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의 길로 이끌어주신 석암스님의 은혜 또한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해인사가 우리나라의 으뜸가는 사찰이 되도록 노력하신 여러 선배 스님이나 함께 수행한 분들의 은혜를 단단히 입고 살았다. 지금에 와서는 같이 동행하는 이들이라든가, 나를 따라서 수행하는 분들에게도 다 큰 은혜를 입었다.
처음 출가할 무렵에는 대처승이 판을 치는 때인지라, 비구들은 갈 곳이 없어서 아주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이제는 비구승들이 제대로 하고는 있지만 때로 사리사욕에 얽매여 불도를 삿된 방향으로 몰고가는 이들이 더러 있어서 안타깝기만 하다.
올바르게 수행하는 이들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세상사람들의 눈에 바른 도가 보이지 않고, 단지 ‘불교가 저런 것이로구나’ 하고 오해를 살까 봐 두려울 때가 많다.
사람들이 눈이 없어서 못 보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든지 보복을 한다든가 살생을 한다는 걸 옳다고 할 사람은 없다. 권력을 지닌 사람의 압력이 가해지면 손해를 보지 않을까 해서 알면서도 쉬쉬하는 것이다. 만일 그러한 사회라면 진실이 뒷걸음치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또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선(禪)이 도중에 와서 발전한 것처럼 선을 중시하지만, 부처님 경전보다 위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부처님 생전에 사성제법을, 팔정성도를 말씀하셨다. 다른 것으로 되는 게 아니다. 부처님 법은 후퇴할 수도 없고 그 이상도 없고, 둘도 아닌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덕을 쌓은 스님들이 자기도 못할 것, 누가 해서 되지도 못할 것을 법이라고 말하니 결국은 따라갈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도 행할 수 없는 법문, 다른 사람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 행할 수 없는 것을 말해놓으면, 지금도 좋은 일이 아닐 뿐더러 후에도 결코 좋은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드시 누구든지 들을 수 있는 조건으로, 나도 행할 수 있고 다른 사람도 행할 수 있는 길, 이것이 바로 바른 길이요 부처님의 위대한 길이다. 부처님께서는 ‘너희들도 나와 같이 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하셨다. 이것이 결국은 부처님 말씀이고 바른 길이다.
몇 년 전에 미국이 아프카니스탄을 보복한 것은 내가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노벨상을 받았는데, 그 사람이 그것을 왜 모르겠는가? 이렇게 우리는 알면서도 말을 못 하는 것이다. 어디에 눌려 지내는 게 아닌가 한다.
그러니 그 올바른 말을 어떤 압력이나 다른 것에 의해 우리가 말 못 하는 것이 많은 것과 같이, 우리가 올바른 법을 따라서 나아갈 것 같으면 제대로 느낌으로나마 알 수 있을 것인데, 그걸 아닌지 모르는지 짐작하기가 어렵다. 우리 모두는 분명 어디에 눌려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몰라서야 되겠는가? 눌려 있는 것의 정체를 분명히 따져봐야 할 일이다.
- <조건 따라 생겨난 것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 中, 도성(뿐냐산또) 큰스님, 삼각형 프레스, 2003년.
출가의 길로 이끌어주신 석암스님의 은혜 또한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해인사가 우리나라의 으뜸가는 사찰이 되도록 노력하신 여러 선배 스님이나 함께 수행한 분들의 은혜를 단단히 입고 살았다. 지금에 와서는 같이 동행하는 이들이라든가, 나를 따라서 수행하는 분들에게도 다 큰 은혜를 입었다.
처음 출가할 무렵에는 대처승이 판을 치는 때인지라, 비구들은 갈 곳이 없어서 아주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이제는 비구승들이 제대로 하고는 있지만 때로 사리사욕에 얽매여 불도를 삿된 방향으로 몰고가는 이들이 더러 있어서 안타깝기만 하다.
올바르게 수행하는 이들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세상사람들의 눈에 바른 도가 보이지 않고, 단지 ‘불교가 저런 것이로구나’ 하고 오해를 살까 봐 두려울 때가 많다.
사람들이 눈이 없어서 못 보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든지 보복을 한다든가 살생을 한다는 걸 옳다고 할 사람은 없다. 권력을 지닌 사람의 압력이 가해지면 손해를 보지 않을까 해서 알면서도 쉬쉬하는 것이다. 만일 그러한 사회라면 진실이 뒷걸음치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또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선(禪)이 도중에 와서 발전한 것처럼 선을 중시하지만, 부처님 경전보다 위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부처님 생전에 사성제법을, 팔정성도를 말씀하셨다. 다른 것으로 되는 게 아니다. 부처님 법은 후퇴할 수도 없고 그 이상도 없고, 둘도 아닌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덕을 쌓은 스님들이 자기도 못할 것, 누가 해서 되지도 못할 것을 법이라고 말하니 결국은 따라갈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도 행할 수 없는 법문, 다른 사람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 행할 수 없는 것을 말해놓으면, 지금도 좋은 일이 아닐 뿐더러 후에도 결코 좋은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드시 누구든지 들을 수 있는 조건으로, 나도 행할 수 있고 다른 사람도 행할 수 있는 길, 이것이 바로 바른 길이요 부처님의 위대한 길이다. 부처님께서는 ‘너희들도 나와 같이 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하셨다. 이것이 결국은 부처님 말씀이고 바른 길이다.
몇 년 전에 미국이 아프카니스탄을 보복한 것은 내가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노벨상을 받았는데, 그 사람이 그것을 왜 모르겠는가? 이렇게 우리는 알면서도 말을 못 하는 것이다. 어디에 눌려 지내는 게 아닌가 한다.
그러니 그 올바른 말을 어떤 압력이나 다른 것에 의해 우리가 말 못 하는 것이 많은 것과 같이, 우리가 올바른 법을 따라서 나아갈 것 같으면 제대로 느낌으로나마 알 수 있을 것인데, 그걸 아닌지 모르는지 짐작하기가 어렵다. 우리 모두는 분명 어디에 눌려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몰라서야 되겠는가? 눌려 있는 것의 정체를 분명히 따져봐야 할 일이다.
- <조건 따라 생겨난 것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 中, 도성(뿐냐산또) 큰스님, 삼각형 프레스,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