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자 Co-Admin
Mahānāma Pariyatti, patipatti, pativedha
Mar 16, 2021, 9:25 PM
한국테라와다불교《빤냐완따》이사장 스님의 수요법문
어느 거사님께 드리는 글 <1>
마지막 남은 한 장 달력을 새 달력 위에 덧걸어 놓고
나니 문득 한동안 잊고 있었던 시경(詩經)의 구절이 생각납니다.
“젊음은 수이 가고 배움은 이루기 어렵나니,
촌음이라도 가벼이 말라.
뜰의 봄풀은 꿈도 깨지 않았는데,
섬돌 앞의 오동잎 가을소릴 내는구나.”
일전에, 짧은 시간 두서없이 법담 나누다가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전화로 할까 하다가 그만 잊고 있었는데, 창고 정리하다가 문득 몇년전 이 승이 엮었던 손바닥만 한 법문집 한권이 보이길래 일독을 권하면서 이렇게 몇자 덧붙여 보냅니다. 그리고 이 글의 말미에는 지난번에 못다 했던 ‘사띠’(잊지않음, 주의주시, 알아차림)와 깨달음의 7요인 ‘칠각지’(七覺支)에 대한 보충 내용을 정리해 놓았으니 참고되시길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고민거리나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사원이나 선원, 집중수행모임을 찾아갑니다. 지도자의 안내에 따라 수행법을 배우고 익히면서 수행의 길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갑니다. 한달, 석달, 1년, 3년, 혹은 5년, 10년··· 이제 어느덧 선원을 떠나 혼자서도 수행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선원을 떠나서도(그것이 안방이던 앞마당이던 공원이던) 주로 좌선수행을 통해서만 삼매를 얻고 지혜를 계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무상·고·무아는 좌선삼매를 통해서만 증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 어디서나 늘 좌선의 고요 속에서 깨어 있으려고 노력합니다. 또한 좌선에서의 삼매체험을 본질적인 수행으로 이해한 나머지 더 한층 좌선에 치중하면서 그 특별한 체험들을 수행의 진전으로 생각하며 집착합니다. 물론 좌선은 중요한 수행형태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온전한 수행이 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상의 온갖 고민, 크고 작은 인생문제, 생사의 괴로움이 어디서 생겨났겠습니까? 그것은 일평생 일상생활을 통해 무수히 많은 대상을 만나 시비분별하며 생겨난 것들입니다. 괴로움의 생성지점이야말로 고통의 소멸점입니다. 고의 일어남을 현장에서 절감할 때, 그 일어남의 근본원인을 현장에서 분명히 보고 이해할 때 마침내 고의 소멸에 이를 수 있습니다. 고요히 앉아 있을 때는 생생하게 꿈틀거리던 것들이 실체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좌선수행에서는 공부거리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현장, 즉 학교공부가 아닌 교과서 밖의 삶 한복판에서 맞부딪히는 생생한 문제를 통해 배양되는 마음의 근력과 통찰의 지혜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수행의 관건은 ‘일상의 삶’과 ‘수행’을 얼마나 잘 일치시키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듯 하면서도 너무나 쉽고 당연한 이치입니다. 울타리 안에서의 공부와 눈비내리고 폭풍이 몰아치는 현장에서의 공부는 결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학교의 교과과정은 현장을 살아가기 위한 기초이며 디딤돌입니다. 학교가 아닌 현장에서의 오랜 실무경험을 통해서만이 명의가 탄생하고 시대의 장인이 만들어집니다. 6법전서를 완벽하게 숙지한 젊은 판사가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의 불가사의한 업을 어찌 온전하게 판가름 할 수 있겠습니까?
수행론은 뗏목과 같은 것으로서 수행에 대한 바른 견해가 생겨나면, 그리하여 일상과 수행이 분리되지 않는다면, 그는 상황에 따라 수행론을 언급할 수는 있겠지만 수행론(법)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칠각지(七覺支)는 현상에 대한 집중과 이해가 깊어지면서 나타나는 7가지 법의 현상입니다. 진지한 수행자라면 그러한 체험을 한번 혹은 그 이상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치면 자칫 ‘놓는수행’이 아닌 ‘집착하는 역수행’에 빠지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즉, ‘수행을 위한 수행’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선가에서 스승이 수행자에게“차나 한잔 하고 가게나(끽다거)”“차마시고 밥숟가락 드는 일이 모두 도(다반사)”라 말한 것도 실은 머리로 이해하는 수행, 수행론에 집착하는 수행을 경계하기 위한 것입니다.
수행의 주된 관찰 대상은 ‘탐·진·치’입니다. 선방에서 일어나는 탐진치는 매우 제한적이지만 일상에서는 무수한 대상과 접촉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탐진치가 생겨납니다. 탐진치를 인지·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6도를 윤회하지만, 생겨나는 탐진치를 바로 보고 이해한다면, 즉 오온(五蘊)을 나로 착각하지 않아서 나의 몸(물질)·느낌·관념·의도·인식에 끌려다니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생사해탈로 가는 길입니다. 탐진치가 일어나고 있는 보고 듣고 말하는 모든 상황들이 생생한 수행의 현장이며, 생사해탈과 생사윤회의 중대한 갈림길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5년을, 10년을 수행해도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격이 되고 맙니다. 가령 어느 스님은, “한번 앉으면 이내 호흡이 사라지면서 온갖 마음도 사라지고 결국 아는 마음 하나만 남는데 그 아는 마음마저 종종 사라지더라.” 10년 전에 했던 말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스님은 “사띠수행을 하다 보니 대상을 대상으로 아는 마음이 생겨나고 그 아는 마음을 또 뒤에서 지켜보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즉 하나의 아는 마음이 생겼다 사라지고 그다음 아는 마음이 또 생겼다가 사라집니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어느 정도의 선정력과 통찰력은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깊은 삼매, 특별하게 보는 눈을 가졌다 해도 그것은 아직 수행의 본질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사라지고, 앞마음 뒷마음이 사라지고··· 그래서 결국 뭐가 어떻다는 것인가요?
수행의 목적은 ‘바른 견해’(삼마-딧티)를 얻는데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마음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설령 입정(入定)과 출정(出定)이 자유자재하고 4선정 8선정을 얻었다 하여 그것에 만족해하거나 지나치게 관심을 갖다 보면 지혜의 성숙은 거기에서 멈추게 될 것이며, 윤회계는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3계(욕계·색계·무색계)의 존재들은 모두 화염에 휩싸인 배를 타고 윤회하는 불쌍한 중생이라 부처님께서 설하셨듯이. <계속 이어짐···>
불멸 2565(2021). 3.17
천림산 기슭에서 합장
+++++++++++++++++++++++++++++++
테라와다불교를 이끈 근·현대의 스승들
<미얀마 편>
미얀마의 공식 국가명은 <미얀마 연방>(Union of Myanmar)입니다. 국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얀마는 전체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버마족을 포함한 8개의 주요 종족(산간의 소수부족까지 포함해 약 135종족)으로 구성돼 있는 연합종족 국가입니다. 주 종족인 버마족은 훗날 바간을 중심으로 통일왕국을 건설하면서 미얀마의 불교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웁니다. 주요 종족 중의 하나였던 몬족은 미얀마 남부전역에 살면서 버마족에게 테라와다불교를 전해준 종족으로서 현대는 거의 버마족에 동화되어 있습니다. 미얀마의 최고 불교성지의 하나로 손꼽히는 짜익띠요산 정상의 황금자연석탑이 현재 몬족의 중심지인 따톤에 소재하고 있습니다.
미얀마 불자들의 수행에 대한 열기는 현존하는 테라와다불교국가 가운데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얀마 대학생들의 대부분이 명상센터에서 수행을 지도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미얀마 사람들이 명상센터에서 휴가를 수행으로 보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양곤 근교에는 10곳이 넘는 국제적인 명상센터가 있으며, 전국에 크고 작은 명상센터가 산재해 있습니다.
최근 남방불교 수행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고 있는 위빳사나 수행은 테라와다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서, 미얀마에서 희미하게 명맥을 이어가던 이 수행법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미얀마 북부 틸론지방의 전설적인 수행승 <우 산디마스님>에 귀의한 <민돈왕>(1853~1878)이 위빠사나 수행을 몸소 실천하면서 부터입니다. 이후 영국 제국주의의 찬탈과 함께 불교청년회(YMBA)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운동이 본격화 되면서 <레디 사야도>와 <밍군 제따완 사야도> 등에 의해 불교의 전통적 수행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분들은 쇠퇴해가던 미얀마 상가(승단)의 민족의식을 일깨워서 대중과 함께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한 근대의 독보적인 테라와다 스승들입니다.
<레디 사야도>는 교학에 정통한 수행승으로서 70권이 넘는 방대한 빨리어 저술을 남겼으며, 특히 1897에 발표한 Paramattha-dīpanī Tīkā(궁국적 진리에 대한 해설)는 아비담마 연구와 논쟁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아나빠나 사띠(Ānāpānasati:입출호흡 알아차림)를 기반으로 한 위빳사나를 스스로 실천하고, 출가자와 재가 수행자들을 지도하면서 <마하시 사야도>의 스승인 <밍군 제따완 사야도>와 함께 미얀마 위빳사나 수행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레디 사야도>는 교학과 수행이 심오했을 뿐 아니라 미얀마 독립의 정신적 지주로서 수많은 불교관련 출판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습니다. <밍군 제따완 사야도>나 <마하시 사야도>처럼 수행처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지도하지는 않았지만, 1923년 77세를 일기로 입멸한 이후 수많은 제자들에 의해 그 전통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곡 사야도>는 미얀마 북부에서 30년간 불교심리학과 경전을 가르친 학승이었습니다. <모곡 사야도>는 수행에 앞서 아비담마 법문을 통해 수행자로 하여금 현상과 실재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의 수준에 도달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12연기 도표를 이용해 5온의 윤회를 설명함으로써 인과의 원리가 우리의 몸과 마음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호흡과 느낌과 인식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해 지금까지 이론적으로만 이해했던 연기의 과정을 몸소 체험하도록 했습니다.
미얀마가 영국 식민지하에 들어간 이후 교육과 문화를 통한 불교부흥 운동이 한창이던 1914년, <밍군 제따완 사야도>는 미얀마 남부 따톤에 미얀마 최초의 위빳사나 명상센터를 개원하고 본격적인 위빳사나 수행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을 통해 걸출한 두 제자를 탄생시킵니다. 그들이 바로 <땀불루 사야도>와 <마하시 사야도>입니다.
<땀불루 사야도>는 만달레이의 한 승원에서 200여명의 학인들을 대상으로 교학을 가르치던 강사스님이었습니다. <밍군 제따완 사야도>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이후 만달레이 메틸라에 있는 원데인 숲속으로 들어가 철저한 두타행(Dhutanga)을 바탕으로 한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했습니다. 그 심오한 수행체험이 세상에 알려지자, 그 명성을 듣고 내국인은 물론 많은 외국인 수행자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받고 갔습니다. <마하시 사야도>와의 깊은 교분을 통해서 <마하시 사야도>가 위빳사나 수행체계를 정립하는 데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땀불루 사야도>는 일생동안 철저한 두탕가의 삶을 살면서 <마하시 사야도>처럼 조직적이거나 체계적인 전법체제를 구축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우 조띠까 사야도>가 그 법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법을 세계에 전파시킨 <마하시 사야도>는 26세 되던 1932년, <밍군 제따완 사야도>를 찾아갑니다. 그리하여 빨리어 경전『사띠빳타나 숫따』(염처경:念處經)를 근거로 체계화 한 위빳사나 행법을 통해 단 4개월만에 깊은 담마(진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 후 자신의 고향 세익쿤으로 돌아와 마하시 수도원을 건립하고 그곳에서 제자들을 위해 위빳사나 수행의 교리적인 측면과 실제적인 측면 모두를 이해하기 쉽게 적은『사띠빳타나 -바와나』(염처 수행)를 엮어냅니다. 그 명성은 미얀마 북부에까지 퍼져나갔습니다.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듬해 1949년, 불교적 사회주의를 꿈꾸던 <우 누 수상>의 요청에 의해 현재 양곤의 ‘마하시 명상센터’에서 본격적인 수행지도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1954년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역사적인 제6차 경전결집을 삼장법사 <밍군 사야도>(우 위세이따다라)와 함께 성공적으로 이끕니다.
1955년 스리랑카 정부는 <마하시 사야도>에게 자국에서의 위빳사나 수행 보급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였고, 1959년 사야도께서는 대규모 방문단을 이끌고 인도·스리랑카 등지를 순회하면서 위빳사나 수행법을 보급시켰습니다. 이 무렵 스리랑카에서는 이미 7곳의 수행처에서 마하시 방식의 위빳사나 행법을 가르치고 있었고, 그 순회를 계기로 하여 동서남아시아에는 수많은 명상센터가 생겨납니다. 태국에는 이미 1952년 종교성의 요청으로 『사띠빳타나 위빳사나』가 소개된 상태였고, 1960년 무렵에는 수많은 명상센터의 건립과 함께 수행력을 갖춘 수행자가 이미 10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왓 마하닷 사원’을 비롯한 방콕 시내에 있는 대부분 사원에서는 마하시 계통의 위빳사나 수행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을 이은 제자들로는, ‘쉐우민 명상센터’의 <우 꼬살라 사야도>, ‘빤딧따라마 명상센터’의 <우 빤디따 사야도>, ‘참메 명상센터’의 <우 자나카 비왐사>, ‘삿담마란시 명상센타’의 <우 쿤다라 비왐사>, ‘국제테라와다불교대학교’총장 <우 실라난다 사야도>, 그리<우 자띨라 사야도>, <우 와사와 사야도> 등이 있습니다.
(위 글은 2009년 대한불교조계종에서 개최한 제5차 국제정책 세미나 때 이 승이 발표한 논문 『글로벌시대의 개방에 따른 한국·미얀마 불교교류 현황과 과제』에서 발췌·요약 정리하였습니다.)
1
1
1
1
1
게시자 Co-Admin
Mahānāma Pariyatti, patipatti, pativedha
Mar 16, 2021, 9:25 PM
한국테라와다불교《빤냐완따》이사장 스님의 수요법문
어느 거사님께 드리는 글 <1>
마지막 남은 한 장 달력을 새 달력 위에 덧걸어 놓고
나니 문득 한동안 잊고 있었던 시경(詩經)의 구절이 생각납니다.
“젊음은 수이 가고 배움은 이루기 어렵나니,
촌음이라도 가벼이 말라.
뜰의 봄풀은 꿈도 깨지 않았는데,
섬돌 앞의 오동잎 가을소릴 내는구나.”
일전에, 짧은 시간 두서없이 법담 나누다가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전화로 할까 하다가 그만 잊고 있었는데, 창고 정리하다가 문득 몇년전 이 승이 엮었던 손바닥만 한 법문집 한권이 보이길래 일독을 권하면서 이렇게 몇자 덧붙여 보냅니다. 그리고 이 글의 말미에는 지난번에 못다 했던 ‘사띠’(잊지않음, 주의주시, 알아차림)와 깨달음의 7요인 ‘칠각지’(七覺支)에 대한 보충 내용을 정리해 놓았으니 참고되시길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고민거리나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사원이나 선원, 집중수행모임을 찾아갑니다. 지도자의 안내에 따라 수행법을 배우고 익히면서 수행의 길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갑니다. 한달, 석달, 1년, 3년, 혹은 5년, 10년··· 이제 어느덧 선원을 떠나 혼자서도 수행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선원을 떠나서도(그것이 안방이던 앞마당이던 공원이던) 주로 좌선수행을 통해서만 삼매를 얻고 지혜를 계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무상·고·무아는 좌선삼매를 통해서만 증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 어디서나 늘 좌선의 고요 속에서 깨어 있으려고 노력합니다. 또한 좌선에서의 삼매체험을 본질적인 수행으로 이해한 나머지 더 한층 좌선에 치중하면서 그 특별한 체험들을 수행의 진전으로 생각하며 집착합니다. 물론 좌선은 중요한 수행형태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온전한 수행이 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상의 온갖 고민, 크고 작은 인생문제, 생사의 괴로움이 어디서 생겨났겠습니까? 그것은 일평생 일상생활을 통해 무수히 많은 대상을 만나 시비분별하며 생겨난 것들입니다. 괴로움의 생성지점이야말로 고통의 소멸점입니다. 고의 일어남을 현장에서 절감할 때, 그 일어남의 근본원인을 현장에서 분명히 보고 이해할 때 마침내 고의 소멸에 이를 수 있습니다. 고요히 앉아 있을 때는 생생하게 꿈틀거리던 것들이 실체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좌선수행에서는 공부거리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현장, 즉 학교공부가 아닌 교과서 밖의 삶 한복판에서 맞부딪히는 생생한 문제를 통해 배양되는 마음의 근력과 통찰의 지혜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수행의 관건은 ‘일상의 삶’과 ‘수행’을 얼마나 잘 일치시키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듯 하면서도 너무나 쉽고 당연한 이치입니다. 울타리 안에서의 공부와 눈비내리고 폭풍이 몰아치는 현장에서의 공부는 결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학교의 교과과정은 현장을 살아가기 위한 기초이며 디딤돌입니다. 학교가 아닌 현장에서의 오랜 실무경험을 통해서만이 명의가 탄생하고 시대의 장인이 만들어집니다. 6법전서를 완벽하게 숙지한 젊은 판사가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의 불가사의한 업을 어찌 온전하게 판가름 할 수 있겠습니까?
수행론은 뗏목과 같은 것으로서 수행에 대한 바른 견해가 생겨나면, 그리하여 일상과 수행이 분리되지 않는다면, 그는 상황에 따라 수행론을 언급할 수는 있겠지만 수행론(법)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칠각지(七覺支)는 현상에 대한 집중과 이해가 깊어지면서 나타나는 7가지 법의 현상입니다. 진지한 수행자라면 그러한 체험을 한번 혹은 그 이상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치면 자칫 ‘놓는수행’이 아닌 ‘집착하는 역수행’에 빠지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즉, ‘수행을 위한 수행’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선가에서 스승이 수행자에게“차나 한잔 하고 가게나(끽다거)”“차마시고 밥숟가락 드는 일이 모두 도(다반사)”라 말한 것도 실은 머리로 이해하는 수행, 수행론에 집착하는 수행을 경계하기 위한 것입니다.
수행의 주된 관찰 대상은 ‘탐·진·치’입니다. 선방에서 일어나는 탐진치는 매우 제한적이지만 일상에서는 무수한 대상과 접촉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탐진치가 생겨납니다. 탐진치를 인지·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6도를 윤회하지만, 생겨나는 탐진치를 바로 보고 이해한다면, 즉 오온(五蘊)을 나로 착각하지 않아서 나의 몸(물질)·느낌·관념·의도·인식에 끌려다니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생사해탈로 가는 길입니다. 탐진치가 일어나고 있는 보고 듣고 말하는 모든 상황들이 생생한 수행의 현장이며, 생사해탈과 생사윤회의 중대한 갈림길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5년을, 10년을 수행해도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격이 되고 맙니다. 가령 어느 스님은, “한번 앉으면 이내 호흡이 사라지면서 온갖 마음도 사라지고 결국 아는 마음 하나만 남는데 그 아는 마음마저 종종 사라지더라.” 10년 전에 했던 말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스님은 “사띠수행을 하다 보니 대상을 대상으로 아는 마음이 생겨나고 그 아는 마음을 또 뒤에서 지켜보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즉 하나의 아는 마음이 생겼다 사라지고 그다음 아는 마음이 또 생겼다가 사라집니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어느 정도의 선정력과 통찰력은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깊은 삼매, 특별하게 보는 눈을 가졌다 해도 그것은 아직 수행의 본질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사라지고, 앞마음 뒷마음이 사라지고··· 그래서 결국 뭐가 어떻다는 것인가요?
수행의 목적은 ‘바른 견해’(삼마-딧티)를 얻는데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마음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설령 입정(入定)과 출정(出定)이 자유자재하고 4선정 8선정을 얻었다 하여 그것에 만족해하거나 지나치게 관심을 갖다 보면 지혜의 성숙은 거기에서 멈추게 될 것이며, 윤회계는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3계(욕계·색계·무색계)의 존재들은 모두 화염에 휩싸인 배를 타고 윤회하는 불쌍한 중생이라 부처님께서 설하셨듯이. <계속 이어짐···>
불멸 2565(2021). 3.17
천림산 기슭에서 합장
+++++++++++++++++++++++++++++++
테라와다불교를 이끈 근·현대의 스승들
<미얀마 편>
미얀마의 공식 국가명은 <미얀마 연방>(Union of Myanmar)입니다. 국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얀마는 전체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버마족을 포함한 8개의 주요 종족(산간의 소수부족까지 포함해 약 135종족)으로 구성돼 있는 연합종족 국가입니다. 주 종족인 버마족은 훗날 바간을 중심으로 통일왕국을 건설하면서 미얀마의 불교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웁니다. 주요 종족 중의 하나였던 몬족은 미얀마 남부전역에 살면서 버마족에게 테라와다불교를 전해준 종족으로서 현대는 거의 버마족에 동화되어 있습니다. 미얀마의 최고 불교성지의 하나로 손꼽히는 짜익띠요산 정상의 황금자연석탑이 현재 몬족의 중심지인 따톤에 소재하고 있습니다.
미얀마 불자들의 수행에 대한 열기는 현존하는 테라와다불교국가 가운데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얀마 대학생들의 대부분이 명상센터에서 수행을 지도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미얀마 사람들이 명상센터에서 휴가를 수행으로 보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양곤 근교에는 10곳이 넘는 국제적인 명상센터가 있으며, 전국에 크고 작은 명상센터가 산재해 있습니다.
최근 남방불교 수행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고 있는 위빳사나 수행은 테라와다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서, 미얀마에서 희미하게 명맥을 이어가던 이 수행법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미얀마 북부 틸론지방의 전설적인 수행승 <우 산디마스님>에 귀의한 <민돈왕>(1853~1878)이 위빠사나 수행을 몸소 실천하면서 부터입니다. 이후 영국 제국주의의 찬탈과 함께 불교청년회(YMBA)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운동이 본격화 되면서 <레디 사야도>와 <밍군 제따완 사야도> 등에 의해 불교의 전통적 수행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분들은 쇠퇴해가던 미얀마 상가(승단)의 민족의식을 일깨워서 대중과 함께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한 근대의 독보적인 테라와다 스승들입니다.
<레디 사야도>는 교학에 정통한 수행승으로서 70권이 넘는 방대한 빨리어 저술을 남겼으며, 특히 1897에 발표한 Paramattha-dīpanī Tīkā(궁국적 진리에 대한 해설)는 아비담마 연구와 논쟁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아나빠나 사띠(Ānāpānasati:입출호흡 알아차림)를 기반으로 한 위빳사나를 스스로 실천하고, 출가자와 재가 수행자들을 지도하면서 <마하시 사야도>의 스승인 <밍군 제따완 사야도>와 함께 미얀마 위빳사나 수행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레디 사야도>는 교학과 수행이 심오했을 뿐 아니라 미얀마 독립의 정신적 지주로서 수많은 불교관련 출판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습니다. <밍군 제따완 사야도>나 <마하시 사야도>처럼 수행처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지도하지는 않았지만, 1923년 77세를 일기로 입멸한 이후 수많은 제자들에 의해 그 전통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곡 사야도>는 미얀마 북부에서 30년간 불교심리학과 경전을 가르친 학승이었습니다. <모곡 사야도>는 수행에 앞서 아비담마 법문을 통해 수행자로 하여금 현상과 실재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의 수준에 도달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12연기 도표를 이용해 5온의 윤회를 설명함으로써 인과의 원리가 우리의 몸과 마음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호흡과 느낌과 인식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해 지금까지 이론적으로만 이해했던 연기의 과정을 몸소 체험하도록 했습니다.
미얀마가 영국 식민지하에 들어간 이후 교육과 문화를 통한 불교부흥 운동이 한창이던 1914년, <밍군 제따완 사야도>는 미얀마 남부 따톤에 미얀마 최초의 위빳사나 명상센터를 개원하고 본격적인 위빳사나 수행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을 통해 걸출한 두 제자를 탄생시킵니다. 그들이 바로 <땀불루 사야도>와 <마하시 사야도>입니다.
<땀불루 사야도>는 만달레이의 한 승원에서 200여명의 학인들을 대상으로 교학을 가르치던 강사스님이었습니다. <밍군 제따완 사야도>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이후 만달레이 메틸라에 있는 원데인 숲속으로 들어가 철저한 두타행(Dhutanga)을 바탕으로 한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했습니다. 그 심오한 수행체험이 세상에 알려지자, 그 명성을 듣고 내국인은 물론 많은 외국인 수행자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받고 갔습니다. <마하시 사야도>와의 깊은 교분을 통해서 <마하시 사야도>가 위빳사나 수행체계를 정립하는 데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땀불루 사야도>는 일생동안 철저한 두탕가의 삶을 살면서 <마하시 사야도>처럼 조직적이거나 체계적인 전법체제를 구축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우 조띠까 사야도>가 그 법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법을 세계에 전파시킨 <마하시 사야도>는 26세 되던 1932년, <밍군 제따완 사야도>를 찾아갑니다. 그리하여 빨리어 경전『사띠빳타나 숫따』(염처경:念處經)를 근거로 체계화 한 위빳사나 행법을 통해 단 4개월만에 깊은 담마(진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 후 자신의 고향 세익쿤으로 돌아와 마하시 수도원을 건립하고 그곳에서 제자들을 위해 위빳사나 수행의 교리적인 측면과 실제적인 측면 모두를 이해하기 쉽게 적은『사띠빳타나 -바와나』(염처 수행)를 엮어냅니다. 그 명성은 미얀마 북부에까지 퍼져나갔습니다.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듬해 1949년, 불교적 사회주의를 꿈꾸던 <우 누 수상>의 요청에 의해 현재 양곤의 ‘마하시 명상센터’에서 본격적인 수행지도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1954년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역사적인 제6차 경전결집을 삼장법사 <밍군 사야도>(우 위세이따다라)와 함께 성공적으로 이끕니다.
1955년 스리랑카 정부는 <마하시 사야도>에게 자국에서의 위빳사나 수행 보급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였고, 1959년 사야도께서는 대규모 방문단을 이끌고 인도·스리랑카 등지를 순회하면서 위빳사나 수행법을 보급시켰습니다. 이 무렵 스리랑카에서는 이미 7곳의 수행처에서 마하시 방식의 위빳사나 행법을 가르치고 있었고, 그 순회를 계기로 하여 동서남아시아에는 수많은 명상센터가 생겨납니다. 태국에는 이미 1952년 종교성의 요청으로 『사띠빳타나 위빳사나』가 소개된 상태였고, 1960년 무렵에는 수많은 명상센터의 건립과 함께 수행력을 갖춘 수행자가 이미 10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왓 마하닷 사원’을 비롯한 방콕 시내에 있는 대부분 사원에서는 마하시 계통의 위빳사나 수행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을 이은 제자들로는, ‘쉐우민 명상센터’의 <우 꼬살라 사야도>, ‘빤딧따라마 명상센터’의 <우 빤디따 사야도>, ‘참메 명상센터’의 <우 자나카 비왐사>, ‘삿담마란시 명상센타’의 <우 쿤다라 비왐사>, ‘국제테라와다불교대학교’총장 <우 실라난다 사야도>, 그리<우 자띨라 사야도>, <우 와사와 사야도> 등이 있습니다.
(위 글은 2009년 대한불교조계종에서 개최한 제5차 국제정책 세미나 때 이 승이 발표한 논문 『글로벌시대의 개방에 따른 한국·미얀마 불교교류 현황과 과제』에서 발췌·요약 정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