을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무집착의 태도가 길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집착은 비록 완전하게 계발되지 않을지라도 죽음의 때에 이르러 매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보통 '죽음'이라는 말은 육체를 통한 삶의 과정이 끝남을 의미합니다. 우리 자신은 정신적 흐름(citta-santana)과 육체적 흐름(kaya-santana), 이 둘의 상호 의존적인 흐름일 뿐입니다. 죽음의 순간에 흐름은 멈추며 육체적 흐름은 네 가지 요소(四大)로 흩어지고 정신적 흐름은 이미 만들어진 업에 따라서 계속 흘러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의 고통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죽음은 둑카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항상 살고자 하는 욕망과 감각적인 즐거움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혀서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해 왔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일어난 후, 죽음은 가능한 좋게 보이도록 꾸며집니다. 시체는 장식되고 커다란 관에 넣어져서 인위적으로 보존되며 누구도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향기 나는 꽃이 관 위와 둘레에 놓여지고 나면(아마도 땅속에서 시체가 썩을 때 나는 악취를 꽃냄새가 없애줄 것이라는 잠재적인 생각일 것입니다.) 성대한 의식이 행해진 후, 품위 있는 방식으로 안치됩니다. 이것은 요즘 도시인들이 행하는 방식입니다.

부처님 당시의 일반적인 처리방식은 시체를 숲의 특정한 구역에 버려서 썩게 남겨두는 것이고 이렇게 불쾌한 진실을 감추지 않는 단순한 방식은 현재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비록 어떤 경우에는 위엄 있게 꾸며서 전시를 하지만 그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 때문이며 그 이면에는 항상 죽음의 불쾌한 모습을 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을, 우리가 좋아하는 한 부분만 보아서는 안 되며 전체적인 모습을 보려고 해야 합니다.

 

앞에서 다룬 태어남, 늙음, 병듦 그리고 죽음이라는 둑카의 측면은 '가끔 겪는 둑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인생을 통해서 한 번 또는 특정한 시기에 겪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업이나 다른 원인으로 인해서 불치의 병을 겪어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에게 질병은 가끔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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