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울진 불영사에서 2년을 산 적이 있었다.
그 후 26년이라는 세월이 흐룬 후에 우연히 저녁에 불영사(佛影寺)에 들르게 되었는데, 예전과는 달리 그곳에는 비구니 스님들만이 살고 있었다. 법당 앞에 있는 나를 보고는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왔다.
“비구 스님은 이 절에서 주무실 수 없습니다.”
“예, 참배하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내가 물으니 그 비구니 스님은 괜찮다고 했다.
“그러면, 참배나 하고 가겠습니다.”
대웅전에 가서 참배하고 뜰을 거닐며 경내를 둘러보았다. 내가 예전에 살던 곳이니 그때 심었던 나무들이 잘 자라는지, 법당은 어떻게 되었는지 살피면서 전각들을 참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좀 지나니까 그 비구니 스님이 다시 오더니 물었다.
“혹시, 부산에서 오신 도성스님이십니까?”
“어떻게 내 이름을 압니까?”
“스님께서 경내를 도는 게 아무래도 달라 보이기에….”
“무엇이 다릅니까?”
“이 마을 사람들이 모이면 스님 얘기를 자주 합니다. 얼마 전 구십 먹은 채씨 노인이 임종을 눈앞에 두고 도성스님을 못 보고 죽는 게 참 한스럽다고 했는데, 스님을 뵈오니 도성스님 같아 여쭈어 봤습니다.”
그 후에도 그곳 출신의 93세 노인이 그때의 인연을 잊지 않고 나를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이 정신과 몸이 일치하는 덕을 베풀어야 사람들에게 감화를 준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행실이 바르고 계행에 따라 생활한다면 모든 이의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경책하는 것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부처님 법을 잘 지키고, 부처님 말씀 아니면 따르지 않는 사람을 존경한다면 바로 지월스님이 그런 분이셨다. 은사 스님은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지키신 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철스님도 한암스님도 인정하셨다.
키가 큰 분도 아니고 잘생긴 분도 아닌데 그렇게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은, 늘 자비심이 넘치고 항상 정진하시고 계를 어기는 일은 안 하려 철저하게 노력하신 분이셨기 때문이다.
지월 스님께서 해인사에 계실 때였다.
그 당시엔 속가 사람들이 막걸리와 장구 등을 가지고 산에 와서 놀다가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절로 들어와 소란을 피우는 일이 허다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해있다 보니 스님들을 붙잡고 함께 춤추고 놀자고 억지를 쓰기도 했는데, 스님들 입장에서는 취객들이 부처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불가피하게 시비가 벌어지는 일이 빈번했다.
그렇게 시비가 잦다 보니, 하루는 깡패 기질이 다분한 사람들이 절에 들어와 스님들이 맞장구를 치기라도 하면 행패를 부리려고 작정을 하고 왔던 모양이다. 해인사 대웅전 앞에는 부처님 사리를 모신 탑이 하나 있는데, 이 취객들이 그 탑에 올라가 사진을 찍겠다고 야단을 부리니, 강원의 젊은 스님들이 보다 못해 멱살까지 잡는 사태가 벌어졌다.
마침내 소란스런 소리를 듣고 체구는 자그마하고, 몸에는 항상 당신 스스로 기운 누더기를 걸치고 계셨던 지월스님이 밖으로 나오셨다.
지월스님은 스님들을 외면한 채 취객들에게 다가가서 사정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소승의 잘못이니, 소승을 봐서 용서해 주시오.”
지월스님의 그 모습에 젊은 스님들이 격렬하게 항의했다.
“우리가 잘못한 게 없는데, 노스님이 왜 이놈들에게 굽실거립니까?”
지월스님은 ‘이분들은 절의 손님인데, 스님들이 그러는 게 아니다’ 하시며 계속 취객들에게 노여움을 거두어주십사 간청하는 것이었다. 노스님이 공손하게 사죄하는 것을 보고 멋쩍은 취객들이 한두 사람씩 슬그머니 꽁무리를 빼게 되었다.
싸움이 있을 때마다 지월스님이 달려나와 매번 이렇게 말리시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해인사에 도인 스님이 계신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행패부리는 사람이 사라지게 되었다.
지월스님을 일명 자비 보살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결코 가식이 아닌 말이다.
불덩이가 솟아오르면 물을 부어 불을 끄듯, 당신 마음의 불덩이에 자비를 부어 가라앉힌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비이며, 자비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기본적인 도구인 것이다. 또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도 없어서는 안 될 도구이다. 이런 자비를 실천하게 되면 우리는 여러 가지 좋은 것을 경험하게 된다.
항상 부처님의 자비심을 행하고 부처님 가르침대로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아무리 긴 세월이 지났을지라도 부처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마음을 지닐 수 있다.
이런 부처님의 깊으신 자비심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하고, 또 나만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라도 더 부처님의 자비를 심어주기 위해 다같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월스님은 근래의 스님으로는 보기 어려운 자비스러움 그 자체요, 수행을 올바르게 하신 모범적인 수행자이셨다. 한마디로 말해서 스님 노릇을 잘하신 분이었다. 크게 유식한 분이 아니어서 문장 짓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묵묵히 수행으로만 일관하신 스님이시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유리잔 같은 장판 위에
큰 하얀 백옥 같은 쌀밥을 놓고
어찌 공부 안 하고 게을리할 수가 있느냐.”
이렇게 시주 물건이 좋은 거라며, 늘 열심히 공부할 것을 일깨워주셨다. 지월스님께서 돌아가시기 1년 전쯤이었다. 서울에서 스님의 병을 진단했던 의사의 연락을 받고 찾아가니 나에게 신신당부하는 것이었다.
“스님께서 해인사로 내려가셨습니다. 간경화가 악화되어 입원하지 않으면 위험하니, 더 어려운 지경에 이르기 전에 꼭 입원하셔야 합니다.”
내가 해인사로 다시 내려가서 스님을 뵙고 말씀드렸다.
“스님 입원하시는 게 옳을 듯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병원으로 모시려 해도 들은 체 만 체 하시며 가시지 않았지만, 나의 간곡한 청은 거절 못 하시고 입원을 하셨다. 다행히 경과가 좋아서 7월에 퇴원하고 해인사로 다시 돌아오셨다.
그해 겨울 스님께서는 쇠약한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용맹정진에 임하셨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법당에서 아침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나오시지를 않았다. 일주일을 그렇게 고행하시니 처음에는 감기가 걸린 듯 싶었으나 지병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이었다. 해제하고 병은 더욱 깊어만 갔고 결국 스님께서는 간암으로 1973년 3월 27일, 세수 63세, 법랍 47세로 입적하셨다.
- <조건 따라 생겨난 것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 中, 도성(뿐냐산또) 큰스님, 삼각형 프레스, 2003년.
예전에 울진 불영사에서 2년을 산 적이 있었다.
그 후 26년이라는 세월이 흐룬 후에 우연히 저녁에 불영사(佛影寺)에 들르게 되었는데, 예전과는 달리 그곳에는 비구니 스님들만이 살고 있었다. 법당 앞에 있는 나를 보고는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왔다.
“비구 스님은 이 절에서 주무실 수 없습니다.”
“예, 참배하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내가 물으니 그 비구니 스님은 괜찮다고 했다.
“그러면, 참배나 하고 가겠습니다.”
대웅전에 가서 참배하고 뜰을 거닐며 경내를 둘러보았다. 내가 예전에 살던 곳이니 그때 심었던 나무들이 잘 자라는지, 법당은 어떻게 되었는지 살피면서 전각들을 참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좀 지나니까 그 비구니 스님이 다시 오더니 물었다.
“혹시, 부산에서 오신 도성스님이십니까?”
“어떻게 내 이름을 압니까?”
“스님께서 경내를 도는 게 아무래도 달라 보이기에….”
“무엇이 다릅니까?”
“이 마을 사람들이 모이면 스님 얘기를 자주 합니다. 얼마 전 구십 먹은 채씨 노인이 임종을 눈앞에 두고 도성스님을 못 보고 죽는 게 참 한스럽다고 했는데, 스님을 뵈오니 도성스님 같아 여쭈어 봤습니다.”
그 후에도 그곳 출신의 93세 노인이 그때의 인연을 잊지 않고 나를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이 정신과 몸이 일치하는 덕을 베풀어야 사람들에게 감화를 준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행실이 바르고 계행에 따라 생활한다면 모든 이의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경책하는 것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부처님 법을 잘 지키고, 부처님 말씀 아니면 따르지 않는 사람을 존경한다면 바로 지월스님이 그런 분이셨다. 은사 스님은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지키신 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철스님도 한암스님도 인정하셨다.
키가 큰 분도 아니고 잘생긴 분도 아닌데 그렇게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은, 늘 자비심이 넘치고 항상 정진하시고 계를 어기는 일은 안 하려 철저하게 노력하신 분이셨기 때문이다.
지월 스님께서 해인사에 계실 때였다.
그 당시엔 속가 사람들이 막걸리와 장구 등을 가지고 산에 와서 놀다가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절로 들어와 소란을 피우는 일이 허다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해있다 보니 스님들을 붙잡고 함께 춤추고 놀자고 억지를 쓰기도 했는데, 스님들 입장에서는 취객들이 부처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불가피하게 시비가 벌어지는 일이 빈번했다.
그렇게 시비가 잦다 보니, 하루는 깡패 기질이 다분한 사람들이 절에 들어와 스님들이 맞장구를 치기라도 하면 행패를 부리려고 작정을 하고 왔던 모양이다. 해인사 대웅전 앞에는 부처님 사리를 모신 탑이 하나 있는데, 이 취객들이 그 탑에 올라가 사진을 찍겠다고 야단을 부리니, 강원의 젊은 스님들이 보다 못해 멱살까지 잡는 사태가 벌어졌다.
마침내 소란스런 소리를 듣고 체구는 자그마하고, 몸에는 항상 당신 스스로 기운 누더기를 걸치고 계셨던 지월스님이 밖으로 나오셨다.
지월스님은 스님들을 외면한 채 취객들에게 다가가서 사정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소승의 잘못이니, 소승을 봐서 용서해 주시오.”
지월스님의 그 모습에 젊은 스님들이 격렬하게 항의했다.
“우리가 잘못한 게 없는데, 노스님이 왜 이놈들에게 굽실거립니까?”
지월스님은 ‘이분들은 절의 손님인데, 스님들이 그러는 게 아니다’ 하시며 계속 취객들에게 노여움을 거두어주십사 간청하는 것이었다. 노스님이 공손하게 사죄하는 것을 보고 멋쩍은 취객들이 한두 사람씩 슬그머니 꽁무리를 빼게 되었다.
싸움이 있을 때마다 지월스님이 달려나와 매번 이렇게 말리시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해인사에 도인 스님이 계신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행패부리는 사람이 사라지게 되었다.
지월스님을 일명 자비 보살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결코 가식이 아닌 말이다.
불덩이가 솟아오르면 물을 부어 불을 끄듯, 당신 마음의 불덩이에 자비를 부어 가라앉힌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비이며, 자비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기본적인 도구인 것이다. 또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도 없어서는 안 될 도구이다. 이런 자비를 실천하게 되면 우리는 여러 가지 좋은 것을 경험하게 된다.
항상 부처님의 자비심을 행하고 부처님 가르침대로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아무리 긴 세월이 지났을지라도 부처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마음을 지닐 수 있다.
이런 부처님의 깊으신 자비심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하고, 또 나만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라도 더 부처님의 자비를 심어주기 위해 다같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월스님은 근래의 스님으로는 보기 어려운 자비스러움 그 자체요, 수행을 올바르게 하신 모범적인 수행자이셨다. 한마디로 말해서 스님 노릇을 잘하신 분이었다. 크게 유식한 분이 아니어서 문장 짓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묵묵히 수행으로만 일관하신 스님이시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유리잔 같은 장판 위에
큰 하얀 백옥 같은 쌀밥을 놓고
어찌 공부 안 하고 게을리할 수가 있느냐.”
이렇게 시주 물건이 좋은 거라며, 늘 열심히 공부할 것을 일깨워주셨다. 지월스님께서 돌아가시기 1년 전쯤이었다. 서울에서 스님의 병을 진단했던 의사의 연락을 받고 찾아가니 나에게 신신당부하는 것이었다.
“스님께서 해인사로 내려가셨습니다. 간경화가 악화되어 입원하지 않으면 위험하니, 더 어려운 지경에 이르기 전에 꼭 입원하셔야 합니다.”
내가 해인사로 다시 내려가서 스님을 뵙고 말씀드렸다.
“스님 입원하시는 게 옳을 듯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병원으로 모시려 해도 들은 체 만 체 하시며 가시지 않았지만, 나의 간곡한 청은 거절 못 하시고 입원을 하셨다. 다행히 경과가 좋아서 7월에 퇴원하고 해인사로 다시 돌아오셨다.
그해 겨울 스님께서는 쇠약한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용맹정진에 임하셨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법당에서 아침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나오시지를 않았다. 일주일을 그렇게 고행하시니 처음에는 감기가 걸린 듯 싶었으나 지병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이었다. 해제하고 병은 더욱 깊어만 갔고 결국 스님께서는 간암으로 1973년 3월 27일, 세수 63세, 법랍 47세로 입적하셨다.
- <조건 따라 생겨난 것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 中, 도성(뿐냐산또) 큰스님, 삼각형 프레스,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