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마(sīmā)란 무엇인가? (20121220)
1. 시마의 유래
부처님이 성도한 후 6개월 사이에 비구상가의 수가 1천명 이상이나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많아진 상가의 승려들에게 「항상 비구들은 화합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상가깜마를 행할 때에는 제자들 전원의 몸과 마음에 의한 화합이 필요하고, 「승려 중에서 혼자일지라도 화합하지 않으면 이 상가깜마는 성립하지 않는다.」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성도 초기에는 부처님 제자들의 수가 그만큼 많지는 않았고, 상가의 상가깜마도 많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상가깜마가 있을 때라도 제자들 전원이 화합하는 것이 용이했습니다. 그래서 시마(sīmā, 결계)는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승려의 수가 증가하는 것에 따라, 부처님의 거처로부터 멀어져 먼 곳까지 가서 머무는 제자들도 많아졌습니다. 광대한 인도의 여러 지방으로 따로따로 나뉘어 수행하거나 포교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비구들은 마가다국으로, 다른 비구들은 꼬살라국으로, 혹은 웨살리국으로 유행하다가 머물게 됨으로써 따로따로 떨어져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또한 상가 내에서의 의례, 즉 상가깜마(saṅghakamma, 僧家喝磨)도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인도 전 국토에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비구들을 상가깜마를 할 때에 전원 한 장소에 화합하기 위해 모으는 것은 곤란해졌습니다. 그것을 비구들이 부처님께 보고했습니다.
부처님은 그렇다면 「각각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경계 내에 있는 전원의 비구들의 몸과 마음에 의한 화합이 있으면, 어떠한 상가깜마라도 행할 수가 있고 그 상가깜마는 성립한다.」라고 허가하셨습니다.
이제 인도 전 국토에 따로따로 떨어져 살고 있는 비구 전원을 모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자신이 있는 마을의 경계 내에 있는 비구들을 모아 용이하게 상가깜마를 행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시대에도 안거(vassa)가 되면 출가 비구의 수가 평상시의 생활할 때보다 훨씬 많아졌습니다. 마을의 경계가 수km정도도 있지만, 수십 혹은 수백km의 넓고 큰 경계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넓고 비구 수도 많은 경계 내에서는 상가깜마를 할 때에 비구 전원을 모으기 위한 노력도 많아졌습니다. 또한 한 달에 2번 행하는 포살(uposatha)일에 출석할 수 없는 비구들의 위임을 받아야만 하기에, 상가깜마하는 도중에 다른 경계로부터 다른 비구가 그 경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상가깜마를 멈추지 않으면 안 되는 등 다양한 일이 일어나서 상가깜마를 하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러한 상가 비구들의 불편함을 이해한 부처님은 자신의 경계 내에 장소를 결정해 그 자리에 「시마(sīmā, 계단, 결계)」를 만들도록 허가했습니다. 그래서 상가깜마를 행할 때는 그 시마 내에 들어가, 시마 내의 비구의 화합이 있으면 그 상가깜마는 성립하게 됩니다.
그 시마에 들어가지 않는 비구의 화합을 위해 다른 비구들이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고 붙잡혀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시마를 정하고 나서 인공 시마라는 형식도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인공 시마도, 자연 시마도 모두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인공 시마는 자연 시마 내에 하나의 지역을 한정해서 설정하는 셈입니다. 큰 지역으로부터 작은 구역으로 한정해 설정하고, 큰 영역으로부터 작은 영역으로 축소했기 때문에 불교 상가깜마를 하기 쉬워졌습니다.
더불어 이와 같이 장소를 좁게 한정했으므로 화합하기 쉬워졌습니다. 화합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시마의 설정 허가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즉, (1) 지구상의 출가 비구 전원의 몸과 마음에 의한 화합.
(2) 마을의 경계 내에 있어서의 출가 비구 전원의 몸과 마음에 의한 화합.
(3) 정해진 장소 내에 있어서의 출가 비구 전원의 몸과 마음에 의한 화합으로 바뀌어 나간 것입니다.
2. 시마의 의미
불교에서 상가의 존재와 그 연속을 위한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는 단일 지역의 모든 출가자들이 화합된 상가(samagga saṅgha)로서 모임을 갖는 상가깜마를 위한 장소에 시마(sīmā, 경계)가 설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빨리어 시마(sīmā)는 계단(戒壇), 결계(結界), 경계(境界)라는 의미입니다. 경계 구역 안에서 출가 비구들의 계율에 관련되는 의식이 거행되므로 위나야 시마(vinaya sīmā)라고도 합니다. 출가 비구들은 계율을 청정히 하기 위해 한 달에 2번 경계 안에 있는 결계당(sīmāgeha)에서 비구 전원이 모여 계본을 독송하는 상가깜마인 uposatha(포살)를 실행합니다. 이 포살은 반드시 계단 안에서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 우뽀사타 시마(uposatha sīmā)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uposatha라는 것은 부처님의 시대에는 수행의 날을 의미했습니다. 불교 이외의 종교에서도 한 달에 네 번(초생달, 만월, 상현의 반달, 하현의 반달) 경제활동을 멈추고 자신의 신앙에 적절한 명상을 한 것 같습니다.
이를 본받아 불교의 재가자도 한 달에 네 번, 세속적인 생활을 일단 멈추고 사원에서 수행하며 하루를 보내었습니다. 출가자는 일평생 수행하여야 하므로 수행하는 날을 특별히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대신 한 달에 2번 계율을 확립하는 포살행사가 부처님에 의해 정해졌습니다. 계단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의식 중에서 이 포살행사는 보름마다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계단이라는 것은 다섯 명 이상의 비구들이 모여 앉을 수 있는 정도의 면적을 가진 땅입니다. 그러나 다섯 명이 빠듯하게 앉을 수 있는 좁은 장소는 계단으로서 인정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비구 계율 중에서 비교적 중죄인 13 승잔죄(saṅghādisesa)의 계율을 파하였을 경우에 상가는 그 파계 비구에 대하서 동료 비구들로부터 떨어져 별주 할 것을 명령합니다.
또한 별주가 끝나고 나면 별주를 해제하고 상가의 동료로 맞이하기 위한 상가깜마를 실행합니다. 이 두 가지 상가깜마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비구 20명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계단의 최소한의 크기는 25명의 비구들이 앉을 수 있는 장소가 됩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앉는 것이 아니라 팔을 뻗으면 다른 비구에게 손이 닿을 정도의 간격이 있도록 앉는 것이므로 그다지 큰 땅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보통 원룸 정도의 크기인 30m², 즉 9평 정도의 면적이면 충분합니다.
3. 시마의 조건
부처님이 성도한 후 초기 시대에는 상가가 땅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출가한 비구들도 재산을 가지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땅을 소유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의 인도에서는 성자들이나 수행자들이 모이는 장소가 도처에 있었습니다. 재산가들과 국왕은 자신이 소유한 땅이나 공원 등에 수행자들이 그 땅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숲이나 공한지 등의 국유지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장소에 비구들은 자유롭게 표시를 하여, 자신들이 상가깜마를 실행하는 결계(계단)로서 인정한 것입니다.
비록 계단 인정이 이루어져서 상가깜마를 행하였다고 해도, 그 땅은 상가에서 소유한 재산은 아니기 때문에, 계단에서의 행사가 끝나면 비구들은 자신들의 거주처로 돌아갑니다. 2주일이 지나면 또 결계의 장소에 모입니다.
그 사이에 계단으로 인정된 땅은 원래의 용도에 맞게 자유롭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어떤 공원에 단체로 놀러 가서 한쪽에 시트를 깔아놓고 즐겁게 놀다가, 다 놀고 나면 그 시트를 접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놀고 있는 동안은 허락이 없으면 그 시트 안으로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가 널리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불교도가 되었고, 부처님과 비구들을 위하여 땅을 보시하거나 사원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그 경우는 재가자로부터 보시된 땅이나 건물은 비구들의 개인 재산이 아니라 상가라는 출가 조직 전체의 공유재산이 됩니다. 그러한 땅에 계단을 건립하여 인정한 후, 연중 상가깜마를 실행할 수 있도록 상설 건물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현재 스리랑카, 태국, 버마 등의 전통적인 큰 사원에는 반드시 경내의 한쪽에 결계당을 건립하여 계단으로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계단으로 인정되는 장소는 비구들이 모이기 쉬운 장소가 아니면 곤란합니다. 즉, 교통이 편한 곳이어야 합니다.
상가나 유흥장, 도박장이 있는 곳은 계단으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비구들의 마음이 더러워질 우려가 있고, 그런 장소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허가를 해 준다면 재가자들 소유의 땅이라도 좋습니다. 그러나 소유자가 없어지거나 바뀌어 상속한 사람들이 비구들의 출입을 금한다면 그 계단은 사용할 수 없게 될 수 있습니다.
계단이 된 땅은 월 2회의 포살법요식 등 상가의 행사를 실행할 때는 다른 건물·수목 등과 접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계단의 땅에 법당과 같은 건물이 있어 그 안에서 행사를 실행할 때도 그 건물을 다른 것과 접촉하지 않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전선, 전화선 등이 있으면 일시적으로 제거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용도의 빌딩과 같은 높은 장소는 원칙적으로 계단으로서 인정할 수 없습니다.
현대적으로 보면 까다롭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부처님의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결정은 완고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전화·전기·수도·공동숙소 등의 문화적인 시설은 경내의 다른 곳에서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계당에는 이런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만약 최근의 문화에 맞게 계율을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정자각자인 붓다의 지혜보다 욕구와 경쟁에 빠져 있는 현대인의 생각을 소중히 하고 우선해야 할 일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부처님의 시대에는 계율의 불편한 사항이 나타났을 경우는 그것을 부처님께 보고합니다. 부처님이 그에 대한 해결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 계율을 바꾸는 권한은 부처님 밖에 없다고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불편한 사항도 있지만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존중하기에 결코 계율이나 규칙 등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완고한 태도이지만 보수적인 태도는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해탈에의 길을 다 아시고, 범부들이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행하지 말아야 하는지 명확하게 가르쳤습니다. 해탈을 목적으로 출가했지만,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을 때는 범부인 것입니다. 수행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계율을 개혁하거나, 새로운 수행 방법을 제안하거나 할 능력도 자격도 없습니다. 공부하려고 입학한 학생이 스스로 교과서를 쓰거나 교육 방법을 정하거나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마음대로 바꾸면 얼마 못 가서 원래의 부처님 가르침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그렇지 않다」라고 부정하는 것은 인간이든 신들이든 범천이든 다른 어떠한 생명이라도 할 수 없습니다. 이 가르침을 뒤집을 수 있던 존재는 역사상 한 분도 없습니다. 테라와다의 출가자들도 계율과 규칙을 그대로 현대에서 행할 때에 여러 가지 불편한 경우가 있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지혜를 존중하기에 계율과 규칙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불완전한 범부들은 붓다에 의해 말해진 계율과 규칙을 그대로 완벽하게 지키는 것은 부처님 살아계시던 시대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완벽하게 지키려는 마음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중한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사소한 계율을 범했을 때는 한 달에 2번 계단이라고 하는 결계당에 모여 계율을 회상하고 참회하는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결정하셨습니다. 한 달에 2번의 포살 행사 없이는 상가가 계속하여 존속할 수는 없습니다.
4. 왜 시마가 필요한가?
출가 비구는 속세를 떠난 존재입니다. 그러나 출가했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키고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구는 상가라는 조직의 일원입니다. 상가란 비구들 모두를 나타내는 고유명사입니다. 계율적으로는 비구가 네 명 이상 모이면 상가(saṅgha)인 것입니다. 세 명만 모였다면 가나(gaṇa, 모임, 무리)라고 하고, 두 명 이하는 개인입니다.
출가 비구들의 생활 습관의 관리, 사원 재산의 관리감독, 비구들 간에 혹은 비구와 재가자 간에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에 조정하는 것, 비구들에게 계율에 대한 의문이 생겼을 경우의 해결, 개개인의 계율을 바르게 세우는 것, 재가자를 비구로 출가시키는 것, 출가자로서 어울리지 않는 삶을 하는 비구들을 추방하거나 훈계하는 것 등의 다양한 의무를 상가가 실행합니다. 개개인의 비구에 대해서 상가는 절대적인 권한·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비구 개개인도 상가의 일원인 것입니다.
상가에서 결정되는 모든 것은 만장일치로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상가는 이상적인 민주주의의 조직인 것입니다.
재가 세속생활과 멀어진 집단이고, 욕망 없고 집착 없는 조직이므로, 상가의 의식, 의무, 의례 등은 상가 동료들의 참석만으로 실행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타종교의 사람이나 재가자는 상가의 깜마에 참가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국회에서 국회의원들만의 운영 위원회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론 배타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배타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느 비구가 밤에 식사를 했다고 합시다. 상가는 계율위반으로 그것을 경고합니다. 그런데 그 회의에 일반인도 참석해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밤에 밥을 먹고 싶어서 먹은 것이 뭐 그렇게 나쁩니까? 괜히 사람을 괴롭히지 말고 자비를 실천하세요!」라고 재가자가 말한다면 상가는 참으로 곤란할 것입니다. 그것은 출가 비구의 계율이고, 결정된 사항이므로 지킬 수 없었던 사람은 참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저기로부터 반대 의견이 난무하면 만장일치로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또 범계한 비구도 자신에게 아군이 있다고 착각하여 오만하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라는 목표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어쩌면 다른 종교인들은 더 많은 문제를 만들어 상가를 곤란하게 할 우려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부처님도 「같은 가치관, 같은 목표를 가지고 걷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 사이좋고 평온하게 지낼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가는 모두 같은 가치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조직이므로, 그 조직의 속으로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5. 시마의 중요성
부처님에 의해 설해진 진리는 천인들과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명에 들어맞는 가르침으로서 무기를 가지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위협하지 않고, 철저한 자애에 기초를 두고서 2600년 동안 빛나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끊임없이 인류에게 평화로운 삶의 방법을 가르쳐 왔습니다.
이런 불교의 포교전도 속에서 출가자의 역할은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출가자가 없었다면 스리랑카와 태국, 중국과 한국에도 불교를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현대에는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서양에도 지식적으로는 불교가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시키고 서양 세계에 불교를 살린 것은 출가자들의 노력에 의한 결과인 것입니다. 과학이 발전해도, 미래에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도, 부처님에 의해 설해진 진리는 바뀌지 않고 어떤 시대의 사람에게도 마음의 평온함을 주는 것,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일을 불교에서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가자가 이 중대한 의무를 담당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재가자는 불교보다 먼저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 가족을 지키는 것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유가 있으면 불교도 가르칠지 모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출가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전하는 일을 평생 동안 하고 있습니다. 출가자가 있는 것은 불교가 살아 있다는 의미합니다. 불교가 살아 있는 것은 인류에게 평화와 평온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출가자의 생명은 상가에 의해 지켜지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의 출가자를 만드는 일도 상가 밖에 가능하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승복을 입는다고 출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계단은 출가자가 새롭게 태어나는 장소입니다. 계율을 자주 위반하게 되면 그 비구는 정신적으로 미약해집니다. 그것을 복구해서 건강을 되찾게 해 주는 장소도 계단이므로 비구들의 병원이기도 합니다. 출가 세계의 국회 의사당도 계단입니다.
작은 땅에 지나지 않는 계단이지만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살리고, 전하고, 유지하는 장소인 것입니다. 곧 「불교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6. 시마는 「공덕의 샘」
아소까 왕(기원 전 268~232년) 시대에 불교 전도사단은 9개의 나라들에 파견되었습니다. 스리랑카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불교가 전래되어 머지않아 계단(sīmā) 설정을 먼저 했습니다. 계단을 설정하는 것이 자신의 나라에 부처님의 교법이 뿌리내리게 된다고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뿌리 내리면 그 공덕에 의해 그 나라가 오랫동안 지켜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불안, 천재지변, 다른 나라의 침략, 타종교의 공격 등 여러 물결이 밀려왔지만, 아직까지 이런 나라들에서는 불교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도덕을 확립하게 되어 그 나라와 국민이 오랫동안 평화롭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의 법력은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 나라에 계단을 설정하게 되어 상가가 모여 그 일을 행할 때는 천상의 신들도 덕을 쌓기 위해서 강림하여 그 법요에 참가합니다. 그리고 비구들이 계속해서 그 장소에서 행사를 실행한다면 신들의 가호는 끊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계단설치를 위한 땅을 보시할 기회를 얻은 사람은 불교에서 말해지는 최고의 덕을 쌓을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 공덕은 친족과 인연 있는 분뿐만 아니라, 찬성하고 기뻐하는 분에게도 이 위없는 공덕이 전이되므로, 기대하지 않아도 재난과 만나는 일이 없고, 쇠약해지지 않는 번영을 누리며, 평화롭고 안온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사후 천상계에 태어나는 것도 확실합니다.
보시하는 것은 한 번의 행위이지만 그 장소에서 상가가 모든 행사를 계속해서 실천하므로 그때마다 보시자에게도 공덕이 회향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 계단이 있는 곳에 불교가 살아있는 한 공덕이 증가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제약으로 땅을 보시할 수가 없어서 땅을 빌려주어도 공덕은 똑같습니다.
상가에서 인정된 계단이 있는 나라는 적에게 공격받지 않습니다. 평화를 유지하고 국민은 번영합니다. 불교의 심장부를 만들게 되므로 계단이 있는 장소는 본격적인 성지가 됩니다.
한국 테라와다 불교(Theravada Buddhasasana in Korea)라는 이름은 독자적인 종교 법인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결코 기존의 대승 불교와 대립해서 활동할 목적이 아닙니다. 어떤 이름이 없으면 등록할 수 없는 것뿐입니다. 불교의 모든 종파의 가르침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각 종파의 가르침이 서로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불교로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곳의 가르침이 뛰어나다는 개인적인 생각은 피할 수 없겠지만, 사실을 조사하지도 않고 감정적으로 가지는 생각 자체는 부끄러워해야 할 사고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적으로 협력하며 서로의 장점을 배워 단점을 고치며 사는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야말로 가슴을 펴고 세계를 향해 「우리는 불교도이다」라고 자랑할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변함없이 완전인 좋은 사람도, 완전인 나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고·철학·삶의 방법을 가지고 있는 인간 조직도 있을 리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서로 협력하고, 서로 보충하고,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보편적인 진리를 설하셨습니다. 태양이 땅을 차별 없이 비추듯이, 붓다의 가르침은 모든 생명에게 살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테라와다 불교도의 특권도, 대승 불교 각기 종파의 특권도 아닙니다. 인도인들의 문화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특정한 민족에게만 우월권을 주는 가르침도 아닙니다. 진리·사실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류의 공유재산인 것입니다.
한국 테라와다 불교는 민족성, 시대의 흐름, 문화나 언어의 차이를 넘어 붓다 자신의 순수한 가르침을 모든 이들이 화합하며 배우고 실천해 보자는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나의 가르침을 믿어라」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각자의 문화가 있고 삶의 방법이 있습니다. 억지로 그것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들의 문화와 습관 등은 그대로 소중하게 지키고 다음 세대에도 전하면서도, 인간으로서 올바른 삶의 방법은 무엇인지, 선악의 판단은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생활하면 좋은 것인지, 어떤 인간이 되면 좋은 것인지, 잇달아 일어나는 나쁜 마음은 어떻게 해독하는지 라는 대답을 아주 간단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테라와다 불교는 한국 대승 불교의 승려, 단체, 종파들과 우호 관계를 가지고 함께 노력하며 현대 한국 사회에 정신적인 평온함을 가져다주는 일을 묵묵히 수행해 나갈 것입니다.
7. 한국 테라와다 불교에서 해야 할 일 중의 하나
이제는 붓다의 가르침의 논리성, 과학성에 감동과 놀라움을 느낀 분들이 많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붓다가 훌륭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낀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실천하고 수행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는 한국의 기존 불교에서 해답을 구하지 못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분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법을 제시하고, 실천을 통해 확실히 마음의 평온함을 체험할 수 있는 이 가르침을 한국에 뿌리내리게 하기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테라와다 교단으로 출가를 희망하는 분들도 서서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출가한다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제대로 갖추고 바르게 해야 합니다. 인정받은 계단에서, 화상(和尙)을 정한 후, 삼사칠증(三師七證)을 갖추고, 출가에 결격사유가 없어야 하며, 발우와 삼의를 수지하여서 출가해야 합니다. 출가 후에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율을 순수하게 지키며, 수행과 교학을 배우는 것이 출가자에게 요구되고, 그럴 때만이 불자들의 신뢰를 받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출가자라도 괴짜 취급을 할 뿐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출가자가 괴짜 취급당하는 것은 인류에게 있어서 불행한 일입니다. 따라서 계단이라고 하는 불교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장소를 상가에 의해 인정받는 것은 필수 조건입니다.
그러나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고민하고 고민 해봐도 당장 한국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큰돈이 드는 땅의 구입과 결계당을 건설할 정도의 재력이 없습니다. 테라와다 불자도 물론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수로 구성된 가난한 조직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만은 진심입니다. 억지로 보시를 받는 일도 붓다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다 매매할 걱정 없이 안전한 조계종 사찰인 부산 태종사에 태국 원로이신 아짠 통 시리망갈로 대장로 스님의 인도아래 붓다야나깔라 시마(BUDDHAYĀNAKĀLA SĪMĀ)라는 이름의 결계당을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상가의 스님들이 모여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지만, 태종사는 조계종의 사찰이기에 사찰의 행사로 인해 테라와다의 상가 스님들이 결계당을 자유롭게 이용하기에는 불편함도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에 한국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힘을 모아 테라와다 교단 소속의 경주 마하보디 선원과 하동 신월정사에 상가의 의결을 거쳐 결계당을 건립하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상가 공동체의 존재와 연속을 위한 중요한 조건들 중의 하나는 단일한 지역의 모든 인원들이 출가자의 여러 행위들을 위해 지정된 장소에서 화합된 상가(samagga saṅgha)로서 모여서 여러 가지를 규정짓는 계단(시마)의 설치입니다.
계단에서 실행하는 행위는 6종류가 있습니다.
1) 출가비구, 비구니들의 월 2회의 포살행위(uposatha).
2) 출가비구, 비구니로 출가를 서원한 사미, 사미니를 한 사람의 새로운 비구, 비구니로서 상가에 의해 인정하는 행위(upasamapadā).(이 경우에게만 지원자가 아직은 비구, 비구니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인들도 들어와 견학할 수가 있습니다)
3) 비구, 비구니가 만약 어떤 문제를 일으켜, 상가가 그 심판을 실행할 때의 재판소로서의 기능(saṅghakamma).
4) 3개월간의 우기안거를 종료하는 자자 행위(pavāraṇā).
5) 우기안거의 수행을 완료한 비구, 비구니에게 재가자가 가사를 보시하는 습관이 있으므로 그 가사를 한 사람의 비구 혹은 비구니에게 주는 행위가 매년 한 번 행해집니다(kaṭhina).
6) 이 세상의 테라와다 출가자와 관련된 새로운 결정 등은 상가의 결집에 의해 정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행사도 계단에서 행해집니다. 이러한 행사는 불교역사에서 6번 밖에 없었습니다(saṅgīti).
출처: https://cafe.naver.com/buddhayana1/1957
* 시마(sīmā)란 무엇인가? (20121220)
1. 시마의 유래
부처님이 성도한 후 6개월 사이에 비구상가의 수가 1천명 이상이나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많아진 상가의 승려들에게 「항상 비구들은 화합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상가깜마를 행할 때에는 제자들 전원의 몸과 마음에 의한 화합이 필요하고, 「승려 중에서 혼자일지라도 화합하지 않으면 이 상가깜마는 성립하지 않는다.」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성도 초기에는 부처님 제자들의 수가 그만큼 많지는 않았고, 상가의 상가깜마도 많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상가깜마가 있을 때라도 제자들 전원이 화합하는 것이 용이했습니다. 그래서 시마(sīmā, 결계)는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승려의 수가 증가하는 것에 따라, 부처님의 거처로부터 멀어져 먼 곳까지 가서 머무는 제자들도 많아졌습니다. 광대한 인도의 여러 지방으로 따로따로 나뉘어 수행하거나 포교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비구들은 마가다국으로, 다른 비구들은 꼬살라국으로, 혹은 웨살리국으로 유행하다가 머물게 됨으로써 따로따로 떨어져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또한 상가 내에서의 의례, 즉 상가깜마(saṅghakamma, 僧家喝磨)도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인도 전 국토에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비구들을 상가깜마를 할 때에 전원 한 장소에 화합하기 위해 모으는 것은 곤란해졌습니다. 그것을 비구들이 부처님께 보고했습니다.
부처님은 그렇다면 「각각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경계 내에 있는 전원의 비구들의 몸과 마음에 의한 화합이 있으면, 어떠한 상가깜마라도 행할 수가 있고 그 상가깜마는 성립한다.」라고 허가하셨습니다.
이제 인도 전 국토에 따로따로 떨어져 살고 있는 비구 전원을 모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자신이 있는 마을의 경계 내에 있는 비구들을 모아 용이하게 상가깜마를 행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시대에도 안거(vassa)가 되면 출가 비구의 수가 평상시의 생활할 때보다 훨씬 많아졌습니다. 마을의 경계가 수km정도도 있지만, 수십 혹은 수백km의 넓고 큰 경계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넓고 비구 수도 많은 경계 내에서는 상가깜마를 할 때에 비구 전원을 모으기 위한 노력도 많아졌습니다. 또한 한 달에 2번 행하는 포살(uposatha)일에 출석할 수 없는 비구들의 위임을 받아야만 하기에, 상가깜마하는 도중에 다른 경계로부터 다른 비구가 그 경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상가깜마를 멈추지 않으면 안 되는 등 다양한 일이 일어나서 상가깜마를 하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러한 상가 비구들의 불편함을 이해한 부처님은 자신의 경계 내에 장소를 결정해 그 자리에 「시마(sīmā, 계단, 결계)」를 만들도록 허가했습니다. 그래서 상가깜마를 행할 때는 그 시마 내에 들어가, 시마 내의 비구의 화합이 있으면 그 상가깜마는 성립하게 됩니다.
그 시마에 들어가지 않는 비구의 화합을 위해 다른 비구들이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고 붙잡혀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시마를 정하고 나서 인공 시마라는 형식도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인공 시마도, 자연 시마도 모두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인공 시마는 자연 시마 내에 하나의 지역을 한정해서 설정하는 셈입니다. 큰 지역으로부터 작은 구역으로 한정해 설정하고, 큰 영역으로부터 작은 영역으로 축소했기 때문에 불교 상가깜마를 하기 쉬워졌습니다.
더불어 이와 같이 장소를 좁게 한정했으므로 화합하기 쉬워졌습니다. 화합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시마의 설정 허가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즉, (1) 지구상의 출가 비구 전원의 몸과 마음에 의한 화합.
(2) 마을의 경계 내에 있어서의 출가 비구 전원의 몸과 마음에 의한 화합.
(3) 정해진 장소 내에 있어서의 출가 비구 전원의 몸과 마음에 의한 화합으로 바뀌어 나간 것입니다.
2. 시마의 의미
불교에서 상가의 존재와 그 연속을 위한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는 단일 지역의 모든 출가자들이 화합된 상가(samagga saṅgha)로서 모임을 갖는 상가깜마를 위한 장소에 시마(sīmā, 경계)가 설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빨리어 시마(sīmā)는 계단(戒壇), 결계(結界), 경계(境界)라는 의미입니다. 경계 구역 안에서 출가 비구들의 계율에 관련되는 의식이 거행되므로 위나야 시마(vinaya sīmā)라고도 합니다. 출가 비구들은 계율을 청정히 하기 위해 한 달에 2번 경계 안에 있는 결계당(sīmāgeha)에서 비구 전원이 모여 계본을 독송하는 상가깜마인 uposatha(포살)를 실행합니다. 이 포살은 반드시 계단 안에서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 우뽀사타 시마(uposatha sīmā)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uposatha라는 것은 부처님의 시대에는 수행의 날을 의미했습니다. 불교 이외의 종교에서도 한 달에 네 번(초생달, 만월, 상현의 반달, 하현의 반달) 경제활동을 멈추고 자신의 신앙에 적절한 명상을 한 것 같습니다.
이를 본받아 불교의 재가자도 한 달에 네 번, 세속적인 생활을 일단 멈추고 사원에서 수행하며 하루를 보내었습니다. 출가자는 일평생 수행하여야 하므로 수행하는 날을 특별히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대신 한 달에 2번 계율을 확립하는 포살행사가 부처님에 의해 정해졌습니다. 계단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의식 중에서 이 포살행사는 보름마다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계단이라는 것은 다섯 명 이상의 비구들이 모여 앉을 수 있는 정도의 면적을 가진 땅입니다. 그러나 다섯 명이 빠듯하게 앉을 수 있는 좁은 장소는 계단으로서 인정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비구 계율 중에서 비교적 중죄인 13 승잔죄(saṅghādisesa)의 계율을 파하였을 경우에 상가는 그 파계 비구에 대하서 동료 비구들로부터 떨어져 별주 할 것을 명령합니다.
또한 별주가 끝나고 나면 별주를 해제하고 상가의 동료로 맞이하기 위한 상가깜마를 실행합니다. 이 두 가지 상가깜마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비구 20명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계단의 최소한의 크기는 25명의 비구들이 앉을 수 있는 장소가 됩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앉는 것이 아니라 팔을 뻗으면 다른 비구에게 손이 닿을 정도의 간격이 있도록 앉는 것이므로 그다지 큰 땅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보통 원룸 정도의 크기인 30m², 즉 9평 정도의 면적이면 충분합니다.
3. 시마의 조건
부처님이 성도한 후 초기 시대에는 상가가 땅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출가한 비구들도 재산을 가지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땅을 소유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의 인도에서는 성자들이나 수행자들이 모이는 장소가 도처에 있었습니다. 재산가들과 국왕은 자신이 소유한 땅이나 공원 등에 수행자들이 그 땅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숲이나 공한지 등의 국유지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장소에 비구들은 자유롭게 표시를 하여, 자신들이 상가깜마를 실행하는 결계(계단)로서 인정한 것입니다.
비록 계단 인정이 이루어져서 상가깜마를 행하였다고 해도, 그 땅은 상가에서 소유한 재산은 아니기 때문에, 계단에서의 행사가 끝나면 비구들은 자신들의 거주처로 돌아갑니다. 2주일이 지나면 또 결계의 장소에 모입니다.
그 사이에 계단으로 인정된 땅은 원래의 용도에 맞게 자유롭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어떤 공원에 단체로 놀러 가서 한쪽에 시트를 깔아놓고 즐겁게 놀다가, 다 놀고 나면 그 시트를 접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놀고 있는 동안은 허락이 없으면 그 시트 안으로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가 널리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불교도가 되었고, 부처님과 비구들을 위하여 땅을 보시하거나 사원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그 경우는 재가자로부터 보시된 땅이나 건물은 비구들의 개인 재산이 아니라 상가라는 출가 조직 전체의 공유재산이 됩니다. 그러한 땅에 계단을 건립하여 인정한 후, 연중 상가깜마를 실행할 수 있도록 상설 건물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현재 스리랑카, 태국, 버마 등의 전통적인 큰 사원에는 반드시 경내의 한쪽에 결계당을 건립하여 계단으로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계단으로 인정되는 장소는 비구들이 모이기 쉬운 장소가 아니면 곤란합니다. 즉, 교통이 편한 곳이어야 합니다.
상가나 유흥장, 도박장이 있는 곳은 계단으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비구들의 마음이 더러워질 우려가 있고, 그런 장소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허가를 해 준다면 재가자들 소유의 땅이라도 좋습니다. 그러나 소유자가 없어지거나 바뀌어 상속한 사람들이 비구들의 출입을 금한다면 그 계단은 사용할 수 없게 될 수 있습니다.
계단이 된 땅은 월 2회의 포살법요식 등 상가의 행사를 실행할 때는 다른 건물·수목 등과 접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계단의 땅에 법당과 같은 건물이 있어 그 안에서 행사를 실행할 때도 그 건물을 다른 것과 접촉하지 않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전선, 전화선 등이 있으면 일시적으로 제거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용도의 빌딩과 같은 높은 장소는 원칙적으로 계단으로서 인정할 수 없습니다.
현대적으로 보면 까다롭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부처님의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결정은 완고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전화·전기·수도·공동숙소 등의 문화적인 시설은 경내의 다른 곳에서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계당에는 이런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만약 최근의 문화에 맞게 계율을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정자각자인 붓다의 지혜보다 욕구와 경쟁에 빠져 있는 현대인의 생각을 소중히 하고 우선해야 할 일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부처님의 시대에는 계율의 불편한 사항이 나타났을 경우는 그것을 부처님께 보고합니다. 부처님이 그에 대한 해결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 계율을 바꾸는 권한은 부처님 밖에 없다고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불편한 사항도 있지만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존중하기에 결코 계율이나 규칙 등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완고한 태도이지만 보수적인 태도는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해탈에의 길을 다 아시고, 범부들이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행하지 말아야 하는지 명확하게 가르쳤습니다. 해탈을 목적으로 출가했지만,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을 때는 범부인 것입니다. 수행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계율을 개혁하거나, 새로운 수행 방법을 제안하거나 할 능력도 자격도 없습니다. 공부하려고 입학한 학생이 스스로 교과서를 쓰거나 교육 방법을 정하거나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마음대로 바꾸면 얼마 못 가서 원래의 부처님 가르침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그렇지 않다」라고 부정하는 것은 인간이든 신들이든 범천이든 다른 어떠한 생명이라도 할 수 없습니다. 이 가르침을 뒤집을 수 있던 존재는 역사상 한 분도 없습니다. 테라와다의 출가자들도 계율과 규칙을 그대로 현대에서 행할 때에 여러 가지 불편한 경우가 있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지혜를 존중하기에 계율과 규칙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불완전한 범부들은 붓다에 의해 말해진 계율과 규칙을 그대로 완벽하게 지키는 것은 부처님 살아계시던 시대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완벽하게 지키려는 마음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중한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사소한 계율을 범했을 때는 한 달에 2번 계단이라고 하는 결계당에 모여 계율을 회상하고 참회하는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결정하셨습니다. 한 달에 2번의 포살 행사 없이는 상가가 계속하여 존속할 수는 없습니다.
4. 왜 시마가 필요한가?
출가 비구는 속세를 떠난 존재입니다. 그러나 출가했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키고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구는 상가라는 조직의 일원입니다. 상가란 비구들 모두를 나타내는 고유명사입니다. 계율적으로는 비구가 네 명 이상 모이면 상가(saṅgha)인 것입니다. 세 명만 모였다면 가나(gaṇa, 모임, 무리)라고 하고, 두 명 이하는 개인입니다.
출가 비구들의 생활 습관의 관리, 사원 재산의 관리감독, 비구들 간에 혹은 비구와 재가자 간에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에 조정하는 것, 비구들에게 계율에 대한 의문이 생겼을 경우의 해결, 개개인의 계율을 바르게 세우는 것, 재가자를 비구로 출가시키는 것, 출가자로서 어울리지 않는 삶을 하는 비구들을 추방하거나 훈계하는 것 등의 다양한 의무를 상가가 실행합니다. 개개인의 비구에 대해서 상가는 절대적인 권한·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비구 개개인도 상가의 일원인 것입니다.
상가에서 결정되는 모든 것은 만장일치로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상가는 이상적인 민주주의의 조직인 것입니다.
재가 세속생활과 멀어진 집단이고, 욕망 없고 집착 없는 조직이므로, 상가의 의식, 의무, 의례 등은 상가 동료들의 참석만으로 실행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타종교의 사람이나 재가자는 상가의 깜마에 참가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국회에서 국회의원들만의 운영 위원회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론 배타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배타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느 비구가 밤에 식사를 했다고 합시다. 상가는 계율위반으로 그것을 경고합니다. 그런데 그 회의에 일반인도 참석해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밤에 밥을 먹고 싶어서 먹은 것이 뭐 그렇게 나쁩니까? 괜히 사람을 괴롭히지 말고 자비를 실천하세요!」라고 재가자가 말한다면 상가는 참으로 곤란할 것입니다. 그것은 출가 비구의 계율이고, 결정된 사항이므로 지킬 수 없었던 사람은 참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저기로부터 반대 의견이 난무하면 만장일치로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또 범계한 비구도 자신에게 아군이 있다고 착각하여 오만하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라는 목표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어쩌면 다른 종교인들은 더 많은 문제를 만들어 상가를 곤란하게 할 우려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부처님도 「같은 가치관, 같은 목표를 가지고 걷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 사이좋고 평온하게 지낼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가는 모두 같은 가치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조직이므로, 그 조직의 속으로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5. 시마의 중요성
부처님에 의해 설해진 진리는 천인들과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명에 들어맞는 가르침으로서 무기를 가지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위협하지 않고, 철저한 자애에 기초를 두고서 2600년 동안 빛나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끊임없이 인류에게 평화로운 삶의 방법을 가르쳐 왔습니다.
이런 불교의 포교전도 속에서 출가자의 역할은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출가자가 없었다면 스리랑카와 태국, 중국과 한국에도 불교를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현대에는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서양에도 지식적으로는 불교가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시키고 서양 세계에 불교를 살린 것은 출가자들의 노력에 의한 결과인 것입니다. 과학이 발전해도, 미래에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도, 부처님에 의해 설해진 진리는 바뀌지 않고 어떤 시대의 사람에게도 마음의 평온함을 주는 것,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일을 불교에서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가자가 이 중대한 의무를 담당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재가자는 불교보다 먼저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 가족을 지키는 것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유가 있으면 불교도 가르칠지 모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출가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전하는 일을 평생 동안 하고 있습니다. 출가자가 있는 것은 불교가 살아 있다는 의미합니다. 불교가 살아 있는 것은 인류에게 평화와 평온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출가자의 생명은 상가에 의해 지켜지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의 출가자를 만드는 일도 상가 밖에 가능하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승복을 입는다고 출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계단은 출가자가 새롭게 태어나는 장소입니다. 계율을 자주 위반하게 되면 그 비구는 정신적으로 미약해집니다. 그것을 복구해서 건강을 되찾게 해 주는 장소도 계단이므로 비구들의 병원이기도 합니다. 출가 세계의 국회 의사당도 계단입니다.
작은 땅에 지나지 않는 계단이지만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살리고, 전하고, 유지하는 장소인 것입니다. 곧 「불교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6. 시마는 「공덕의 샘」
아소까 왕(기원 전 268~232년) 시대에 불교 전도사단은 9개의 나라들에 파견되었습니다. 스리랑카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불교가 전래되어 머지않아 계단(sīmā) 설정을 먼저 했습니다. 계단을 설정하는 것이 자신의 나라에 부처님의 교법이 뿌리내리게 된다고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뿌리 내리면 그 공덕에 의해 그 나라가 오랫동안 지켜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불안, 천재지변, 다른 나라의 침략, 타종교의 공격 등 여러 물결이 밀려왔지만, 아직까지 이런 나라들에서는 불교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도덕을 확립하게 되어 그 나라와 국민이 오랫동안 평화롭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의 법력은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 나라에 계단을 설정하게 되어 상가가 모여 그 일을 행할 때는 천상의 신들도 덕을 쌓기 위해서 강림하여 그 법요에 참가합니다. 그리고 비구들이 계속해서 그 장소에서 행사를 실행한다면 신들의 가호는 끊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계단설치를 위한 땅을 보시할 기회를 얻은 사람은 불교에서 말해지는 최고의 덕을 쌓을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 공덕은 친족과 인연 있는 분뿐만 아니라, 찬성하고 기뻐하는 분에게도 이 위없는 공덕이 전이되므로, 기대하지 않아도 재난과 만나는 일이 없고, 쇠약해지지 않는 번영을 누리며, 평화롭고 안온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사후 천상계에 태어나는 것도 확실합니다.
보시하는 것은 한 번의 행위이지만 그 장소에서 상가가 모든 행사를 계속해서 실천하므로 그때마다 보시자에게도 공덕이 회향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 계단이 있는 곳에 불교가 살아있는 한 공덕이 증가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제약으로 땅을 보시할 수가 없어서 땅을 빌려주어도 공덕은 똑같습니다.
상가에서 인정된 계단이 있는 나라는 적에게 공격받지 않습니다. 평화를 유지하고 국민은 번영합니다. 불교의 심장부를 만들게 되므로 계단이 있는 장소는 본격적인 성지가 됩니다.
한국 테라와다 불교(Theravada Buddhasasana in Korea)라는 이름은 독자적인 종교 법인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결코 기존의 대승 불교와 대립해서 활동할 목적이 아닙니다. 어떤 이름이 없으면 등록할 수 없는 것뿐입니다. 불교의 모든 종파의 가르침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각 종파의 가르침이 서로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불교로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곳의 가르침이 뛰어나다는 개인적인 생각은 피할 수 없겠지만, 사실을 조사하지도 않고 감정적으로 가지는 생각 자체는 부끄러워해야 할 사고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적으로 협력하며 서로의 장점을 배워 단점을 고치며 사는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야말로 가슴을 펴고 세계를 향해 「우리는 불교도이다」라고 자랑할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변함없이 완전인 좋은 사람도, 완전인 나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고·철학·삶의 방법을 가지고 있는 인간 조직도 있을 리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서로 협력하고, 서로 보충하고,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보편적인 진리를 설하셨습니다. 태양이 땅을 차별 없이 비추듯이, 붓다의 가르침은 모든 생명에게 살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테라와다 불교도의 특권도, 대승 불교 각기 종파의 특권도 아닙니다. 인도인들의 문화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특정한 민족에게만 우월권을 주는 가르침도 아닙니다. 진리·사실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류의 공유재산인 것입니다.
한국 테라와다 불교는 민족성, 시대의 흐름, 문화나 언어의 차이를 넘어 붓다 자신의 순수한 가르침을 모든 이들이 화합하며 배우고 실천해 보자는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나의 가르침을 믿어라」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각자의 문화가 있고 삶의 방법이 있습니다. 억지로 그것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들의 문화와 습관 등은 그대로 소중하게 지키고 다음 세대에도 전하면서도, 인간으로서 올바른 삶의 방법은 무엇인지, 선악의 판단은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생활하면 좋은 것인지, 어떤 인간이 되면 좋은 것인지, 잇달아 일어나는 나쁜 마음은 어떻게 해독하는지 라는 대답을 아주 간단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테라와다 불교는 한국 대승 불교의 승려, 단체, 종파들과 우호 관계를 가지고 함께 노력하며 현대 한국 사회에 정신적인 평온함을 가져다주는 일을 묵묵히 수행해 나갈 것입니다.
7. 한국 테라와다 불교에서 해야 할 일 중의 하나
이제는 붓다의 가르침의 논리성, 과학성에 감동과 놀라움을 느낀 분들이 많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붓다가 훌륭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낀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실천하고 수행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는 한국의 기존 불교에서 해답을 구하지 못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분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법을 제시하고, 실천을 통해 확실히 마음의 평온함을 체험할 수 있는 이 가르침을 한국에 뿌리내리게 하기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테라와다 교단으로 출가를 희망하는 분들도 서서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출가한다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제대로 갖추고 바르게 해야 합니다. 인정받은 계단에서, 화상(和尙)을 정한 후, 삼사칠증(三師七證)을 갖추고, 출가에 결격사유가 없어야 하며, 발우와 삼의를 수지하여서 출가해야 합니다. 출가 후에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율을 순수하게 지키며, 수행과 교학을 배우는 것이 출가자에게 요구되고, 그럴 때만이 불자들의 신뢰를 받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출가자라도 괴짜 취급을 할 뿐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출가자가 괴짜 취급당하는 것은 인류에게 있어서 불행한 일입니다. 따라서 계단이라고 하는 불교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장소를 상가에 의해 인정받는 것은 필수 조건입니다.
그러나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고민하고 고민 해봐도 당장 한국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큰돈이 드는 땅의 구입과 결계당을 건설할 정도의 재력이 없습니다. 테라와다 불자도 물론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수로 구성된 가난한 조직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만은 진심입니다. 억지로 보시를 받는 일도 붓다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다 매매할 걱정 없이 안전한 조계종 사찰인 부산 태종사에 태국 원로이신 아짠 통 시리망갈로 대장로 스님의 인도아래 붓다야나깔라 시마(BUDDHAYĀNAKĀLA SĪMĀ)라는 이름의 결계당을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상가의 스님들이 모여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지만, 태종사는 조계종의 사찰이기에 사찰의 행사로 인해 테라와다의 상가 스님들이 결계당을 자유롭게 이용하기에는 불편함도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에 한국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힘을 모아 테라와다 교단 소속의 경주 마하보디 선원과 하동 신월정사에 상가의 의결을 거쳐 결계당을 건립하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상가 공동체의 존재와 연속을 위한 중요한 조건들 중의 하나는 단일한 지역의 모든 인원들이 출가자의 여러 행위들을 위해 지정된 장소에서 화합된 상가(samagga saṅgha)로서 모여서 여러 가지를 규정짓는 계단(시마)의 설치입니다.
계단에서 실행하는 행위는 6종류가 있습니다.
1) 출가비구, 비구니들의 월 2회의 포살행위(uposatha).
2) 출가비구, 비구니로 출가를 서원한 사미, 사미니를 한 사람의 새로운 비구, 비구니로서 상가에 의해 인정하는 행위(upasamapadā).(이 경우에게만 지원자가 아직은 비구, 비구니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인들도 들어와 견학할 수가 있습니다)
3) 비구, 비구니가 만약 어떤 문제를 일으켜, 상가가 그 심판을 실행할 때의 재판소로서의 기능(saṅghakamma).
4) 3개월간의 우기안거를 종료하는 자자 행위(pavāraṇā).
5) 우기안거의 수행을 완료한 비구, 비구니에게 재가자가 가사를 보시하는 습관이 있으므로 그 가사를 한 사람의 비구 혹은 비구니에게 주는 행위가 매년 한 번 행해집니다(kaṭhina).
6) 이 세상의 테라와다 출가자와 관련된 새로운 결정 등은 상가의 결집에 의해 정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행사도 계단에서 행해집니다. 이러한 행사는 불교역사에서 6번 밖에 없었습니다(saṅgīti).
출처: https://cafe.naver.com/buddhayana1/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