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과 마음 》/ 빤냐완따 스님

Kusalo
2022-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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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늦여름(한국테라와다불교 공식출범 두 달 전), 조계사 한국역사문화기념관에서 한국테라와다불교 제1회 학술세미나가 개최된 적 있습니다. 대주제는 "한국불교전통과 테라와다불교" 였습니다. 그 해 겨울, 같은 건물에서는 불교전공자 철학자 심리학자 등이 참여하는 학술연찬회가 열렸습니다(밝은사람들연구소 주최). 그 때의 대주제가 "몸, 마음공부의 기반인가 장애인가" 였습니다. 


그 학술회 소식은 교계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발제자들과 발제논문의 제목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주제의 제목은 또렸이 생각납니다. 당시 대주제에 대해서 잠시 숙고해 본 적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몸은 과연 마음공부의 기반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장애물에 불과한 것일가?" 그러나 더 이상의 숙고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해답이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 답에 대한 생각은 전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왜일까요? 빨리어 경전에는 그에 대한 해답이 곳곳에 명확히 적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맛지마니까야]의 <염신경(念身經)>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아비담마나 각종 주석서에는 물질인 몸과 비물질인 마음의 상관관계, 몸에 대한 직접 관찰법, 몸을 통한 마음관찰법, 그 관찰들을 통한 몸의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이해, 그리고 해탈열반에 이르기 까지의 여정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는 몸이 없는 마음은 존재할 수 없고, 마음 없는 몸 또한 존속할 수 없습니다. 육신을 가진 자는 누구나 예외없이 생노병사를 경험합니다. 생노병사와 함께 우비고뇌(憂悲苦腦)를 겪습니다. 모두가 고통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고통의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집착하며 살아갑니다. 빛깔 소리 냄새 맛 감촉에 탐닉되어 일평생 살아갑니다. 


물질로 이루어진 몸은 분명 고통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고통은 몸 자체가 아니라 몸의 본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어리석은 마음이 일으키는 몸의 감각에 대한 집착과 갈애입니다. 집착과 갈애는 몸과 마음에 대한 해탈을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오물덩어리를 오물덩어리인 줄 모른 채 보물꾸러미로 착각하여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의 세계를 끊임없이 윤회하는 것입니다. 


몸은 고통의 원천인 동시에 해탈을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뛰어넘어야 하고 포기해야 하고 마침내 놓아버려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몸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하지 않고서는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없고 포기할 수 없고 놓아버릴 수 없습니다. 장애물을 장애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집착하면서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살아갑니다. 마치 두 손목이 황금의 수갑에 갖힌 줄도 모르고 황금에 탐닉되어 살아가듯이. 


몸은 지수화풍 사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주의 근본물질인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의 물리화학적 결합체입니다. 생존을 지속하기 위해 끊임없이 호흡하고 있는 몸. 하루 11톤의 혈액을 순환시키며 판막을 열고닫는 심장. 그 심장의 박동과 함께 들이키고 내쉬는 숨. 생존을 위해 혹은 맛을 즐기기 위해 온갖 음식물을 섭취하는 몸. 섭취된 음식물을 소화시키는 온갖 장기들. 앉고 서고 가고 누워있다가 졸리면 잠을 자는 몸. 


온갖 종류의 마음들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곳. 볼래야 볼 수 없고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마음의 화학공장.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 슬픔과 기쁨, 애증의 흙먼지가 휘날리는 곳. 마음은 몸의 사령관. 몸은 마음의 통치자. 마음은 고통의 덩어리며 몸은 그 고통의 근원. 몸은 마음공부의 장애물인 동시에 해탈의 문을 여는 열쇠. 즉 몸에 대한 올바른 이해야말로 그 강력한 구속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입니다.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에 대하여 흔히 마음을 깨친다고 하지 몸을 깨닫는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일체는 오직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뜻입니다. 그 마음공장의 근원을 찾기 위해 많은 수행자들이 이 산사 저 선방을 돌며 행각을 합니다. 불교수행을 마음닦는 수행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강조하다보니 몸은 한낮 마음공부의 장애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따마 붓다께서는 마음의 참성품을 온전히 깨닫기 위해서는 육체인 몸에 대해 올바르게 사유하면서 관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물질인 몸은 결코 깨끗하지도 않고 오래 유지되지도 않는 질병의 주머니일 뿐, 그 주머니는 결코 나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몸에 대한 바른 사유와 관찰을 통해 그것은 조건을 따라 생겨나서 조건따라 소멸하는 무상한 성품을 지닌 사대요소의 결합체로 보라 하셨습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물질 그 자체가 결코 수행의 장애는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물질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습관적 본능적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이 발생한다 하였습니다. 관건은 몸에 대한 '바른 이해' 입니다. 음식은 문제가 없습니다. 음식에 집착하기 때문에 탈이 납니다. 몸에 대한 진실을 규명해내지 못하면 몸을 항상한 나의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몸의 강력한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몸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미 마음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몸의 특성 본성을 이해하려는 것은 의학적 수명장수나 건강을 증진시키고자 함이 아닙니다. 몸의 성질을 통찰할 수 있을 때라야 몸에 대한 헛된 환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따마 붓다께서는 마음을 관찰하기에 앞서 몸에 대한 관찰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수행자들이 몸에 대한 관찰이나 이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몸에 대한 이해보다는 마음에 대한 이해가 단연 중요합니다. 마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 없이는 온전한 해탈에 이를 수 없습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온갖 마음이 세상을 지배하고 그 마음에 의해 세상은 이끌려 간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체의 심리현상에 대한 바른 관찰은 대단히 중요한 수행주제 입니다. 또한 고따마 붓다께서는 마음관찰과 함께 몸에 대한 관찰을 통해 물질인 몸의 성품을 통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호흡의 감각이나 몸의 동작을 주의깊게 관찰하다보면 지수화풍 이라는 사대의 특성(무거움 가벼움 따뜻함 차가움 등등)들이 드러납니다. 사대의 특성들을 관찰하다보면 '나의 몸'은 단지 사대의 요소들을 의지하여 형성된 '집착하는 몸'일 뿐이라는 인식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인식은 몸에 대한 깨끗한 지혜입니다. 이러한 지혜를 바탕으로 몸을 거듭 관찰하다보면 마침내 마음의 특성들이 그 실체를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몸과 마음은 본래 하나가 아닙니다. 몸은 몸이고 마음은 마음입니다. 몸은 물질이고 마음은 비물질입니다. 그럼에도 마음은 몸을 의지하여 생겨나고 몸은 마음에 기대어 존재합니다. 몸과 마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합니다. 마음관찰을 통해서 궁극의 해탈에 이를 수도 있지만 몸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도 마음의 본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몸에 대한 알아차림은 곧 마음에 대한 통찰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수행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명상수행은 조용한 곳에 않아 마음을 한 곳에 모으거나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봄으로써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라는. 그래서 산사나 선방을 찾아 십년, 이십년을 헤매입니다. 오랜 세월 세습에 길들여질 몸을 극복하기 위해 철야정진하면서 몸을 혹사시키기도 합니다. 대분분의 수행자들이 좌선수행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장좌불와를 수행의 미덕으로 삼습니다. 좌탈입망을 꿈꾸기도 합니다. 


불교수행은 몸에 대한 관찰로부터 시작합니다. 몸에 대한 관찰은 정적인 몸과 동적인 몸에 대한 관찰이 있습니다. 정적인 몸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호흡의 들숨날숨에 대한 관찰을 통해 마음의 본성을 깨달을 수 있고 해탈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도 일상적으로 호흡을 관찰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붓다께서는 호흡 뿐만아니라 일상의 모든 행위에 대해 분명한 앎을 가지고 관찰하라 가르쳤습니다. 


깨어있는 모든 시간은 수행의 시간입니다. 몸과 마음이 행위하고 있는 모든 시간은 수행하기 적당한 시간입니다. 고요히 앉아서 하는 좌선만이 수행이 아닙니다. 새벽녘 첫눈을 뜰 때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는 감각을 알아차림 하는 것으로부터 수행이 시작됩니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칫솔질하고 세수하고 예경하고 청소하고 탁발을 위해 바루를 메고 마을로 걸어들어가고 걸어나오고 돌아와 탁발받은 음식을 먹는 일 등등. 


하루동안에 수십 수백 가지의 크고 작은 일들과 수천 수만 번의 물리적 신체적 행위가 이루어집니다. 그 모든 일상의 행위들이 중요한 수행대상입니다. 좌선수행을 통해서 삼매의 힘을 키우고 통찰지를 계발할 수도 있지만, 빨리어 3장에서는 걷는 수행이나 일상의 신체 행위에 대한 바른 관찰을 통해 번뇌를 뿌리뽑고 해탈에 이른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난다 마하테라의 '까-야가따-사띠(몸의 동작에 대한 알아차림)' 입니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노동을 하면서 삶을 유지해 왔습니다. 노동에는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대체적으로 정신적 노동을 많이 합니다. 일상의 삶 자체가 정신노동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정신활동에 과부하가 걸리기도 합니다. 그로 의한 스트레스는 육체적 노동에 의한 스트레스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현대인들이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 불안 초조 정신분열 노이로제 히스테리 정신공황 분노조절장애 등 온갖 정신과적 병리현상에 시달립니다. 


적절한 운동이나 육체적 노동은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일 뿐만아니라 정신건강을 유지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더 나아가 그것이 분명한 앎에 의한 알아차림이 함께하는 노동ㆍ운동일 때 그것은 정신적ㆍ육체적 건강을 초월하여 고통의 근원을 뿌리뽑을 수 있는 지혜로 연결됩니다. 호흡이나 몸의 동작에 대한 알아차림,  몸의 동작이나 몸의 감각에 대한 올바른 관찰은 몸과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결정적 단초가 됩니다. 


몸이 있는 곳에는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곳에는 항상 몸이 있습니다. 가령 한 수행자가 물체를 볼 때 보이는 즉시 보는 줄 알고, 소리가 들릴 때 들리는 즉시 듣는 줄 알고, 냄새가 날 때 나는 즉시 냄새맡고 있음을 알아차림 한다면, 혹은 길을 걸을 때 발이 들리면 들리는 줄 알고, 나아가면 나아가는 줄 알고, 발이 땅에 닿을 때 닿는 감각을 순간순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림 한다면 그 수행자는 어느날 문득 허공에 떠 있던 발이 땅바닥에 닿기 전에 몸과 마음의 참성품을 확연히 보게 될 것입니다. 


한때 세존께서 사왓티의 제따와나 수도원에 머무고 계실 때, 탁발을 마치고 돌아와 강당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하나의 법(까-야가따-사띠,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수행하여 여러 번 행하면, 몸의 참성품을 알게 되어 몸에 대한 큰 두려움이 생겨나 마음을 닙바나로 향하게 하느니라. 그리하여 알아차림은 더욱 명료해지고, 대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함께 통찰지를 얻게 되느니라. 이 법으로 인해 금생에 평온한 삶을 살게 되고, 삼명(三明, 특별한 지혜 3가지)을 얻어 마침내 성스러운 도와 과를 증득하게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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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2565(6).7.29

천림산 기슭에서 

메따와 함께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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