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수행자와의 문답 》
[ 질문 ]
제가 최근에 들어서 혼자 고민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불교수행이란 결국은 삶에서 탐진치가 줄어들어 없어지고, 마음의 상태/질이 높아져서 도와 과에 이르는 것이라고 한다면요.
결국은 "대상" 보다는 "아는 마음" 이 관건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구요. 대상을 관찰하는 수행보다 대상을 직면할 때의 마음을 관찰해서 무상/고/무아, 정견을 확립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제가 막혀버린 듯한 느낌입니다. 과연 내가 하는 마하시 수행이 대상을 향하지 않고 마음의 질/상태, 견해를 바꾸도록, 마음이 대상으로 보도록 가르치는가 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몇 달동안 못 구하고 있어요.
[ 대답 ]
1.
"마음에 의해 세상은 인도되고
마음에 의해 끌려 다니노라.
마음이라는 하나의 법에 의해
모든 것은 지배되노라."
<SN1:63>
"마음이 모든 일에 앞장서 나아가고,
마음이 모든 일의 주인노릇을 하며
마음에 의해 모든 일이 만들어진다....."
<담마빠다 1번송>
".....이 몸 만드는 목수를 찾아
셀 수 없는 생 윤회하며 고통 받았네.
집 짓는 자여! 이제 그댈 보았노라.
그대 더 이상 집짓지 못하리!
이제 모든 서까래 내려앉고
대들보 부러졌으며
마음은 이미 열반에 이르러
감각적 욕망 모두 끊어졌노라."
<부처님의 깨달음 게송>
세상일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일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마음이 하고 있는 일을 분명하게 알아차림하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 자도 마음이며, 집의 재료인 서까래 대들보 모두 마음입니다. 그래서 바른 깨달음을 통한 고통의 소멸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이 하고 있는 일을 바르게 알고 이해하는 것이 단연 중요합니다.
[대상] ---- [아는 마음]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 수행대상(알아차림 대상)이 정해집니다. 호흡의 감각일 수도 있고, 발의 움직임일 수도 있고, 무릎의 통증이거나 특정 부위의 가려움일 수도 있고, 혹은 감정이나 일어나는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 관찰대상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무언가를 찾기(깨닫기) 위해 애를 쓰거나 매달립니다.
대개의 경우 관찰대상을 대상으로 보는 가운데 대상과 대상을 아는 마음의 성품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몰입하거나 대상에 이끌려 다니면서 잘못된 길로 빠지거나 오랜 세월 시간을 낭비하며 헤매이곤 합니다.
그럼에도 대상을 대상으로 알지 못하고 대상에 이끌려다니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런 수행의 과정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승이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제자가 옆길로 샐 때 스승은 이따금씩 방향 잡아주는 역할만 할 뿐 자기 수행은 끝까지 자기 자신의 일이니까요.
경험에 의하면 처음부터 너무 수준 높은(핵심적인) 법문, 정교한 수행기법에 많은 관심을 갖기 보다는 이리 부딪히고 저리 넘어지면서 한 호흡, 한 호흡, 한 걸음, 한 걸음, 한 생각, 한 생각... 뒤로 물러나지 않고 우직하게 나가다 보면 답답했던 시야에 안개가 걷히면서 마침내 마음의 성품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사띠수행을 하다보면 대상(접촉대상)에 밀착되어 있던 마음이 어느 순간 대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그 대상이 객관적으로 보이기(알아차려지기) 시작합니다. 대상에 인위적으로 몰입하여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대상으로 아는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위빳사나 수행의 진정한 시작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의 관찰이 자의식이 개입된 주관적 관찰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주관이 사라지고 제3자(객관)가 대상을 지켜봅(빳사나, 觀)니다.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습니다.
가령, 소리를 들을 때 그 이전까지는 새소리ㆍ개짓는 소리 등 개념화된 소리로 들렸지만, 이제 새ㆍ개라는 개념 명칭은 사라지고 단지 '소리들림ㆍ울림ㆍ진동' 정도로만 인식됩니다. 내가 어떤 소리를 듣거나 그 소리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ㆍ명칭화되기 이전의 맨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인식될 뿐입니다.
그 다음 단계가 <그 아는 마음을 또다른 아는 마음이 뒤에서 지켜보는 앎> 입니다. 예를 들자면, 강가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다가 문득 둘중 한 사람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남은 한 사람이 물 속으로 사라진 사람을 본 것과 같습니다.
감각기능이 순일해지고 흙탕물같던 마음이 샘물처럼 맑고 고요해지면 알아차림 의식이 자동적으로 활성화되고 정밀해지면서 <찰라전의 아는 마음을 또다른 찰라의 아는 마음이 일어나 마치 뒤에서 지켜보는 듯한 앎>이 생겨납니다. 이때부터 몸과 마음의 모든 현상을 삼법인으로 관하는 위빳사나 지혜가 본격적으로 생겨납니다.
1. 대상(관찰대상) <----
2. 대상을 [주시하는(noting)마음] <----
3. [주시하고 있는 마음]을 [지켜보는(watching)마음]
심념처 수행에서는 이 부분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통찰지 성숙의 중요한 요건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쉐우민 센터에서는 수행의 기초적인 부분(4가지 예비수행 포함)이나 선정(탄탄한 기초 집중력)에 주안점을 두기 보다는 <마음의 본질> 속으로 곧바로 뛰어들어가 그 본성을 조사ㆍ관찰ㆍ이해함으로써 심념처는 물론 법념처에 까지 이르도록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심념처수행 법문집을 들여다 본 적이 있는데, 사야도의 말씀 하나하나 법에서 벗어난 것이 없었으며, 참으로 유용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으로 곧장 들어가 마음의 성품을 깨달으려는 한국의 선수행 방식과 일면 유사한 점도 없지 않으나, 선수행 방식의 경우 과정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어진 반면 심념처수행의 가르침은 그 과정을 소상히 밝힘[사야도의 구체적 설명ㆍ수행자의 조사ㆍ숙고ㆍ이해]으로써 헤매지 않고 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성품을 바르게 관찰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심념처를 자칫 잘못 이해하면 '나는 마음의 성품을 완전히(바르게) 이해했다ㆍ깨달았다' 라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마음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잡을 수 없고, 복잡 미묘해서 속기 쉽습니다.
설령 '바른 이해'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상의 삶속에서 <이해의 실천>으로 승화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흔들림 없는 집중력(삼매)과 예리한 사띠가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이런 것이 기초가 되었을 때 심념처수행은 그 효력이 극대화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마하시 사야도의 가르침은 기초를 충실히 다지면서 심념처ㆍ법념처, 그리고 법에 대한 온전한 이해로 나아가는 매우 유용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질ㆍ정신의 근원적인 분석과 선정삼매의 탄탄한 기초를 강조하는 파욱 사야도의 가르침 또한 매우 소중하다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꼭 들려드리려 했던 중요한 얘기는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사띠수행을 하다보면 접촉대상에 밀착되어 있던 마음이 어느 순간 대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그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기(알기) 시작한다거나, 대상에 몰입되어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대상으로 아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부분입니다.}
<대상을 대상으로 아는 마음>은 의도에 의해 능동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이 익어지면(사띠, 위리야, 사마디가 균형을 이루면) 저절로(수동적으로) <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사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위적인(능동적인)사띠가 있고, 저절로(수동적으로) 되는 사띠가 있습니다.
수행의 초기 단계에서 이뤄지는 인위적인 사띠는 아직 진정한 사띠라 할 수 없습니다. 인위적인 사띠로는 자연적인 성품이나 빠라맛타를 볼 수 없습니다. 하는 사띠가 아닌 저절로 되어지는, 대상을 따라가는 가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언제 어디서나 대상 혹은 대상에 대한 앎이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사띠가 되었을 때 비로소 법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순간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마음이 마음을 지켜보는 것, 앎이 또다른 앎을 알게 되는 것이 의도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수행자께서는 이미 그런 것을 경험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경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경험했을 때 비로소 사띠와 앎이 예전의 사띠와 예전의 앎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앎을 통해서 마음의 무상성을 깨닫고, 고통의 근본 원인을 이해함으로서 점차 번뇌의 완전한 소멸로 나아가는 것이 이 수행의 핵심입니다.
지혜가 성숙되면 자연스럽게 주로 마음을 보게 됩니다. 대상에 반응하는 마음, 문득문득 일어나는 마음, 활성화되기 직전의 미세한 마음상태까지... 초심자(통찰지가 성숙되기 전)는 대상을 관찰하더라도 그것을 개념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점차 바른노력ㆍ바른집중ㆍ바른사띠가 이어질 때 마침내 수행자는 개념이 아닌 빠라맛타를 대상으로 하는 바른 관찰로 나아가게 됩니다.
6근이 6경과 접촉하는 순간 각각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생겨나는 순간의 마음관찰은 단연 중요합니다. 생겨난 번뇌망상 역시 마음의 하나입니다. 번뇌망상은 인위적 노력에 의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특성을 바르게 이해할 때 근원적으로 제거됩니다.
망상번뇌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떠한 마음이든 경계를 두지 말고 지켜볼 수 있다면 지겨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관찰이 주가 되더라도 때에 따라 신ㆍ수ㆍ심ㆍ법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것이 경전의 보편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같은 사띠빳타나 위빳사나 수행만으로는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 구경의 해탈ㆍ열반에 이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른견해ㆍ바른생각ㆍ바른언어ㆍ바른행위ㆍ바른생활수단ㆍ바른노력ㆍ바른사띠ㆍ바른삼매 등이 갖추어진 <8정도>를 골고루 온전하게 닦아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궁극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그 수행자에게 대답한 내용입니다.
아래 '2'에 설명되어질 내용은 그 수행자는 물론
이 글을 읽는 여러 수행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보충설명 입니다. 부족한 설명이지만 수행에 대한
바른 견해를 세우는 데 참고가 되시길 바랍니다.)
2.
이 승이 미얀마에 머물 때의 일입니다.
마하시 센터에서 수행하던 수행자가 수행 도중 수행진전이 없을 때(수행 장애를 만나면), 주로 쉐우민 센터로 갑니다. 쉐우민 센터에 이르러서 장애가 극복되고 한 단계 성숙된(밝아진) 법안(담마짝꾸)이 열립니다. 그러다가 그 수행자는 다시 벽을 만납니다. 스스로 강한 삼매의 필요성을 느끼고는 삼매수행을 강조해서 가르치는 다른 위빳사나 수행처를 찾아 떠납니다.
경전에는 사마디의 힘ㆍ선정력이 뒷받침 되었을 때 위빳사나 지혜가 생겨나고, 그 두 가지가 구족되었을 때 비로소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고 설해져 있습니다. 사실,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위빳사나 지혜와 사마디의 힘ㆍ선정력이 구족되야 합니다. 마하시 센터ㆍ쉐우민 센터의 가르침은 <칸니까 사마디>(순간집중)를 기반으로 하여 통찰지를 증장시켜나가는 방식입니다.
순간순간의 집중이 모며 마침내 물샐틈 없는 집중상태를 이루게 되고, 그 집중이 정점에 이르게 되면 그 집중력은 거의 몰입삼매(아빠나 사마디)에 버금가는 수준의 삼매의 힘이 됩니다.
마하시 사야도께서는 (경전과 주석서, 특히 앙굿따라ㆍ맛지마ㆍ상윳따 니까야 주석서와 위숫디막가를 근거로 하여) 사마타 수행을 별도로 선행하지 않고, 위빳사나 통찰수행 만으로도 삼매를 계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위빳사나 통찰삼매를 통해 온전한 삼마딧티(정견)ㆍ열반 실현이 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제4선이라는 온전한 선정의 기반위에서 위빳사나 지혜가 완전히 구족되었을 때 비로소 열반 실현이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제1선정~제4선정에도 낮은 수준의 선정이 있고, 중간 정도의 선정이 있고, 높은 단계의 선정이 있고, 최상의 완벽한 선정이 있습니다. '삼법인' 역시 처음 단계에서는 어려풋이 이해되다가 마침내 삼법인에 대한 철견에 이르게 됩니다.
삼마딧티(정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마루빠 냐나'(정신ㆍ물질을 파악하는 지혜)의 정견(삼마딧티)이 있고, 상카루빼카 단계의 정견이 있고, 수다원 정견과 아라한의 정견은 그 수준이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다원이 증득하는 도과의 질과 아라한이 증득하는 도과의 질은 당연히 같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선정 측면에서도 수다원의 선정 수준과 아라한의 선정 수준은 확연히 다릅니다. 그야말로 <제4선정의 완벽한 구족>은 <아나함 성자>(아라한 전 단계의 성자)가 되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초전법륜경, 팔정도경의 <삼마 사마디>(바른삼매) 부분에 제1선정~제4선정이 설해져 있습니다. 완전한 삼마딧티(정견)의 기저에는 완벽한 제4선이 동반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열반의 실현을 위해서는 결코 선정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경전의 한결같은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선정삼매에 한계를 느낀 수행자들이 주로 찾는 수행처가 미얀마의 빠욱 센터입니다. 빠욱 센터에서는 처음부터 사마타ㆍ위빳사나를 함께 닦지 않고, 철저한 선정삼매의 토대 위에서 위빳사나 통찰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도합니다.
그러나, 마하시 센터 방법으로도 쉐우민 센터 방법으로도 빠욱 센터 방법으로도 충분히 도과를 이룰 수 있고, 도과를 이룬 수행자들을 실제로 보았습니다. 어쨌든 마하시에서 쉐우민으로, 쉐우민에서 빠욱으로 간 수행자가 빠욱의 방식을 따라 철저하게ㆍ끊임없이 수행하는 수행자가 있는가 하면,
다시 마하시 센터나 쉐우민 센터로 되돌아오는 수행자가 있습니다. 방법에 따라 일장일단은 있겠지만, 그 일장일단은 수행자의 성향이나 근기에 따라 좀 더 잘 맞거나 덜 맞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모든 수행처들이 바른 견해를 갖추신 훌륭한 스승님들이 가르치는 곳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방식 저 방식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나 사실 각각의 방식들이 붓다의 가르침인 빨리어 삼장과 주석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가르침 안에는 열반으로 가는 길이 공히 들어 있습니다.
자신의 성향에 맞는 곳을 찾기 위해 각 수행처를 섭렵할 수도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맞고 안 맞고는 외부의 조건이나 방식에 있기 보다는 자기 마음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서 이만 마치겠습니다.
할머니께서 어린 학생인 손주에게 말했습니다.
"아가, 미얀하다~
이 할미 친구들이 거의 매일 놀러와
소리를 내면서 니 공부를 방해하는구나~"
"할머니, 신경 쓰시지 마세요~
저 하나도 신경 안 쓰여요~
이런 상황에서도 공부할 수 있어야
그게 진짜 공부하는 거죠~ "
※
담마 안에서 늘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담마 따라서 마침내
고의 온전한 소멸에 이르시길 바랍니다.
※
천림산 기슭에서
메따와 함께 _( )_
《 어느 수행자와의 문답 》
[ 질문 ]
제가 최근에 들어서 혼자 고민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불교수행이란 결국은 삶에서 탐진치가 줄어들어 없어지고, 마음의 상태/질이 높아져서 도와 과에 이르는 것이라고 한다면요.
결국은 "대상" 보다는 "아는 마음" 이 관건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구요. 대상을 관찰하는 수행보다 대상을 직면할 때의 마음을 관찰해서 무상/고/무아, 정견을 확립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제가 막혀버린 듯한 느낌입니다. 과연 내가 하는 마하시 수행이 대상을 향하지 않고 마음의 질/상태, 견해를 바꾸도록, 마음이 대상으로 보도록 가르치는가 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몇 달동안 못 구하고 있어요.
[ 대답 ]
1.
"마음에 의해 세상은 인도되고
마음에 의해 끌려 다니노라.
마음이라는 하나의 법에 의해
모든 것은 지배되노라."
<SN1:63>
"마음이 모든 일에 앞장서 나아가고,
마음이 모든 일의 주인노릇을 하며
마음에 의해 모든 일이 만들어진다....."
<담마빠다 1번송>
".....이 몸 만드는 목수를 찾아
셀 수 없는 생 윤회하며 고통 받았네.
집 짓는 자여! 이제 그댈 보았노라.
그대 더 이상 집짓지 못하리!
이제 모든 서까래 내려앉고
대들보 부러졌으며
마음은 이미 열반에 이르러
감각적 욕망 모두 끊어졌노라."
<부처님의 깨달음 게송>
세상일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일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마음이 하고 있는 일을 분명하게 알아차림하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 자도 마음이며, 집의 재료인 서까래 대들보 모두 마음입니다. 그래서 바른 깨달음을 통한 고통의 소멸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이 하고 있는 일을 바르게 알고 이해하는 것이 단연 중요합니다.
[대상] ---- [아는 마음]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 수행대상(알아차림 대상)이 정해집니다. 호흡의 감각일 수도 있고, 발의 움직임일 수도 있고, 무릎의 통증이거나 특정 부위의 가려움일 수도 있고, 혹은 감정이나 일어나는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 관찰대상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무언가를 찾기(깨닫기) 위해 애를 쓰거나 매달립니다.
대개의 경우 관찰대상을 대상으로 보는 가운데 대상과 대상을 아는 마음의 성품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몰입하거나 대상에 이끌려 다니면서 잘못된 길로 빠지거나 오랜 세월 시간을 낭비하며 헤매이곤 합니다.
그럼에도 대상을 대상으로 알지 못하고 대상에 이끌려다니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런 수행의 과정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승이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제자가 옆길로 샐 때 스승은 이따금씩 방향 잡아주는 역할만 할 뿐 자기 수행은 끝까지 자기 자신의 일이니까요.
경험에 의하면 처음부터 너무 수준 높은(핵심적인) 법문, 정교한 수행기법에 많은 관심을 갖기 보다는 이리 부딪히고 저리 넘어지면서 한 호흡, 한 호흡, 한 걸음, 한 걸음, 한 생각, 한 생각... 뒤로 물러나지 않고 우직하게 나가다 보면 답답했던 시야에 안개가 걷히면서 마침내 마음의 성품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사띠수행을 하다보면 대상(접촉대상)에 밀착되어 있던 마음이 어느 순간 대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그 대상이 객관적으로 보이기(알아차려지기) 시작합니다. 대상에 인위적으로 몰입하여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대상으로 아는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위빳사나 수행의 진정한 시작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의 관찰이 자의식이 개입된 주관적 관찰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주관이 사라지고 제3자(객관)가 대상을 지켜봅(빳사나, 觀)니다.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습니다.
가령, 소리를 들을 때 그 이전까지는 새소리ㆍ개짓는 소리 등 개념화된 소리로 들렸지만, 이제 새ㆍ개라는 개념 명칭은 사라지고 단지 '소리들림ㆍ울림ㆍ진동' 정도로만 인식됩니다. 내가 어떤 소리를 듣거나 그 소리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ㆍ명칭화되기 이전의 맨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인식될 뿐입니다.
그 다음 단계가 <그 아는 마음을 또다른 아는 마음이 뒤에서 지켜보는 앎> 입니다. 예를 들자면, 강가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다가 문득 둘중 한 사람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남은 한 사람이 물 속으로 사라진 사람을 본 것과 같습니다.
감각기능이 순일해지고 흙탕물같던 마음이 샘물처럼 맑고 고요해지면 알아차림 의식이 자동적으로 활성화되고 정밀해지면서 <찰라전의 아는 마음을 또다른 찰라의 아는 마음이 일어나 마치 뒤에서 지켜보는 듯한 앎>이 생겨납니다. 이때부터 몸과 마음의 모든 현상을 삼법인으로 관하는 위빳사나 지혜가 본격적으로 생겨납니다.
1. 대상(관찰대상) <----
2. 대상을 [주시하는(noting)마음] <----
3. [주시하고 있는 마음]을 [지켜보는(watching)마음]
심념처 수행에서는 이 부분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통찰지 성숙의 중요한 요건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쉐우민 센터에서는 수행의 기초적인 부분(4가지 예비수행 포함)이나 선정(탄탄한 기초 집중력)에 주안점을 두기 보다는 <마음의 본질> 속으로 곧바로 뛰어들어가 그 본성을 조사ㆍ관찰ㆍ이해함으로써 심념처는 물론 법념처에 까지 이르도록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심념처수행 법문집을 들여다 본 적이 있는데, 사야도의 말씀 하나하나 법에서 벗어난 것이 없었으며, 참으로 유용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으로 곧장 들어가 마음의 성품을 깨달으려는 한국의 선수행 방식과 일면 유사한 점도 없지 않으나, 선수행 방식의 경우 과정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어진 반면 심념처수행의 가르침은 그 과정을 소상히 밝힘[사야도의 구체적 설명ㆍ수행자의 조사ㆍ숙고ㆍ이해]으로써 헤매지 않고 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성품을 바르게 관찰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심념처를 자칫 잘못 이해하면 '나는 마음의 성품을 완전히(바르게) 이해했다ㆍ깨달았다' 라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마음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잡을 수 없고, 복잡 미묘해서 속기 쉽습니다.
설령 '바른 이해'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상의 삶속에서 <이해의 실천>으로 승화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흔들림 없는 집중력(삼매)과 예리한 사띠가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이런 것이 기초가 되었을 때 심념처수행은 그 효력이 극대화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마하시 사야도의 가르침은 기초를 충실히 다지면서 심념처ㆍ법념처, 그리고 법에 대한 온전한 이해로 나아가는 매우 유용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질ㆍ정신의 근원적인 분석과 선정삼매의 탄탄한 기초를 강조하는 파욱 사야도의 가르침 또한 매우 소중하다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꼭 들려드리려 했던 중요한 얘기는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사띠수행을 하다보면 접촉대상에 밀착되어 있던 마음이 어느 순간 대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그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기(알기) 시작한다거나, 대상에 몰입되어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대상으로 아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부분입니다.}
<대상을 대상으로 아는 마음>은 의도에 의해 능동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이 익어지면(사띠, 위리야, 사마디가 균형을 이루면) 저절로(수동적으로) <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사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위적인(능동적인)사띠가 있고, 저절로(수동적으로) 되는 사띠가 있습니다.
수행의 초기 단계에서 이뤄지는 인위적인 사띠는 아직 진정한 사띠라 할 수 없습니다. 인위적인 사띠로는 자연적인 성품이나 빠라맛타를 볼 수 없습니다. 하는 사띠가 아닌 저절로 되어지는, 대상을 따라가는 가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언제 어디서나 대상 혹은 대상에 대한 앎이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사띠가 되었을 때 비로소 법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순간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마음이 마음을 지켜보는 것, 앎이 또다른 앎을 알게 되는 것이 의도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수행자께서는 이미 그런 것을 경험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경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경험했을 때 비로소 사띠와 앎이 예전의 사띠와 예전의 앎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앎을 통해서 마음의 무상성을 깨닫고, 고통의 근본 원인을 이해함으로서 점차 번뇌의 완전한 소멸로 나아가는 것이 이 수행의 핵심입니다.
지혜가 성숙되면 자연스럽게 주로 마음을 보게 됩니다. 대상에 반응하는 마음, 문득문득 일어나는 마음, 활성화되기 직전의 미세한 마음상태까지... 초심자(통찰지가 성숙되기 전)는 대상을 관찰하더라도 그것을 개념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점차 바른노력ㆍ바른집중ㆍ바른사띠가 이어질 때 마침내 수행자는 개념이 아닌 빠라맛타를 대상으로 하는 바른 관찰로 나아가게 됩니다.
6근이 6경과 접촉하는 순간 각각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생겨나는 순간의 마음관찰은 단연 중요합니다. 생겨난 번뇌망상 역시 마음의 하나입니다. 번뇌망상은 인위적 노력에 의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특성을 바르게 이해할 때 근원적으로 제거됩니다.
망상번뇌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떠한 마음이든 경계를 두지 말고 지켜볼 수 있다면 지겨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관찰이 주가 되더라도 때에 따라 신ㆍ수ㆍ심ㆍ법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것이 경전의 보편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같은 사띠빳타나 위빳사나 수행만으로는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 구경의 해탈ㆍ열반에 이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른견해ㆍ바른생각ㆍ바른언어ㆍ바른행위ㆍ바른생활수단ㆍ바른노력ㆍ바른사띠ㆍ바른삼매 등이 갖추어진 <8정도>를 골고루 온전하게 닦아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궁극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그 수행자에게 대답한 내용입니다.
아래 '2'에 설명되어질 내용은 그 수행자는 물론
이 글을 읽는 여러 수행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보충설명 입니다. 부족한 설명이지만 수행에 대한
바른 견해를 세우는 데 참고가 되시길 바랍니다.)
2.
이 승이 미얀마에 머물 때의 일입니다.
마하시 센터에서 수행하던 수행자가 수행 도중 수행진전이 없을 때(수행 장애를 만나면), 주로 쉐우민 센터로 갑니다. 쉐우민 센터에 이르러서 장애가 극복되고 한 단계 성숙된(밝아진) 법안(담마짝꾸)이 열립니다. 그러다가 그 수행자는 다시 벽을 만납니다. 스스로 강한 삼매의 필요성을 느끼고는 삼매수행을 강조해서 가르치는 다른 위빳사나 수행처를 찾아 떠납니다.
경전에는 사마디의 힘ㆍ선정력이 뒷받침 되었을 때 위빳사나 지혜가 생겨나고, 그 두 가지가 구족되었을 때 비로소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고 설해져 있습니다. 사실,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위빳사나 지혜와 사마디의 힘ㆍ선정력이 구족되야 합니다. 마하시 센터ㆍ쉐우민 센터의 가르침은 <칸니까 사마디>(순간집중)를 기반으로 하여 통찰지를 증장시켜나가는 방식입니다.
순간순간의 집중이 모며 마침내 물샐틈 없는 집중상태를 이루게 되고, 그 집중이 정점에 이르게 되면 그 집중력은 거의 몰입삼매(아빠나 사마디)에 버금가는 수준의 삼매의 힘이 됩니다.
마하시 사야도께서는 (경전과 주석서, 특히 앙굿따라ㆍ맛지마ㆍ상윳따 니까야 주석서와 위숫디막가를 근거로 하여) 사마타 수행을 별도로 선행하지 않고, 위빳사나 통찰수행 만으로도 삼매를 계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위빳사나 통찰삼매를 통해 온전한 삼마딧티(정견)ㆍ열반 실현이 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제4선이라는 온전한 선정의 기반위에서 위빳사나 지혜가 완전히 구족되었을 때 비로소 열반 실현이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제1선정~제4선정에도 낮은 수준의 선정이 있고, 중간 정도의 선정이 있고, 높은 단계의 선정이 있고, 최상의 완벽한 선정이 있습니다. '삼법인' 역시 처음 단계에서는 어려풋이 이해되다가 마침내 삼법인에 대한 철견에 이르게 됩니다.
삼마딧티(정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마루빠 냐나'(정신ㆍ물질을 파악하는 지혜)의 정견(삼마딧티)이 있고, 상카루빼카 단계의 정견이 있고, 수다원 정견과 아라한의 정견은 그 수준이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다원이 증득하는 도과의 질과 아라한이 증득하는 도과의 질은 당연히 같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선정 측면에서도 수다원의 선정 수준과 아라한의 선정 수준은 확연히 다릅니다. 그야말로 <제4선정의 완벽한 구족>은 <아나함 성자>(아라한 전 단계의 성자)가 되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초전법륜경, 팔정도경의 <삼마 사마디>(바른삼매) 부분에 제1선정~제4선정이 설해져 있습니다. 완전한 삼마딧티(정견)의 기저에는 완벽한 제4선이 동반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열반의 실현을 위해서는 결코 선정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경전의 한결같은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선정삼매에 한계를 느낀 수행자들이 주로 찾는 수행처가 미얀마의 빠욱 센터입니다. 빠욱 센터에서는 처음부터 사마타ㆍ위빳사나를 함께 닦지 않고, 철저한 선정삼매의 토대 위에서 위빳사나 통찰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도합니다.
그러나, 마하시 센터 방법으로도 쉐우민 센터 방법으로도 빠욱 센터 방법으로도 충분히 도과를 이룰 수 있고, 도과를 이룬 수행자들을 실제로 보았습니다. 어쨌든 마하시에서 쉐우민으로, 쉐우민에서 빠욱으로 간 수행자가 빠욱의 방식을 따라 철저하게ㆍ끊임없이 수행하는 수행자가 있는가 하면,
다시 마하시 센터나 쉐우민 센터로 되돌아오는 수행자가 있습니다. 방법에 따라 일장일단은 있겠지만, 그 일장일단은 수행자의 성향이나 근기에 따라 좀 더 잘 맞거나 덜 맞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모든 수행처들이 바른 견해를 갖추신 훌륭한 스승님들이 가르치는 곳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방식 저 방식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나 사실 각각의 방식들이 붓다의 가르침인 빨리어 삼장과 주석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가르침 안에는 열반으로 가는 길이 공히 들어 있습니다.
자신의 성향에 맞는 곳을 찾기 위해 각 수행처를 섭렵할 수도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맞고 안 맞고는 외부의 조건이나 방식에 있기 보다는 자기 마음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서 이만 마치겠습니다.
할머니께서 어린 학생인 손주에게 말했습니다.
"아가, 미얀하다~
이 할미 친구들이 거의 매일 놀러와
소리를 내면서 니 공부를 방해하는구나~"
"할머니, 신경 쓰시지 마세요~
저 하나도 신경 안 쓰여요~
이런 상황에서도 공부할 수 있어야
그게 진짜 공부하는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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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 안에서 늘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담마 따라서 마침내
고의 온전한 소멸에 이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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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림산 기슭에서
메따와 함께 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