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교학_불교란 무엇인가_ 냐나로까 스님 법어 1.

사깜마
2024-12-03
조회수 86

제2장 초기불교 교학 _ 냐나로까 스님 법어

 

[차례]

1. 불교란 무엇인가 

1-1. 불교의 특징 

1-2. 믿음과 앎(지혜, 깨달음) 

2. 이 시점에서 왜 초기불교인가? 

2-1. 나는 무엇인가 

2-2. 세상은 무엇인가 

2-3. 진리란 무엇인가 

 

Ⅰ. 서언

 

1. 불교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종교에 대하여,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이다.” 고 정의하고 있다.

특히 계시종교에서는 인간은 유한함, 부족함, 더러움 그리고 죄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지극히 높고, 거룩하며 전지전능의 능력으로 온 우주와 생물을 창조하였으며, 인류 역사를 조종하는 신・하느님・절대자에게 믿음과 복종으로 기도를 하여 죄를 사하고 영생과 구원을 얻고자 한다.

이에 비하여 불교는 이러한 종교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보면 일반인들은 당혹스럽기 조차할는지도 모르겠다. 붓다는 “나는 고(苦)와 고로부터의 벗어남에 대해서만 설한다.”고 선언하며, 단순히 현대 심리학이 목표로 삼는 것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행복인 해탈・열반을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함을 삶의 최고의 목표로 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종교와는 전혀 방향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러면 불교가 다른 종교와 차별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1.1. 불교의 특징

 

1) 불교는 본체로서의 신, 절대자, 창조자, 조물주 등을 부정한다.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신ㆍ절대자ㆍ창조주 등의 개념은 철학적으로는 본체로서 실재하는 실체적인 존재이다. 철학적으로 본체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① 항상성(恒常性), 상일성(常一性)을 가져야 한다. 

본체로서의 ‘자아’라는 것을 예를 들어보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의 몸과 마음은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면서 죽는 것이지만 처음부터 죽을 때까지 변화하지 않는 그 어떤 무엇의 ‘항상체, 상일체’가 있어야만 육체적, 정신적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체요, 생명의 본질로서의 ‘자아’가 존재하는 것이다. 붓다 이전의 사상가들은 ‘자아’의 이런 불변설에 착안하여 그것을 우주의 본질이며, 본체인 브라흐만(Brahman)과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설로 심화시켰던 것이다.

 

우리의 몸은 수많은 조건이 결합된 집합체이다. 그러나 그러한 집합체는 한시도 같은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 기관 하나, 근육 하나, 피 한 톨, 세포 하나도 잠시도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심지어는 1초 동안 30만 개의 세포가 소멸되고, 30만 개의 새로운 세포가 생성된다고 하니 참으로 무상함이 극치를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사정은 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마음 역시 수많은 작용의 요소들이 조건지워진 집합체이다. 찰나도 마음은 영원성을 지니고 머물러 있지 않는다. 

또 다른 예로 전깃불이나 촛불을 보자. 밝기의 상태가 결코 항상하지 않는다. 순간 순간은 전기불이나 촛불은 깜박거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본체로서의 항상성, 상일성은 부정된다.

 

② 유일성이 있어야 한다.

본체가 두 개, 세 개 혹은 여러 개일 수는 없다. 동일 상황에서 여러 개의 본체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본체가 아니다. 

동일 존재에 대하여 조건이 변하더래도 그것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자기 동일자로서 유일성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존재의 자기 동일성은 단지 생성의 연속성에 대한 별칭에 불과하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순간순간 새로워지며, 찰나 간에 사라지며, 단지 유사한 것으로 대체될 뿐인 수많은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지 이와 같은 작용들이 너무나 순간적으로 일어나 연속되고 있으므로 고정적인 유일성으로 잘못 판단하고 있을 뿐이다.

이름과 형태의 자기 동일이 곧 내적인 실재의 자기 동일을 보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영원한 유일성의 실재를 상정하도록 이끌리지만 그것은 사유작용의 추상일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예를 들면 여기 금 한 돈이 있는데 이것을 반지로 만들었다. 얼마 후 이 반지를 녹여서 두드려 목걸이를 만들었다. 이런 경우 이 금은 반지에서 목걸이로 형태는 바뀌었지만 금은 동일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반지가 목걸이로 될 때 다른 여러 가지의 환경변수들과 관계되어 반지 때의 그 금과는 다른 조건화된 금이 된다. 반지일 때의 금과 목걸이일 때의 금은 이름과 언어는 동일한 금이나 실제의 양상은 동일 자가 아니다.

따라서 불교는 유일성이 부정됨으로 본체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③ 특히 본체가 ‘나(자아)’에 적용될 경우 본체는 주재성(主宰性)을 지녀야 한다.

나의 몸과 마음이 곧 나의 자아라면 나는 나에 대해서 주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삶에서 늘 괴로움을 본다. 그것은 괴로움은 주재성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붓다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눈(眼)이 만일 ‘나’라면 핍박의 괴로움을 받을 까닭이 없고,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있으리라. 그러나 눈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핍박의 괴로움을 받고,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다. 귀, 코, 혀, 몸, 의지 또한 그와 같다”(상윳따 니까야 권1)

 

④ 본체는 자기 원인을 지닌다.

본체는 ‘결과’가 ‘원인’을 품고 있다. 어떤 원인적인 존재가 어떤 조건을 만나 어떤 결과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가 동일자로, 다시 말하면 결과 속에 원인이 이미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神)ㆍ창조주ㆍ절대자는 무엇이 어떤 조건에 의해서 신(神)ㆍ창조주ㆍ절대자는 스스로 처음부터 신(神)ㆍ창조주ㆍ절대자이었다. 그래서 본체이다.

 

불교에서는 그런 유일하고, 고정불변하여 영원하며 자기 스스로를 주재하며, 자기 원인을 지닌 동일자로서 본체라 할 만 한 존재는 이 우주에 성립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다만 형이상학적인 개념적인 존재일 뿐이라고 하면서 실재하는 실체로서의 본체를 부정한다.

 

2) 불교는 ‘정의(情意)ㆍ믿음’을 절대로 하는 종교가 아니라 ‘앎’, 즉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종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종교를 믿는다.’고 말한다. 종교는 신(神)ㆍ창조주ㆍ절대자를 ‘믿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불교는 ‘믿음’보다는 문제에 대한 ‘앎(이해)’을 주창한다. 문제의 사실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면 그에 답을 얻어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어 자연히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정법(正法)이 있어 정법에 의하여 나는 깨달았다(이해했다, 알았다). 이 법, 진리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겠다”

 

따라서 불교는 붓다를 믿는 그 자체를 지향하는 종교가 아니라, 붓다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이다.

 

3) 불교는 모든 존재들은 “원인과 결과”라는 법칙 속에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신ㆍ절대자ㆍ창조자가 있다면 그가 모든 존재와 법칙을 만든 것이 될 것이다. 타종교 일반에서는 이른바 영원한 실체(형이상학적 본체)라는 것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다분히 자기 충족적이고, 자기(결과)에 선행하는 원인이 없으며, 자신의 의지에 따른 행위로 그 존재들을 창조한다고 한다. 불교는 이러한 생각을 반박한다.

 

창조자라면 당연히 전능해야 한다. 그런데 창조자가 창조할 것을 ‘결심’하지 않는다면 그는 전능함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창조는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졌던 셈이 되기 때문이다. 또 그가 자기 의지에 따라 창조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그는 전능하지 않은 셈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에 의해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창조자는 영원한 실체일 수 있을까? 창조하기 전과 창조하고 난 후의 그의 존재는 서로 다르다. 실제로 그는 ‘창조했던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우주 전체를 창조한다는 것은 곧 필연적으로 우주의 모든 원인들이 그의 내면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인과의 법칙의 기초 가운데 하나인 업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위한 모든 원인과 조건이 결합되지 않으면 그 사건은 일어날 수 없으며, 그것들이 결합되면 그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곧 창조자가 결코 창조할 수 없거나 혹은 끊임없이 창조해야만 한다는 의미한다. 

 

실제로, 모든 존재는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원인들의 의존적인 관계에 의해 결과적인 존재가 발생한다. 그러한 조건이 없으면 생성시키려고 해도 생성되지 않으며, 어떤 조건이 존재하면 소멸시키려고 해도 소멸되어지지 않는다. 


4) 불교는 신, 절대자, 초월자와 같은 계시주의(啓示主義), 권위주의(權威主義)의 입장을 부정하므로 하향식이 아니라, 인간이 주체이므로 인간 주변의 행복을 장애하는 요소가 무엇인가를 회의(懷疑)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상향식 종교이다.

 

5) 신ㆍ절대자의 종교에서는 기도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궁극의 방법이 되나 불교는 그것을 부정하고 자신이 깨달음으로 가는 종교이므로 수행이 궁극을 향한 방법이 된다.

 

6) 인간의 문제를 구원ㆍ구제해주는 절대자를 부정하고, 자신의 문제를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해결하는 주체 중심의 자력종교(自力宗敎)이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자신을 피난처로 삼고, 법을 피난처로 삼아라”라고 말씀하셨다.

 

7) 불교의 과제로,

 

① 삶을 고(苦)로 보았다. 

고(苦)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하면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가를 문제 삼는 종교이다. 중생의 고(苦)가 다 없어질 때 불교의 존재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 바램이다. 

 

② 물론 악(惡)을 그치고, 선(善)을 권장하기는 하지만, 궁극의 목표는 고(苦)에서 완전히 벗어남이다.

 

③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불행과 운명을 결정하는가? 

그것 또한 자기 자신임을 불교는 주장한다. 그러니 자신의 문제는 자기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1.2. 믿음과 앎(지혜, 깨달음)

 

   앞서 신(神)ㆍ절대자ㆍ창조자가 있다면 그가 모든 존재와 법칙을 만든 것이 되겠지만 신(神)ㆍ절대자ㆍ창조자를 믿는 자들이 종교를 정의함에 있어서 종교란 초월적인 대상을 믿고, 신뢰하여 외경하고 숭배하고, 축복하고 귀의하는 의식, 행위, 수행으로 보았다. 여기서 믿고 신뢰한다는 구절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너는 무슨 종교를 믿느냐?”라고 표현한다.

 

인간의 의식에는 이지(理智), 감정(感情), 의지(意志)의 세 가지 작용이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감정, 정서, 감성을 중요시한다. 바로 이 감정, 감성을 대표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이 깊어지면 신념(信念)이 되고, 그것이 무지에 갇히면 마침내는 고정관념(固定觀念)이 되어 절대화된다. 우리는 잘못된 믿음을 미신(迷信), 사언(邪信)이라고 한다. 믿음 나아가서 신념은 그 자체가 진리가 결코 아니다. 믿음이 명백하게 진실로 확인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이제 믿음이라 불리지 않고 ‘앎’이라 일컫는다.

 

우리는 믿음에서 앎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음의 두 문장을 비교해 보자.

갑 : 나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을 : 나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다.

 

‘사람이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믿기보다는 ‘알고 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현대인들은 고대인들이 외경하였던 천둥현상을 앎의 빛 안으로 드러내었고, 고대인들의 추리와 상상으로만 접근했던 수많은 것들을 물리, 화학, 등으로 법칙화 하면서 그것의 실상들을 밝혀내었다. 그러고 보면 인류의 문명사란 결국 믿음의 영역으로부터 점차 앎의 영역으로 확장해 온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믿음의 길은 비과학 혹은 과학이 아직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만 힘을 쓸 수 있는 길이며, 앎의 길은 과학의 길, 이성, 이지(理智)의 길이다. 이렇게 보면 믿음보다는 앎이 더 명백하게 진리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불교는 감성보다는 냉철한 이지(理智)가 요구된다. 이것이 “앎”이다. 물론 불교에서도 믿음 즉 신심은 결정심(決定心)이라고 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비중의 위치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믿음인 신(信)에서 출발하여, 신(信) - 해(解) - 행(行) - 증(證)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믿음에서 점점 의심이 없어지면서 앎의 과정을 거쳐 깨달음을 통하여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앎, 즉 지혜에는 네 가지가 있다.

(1) 문혜(聞慧)

다른 이로부터 들어서 아는 지혜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붓다의 말씀인 경전을 들어서 개념적으로 이해하여 아는 것을 의미한다. 해(解)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것은 개념적 지혜(이해)이다.

(2) 사혜(思慧)

스스로 사고하고, 유추해서 아는 지혜를 말한다. 문혜(聞慧)를 바탕으로 사색, 사고, 추리, 유추로서 생겨나는 지혜이다. 해(解)가 심화된 것이다. 이것 또한 개념적 지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겠다.

 

(3) 수혜(修慧)

이는 스스로 실천적으로 닦아서 아는 지혜를 말한다. 몸과 마음으로 직접 경험을 통하여 실천 수행의 단계에서 얻어지는 지혜이다. 

 

(4) 증혜(證慧)

실천적으로 깨달은 지혜를 말한다. 수행이 완성되었을 때 일어나며, 이것의 다른 표현이 Paññā(般若)라고 하며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기도 하다.

 

이 네 가지 앎이 다 앎이지만 뒤의 것이 앞의 것 보다 의심이 보다 더 없어진 심원의 확신으로 총체적인 지혜에 가깝다. 불교는 그것을 진리라고 한다. 

 

「Pali Nikaya 칼라마 숫따」에

“칼라마 사람들이여! 거듭 들어서 얻어진 지식이라 해서, 전통이 그러하다고 해서, 소문이 그러하다고 해서, 경전에 그렇게 씌여졌다고 해서, 그럴싸한 추리에 의한 것이라 해서, 곰곰이 궁리해 낸 견해와 그것에 대해 갖게 되는 편견 때문에, 다른 사람의 그럴듯한 능력 때문에 ‘이 분은 우리의 스승이다’라고 하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 말라”고 세존은 말씀하신다. 

 

그러면 이렇게 의심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 세월에 어떻게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다시 같은 경전에

“칼라마 사람들이여! ‘스스로 이것들은 좋은 것이고, 비난받지 않을 것이고, 이것들은 지혜로운 이에 의해 칭찬받을 일이고, 이것들을 행하면 이롭고 행복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대 칼라마 사람들이여! 그대로 받들어 살도록 해라”고 설법하셨다.

 

 

2. 이 시점에서 왜 초기불교인가?

 

   오늘날 우리가 불교를 칭하는 말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대승불교, 소승불교, 남방불교, 북방불교, 상좌부불교, 티벳불교 등이 있다. 또한 북방 대승불교권이 있는 우리는 한국불교를 ‘통불교’라고 하며서 한국의 대승불교를 암암리에 은근히 최상승 불교라고 자부해왔었다. 과연 그러할까? 그것의 진의를 따지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날 한국불교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일단은 인정하고 그러한 문제를 뛰어넘어 불교에서 삶의 진실과 가치와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초기불교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왜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초기불교를 붙잡아야 하는가?

 

첫째 : 불교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는 불교의 시작점이다. 모든 나무에 뿌리가 있듯이 모든 존재에는 존재함의 핵심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뿌리라 일컫는다. 불교 2600년의 전개에도 그 뿌리가 있다. 뿌리를 모르는 역사는 이미 역사의 중요성을 아는 이 시대에서 결국은 외면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삶, 그 자체이다. 이론은 그 자체로 삶이 될 수는 없으나 그것의 응용으로 삶을 현실적으로 변화시킨다. 뿌리를 알면 바람직한 응용의 목표와 방식은 자연스럽게 찾아질 것이다. 

 

둘째 : 초기불교는 불교에 있어 판단의 기준이다.

불교는 삶에 있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런데 불교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믿음’보다는 존재의 실상에 대한 ‘앎(이해)’을 주장한다. ‘앎(이해)’이 찾아들면 극복은 자연스럽게 찾아든다는 것이다. 그 ‘앎’이란 다름 아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상ㆍ고ㆍ무아이며, 무아 즉 실체가 없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가 연기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앎’이다. 불교는 이 ‘앎’의 내용이 진리이며, 이 진리를 완전하게 깨달으면 그것을 열반이라고 하는데, 이의 성취가 곧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한 벗어남인 해탈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불교는 시대를 흘러오면서 불교라는 이름을 지닌 채 실제로는 변질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한국불교는 조선조 500년과 근대와 현대의 격동기를 겪으면서 불교의 근본적인 본질에서 너무나 멀어진 양상을 지니고 있는 면도 부정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불교이고 무엇이 불교가 아니냐는 판단을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 기준은 불교의 뿌리인 초기불교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서 어디까지가 초기불교에 해당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한 답은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은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전까지의 불교로 통칭하고자 한다.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논자들은 부파불교 시대의 불교도 초기불교의 범주에 넣어도 좋은가 하는 질문을 해 올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간단히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파불교의 세세한 차별성은 여기서의 초기불교 통론에서는 그 자세한 부파불교 불교철학사 내지 교단사의 자세한 부문은 일단 배재할 것이고 주요 부문은 다소 언급하려 한다.

 

셋째 : 과학적 사고와 융화될 수 있는 해석적 방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사상과 가치를 받치고 있는 것은 과학이다. 과학은 초월성과 신비성을 최대한 배재하고 분석적 방법으로 존재의 본질을 규명한다. 따라서 과학적 사고라 함은 분석성, 합리성, 논리성, 체계성을 지닌 사고를 말한다고 할 수 있겠다. 붓다의 초기불교의 교학은 존재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나’와 ‘대상(세상)’을 5온ㆍ12처ㆍ18계ㆍ22근ㆍ4제ㆍ12연기로 분석ㆍ분별ㆍ해체하여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다. 또한 초기불교는 37보리분법 이라는 수행의 실천으로 개념적 이해를 실제로 확인 이해하며 마지막으로 자비행으로 삶을 실천함으로써 삶의 갈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대승불교 시대에 와서 존재의 비실체성을 드러내는 방법론으로 언어철학적인 방법으로 중론, 심리학적 방법으로 유식철학이라는 방법론이 대두되었지만, 고따마 붓다께서는 해체・분석이라는 과학적 방법으로 실체론을 부정하였다. 따라서 초기불교는 현대의 과학적 사고방식과 매우 조화로운 방법론으로 보편 교육을 받은 대중과 지식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넷째 : 초기불교는 가장 오래된 경전들과 그것들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는 주석서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내용을 신빙성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방법 중에서 신뢰할 만한 것은 문헌을 통한 이해일 것이다. 초기불전은 빠알리어로 쓰여진 가장 이른 연대의 경전이 완벽하게 남아 있으며 또한 그에 대한 주석서는 사리뿟따 마하테라 등 붓다의 직계제자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므로 비교적 우리에게 매우 신뢰를 준다.

또한 결집이라는 양식을 통해 불멸 후 인증된 초기경전의 내용을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결집이라는 형식으로 경전의 내용을 확인해 왔기 때문에 검증적인 측면에서 신빙성을 지니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문으로 번역되거나 만들어진 삼장은 결국 2차 자료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승불교도 인도의 힌두 종교 언어인 산스끄리뜨어로 기록되어 전승되어 왔으므로 역시 2차 자료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되었고 고따마 붓다는 빠알리어 혹은 이에 가장 근접한 언어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빠알리어로 전승된 초기불교는 불교에 대한 자의적 해석에서 탈피하여 불교교리에 대한 곡해를 제거하여 준다.

 

다섯째 : 초기불교의 이해는 진정한 우리의 자주 불교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붓다의 원음을 통해서 인도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변형이 불가피했던 중국불교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한국불교의 자존심이라 할 만한 원효 스님 등이 추구했던 자주불교의 전통을 오늘에 구현할 수 있는 계기도 초기불교를 통하여 발견하여야 하고 또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초기불교야말로 한국의 자주불교를 구현하는 최상의 방법론이다.

 

여섯째 : 초기불교는 타종교에 비해 위축되고 있는 한국불교가 딛고 일어서야 할 발판이기 때문이다. 

한국불교는 줄곧 대승불교와 선수행의 종주국임을 주창하여 왔다. 초기불교는 불교의 뿌리로서 대승불교를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초기불교는 후대불교의 성립을 가능하게 해줄 튼튼한 뿌리 역할을 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한국불교의 전통의 진면목을 교학적인 측면에서 초기불교로의 환원에 있음을 증명해내고, 수행의 방법의 근원 또한 초기불교와 그 뿌리가 닿아 있음을 발견해 내어 현대 삶의 문제점을 과학적인 사고로 접근할 때, 현대불교는 현대인들로부터 각광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경제, 정치, 철학, 문화, 철학, 의학, 종교, 과학 등 인간의 모든 행위는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의 체계이다. 불교 또한 그것과 다르지 않아 행복을 추구한다. 초기불전에서 붓다께서는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적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봉사를 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붓다는 강조하셨다. 그것이 곧 보시(dana)와 지계(sīla)이다. 나와 더불어 사는 이웃에 보상심리 없는 봉사를 하고, 상가 혹은 어려운 이들에게 보시하며, 도덕적으로 건전한 삶을 살면, 원인과 결과라는 존재의 법칙에 따라 금생에도 행복하고 내생에도 행복하게 태어나게 된다고 초기불교는 말하고 있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세 번째 행복은 궁극적인 행복이며 이것은 열반이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깨달음, 해탈, 열반, 성불은 세상의 어떤 가치체계나 신념체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불교만이 제시하는 고귀한 가르침이다.

 

초기불교는 행복과 열반을 그리고 더불어 원만하게 사는 삶을 이 생의 목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출처: https://cafe.naver.com/buddhayana1/2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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