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교학_나는 무엇인가_ 냐나로까 스님 법어 2.

사깜마
2024-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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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초기불교 교학 _ 냐나로까 스님 법어

 

[차례]

1. 불교란 무엇인가 

1-1. 불교의 특징 

1-2. 믿음과 앎(지혜, 깨달음) 

2. 이 시점에서 왜 초기불교인가? 

2-1. 나는 무엇인가 

2-2. 세상은 무엇인가 

2-3. 진리란 무엇인가 


2.1. 나는 무엇인가(다섯 무더기, 五蘊, pañca-khandha)


   삶은 현실에 근거하고 있다. 현실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은 삶은 이미 삶이 아닐 수 있다. 여기서 삶이란 삶의 주체가 대상과 관계를 맺는 행위, 관계를 맺는 과정, 관계 맺음의 내용 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삶의 주체인 ‘나’에 대한 정체성을 모르고는 불가능하다.

 

붓다께서는 초기경의 도처에서 간단명료하게 ‘나’는 오온(panca-khandha, 五蘊)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붓다는 나라는 존재를 물질,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 알음알이의 다섯 가지 무더기로 해체해서 말하였다. 

여기서 ‘온(khandha, 蘊)’이란 ‘덩어리, 모임, 적취(積聚), 종류, 집합체’라는 뜻이다. 즉 같은 종류의 법(法)이 모여서 하나의 집합을 이룬 것을 ‘온(khandha, 蘊)’이라 한다. 그러므로 온은 궁극의 한 단위가 아니라 복잡한 집합체이다. 

 

불교는 색온(色蘊, rūpa) 이외에 수(受, vedanā), 상(想, saññā), 행(行, saṅkārā), 식(識, viññāṇa)이라는 정신적인 사온(四溫)을 추가한 오온(pañcakhandhā, 五蘊)으로 설명하고 있다.(Saṃyutta Nikaya, 잡아함권3)

수, 상, 행, 식의 4온은 물질적인 색온을 바탕으로 개체를 지속적으로 존속시키려고 느끼고(受), 인식하고(想), 심리현상을 일으키고(行), 식별하는(識) 정신적인 기능을 각각 표현한 것이다. 인간 존재를 물질과 정신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경우, 그 정신적인 부분을 생명활동이라는 측면에서 세분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오온은 인간의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의 총화를 의미하고, 현실적인 인간(나)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다섯 무더기에 대한 대략을 보면, 먼저 경에서 물질(色, rūpa)은 “변형된다고 해서 물질이라 한다.”(S22:79)고 정의된다. 여기서 변형은 변화와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변형(變形)은 형태나 모양이 있는 것이 그 형태나 모양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물질만의 특징이다.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 알음알이와 같은 정신의 무더기들은 변화는 말할 수 있지만 변형은 없다. 형태나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형은 물질에만 있는 성질이다.

 

둘째, 느낌(受, vedanā)은 감정적, 정서적, 예술적 단초가 되는 심리현상이다. 느낌에 바탕을 두고 있는 심리현상들 예를 들면 즐거운 느낌을 주는 것을 끌어당기는 심리현상인 탐욕이나 괴로운 느낌을 주는 대상을 밀쳐내는 심리현상인 성냄은 느낌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이들은 오온의 네 번째인 심리현상들의 무더기(行蘊)에 속한다.

그래서 느낌을 감정적, 정서적인 단초가 되는 심리현상이라 표현한 것이다. 경들에 의하면 느낌에는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세 가지가 있다.

 

셋째, 느낌이 예술적이고 정서적인 심리현상들의 단초가 되는 것이라면 인식(想, saññā)은 지식이나 철학이나 사상이나 이념과 같은 우리의 이지적인 심리현상들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다. 인식은 이처럼 우리의 견해와 사상과 철학과 관계있다. 이것은 단박에 전환이 가능하고 유신견과 관계있다. 상, 락, 아, 정(常樂我淨)이라는 인식의 전도에 빠져서 어리석음으로 발전된다.

 

넷째, 행온(行蘊, saṋkhāra-khandha)의 행은 ‘심리현상들’을 뜻한다. 여기서 오온의 문맥에서 나타나는 행은 항상 복수 형태로 나타내고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혹자들은 오온의 행온도 의도적 행위나 업형성(력) 등으로 이해하고 옮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행온의 한 부분인 cetanā(의도) 만을 부각시킨 역어이다. 행온에는 이 의도를 포함한 50가지 심리현상들(느낌과 인식을 제외한 모든 심리현상, 혹은 심소법)들을 다 포함한다는 것이 주석서와 복주들을 비롯한 아비담마의 한결같은 설명이다.

 

다섯째, 여러 초기불전에서 ‘식별(識別, 了別)한다고 해서 알음알이라 한다’고 알음알이를 정의하고 있다. 한편 초기불전과 아비담마와 유식에서 심(心, citta, 마음)과 의(意, mano)와 식(識, viññāna)은 동의어라고 한결같이 설명되고 있다. 

 

2.1.1. 물질(rūpa-khandha, 色蘊)

   우리는 물질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물질(rūpa-khandha, 色蘊)은 걸림, 변형, 현현(顯現)의 성품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 걸림이란 물체에 바탕이 있어서 서로가 장애가 되어 들어갈 수 없음을 말한다. 변형은 물체에 걸림이 있어서 칼을 대거나 막대기로 치면 잘리게 되거나 다른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하여 형태가 변한다는 의미이다. 현현(顯現)은 겉으로 드러남인데 형상이 있어서 표시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물질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초기경전에서 부처님께서는 물질을 이렇게 정의하신다.

“빅쿠들이여, 그러면 왜 물질이라 하는가? 그것은 변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질이라 한다. 그러면 무엇에 의해서 변형되는가? 차가움, 더움, 배고픔, 목마름, 파리, 모기, 바람, 햇빛, 파충류들에 의해서이다”(S 22:79) 

 

여기서 변형(ruppana)은 변화(viparinna ma)와 다르다. 변형(變形)은 형태나 모양이 있는 것이 그 형태나 모양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물질만의 특징이다.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근본물질인 지ㆍ수ㆍ화ㆍ풍의 4대와, 파생된 물질 24가지를 합하여 모두 28가지 물질을 인정하고 있다. 이 중에서 18가지는 구체적인 물질이라 하고 나머지 10가지는 추상적인 물질이라 한다.

 

구체적인 물질은 업, 마음, 온도, 음식에서 생긴 물질이고, 추상적인 물질은 허공, 몸과 말을 통한 암시, 물질의 가벼움, 부드러움, 적합함 그리고 물질의 생․주․이․멸을 말하며 이 추상인 것들을 테라와다 아비담마에서는 물질의 카테고리에 포함시킨다.

초기불교(테라와다)에서 물질에 대해서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avinibhoga(분리할 수 없는 것)’이란 개념이다. 테라와다 아비담마에서는 4대와 형상(rūpa), 냄새(gandha), 맛(rasa), 자양분(ojā)의 여덟 가지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란 용어를 써서 표현하고 있는데 이들은 항상 서로 묶여서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부터 아주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질적인 대상에 현현해 있기 때문이다. 

 

가. 물질의 열거(rūpasamuddesa)

물질은 4대와 4대로부터 파생된 물질의 2가지이며 이들은 11가지 부문으로 구분되어 있다.

 

가.1. 4대(mahābhūtāni)

아비담마에서는 모두 28가지 형태의 물질을 나열한다. 이것은 크게 두 영역으로 분류된다. 4대와 파생된 물질이다. 

가.2. 파생된 물질

파생된 물질은 4대에서 파생된 물질이란 말이다. 파생된 물질은 4대에서 파생되었거나 4대를 의지해서 생긴 물질의 현상이다. 이들은 모두 24가지이다. 비유하자면 4대는 땅과 같고 파생된 물질은 땅에서 자라는 나무나 넝쿨과 같다고 하겠다.

 

이들 28가지 형태의 물질은 크게 11가지 부류로 나누어진다. 이들 중에서 일곱은 구체적인 물질(nipphanna-rūpa)인데 이들은 고유의 성질(sabhāva)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위빠싸나로써 주시하고 통찰할 수 있는 것이다. 나머지 네 부류는 그 성질상 아주 추상적이기 때문에 추상적인 물질(anipphana-rūpa)이라 부른다.

 

가.1.1. 구체적인 물질(nipphanna-rūpa)

구체적인 물질(nipphanna-rūpa)로 번역한 nipphanna-rūpa에서 nipphanna는 nis(밖으로) + pad(to go)의 과거분사로서 어떤 물건이 완성되어 나온 것이란 의미에서 ‘만들어진, 생산된, 완성된, 완전한, 잘 훈련된’ 등의 뜻으로 쓰인다. 이들은 물질을 일으키는 원인인 업, 마음, 온도, 음식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생기는 물질이고 위빠싸나의 대상이 되는 물질이다.

 

(1) 근본 물질(bhūta-rūpa) 4 가지 :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는 근본물질이라 한다.

bhūta-rūpa를 mahābhūta라고도 한다. 4대는 잘 알려진 것처럼 ① 땅의 요소(paṭhavī- dhātu) ② 물의 요소(āpo-dhātu) ③ 불의 요소(tejo-dhātu) ④ 바람의 요소(vāyo-dhātu)이다. 요소란 ‘자기의 본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요소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예를 들면 땅의 요소는 대지가 그러하듯이 함께 존재하는 물질의 법들을 지탱하기 때문이다. 땅 ․ 물 ․ 불 ․ 바람은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인데 이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이들이 여러 형태로 조합되어서 작은 것은 미진에서부터 큰 것으로는 큰 산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질을 구성한다.

 

(2) 감성의 물질(pasāda-rūpa) 5가지 : 눈, 귀, 코, 혀, 몸은 감성의 물질이라 한다.

감성은 그것의 토대가 되는 감각기관과는 구별이 되어야 한다.

 

① 눈의 감성(cakkhu-pasāda)

② 귀의 감성(sota-pasāda) 

③ 코의 감성(ghāna-pasāda)

④ 혀의 감성(jivhā-pasāda)

⑤ 몸의 감성(kāya-pasāda)

 

(3) 대상의 물질(gocara-rūpa) 4가지 : 색(형상과 색깔), 소리, 냄새, 맛과 물의 요소를 제외한 3대라고 불리는 감촉은 대상의 물질이라 한다.

안․이․비․설․신 다섯 감성의 대상인 색․성․향․미․촉의 다섯만을 gocara라고 부르고 있으며 대상(visaya)이라 하기도 한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이들 색․성․향․미․촉의 다섯 가지 대상 가운데서 촉(감촉, phoṭṭabba)은 28가지 물질 가운데 별개의 단위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비담마에서는 이 감촉은 지대와 화대와 풍대의 화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촉은 이 셋에 포함되므로 따로 최소 단위(dhamma)로서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

① 색(형상 혹은 색깔, 色, rūpa)

② 소리(sadda)

③ 냄새(gandha)

④ 맛(rasa)

 

(4) 성의 물질(bhāva-rūpa) 2가지 : 남성과 여성을 결정하는 물질이다. 


(5) 심장의 물질-(hadaya-rūpa) 1가지 : 심장토대는 심장의 물질이라 한다.

아비담마에서 mano(意)를 인식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그 기관은 당연히 그 기관이 의지한 토대(vatthu)가 있어야 한다. 그런 mano와 mano의 알음알이(意識)들의 의지처로 심장을 주목한다. 이 심장에 있는 한 물질이 바로 심장토대(hadaya-vatthu)이다. 이 심장토대가 되는 물질을 hadaya-rūpa(심장의 물질)라 한다.

 

(6) 생명의 물질(jīvita-rūpa) 1가지 : 생명의 기능(命根)은 생명의 물질이라 한다.

 

(7) 음식의 물질(āhāra-rūpa) 1가지 : 덩어리로 된 음식은 음식의 물질이라 한다.

 

  가.1.2. 추상적인 물질(anipphanna-rūpa)

이 추상적인 물질은 위의 구체적인 물질 18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물질들로 11가지 물질의 부류들 중에서 나머지 다섯 부류에 속하는 물질들을 말한다. 이들은 구체적인 물질을 일으키는 원인인 업, 마음, 온도, 음식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생기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그렇기 때문에 이들 열 가지 추상적인 물질은 궁극적 실재(paramatha)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북방 아비담마, 즉 설일체유부의 아비담마에서는 이런 추상적인 물질을 물질에 포함시키지 않고 마음부수(心所)들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1) 한정하는 물질(pariccheda-rūpa) : 허공의 요소(ākāsa-dhātu)는 한정하는 물질을 말한다.

제한하는 그 성질을 물질로 간주한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허공의 요소를 들고 있다. 

 

(2) 암시의 물질(viññatti-rūpa) : 몸을 통한 암시와 말을 통한 암시는 암시의 물질〔表色〕이라 한다.

아비담마에서 암시는 이것으로 사람이 그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의향 등을 전달하는 것을 말하며 몸의 암시와 말의 암시 두 가지가 있다.

 

(3) 변화의 물질(vikāra-rūpa) : 물질의 가벼움, 물질의 부드러움, 물질의 적합함과 2가지 암시는 변화의 물질이라 한다.

구체적인 물질의 특정한 형태나 드러남을 뜻한다. 위에서 설명한 두 가지 암시도 넓은 의미에서는 이 vikāra에 속하지만 세분하여 암시와 변화로 나누어서 분류하고 있다. 변화에는 가벼움, 부드러움, 적합함이 있는데 이 세 가지는 이미 유익한 마음부수에서도 나타났다. 거기서는 마음과 마음부수들에 해당하는 것이고 여기서는 물질에 해당하는 것이다.

(4) 특징의 물질(lakkhana-rūpa) : 물질의 생성, 물질의 지속, 물질의 낡은 성질, 물질의 무상함은 특징의 물질이라 한다. 여기서 태어남이라는 물질이 생성과 지속으로 불린다.

 

2.1.2. 느낌(vedanaā-Khandha, 受蘊)

   몸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느낌이 따른다. 그러므로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내지는 분명한 앎은 육체적, 정신적인 존재의 전체성을 파악하기 위한 중요한 대목이다. 느낌은 우리의 내부에서 마음의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들 중 중요한 부분으로 역할하기 때문에 느낌에 대한 우선적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느낌을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첫째, 느낌은 감정적ㆍ정서적ㆍ예술적 근거가 되는 심리현상이다. 우리의 삶에서 경험되어지는 모든 것은 신체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인 안, 이, 비, 설, 신의 오근(五根)과 마음, 곧 의근(意根), 이 여섯 개의 감각의 문을 통해서 만난다. 이 여섯 가지 감각의 문에 어떤 대상이 접촉되면 신체와 마음의 현상이 일어나 곧 느낌이 발생한다. 그런데 처음 일어난 느낌은 맨 느낌, 혹은 날 느낌이다. 다시 말하면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중립의 느낌이다 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 감정과 정서가 개입이 된다. 그런 다음 일어나는 느낌에는 경전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세 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 즐거운 느낌은 탐욕의 고질적인 잠재성향을 지니고 있고, 괴로운 느낌은 성냄과 적의의 고질적인 잠재성향을 지니고 있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무지의 고질적인 잠재성향을 지니고 있다.

 

둘째, 불교에서 강조하는 초선부터 제4선까지의 네 가지 선 혹은 본 삼매는 한마디로 느낌의 순화과정이라 표현할 수 있다. 초선에서는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이라는 언어적 사유와, 희열과, 행복한 느낌이 주요한 심리현상으로 드러난다. 제2선은 언어적 사유가 가라앉고 희열과 행복만이 있는 경지이고, 제3선은 희열이라는 강렬한 느낌도 가라앉고 고요함 속에서 잔잔한 행복이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경지이며, 제4선은 행복까지도 가라앉고 평온이라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고결한 느낌이 마침내 전개된다.

<느낌 상윳따>의 몇몇 경에 의하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수승한 느낌으로 수행에서 얻어지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처럼 제4선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자면 삼매 체험이 없는 일반사람들이 평온과 관계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목수 빤짜깡가는 붓다께서는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의 두 가지 느낌만을 말씀하셨다고 주장한다.(S36:19)

 

셋째, 인식이 이념이나 사상을 더 중시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관계가 깊은 것이라 한다면 느낌은 감정과 정서와 예술과 편리함의 추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넷째, 그러나 느낌에 대한 붓다의 결론은 “느낌들이 참으로 거품과 같다.”(S22:95)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서는 “마치 거품이 조그마한 물에서 생겼다가 사라지고 오래 가지 않듯이 느낌도 그와 같다.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순간에 10만 꼬띠(1조)개의 느낌들이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2.1.3. 상온(想蘊, sañña)

   오온의 세 번째 항목은 지각(想. sañña)이다. 지각(인식)이란 간단하게 말하자면 ‘관념 혹은 개념활동’이다. 사람이 대상에 대해 여러 상(相), 예를 들면 대상에 대해 푸르고 누름, 길고 짧음, 남녀, 즐겁고 괴로움 등의 상(相)에 집착해서 여러 명언(名言)개념을 형성하는데 이것을 ‘상(想)’이라 한다. 실로 이 상(想)으로 사물의 표상과 개념을 표시한다. 그러면 지각(인식)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오온의 두 번째인 느낌이 감정적이고 정서적이며 예술적인 심리현상들(행)의 단초가 되는 것이라면, 지각은 지식이나 철학이나 사상이나 이념과 같은 우리의 이지적인 심리현상들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perception으로 정착이 되었다.

 

둘째, 느낌은 닦아서 순차적으로 정화되어 가는 것이지만 지각(인식)은 단박에 전환이 가능하다. 그래서 인식을 비롯한 이지적 심리현상들은 실체 없음을 보는 순간 단박에 전환이 가능하므로 견도(見道, dassana-magga)라 하고, 느낌에 바탕한 탐욕이나 성냄과 같은 감정적 심리현상들은 실체 없음을 본다 하더라도 바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닦아서 점차적으로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수도(修道, bhavana-magga)라 한다. 이것은 남방 상좌부와 북방 설일체유부에서 꼭 같이 강조하는 것이고, 유식에서는 소지장과 번뇌장으로 계승이 되었으며, 선종에서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 하는 오랜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셋째, 감정과 정서와 예술과 편리함의 추구와 관계있는 느낌이 자본주의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다면 인식(想)은 이념이나 사상을 더 중시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관계있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잘못된 지각(인식)은 버려야 한다. 지각(인식)은 대상을 표상으로 받아들여 언어 작업을 통하여 이름 짓고 개념을 일으키는 작용이다. 그런데 이런 개념작용은 또 무수한 집착을 야기하고 해로운 심리현상들(不善法)을 일으키기 때문에 초기 경의 여러 문맥에서 인식은 부정적이고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희론하는 인식’(M12 등)을 가지지 말 것을 초기 경들은 강조하고 있다. 

 

다섯째, 붓다는 닦아야 할 인식으로 ‘무상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초기 경에는 버려야 할 고정관념으로서의 인식만이 아니라 깨달음을 증득하고 해탈ㆍ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 개발하고 닦아야 하는 인식도 있다. 특히 <앙굿따라 니까야>에는 수행자들이 닦아야 할 여러 가지 조합의 인식들이 있다.(A5:61 등)

 

여섯째, 인식은 초기불전에서 실체 없는 신기루(S22:95)에 비유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아니 진아니 대아니 영혼이니 일심이니 하는 잘못된 인식이나 고정관념을 버리고, 이런 인식은 참으로 ‘텅 비고 공허하고 실체가 없는 것’(S22:95)을 분명하게 알아 마침내는 인식이 무상이요, 고통이요, 무아임을 통찰하여 염오-이욕-해탈을 완성해야 할 것이다. 

 

2.1.4. 행온(行蘊, saṅkhara)

   오온의 네 번째 항목은 행(行)이다. ‘수(受)’ ‘상(想)’을 제외한 모든 심리적 활동을 총칭하여 행온이라 한다. 이 행온이 업(業)을 형성하는 것이다. 한국불자들은 여태까지 오온의 행온도 의도적 행위 혹은 의도 그리고 업 형성(력) 등으로 이해하고 있는 경향이 많은데, 이것은 행온의 한 부분인 의도(cetanā) 만을 부각시킨 역어일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주석서와 복서에 의하면 행온에는 이 의도를 포함한 50가지 심리현상들(느낌과 인식을 제외한 모든 심리현상, 혹은 심소법)들을 다 포함한다고 말하고 있다.

 

2.1.5. 식온(識薀, viññāna, 알음알이)

   오온의 다섯 번째 항목은 식온(識薀)이다. 여러 초기불전에서 ‘식별(識別, 了別)한다고 해서 알음알이라 한다’고 식온을 정의하고 있다. viññāna는 vi(분리해서)+√jna(알다)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영어로는 conciou sness 로 정착되었다.

 

‘식(識)’은 ‘요별(了別)해 낸다’라는 의미이다. ‘요(了)’는 ‘알아낸다’는 뜻이고 ‘별(別)’은 ‘분별’을 뜻한다. 그러므로 ‘식(識)’은 대상에 대해서 ‘분별하여 알아낸다’는 의미로서 지각, 인식(認識)의 활동과 그 결과이다. 또한 이것은 감성(感性)인식과 이성(理性)인식의 활동과 내용을 포함하는 것이다. 

 

 

2.2. 세상은 무엇인가 (12처, dvadassayatana)

 

   앞에서 나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초기불교는 ‘나’라는 존재를 물질,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 알음알이의 다섯 가지로 해체해서 답하였음을 살펴보았다. 이에 대하여 ‘세상이란 무엇인가, 대상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일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는 눈, 귀, 코, 혀, 몸, 마노라는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六內處)와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의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六外處)로 해체해서 답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온은 불교의 인간관이요, 12처(dvadassayatana)는 불교의 세계관이다.

나와 세상ㆍ대상ㆍ존재일반을 이처럼 5온과 12처로 해체해서 보면 무상과 고와 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이 무상ㆍ고ㆍ무아의 보편적 특성으로의 참성품을 확연하게 이해함으로써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를 완성해서 궁극적 행복인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초기불교의 근본 가르침이다. 

 

12처는 육내처(여섯 감각기관)와 육외처(여섯 감각대상) 즉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와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의 둘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안’은 눈, 귀, 코, 혀, 몸, 마노의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 혹은 감각기관을 지칭하는 술어이고, 반대로 ‘밖’은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의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 혹은 감각대상을 지칭하는 술어이다. 한편 <상윳따 니까야>(S35) 등에 의하면 12처와 6처와 6내외처는 모두 같은 내용을 지칭하는 동의어이다.

붓다께서는 안의 감각장소(六內處)와 밖의 감각장소(六外處)로 구성된 이 12처야말로 일체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이 12가지 외에 다른 일체는 세울 수 없다고 강조하신다.(<일체경>(S35:23) 그리고 <세상 경>(S35:82) 등에서는 이 12가지야말로 세상 그 자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처럼 세상이나 일체라는 ‘개념적 존재’를 12가지의 법(dhamma)'으로 해체해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12처의 가르침이다.

 

“빅쿠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일체인가? 눈과 형색,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음과 (마음의 대상인)법, 이를 일러 일체라 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이런 일체를 버리고 다른 일체를 천명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말로만 떠벌리는 것일 뿐이다. 만일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더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S35:23)

 

이처럼 붓다께서는 세상 혹은 존재하는 모든 것(일체)이란 모두 안과 밖이 만나는 것, 즉 눈과 형색,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음과 (마음의 대상인)법과 조우하고 부딪히는 것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12처의 가르침을 통해서 강조하고 계신다. 세존께서는 일체 존재와 세상을 이렇게 안과 밖의 감각장소로 해체해서 간단명료하게 제시하신다.

 

“빅쿠들이여, 눈은 무상하다. .....괴로움이다. ........무아다. 마음은 무상하다. ...괴로움이다. ..........무아이다. 빅쿠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마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마노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 탐욕이 빛을 바래고,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S35:222 등등)

 

뭉쳐있는 채로 그대로 두면 세상과 일체라는 실체화된 개념(施設)에 속고 12처라는 법으로 해체하면 깨닫는다. 

 

2.2.1. 18가지 요소(十八界) 

   앞에서 살펴본 12가지 감각(處)장소는 존재하는 모든 것(諸法)을 눈과 귀 등의 6가지 감각기능(根) 즉 안의 감각장소(육내처)와 형색과 소리 등의 6가지 대상(境) 즉 밖의 감각장소(육외처)의 12가지로 해체해서 설하신 것이다. 그런데 육내처와 육외처 즉 눈과 형상, 귀와 소리, .......마노와 법이 만나면 반드시 이들에 관계된 알음알이(識)가 생겨난다. 즉 눈과 형색이 만나면 눈의 알음알이(안식)가, ........마노와 법이 만나면 마노의 알음알이(의식)가 발생한다. 이렇게 조건발생하는 여섯 가지 알음알이(육식)를 넣어서 18가지로 분류한 것이 18가지 요소(界, dhātu) 즉 18계의 가르침이다.

 

<세상경>(S35:107)에서 붓다께서는 세상의 일어남과 사라짐 즉 발생과 소멸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빅쿠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세상의 일어남인가?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마노와 법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고통과 절망이 생긴다. 빅쿠들이여, 이것이 세상의 일어남이다.”

 

그리고 같은 방법으로 세상의 사라짐도 설하신다. 이처럼 세상은 감각기관(근)과 대상(경)이 만나서 생기는 알음알이(식)를 토대로 한 조건발생일 뿐임을 초기불전은 도처에서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조건발생’은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연기를 풀어서 옮긴 것이다.

 

 

2.5. 진리란 무엇인가(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불교에서는 진리는 넷이라고 강조하는데 이것을 교학에서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 이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성스러운’으로 번역되는 ariya(아리야)라는 술어이다. ariya(아리야)는 초기불교 교학의 주제인 온ㆍ처ㆍ계ㆍ근ㆍ제ㆍ연 즉, 5온ㆍ12처ㆍ18계ㆍ22근ㆍ4제ㆍ12연기의 여섯 가지 가운데서는 오직 4제에만 붙어서 사성제로 나타난다.

 

사리뿟따 존자는 “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움직이는 모든 생명들의 발자국들도 모두 코끼리 발자국에 포괄되고 코끼리 발자국이야말로 그 크기로서 최상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어떤 유익한 법이든 그것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포괄됩니다.”라고 말했다.

 

초기불교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네 개 항목으로 되어있다.

①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 ① 4고, 8고 ② 고의 삼성(三性)

②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 : 갈애

③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 열반

④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 : 팔정도

 

한때 붓다께서는 사왓띠의 아나타삔띠까가 보시한 제따와나 사원에 계셨다.

그때 붓다께서 빅쿠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빅쿠들이여, 삼매를 닦아라. 빅쿠들이여, 삼매를 닦으면 있는 그대로 안다. 무엇을 있는 그대로 아는가?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붓다께서는 출가자가 되는 이유도 사성제를 관통하기 위해서이다. (S56:5-6) 라고 말하고 있다.

 

• 훌륭한 가문의 아들①(Kulaputta)

 

한때 붓다께서 사왓띠의 아나타삔띠까가 보시한 제따와나 사원에 계셨다.

그때 붓다께서 빅쿠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빅쿠들이여, 과거세의 어떠한 훌륭한 가문의 아들이라도 올바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했다면 그들 모두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기(abhisamayāya) 위해 출가했던 것이다. 네 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이다.” 

 

• 수행자와 성직자

한때 붓다께서는 사왓띠의 아나타삔띠까가 보시한 제따와나 사원에 계셨다.

그때 붓다께서 빅쿠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빅쿠들이여, 과거세의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든지 있는 그대로 바로 깨달은 바를 설했다면 그들 모두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깨달은 바를 설한 것이다. 

빅쿠들이여, 과거세의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든지 있는 그대로 바로 깨달은 바를 설한다면 그들 모두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깨달은 바를 설할 것이다. 네 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이다.” 

 

2.5.1.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초기불전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일체가 괴로움임을 선언한다. 첫째는 세상에는 네 가지 괴로움과 여덟 가지 괴로움이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괴로움의 세 가지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가. 사고 팔고(四苦 八苦)

“빅쿠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대상들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대상들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 자체가 괴로움이다.”(S56:11)

 

이 경문에서 보듯이 사고(四苦)는 생ㆍ노ㆍ병ㆍ사의 넷이다. 팔고(八苦)는 ‘사랑하는 자와 헤어짐이 고통(愛別離苦)이고, 원망하는 자와도 만나야 함이 고통(怨憎會苦)이고, 원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는 것도 고통(求不得苦)이며, 간단하게 말해서 다섯 가지에 집착함이 고통(五取蘊苦)이다’의 넷을 더한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사고팔고의 결론은 오취온고이다. 나라는 존재는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생은 이런 오온을 ‘나’라고, ‘내 것’이라고 잘못 알고,거기에 집착하기 때문에 이 취착의 대상이 되는 오온으로 구성된 우리의 삶 자체가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이 세상에서 80세, 90세, 100세가 된 남자나 여자들을, 허약하고 허리는 지붕처럼 아래로 굽어 있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걸음을 걷고, 젊은이의 기운이 없어진 지는 벌써 오래된, 이는 빠져 버렸고, 백발이 성성한 머리도 드문드문 남아있거나 그나마 없는, 때가 낀 사지에 피부는 주름져 있는 노인들을. 그리고 그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그대도 역시 이처럼 늙게 되리라는 사실을. 그대는 늙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이 세상에서 병들어 괴로워하며, 병상에서 비탄에 빠져 있으며, 자신의 배설물 속에서 뒹굴고 있는 남자나 여자가 다른 이들에 의해서 들것에 들려져서 병상에 눕혀져 있는 모습을. 그리고 그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그대도 역시 이처럼 병들게 되리라는 사실을. 그대도 병들어 쓰러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이 세상에서 죽은 지 하루, 또는 이틀, 또는 사흘이 된 남자나 여자의 시신이 부어오르고, 색깔은 검푸르게 되어 완전히 썩어있는 모습을. 그리고 그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그대도 역시 이처럼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그대도 죽어 쓰러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 세 가지 괴로움의 성품(三苦性)

괴로움에는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이 있다. 그것은,

① 고통스러운 괴로움의 성질

②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의 성질(壞苦性)

③ 형성된 괴로움의 성질(行苦性)이다. 

 

가.1. 고통스러운 괴로움(苦苦)

가.2. 변화에 따른 괴로움(壞苦)

우리가 존재에 대하여 즐거움을 느끼고, 그래서 그것을 얻고자 하고, 그래서 그것에 몰두하여 집착하려 하는 것은 그 존재가 영원하고 고정적으로 그렇게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의식에서 기인된 것이다. 그런데 그 존재가 항상하지 않고 순간순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안다면 이 무상한 존재의 성품에 대해서 괴로워할 것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가 이와 같이 매순간 전광석화보다 더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다른 존재로 일어났다가 또 사라지고를 반복하고 있다면 그 존재의 덧없음이 사무치게 가슴 안으로 파고들어 그 존재에 대해서 염오하며 너무나 넌덜머리가 나서 괴로움을 느낄 것이다.

 

가.3. 형성됨에서 기인된 괴로움(行苦)

우리가 존재를 볼 때, 그 존재는 그 자체로 그렇게 영원히 고정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요 실재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모든 존재는 앞에서 보았듯이 고정적이며 영원하지 않고 매순간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면, 그것이 실체 혹은 본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속에서 형성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하면 존재란 어떤 조건에 의해서 의존적으로 일어났다가 의존적으로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법은 예외가 없다. 열반마저 괴로움을 이루고 있는 조건이 다 사라진 결과로 찾아든 것이지, 열반이라는 어떤 실체가 그 자체로 존재되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가 실체로서의 자아로 존재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요, 다른 이와 완전히 차별되어 있는 독립된 개체ㆍ인격체로서의 개아도 없다는 것이요, 사후에도 어떤 존재로 ‘나’라는 근간을 이룰만한 영혼 같은 것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정적이고, 영원하고,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존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원인이 조건이 되면 발생할 수밖에 없거나 소멸되지 않을 수 없으니, 잡아둘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다. 괴로움의 종합

이상의 내용을 다시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고(苦)라는 말은 가벼운 불만족에서 절망과 통곡에 이르기까지, 가벼운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느낌에서 뼈저린 고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존재의 구조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의 정신적・물질적인 고통스러움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육체는 무상하지 않은 부분이 없으므로 불안정하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비실재’라는 본질적인 성품에서 오는 고이다. 마음 또한 항상 욕망, 불만, 성냄, 초조, 불안, 걱정스러움, 갈등 속에 있으므로 그것 자체로 괴로움이다. 그런데 우리가 ‘고(苦)’의 반대가 행복이라고 흔히 생각하는데 그 행복마저도 괴로움의 종자(種子)를 품고 있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 우리는 고따마 붓다께서 “일체가 다 괴로움이다”라고 하셨을 때의 괴로움의 의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감각적인 느낌의 괴로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면에서의 괴로움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일지라도 그것은 ‘덧없는 것’이기 때문에, 마침내 변하여 가고 바뀌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거나, 번뇌하는 상태에 이르게 마련인 것이 삶이라고 할 때, ‘삶은 괴로움’이라는 단언은 반박할 여지가 없는 진리인 것이다, 

 

열반을 제외한 모든 유위법들은 그 성질상 모두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문이 있다. 혹자는 불교는 괴로움을 말하기 때문에 염세적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만일 불교가 삶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변화될 수 없는 고정불변의 사실로 간주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런 비판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이처럼 괴로움을 강조하는 것은 삶 그 자체가 괴로움인 것은 인식의 전제 속에서만 그렇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삶의 주체자가 인식을 전환하면 괴로움에서 괴로움이 해결된 경지요 궁극적 행복으로 표현되는 저 열반을 실현하면 괴로움으로 완전히 해방됨을 너무도 중시하기 때문이다.

 

2.5.2.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 

   두 번째 진리는 이러한 괴로움이 왜 일어나는가,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밝히는 진리인데 이를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세존께서는 초기불전의 여러 곳에서 이 괴로움의 일어남 즉 원인을 강조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바로 ‘갈애(渴愛, taṇhā)’이다. taṇhā의 문자적인 의미는 ‘목마름’이다. 경에서는 갈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빅쿠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환희와 탐욕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가 그것이다.”(S56:11) 

 

이 갈애가 근본원인이 되어 중생들은 끝 모를 생사윤회를 거듭한다. 그리고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라는 것은 갈애는 환희와 탐욕과 뜻으로는 하나라는 뜻이다.(DA.ⅲ.799)

 

세존께서는 갈애를 욕애(慾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의 셋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주석서는 욕애를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의 동의어”로, 유애를 “존재를 열망함에 의해서 생긴 상견(常見)이 함께하는 색계와 무색계 존재에 대한 탐욕과 선(禪)을 갈망하는 것의 동의어”로, 무유애를 “단견(斷見)이 함께하는 탐욕의 동의어”(DA.ⅲ.800)로 설명하고 있다.

 

2.5.3.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세 번째는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고멸성제)이다. 갈애가 괴로움의 원인이라면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의해서 이 갈애를 제거하기만 하면 괴로움은 소멸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렇게 하여 괴로움의 소멸은 세 번째 진리가 되며 이것은 괴로움이 모두 소멸된 저 열반의 경지를 말한다. 

 

“빅쿠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S56:11)

 

"여기서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이라는 말은 모두 열반의 동의어들이다. 열반을 얻으면 갈애는 남김없이 빛바래고 소멸하기 때문이다.“(DAⅲ.801)

열반은 문자적으로는 ‘훅, 불어서 꺼진 상태’를 뜻한다. 중국에서는 열반으로 음역하기도 하고 적정(寂靜)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그러면 무엇이 무엇에 의해서 불어서 꺼진 것인가? 사리뿟따는 명쾌하게 설명한다.

 

“도반 사리쁫따여, ‘열반, 열반’이라고들 합니다. 도반이여, 도대체 어떤 것이 열반입니까?” “도반이여, 탐욕의 멸진, 성냄의 멸진, 어리석음의 멸진, 이를 일러 열반이라 합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이러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가 있고 도 닦음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이러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가 있고 도 닦음이 있습니다.”

“도반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이러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이고 도 닦음입니까?”

“도반이여,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로 된 성스러운 도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알아차림, 바른 삼매입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이고 이것이 도 닦음입니다.”(S38:1)

 

2.5.4.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마지막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성스러운 진리로 잘 알려졌다.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는 열반이었다. 그러면 열반은 어떻게 해서 실현되는가? 

 

열반은 팔정도를 실천하여 실현된다. 

 

이제 팔정도를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첫째, 팔정도는 부처님의 최초설법이다. <초전법륜경>(S56:11)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빅쿠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을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을 가진 성스러운 도이니, 즉 바른견해............바른 삼매이다.”

 

둘째, 팔정도는 최후설법이기도 하다. <대열반경>(D16§5.27)을 인용한다.

 

“수밧다여, 어떤 법과 율에서든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가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이 없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없다. 수밧다여, 이 법과 율에는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가 있다. 수밧다여, 그러므로 오직 여기에만 사문이 있다. ........ 여기에만 네 번째 사문이 있다. 다른 교설들에는 사문들이 텅 비어있다.”

 

셋째, 팔정도는 실천이다. 팔정도의 도에 해당하는 단어는 길을 뜻하는 도(magga)와 특히 길을 실제로 걸어가는 도 닦음(patipadā)의 둘로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팔정도라는 표제어에 들어있는 도라는 단어는 길을 뜻하는 막가이고, 도 닦음의 성스러운 진리로 옮겨지는 도성제의 도와 ‘중도’의 도는 도닦음을 뜻하는 patipadā이다. 여기서 빠띠빠다는 실제 길을 걸어가는 ‘실천’의 의미가 강하게 담긴 중요한 술어라는 점을 강조한다.

 

넷째, 더 중요한 사실은 위의 <초전법륜경>에서 보았듯이 팔정도가 바로 ‘중도’라는 점이다. 우리는 중도하면 나가르주나(용수)의 팔불중도만을 강조한다. 불교의 뿌리인 초기불전에서 중도가 팔정도를 뜻하는 이상 중도는 ‘실천’이다. 그러므로 중도를 팔불중도 등의 철학으로만 보면 안 된다. 중도는 초기불전에서 부처님이 중심적으로 설하신 팔정도라는 실천체계로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중도의 도에 해당하는 빠띠빠다가 실제로 길 위를(pati) 밟으면서 걸어가는 것(padā)을 의미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2.5.5. 사성제의 종합

   다시 한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경에서 괴로움의 내용은 네 가지 괴로움과 여덟 가지 괴로움 즉 사고ㆍ팔고(四苦八苦)와 괴로움의 세 가지 성질, 즉 고고성(苦苦性), 괴고성(壞苦性), 행고성(行苦性)으로 정리되어 나타나고, 이것은 오취온으로 요약된다. 괴로움의 원인은 욕애(慾愛)와 유애(有愛)와 무유애(無有愛),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와 존재에 대한 갈애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로 정의되는 갈애다.

이러한 갈애들이 해소된 경지, 즉 탐욕의 멸진, 성냄의 멸진, 어리석음의 멸진이 바로 괴로움의 소멸이며, 그것은 열반이다. 열반은 도닦음을 통해서실현되며, 그것은 바른 견해로부터 바른 삼매까지의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이다.

 

불자는 이 네 가지 진리에 대해서 사무쳐야 한다. 그래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는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pariññeyya)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는 완전히 버려야 한다.(pahātabba)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는 실현해야 한다.(sacchikātabba)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는 닦아야 한다.(bhāvetabba)"(S56:29§5)

 

세존께서는 초기불전의 여러 곳에서 설법을 하신 후에 다음과 같이 간곡하게 말씀하신다. 

 

“빅쿠들이여, 여기 나무 밑이 있다. 여기 빈집이 있다. 참선을 하라. 비구들이여, 방일하지 마라.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당부이다.”(S43:1)


출처: https://cafe.naver.com/buddhayana1/2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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