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하고 사려 깊은 사람은 두 가지 형태의 언어에 모두 익숙해 있다.
일상인에 의해 보여진 의미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의미 등, 다양한 형태의 의미에 능통한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다.
부처님은 청중의 이해능력에 따라서 각각의 가르침의 차원을 달리하여 초세간적인 길과 세간적인 길을 가르쳤는데, 어느 길이든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도록 가르쳤다.
현명한 사람은 세간적인 길을 모르고 초세간적인 길만 아는 자가 아니다.
만약 초세간적인 길만 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아집에 얽매여 아집에 집착해 있는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모든 관념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그 뒤에 감추어진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통찰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보의 참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이러한 여러 가지 의미를 명확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부처님은 역사적으로 2천 5백 년 전 인도 북부 룸비니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난 뼈와 살을 지닌 인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살필 때 부처는 죽은 사람이므로 귀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그분을 따르는 어느 누구의 목표(그것이 천상세상이든 기도 성취이든)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어떠한 개인적인 보장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불교의식을 행하는 데에서 중심에 놓이는 것은 변함없이 불상인데, 불자는 주조물인 모형으로서의 불상이 아닌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으로서의 그분 앞에 나아가 꽃과 향을 올리는 것이며, 이 법을 전하는 감사의 표시로 절에 가는 것이며, 시들어 가는 꽃의 무상함을 보며 부처님의 완전함을 생각한다.
우리는 꽃을 불상 앞에 바치면서 다음과 같이 읊는다.
여기 이 한아름의 꽃은 신선하며 향기롭고 아름답습니다.
이 향기로운 꽃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 전에 올리고 예경하나이다.
이 갖가지 색의 향기로운 꽃으로 부처님께 예경드리는 것은 이러한 꽃도 시들면 버려지듯이 우리들 육체도 시들어감을 되새김으로써 이런 공양 공덕으로 무상의 진리를 회상하며 수행하여 해탈로 나아가기를 바라나이다.
부처님에 대한 존경은 단지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정도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불제자가 된 사람은
법에 따라 살며
법에 따라 실천하며
여래(부처님 자신)를 존경한다.
법을 보는 사람은 여래를 본다.
여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본다.
법을 보지 못한 사람은, 여래의 옷을 붙잡고 있다 해도
여래를 보았다 말할 수 없다.
『장부 경전(長部經典)』
부처님은 그 진리, 법에 의해서 붓다가 되었으므로 그 진리, 법을 본 사람은 참된 부처님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육체나 만들어진 부처님의 형상만 본다면 결코 부처님을 보지 못하고 실제적인 이로움을 얻지 못할 것이다.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비난하기도 했고 심지어 육체적인 해코지까지 하려고도 했다. 사람들이 본 것은 다른 종교에서처럼 단지 물질적인 육체, 껍질로서의 부처님이었기에 의지처의 대상으로서 부처님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내가 선포하고 가르친 법과 율은 내가 죽어 없어져도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물질적인 육체로서의 부처님은 죽었지만 참된 부처님은 사라지거나 죽지 않고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다. 인간이 종속적인 피조물로 되어있는 종교와는 달리, 불자들은 그가 기꺼이 하려고만 한다면 그가 원하는 만큼 높이 그의 힘으로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이 맹목적인 믿음보다는 깨달음에서 생긴 신심, 확신이 앞서는 이유이다.
훌륭한 기록에 따르면 부처님의 명성이 다음과 같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분, 참된 진리에 이르신 분(여래)
모든 번뇌로부터 멀리 떠나신 분(응공, 아라한)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정변지)
지혜와 덕행을 함께 갖추신 분(명행족)
바른 진리의 길을 잘 보이신 분(선서)
세상의 모든 일을 잘 아시는 분(세간해)
위없는 큰 스승이신 분(무상사)
어리석은 자들을 으뜸되게 잘 다스리는 분(조어장부)
모든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신 분(천인사)
원만히 성취해 깨달으신 분(불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
- <조건 따라 생겨난 것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 中, 도성(뿐냐산또) 큰스님, 삼각형 프레스, 2003년.
현명하고 사려 깊은 사람은 두 가지 형태의 언어에 모두 익숙해 있다.
일상인에 의해 보여진 의미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의미 등, 다양한 형태의 의미에 능통한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다.
부처님은 청중의 이해능력에 따라서 각각의 가르침의 차원을 달리하여 초세간적인 길과 세간적인 길을 가르쳤는데, 어느 길이든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도록 가르쳤다.
현명한 사람은 세간적인 길을 모르고 초세간적인 길만 아는 자가 아니다.
만약 초세간적인 길만 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아집에 얽매여 아집에 집착해 있는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모든 관념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그 뒤에 감추어진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통찰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보의 참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이러한 여러 가지 의미를 명확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부처님은 역사적으로 2천 5백 년 전 인도 북부 룸비니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난 뼈와 살을 지닌 인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살필 때 부처는 죽은 사람이므로 귀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그분을 따르는 어느 누구의 목표(그것이 천상세상이든 기도 성취이든)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어떠한 개인적인 보장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불교의식을 행하는 데에서 중심에 놓이는 것은 변함없이 불상인데, 불자는 주조물인 모형으로서의 불상이 아닌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으로서의 그분 앞에 나아가 꽃과 향을 올리는 것이며, 이 법을 전하는 감사의 표시로 절에 가는 것이며, 시들어 가는 꽃의 무상함을 보며 부처님의 완전함을 생각한다.
우리는 꽃을 불상 앞에 바치면서 다음과 같이 읊는다.
여기 이 한아름의 꽃은 신선하며 향기롭고 아름답습니다.
이 향기로운 꽃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 전에 올리고 예경하나이다.
이 갖가지 색의 향기로운 꽃으로 부처님께 예경드리는 것은 이러한 꽃도 시들면 버려지듯이 우리들 육체도 시들어감을 되새김으로써 이런 공양 공덕으로 무상의 진리를 회상하며 수행하여 해탈로 나아가기를 바라나이다.
부처님에 대한 존경은 단지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정도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불제자가 된 사람은
법에 따라 살며
법에 따라 실천하며
여래(부처님 자신)를 존경한다.
법을 보는 사람은 여래를 본다.
여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본다.
법을 보지 못한 사람은, 여래의 옷을 붙잡고 있다 해도
여래를 보았다 말할 수 없다.
『장부 경전(長部經典)』
부처님은 그 진리, 법에 의해서 붓다가 되었으므로 그 진리, 법을 본 사람은 참된 부처님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육체나 만들어진 부처님의 형상만 본다면 결코 부처님을 보지 못하고 실제적인 이로움을 얻지 못할 것이다.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비난하기도 했고 심지어 육체적인 해코지까지 하려고도 했다. 사람들이 본 것은 다른 종교에서처럼 단지 물질적인 육체, 껍질로서의 부처님이었기에 의지처의 대상으로서 부처님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내가 선포하고 가르친 법과 율은 내가 죽어 없어져도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물질적인 육체로서의 부처님은 죽었지만 참된 부처님은 사라지거나 죽지 않고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다. 인간이 종속적인 피조물로 되어있는 종교와는 달리, 불자들은 그가 기꺼이 하려고만 한다면 그가 원하는 만큼 높이 그의 힘으로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이 맹목적인 믿음보다는 깨달음에서 생긴 신심, 확신이 앞서는 이유이다.
훌륭한 기록에 따르면 부처님의 명성이 다음과 같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분, 참된 진리에 이르신 분(여래)
모든 번뇌로부터 멀리 떠나신 분(응공, 아라한)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정변지)
지혜와 덕행을 함께 갖추신 분(명행족)
바른 진리의 길을 잘 보이신 분(선서)
세상의 모든 일을 잘 아시는 분(세간해)
위없는 큰 스승이신 분(무상사)
어리석은 자들을 으뜸되게 잘 다스리는 분(조어장부)
모든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신 분(천인사)
원만히 성취해 깨달으신 분(불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
- <조건 따라 생겨난 것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 中, 도성(뿐냐산또) 큰스님, 삼각형 프레스,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