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14강. 수념처(受念處 Vedanānupassanā)(20110730)

담마마-마까
2021-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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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2OI94TpRdkU


14강. 수념처(受念處)- 느낌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 (20110730)

 

저번 시간까지 몸에 대한 알아차림이 끝났습니다.

이번 시간부터는 웨다나누빳사나(Vedanānupassanā) 부분입니다. 느낌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수행 부분입니다. 신수심법 중에서 수념처(受念處)에 해당이 되는 거죠! 아, 그런데 어떡하냐? 저기 오늘 휴가철이라서 수행 오래도록 한 사람들은 다 빠져버리고, 저기 초보자들이 새로 왔는데 초보자들은 이걸 모를 건데, 알아듣겠어요?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십시오.

'살아있다는 것은 느끼는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십시오. 죽어있는 사람은 느낄 수가 없죠? 살아있는 사람은 반드시 느낌이 있습니다. 그 느끼는 기능하고 또 살아있는 사람들의 특권이 또 하나 뭘까?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들,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다는 것들. 살아있다는 것은 이렇게 느끼는 기능하고 변화하고 있다는, 움직이고 있다는 기능이 있는 것을 보통 살아있다 하고 그렇게 얘기 합니다.

생명이라고 하는 것들은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 없죠! 사람뿐 아니라 어떤 것이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다 마찬가집니다. 가만히 있질 못합니다. 정신없이 바쁘죠. 그러면서 뭔가를 반드시 느끼게 됩니다. 그게 인제 첫 번째로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야 될 부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거는 뭐냐면 '느낌이 이 움직임을 컨트롤 한다.' 하는 겁니다. 좀 느낌이 둔한 사람은 어때요? 움직이는 게 좀 더딥니다. 그런데 예민한 사람들은 아주 빠르게 생각도 하고 움직임도 빠르게 됩니다. 왜 그럴까? 느낌이 움직임을 컨트롤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힘듭니다. 힘들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그럼 힘들면 어떻게 해요? 움직여야 됩니다. 앉아있으면 힘들고 괴로우니까 다리를 뻗어야 됩니다. 그럼 움직이게 됩니다. 그래서 느끼는 것들을 내가 힘들다고 느끼지 않을 것 같으면 조금 더 오래도록 있게 됩니다. 그런데 힘들다고 느끼면 빨리 움직이게 됩니다. 생각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느낌이 사실은 우리 움직이는 것을 컨트롤 하게끔 됩니다.

 

수행할 때 수행의 기본이 맨 처음에 뭐라 그랬어요? '천천히 하라' 그럽니다.

'천천히 하라' 천천히 하지 않으면 빨리빨리 움직이는 걸 내가 욕망대로 그대로 그냥 따라가게끔 됩니다. 그러면 언제 내가 그 느낌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고, 언제 움직이는 걸 분명하게 알아차릴 거라.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천천히 하라는 거라.

그래서 노스님들이나 수행을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행동이 느릿느릿합니다.

 

그런데 알아차림이 없는 사람들은 바쁩니다. 되게 바빠. 일상생활에서도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그러니까 뭐가 그리 할 일이 많은지 빨리 움직여야 됩니다. 그것만 그런가? 생각하는 것도 빠르게 돼있고, 그래서 남이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툭 말해야 돼. 되게 빨라. 그러니까 기다려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니고 남이 이미 말하기 전에 내가 벌써 툭 말하게 되고, 말만 그런 게 아니라 행동도 그렇고, 생각하는 것도 다 빠르게 된다는 겁니다.

느낌을 분명하게 내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고, 그 느낌을 컨트롤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라.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천천히 움직이든 빨리 움직이든 그 움직임이 멈추지 않는 것은 왜 그럴까? 왜 끊임없이 움직여야 될까?

천천히 움직이고 빨리 움직이는 차이뿐이지 움직인단 말이라. 왜 그럴까? 왜 그래요? 괴롭기 때문에! 괴롭지 않으면 안 움직입니다. 밤에 잘 때 편하게 누워 자는 사람들은 안 움직입니다. 안 괴로우니까. 자면서도 뒤척뒤척하는 것은 괴롭기 때문에 움직이는 겁니다. 괴롭기 때문에 움직이게 되는 겁니다. 움직임이 멈추고 있으면 괴로운 것들이 밀려오기 때문에 그것을 참지 못하기 때문에 움직이게 됩니다.

 

그 괴로운 것들을 괴롭다고 알아차리고 '아이고, 그런 것이다' 하고 받아들이면 스트레스가 덜한데 그 괴로움이 싫으면 어떻게 돼요? 그냥 스트레스 만빵 받는 거라. 그게 산다는 것들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우리가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가 있는 것들입니다. 그 느낌으로 인해서 움직이는 것도 컨트롤이 되고, 느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괴로운 것들도 내가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서 스트레스를 받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그렇게 되는 것들입니다. 이게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는 모습들입니다.

 

이때까지 몸에 대해서 관찰을 했습니다.

몸은 관찰할 때 대상이 단순하죠! 호흡이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걸 '일어남' '사라짐' 아주 단순합니다. 걸어갈 때도 발을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아주 단순합니다.

그런데 느낌은 그렇습니까? 느낌은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느낌은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아주 다양합니다.

그러니까 거친 느낌부터 시작해 가지고 미세한 느낌까지 아주 다양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이 느낌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는 것은 굉장히 좋은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거친 건 여러분들이 알아차리기 쉬울 겁니다. 앉아있으면 다리가 아프다, 아픈 느낌, 고통스러운 느낌, 이건 알아차릴 대상이 쉽다는 거라. 그런데 미세한 느낌들, 지금 현재는 눈꺼풀을 뜨고 있으니까 눈꺼풀에서 쓰윽 일어나는 느낌들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 미세하게 느낌들이 있습니다. 손을 여기에다 한번 비벼 봐요. 그럼 틀림없이 느낌이 있습니다. 바람이 접촉하고 있으면 느낌들이 있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미세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릅니다.

 

그런데 이 느낌들을 알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미세한 느낌들을 알려고 하면. 굉장히 내가 힘이 강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알아차림의 힘을 강하게 키워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 느낌은 끊임없이 변한다고 했죠! 느낌은 가만히 있지를 않죠! 그러니까 알아차림의 대상이 얼마나 좋아! 내가 일부러 '일어남' '사라짐' 아니면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고 단순하게 잘 변하지도 않는 걸 하려고 하는 것보다, 지 혼자서 스스로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니까 나는 그것만 따라가 주면 돼. 끊어짐 없이 알아차림을 해줄 수 있는 대상으로써는 가장 좋은 것들이다 하는 겁니다.

 

또 하나는 그렇게 변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으니까 어떻게 돼요?

무상한 성품을 알기에 참 좋다는 것입니다. 변하고 있으니까 '아! 참 무상하구나' 일어난 것은 보니까 언제 사라졌는지 금방 사라져버리고, 또 새로운 게 일어나지고 또 사라지고 끊임없이 그렇게 변화되고 있다는 거라. '아! 참 무상한 성품이구나' 하는 것들을 알아차리기가 쉬워집니다.

그래서 느낌에 대한 수행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대념처경에 지금 보면 느낌에 대한 관찰이 몸에 대한 관찰의 10분의 1도 안 되지? 아마. 아주 단순하게 해놓았습니다.

"세속적인 즐거운 느낌, 세속적인 괴로움 느낌, 세속적인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그다음에 출세간적인 즐겁고, 괴롭고, 중립적인 느낌들이 일어나면 그것을 그대로 알아차려라" 요것만 딱 적어놨거든. 아주 간단하게 적어놨습니다. 그렇지만 그 느낌에 대한 관찰이 중요성을 잃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오히려 중요한 부분입니다.

 

경전에 있는 내용을 한번 들어봅시다.

세속적인 즐거운 느낌은 어떤 겁니까? 맛있는 걸 먹으면 맛있지? 즐겁죠! 그게 세속적인 즐거운 느낌입니다.

세속적인 괴로운 느낌은 어디 다치면 아프지, 칼에 손이 베이면 아프지, 고통스럽다는 거라, 그게 괴로운 느낌입니다.

그럼 세속적인 중립적인 느낌은 어떤 것일까? 그건 연경이가 더 잘 알 거 같은데. 무덤덤한 느낌들, 다른 사람들은 즐겁고 괴롭고 하는 거를 금방 그리 아는데 지는 그걸 잘 몰라.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것들을 먹어도 맛있다 하고 알아차리는데 자기는 그냥 무덤덤한 거라. 그렇다고 무덤덤하다 해가지고 그 음식을 안 먹고 있는 것은 아니거든. 그것에 대해서 애착은 가져. 애착을 가지는 데도 무덤덤한 느낌에 빠져있는 거라. 이게 중립적인 느낌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수행을 한 상태에서 빠지는 느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그냥 어떻게 말하면 '하기 싫다' '알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음이 강하게 있는 상태, 그런 것들을 세속적인 중립적인 느낌이다 하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다음에 출세간적인 즐거운 느낌은 어떤 걸까?

수한이, 수행하다 보면 막 수행 잘될 때 일어나는 느낌 있지? 그때 일어나는 느낌 아, 내가 수행 잘하고 있다, 아, 오늘은 잘됐는데, 그래서 기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그런데 하다 보니까 그렇게만은 안 되지? 잘 안될 때도 있잖아. 아, 참 안되네. 이게 출세간적인 괴로운 느낌이라는 거라.

그럼 출세간적인 중립적인 느낌은 어떤 걸까? 어떤 게 중립적인 느낌이라? 즐겁고 괴롭고 하더라도 그 마음을 항상 평온한 상태에서 유지되면서 느껴지는 것들. 즐거움의 느낌, 기쁨의 느낌, 괴로움의 느낌, 수행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다 그때 즉시즉시 알아차려서,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마음은 고요한 상태에서 머물러서 일어나는 느낌들, 이것들이 '우뻭카'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게 인제 출세간적인 중립적인 느낌이다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일어나면 그것들이 일어난 걸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거라.

맛있는 걸 먹고 있으면 '어, 맛있네' 하고 분명하게 알고는 먹으라는 거라. 자기가 수행을 하든 안 하든 간에. 뭔가 괴로운 통증이 있을 거 같으면 '아, 통증이 있네' 정도는 적어도 알아차리라는 거라. 부처님이 얘기로는. 수행하고 있는데 수행이 잘 되어서 '수행 잘되고 있네' '그래서 즐겁다' 하고는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런데 그것도 못하는 사람들 많죠? 그냥 즐거우면 즐거운 데로 '헤~' 하고, 수행하다 잘되면 '아, 잘된다' 하고 지 혼자 거기 빠져갖고 막 헤매 쌌고 그러지?

적어도 부처님의 얘기는 그렇게는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게 인제 경전에 있는 수념처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것만 이렇게 경전에는 적어놨어요.

 

그런데 왜 그러면 이 수념처(受念處)를 수행의 대상으로 해놨을까?

갈애를 끊기 가장 적당한 방법이기 때문에 이 수념처를 그중에 하나로 넣어놨습니다. 느낌은 어떤 겁니까? 정신적인 겁니까, 육체적인 겁니까? 예? 정신적인 거죠! 물론 육체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느낌이 있어도 그걸 아는 것은 뭡니까? 정신으로 아는 거죠! 그래서 수상행식(受想行識)은 마음의 요소다.

식(識)은 마음이라고 할 것 같으면, 수상행(受想行)은 마음의 작용이죠! 그중에 수(受)가 떨어져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작용이라는 거라.

 

마음의 작용인데, 하도 많은 것 중에 상(想)은 왜 하나의 찹터(chapter, 章)로 안 잡아넣고, 행(行)도 하나의 찹터로 안 잡아넣고, 왜 이 수(受)만 하나의 찹터로 잡아넣고 수념처로 해놔 놨을까? 왜 그랬을까? 느낌만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갈애가 일어나는 것들을 끊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경전의 일부에서는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냥 일상적인 느낌이 있고, 육체적인 느낌이 있고, 정신적인 느낌이 있다 이렇게 보통 표현을 합니다.

 

좌선수행을 할 때 '일어남' '사라짐' 하고 관찰하다가, 어느 정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잘 관찰이 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스승이 그다음에 하나를 더 첨가해줍니다. '일어남' '사라짐' 하고 나서 '앉음' 하고 앉아있는 상태의 느낌을 알아차려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느낌은 어떤 느낌입니까? 즐거운 느낌입니까, 괴로운 느낌입니까?

 

자! 예를 들어봅시다. 손이 지금 여기에 이렇게 딱 닿아있죠? 좌선을 하고 있으면. 그렇죠? 닿아있는데 그 느낌은 어떤 느낌입니까? 즐거운 느낌이라, 괴로운 느낌이라? 모르겠죠? 그냥 느낌일 뿐이죠? 그 느낌이라는 거라.

그걸 보통 '맨느낌'이다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좌선할 때 '일어남' '사라짐' 다음에 '앉음'하고 알아차리라고 하는 것은 그 '맨느낌'을 알아차리라는 거라. 내가 닿아있다는 느낌을 알아차리라는 거라.

여러분들 그런 맨느낌들 많죠? 일상적으로 보통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고 일어나는 느낌들은 그런 대부분이 맨느낌 입니다. 그거만 탁 알아차리면 어떻게 돼요? 적어도 괴롭고 즐겁고 하는 건 없죠! 그것만 계속 알아차려나가면 그 사람은 쉽게 얘기하면 부처님이 된다는 거라.

 

그런데 지금 스님 소리가 들립니까? 소리가 들리는 것도 그냥 맨느낌 입니다.

'소리들림'이라는 것뿐입니다. 그렇게만 알아차리면 좋은데, 사람이란 게 그렇게 안합니다. 소리가 들리면 어떻게 돼요? '즐겁다' '괴롭다' 하고 알아차립니다. 그게 '육체적인 두 번째 닿는 느낌'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그 소리가 즐겁다 할 것 같으면 아, 즐거운 느낌으로 알아차리는 거고, 그 소리가 자기가 듣기 싫으면 괴로운 느낌으로써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괴로운 느낌으로 알아차립니다. 그때도 '어, 내가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네' 하고 알아차리면 또 그래도 괜찮아. 맨느낌 보다는 좀 늦었지만은 그래도 뭐 수행 그렇게 해나가면 또 괜찮아. 거기서 끝날 수 있는데.

 

그런데 또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즐거우면 어떻게 해? 정신적인 것으로 발전이 돼버리지. 아! 정신적으로 더욱더 즐거운 느낌이 증폭되어버리든지. 괴로우면 괴로운 느낌으로 증폭돼 버립니다. 그래서 감정을 컨트롤 못하게 되고, 스님 보면 그냥 멍 해가지고 있고, 어떨 경우에는 괴로우면 '아, 저 소리 빨리 좀 끝났으면 좋겠다' 하는 그 정신적인 부분에 딱 매여가지고 있고. 그리하더라도 '아, 내가 그런 느낌,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이 있네' 하고 알아차리면은 그것은 또 괜찮아. 거기서 또 그칠 수가 있으니까. 그런데 그 이상 넘어가버리면 어떻게 돼요? 잘못하면 정신병자 되는 거지 인제.

 

그래서 느낌은 알아차리는 단계마다 다 알아차릴 수가 있는 거라.

맨느낌은 맨느낌대로 알아차릴 수가 있고, 육체적인 느낌은 육체적인 느낌대로 알아차릴 수 있고, 정신적인 느낌은 정신적인 느낌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몸에 대한 관찰은 그렇게 안 되죠!

그마만큼 느낌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은 폭도 넓고, 또 내가 설혹 깜빡 알아차림이 없이 넘어갔다 하더라도 그다음 단계에서 알아차리면 분명하게 마음은 다시 고요한 맨느낌으로 돌아와집니다. 즐거운 느낌 '아, 저 소리가 아름답다' 하고 느끼더라도, '아름답다' 하고 느낄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다시 그냥 그 소리로만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맨느낌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거고. 정신적인 느낌으로 넘어가더라도 꼭 마찬가지라. 그렇게 소리로써 들리게 되는 거고.

 

그마만큼 느낌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처님은 '딴하(taṇhā)' '갈애(渴愛)'가 생기는 것은 느낌으로 인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욕망이라고 하는 것들은 느낌으로 인해서 일어난다는 거라.

인도에서는 그렇게 얘기 안 하죠! 욕망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그랬어요? 이 신체적인 감각기관으로 인해서 일어난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감각기관을 호되게 그냥 괴로움을 주도록 하는 거라. 그래서 밥도 한 톨 가지고 먹게 되고, 또 육체적인 걸 갖다가 괴롭혀가지고 몸을 조복 받으려 그러고, 소리도 안 들리게끔 만들려고 하고, 보는 것도 안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려고 하고, 그래서 모든 욕망들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인해서 일어난다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걸 싹 뒤집어엎었습니다.

그 욕망이란 것은 그 감각기관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일어난다는 거라. 느낌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그 욕망들은 안 일어난다는 거라. 느낌을 제어를 못하니까 욕망들이 일어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걸 '웨다나 빳짜야 딴하' '느낌으로 인해서 딴하 욕망이 일어난다' 하고 부처님이 분명하게 딱 선언을 해놓은 겁니다.

 

쉽게 말하면 이 번뇌들을 다스리려고 할 것 같으면 느낌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하고 느낌이 어디서 일어나는 건지, 느낌이 어떻게 내가 경험되어지는 건지, 그 느낌을 고요하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지, 하는 걸 분명하게 우리는 알고 있어야만 됩니다. 그래야만 번뇌들이 일어나지 않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 느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번뇌들, 갈망하는 것들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어떻게 돼요? 번뇌가 소멸해버리는 거라. 그게 바로 열반이라.

아주 쉽죠? 열반 체험하기!

 

어쨌든 이 느낌은 수행에서는 몸으로 인해서 느껴지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수행할 때 우선 먼저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관찰대상으로 합니다. 정신적인 느낌들은 두 번째입니다.

그래서 이 웨다나 수행법에서, 부처님이 대념처경에서 얘기하는 여기서는,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정신적인 느낌은 몸을 대상으로 한 느낌들을 분명하게 다스리면 정신적인 느낌으로 안 넘어가집니다.

그래서 대념처경은 그 부분에 대한 얘기는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시간에 스님이 괴로운 느낌에 대한 것들 하면서 육체적인 괴로운 느낌과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을 분간 해가지고 프린트물을 주고 거기에 대한 것들을 다시 설명을 할 겁니다. 물론 지금 프린트물에도 괴로운 느낌에 대한 것, 즐거운 느낌에 대한 것 이렇게 밑에 쭉 적어놨죠!

 

경전 곳곳에서는 그래서 이 '웨다나'라고 하는 느낌에 대한 것을 굉장히 강조를 많이 해놔 놨습니다. 경전뿐 아니라 아비담마에도 꼭 마찬가집니다. "몸의 느낌이 해탈의 길로 가는데 가장 중요하다"고까지 선언을 해놓은 겁니다. 그 정도로 느낌에 대한 것들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수행할 때 몸의 느낌들을 주 대상으로 해야 되는 것은 뭐냐 하면, 삼매를 체험하는데 쉽게 말하면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은 제4선에 가야만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정신적인 느낌은 3선에만 가더라도 사라져버립니다.

 

3선이 어떤 겁니까? 행복감으로 인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상태입니다. 행복감이 충만 돼있기 때문에 거기서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정신적인 즐겁고 괴롭고 하는 것들은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육체적인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은 제3선에도 남아있습니다.

 

수행을 아무리 잘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선정삼매를 자유자재로 들고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육체적인 즐거운 느낌과 육체적인 괴로운 느낌을 분명하게 알아차립니다. 단지 그것이 정신적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육체적인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이 없다고는 얘기를 안 합니다. 맞습니까? 그래서 부처님도 아프면 “아프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단지 그 느낌은 느낌으로써만 분명하게 알아차립니다.

 

어느 스님이 몸에 병이 생겼거든. 제자가 와서 물어봅니다. “스님 많이 아픕니까?” 스승이 뭐라고 답해야 되겠어요? '그래 내 아프다' 이렇게 합니까? 뭐라고 답할까? 여러분들이 스님한테 '스님 아파요?' 하고 물어보면 '응, 많이 아프다' 이렇게 답하는 스님들도 물론 있겠죠.

그런데 그 스님은 뭐라고 답하느냐 하면 "괴로움의 기반이 되는 느낌만 있을 뿐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괴로운 느낌만 있을 뿐이다 하는 거라. 그 괴로운 느낌이 항상 하는 것은 아니니까 변하고 있으니까. 괴로운 느낌이 되는 기반으로 인해서 그런 느낌만 있을 뿐이다.

그럼 제자가 “스님 그럼 아픈 거 아니네요? 그 느낌을 계속 관찰하면 되겠네요.” “그럼 되지.” 그 스승이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내 아프다' 소리도 못하는 거라. 그럼 어떻게 해야 돼? 그 느낌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거라. 그 괴로운 느낌을 알아차리면서 결국에는 아라한이 됩니다.

 

내 다리가 유리에 베어가지고 했을 때 또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다리를 틀림없이 유리가 그냥 살점 다 떼어내고 이렇게 해버렸으니까, 그래서 44 바늘 꿰매고 그랬는데, 밤에 그렇게 됐는데 피가 온데 흥건하게 되어있고 살점도 온데 튀어져있고 하니까 옆에 주변에 있는 스님들하고 대중들이 죽는다고 난리가 난 거라. 그래서 차를 대기해라 해가지고 그 상태에서 뭐 어떻게 지금 할 수도 없으니까 그대로 병원에 갔다,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없어. 밤이 되니까 이걸 기워줄 의사가 없는 거라. 아침이 돼야 기울 수 있는 거라. 그래서 고통을 감소시키는 진통제를, 그러니까 고통이 없도록 하는 거, 그거를 맞으면 아침까진 견딜 수 있다고 하는 거라.

 

그래서 물어봤어. 응급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주사를 맞을 거 같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니까 고통을 못 느낀다는 거라. 그런데 수술을 이렇게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수술이 잘 안될 수도 있다는 거라. 그래서 내가 그랬어. 그러면 그거 놓지 마라. 나도 아파 죽겠어. 놓지마라 해가지고 밤을 지새우는 거라.

그런데 침대 누워가지고 붕대를 싸고, 아무 주사도 안 맞고 그냥 있는데, 고통이 막 엄습해오지. 그런데도 그 괴로운 느낌을, 육체적인 괴로운 느낌을 육체적인 괴로움으로써 계속 알아차리는 거라. 그러니까 그 느낌들이 점점 변해가는 거라. 떼떼 했던 느낌부터 해서, 묵직한 느낌부터 해서, 아주 다양한 느낌들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점점 더 그게 빨라지는 거라. 그래서 정신적인 느낌으로 발전이 안 돼. 육체적인 느낌에서 그쳐버리는 거라.

 

그러다가 몸이라는 것은 밤에 시간이 되면 자야됩니다. 그걸 알아차리면서 그냥 잠에 툭 떨어져 버린 거라. 옆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기가 찬 거라. 저 스님이 저리 아픈데도 잠을 자고 있으니까. 상식적으로는 잠을 잘 수가 없는데 잠을 자고 있거든. 그렇게 하고 알아차리니까 아침에 일어날 때는 또 분명하게 깨어나자마자 그 느낌들을 또 알아차릴 수가 있는 거라. 그래가 수술을 한 거라.

그게 뭐냐면 육체적인 느낌을 분명하게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정신적인 느낌으로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거라. 이 스님도 꼭 마찬가지라. 그때 내가 조금 더 해가지고 잠 안 자고 공부 더했으면 그냥 아라한이 돼버렸을건데 잘못했어. 잠자는 바람에.

 

여러분도 꼭 마찬가집니다. 맨느낌으로써만 그냥 알아차릴 수 있으면 가장 좋은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안됩니다. 거의 대부분은 육체적인 느낌으로써 넘어가지게 됩니다. 그래도 그때도 안 늦습니다. 분명하게 그것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육체적으로 즐거운 느낌과 육체적인 괴로운 것으로써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 나중에는 즐겁고 괴롭고 하는 느낌으로 있는 게 아니고 그냥 느낌 자체로써만 있게 됩니다. 그 느낌이 끊임없이 변화가 오기 때문에 느낌으로써만 알아차리는 것만도 벅찰 정도가 됩니다.

자! 이해가 됐습니까? 그게 바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대부분 수행자들은 배를 관찰하라 할 것 같으면 실재적인 것을 관찰을 잘 안 합니다. 배가 불러오면 '일어남' 하고 알아차리고, 배가 꺼지면 '사라짐' 하고 알아차리는데, 실제로 일어나는 걸 알아차리고 실제로 꺼지는 걸 알아차리는 게 아니고, '일어남' 하면서 그 명칭을 알아차립니다. '꺼짐' 하면서 '사라짐'이라고 하는 명칭을 알아차리고 있는 거라.

그런데 느낌은 어떻습니까? 명칭으로부터 좀 벗어날 수 있기에 아주 용이합니다.

 

수행은 뭐라 그랬어요? 모양이나 형태 명칭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실재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그래서 '빤냣띠(paññatti)로 알아차리지 말고 '빠라맛타(paramattha) 실재하는 것들로써 알아차려라.'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일어남' '사라짐' 하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알아차리면 어떻게 돼요? 일어날 때 딱딱한 느낌, 팽창하는 느낌, 그다음에 움직이는 느낌, 이 느낌으로 압니다.

그런데 그렇게 알려고 하지 않고 '일어남' 하면서 알아차리고 그것만 알아차립니다. 개념으로 잡고 있으니까. 그런데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어떻게 돼요? 좀 더 쉽게 다가와지는 거라.

 

그래서 스님이 여러분에게 자꾸 강조하는 게 몸에 대해서 알아차리더라도 몸의 움직임을 알고 반드시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이 느낌으로써 알아차리라는 거라. '몸'을 알아차릴 때도 수념처가 이렇게 적용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은 '마음'에 대해서 알아차릴 때는 수념처가 적용이 안 됩니까?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고요할 것 같으면 마음도 고요합니다. 그런데 수행이 잘 안 될 때 어떻게 돼요? 마음도 들떠 있습니다. 그럼 그 마음을 관찰합니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느낌으로. 가슴에 묵직한 느낌이라든지 아니면 떼떼떼 하는 느낌이라든지 있을 거 같으면 틀림없이 호흡이 자연스럽지 않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라. 마음을 관찰할 때도 수념처로써 관찰하게 되는 거라.

'현상'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수념처로써 관찰하게 됩니다. 아주 즐거운 현상들을 봤다 그럼 그걸 즐거운 느낌으로 알게 되는 것들이라.

 

이렇게 수념처라고 하는 것은 신·수·심·법에 공통적으로 다 할 수 있는 것들이라.

 

마찬가지로 몸에 대한 관찰도 엄밀하게 따지면 마음으로 아는 겁니다.

그럼 마음으로 아는 건 뭐로 알 수 있습니까? 느낌으로 아는 겁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 그 현상들도 꼭 마찬가지로 느낌으로써 내가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모든 현상은 느낌이다' 하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반드시 그 느낌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 느낌을 알아차리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자! 그러면 느낌의 특성을 한번 봅시다.

즐거울 때 괴로운 거 생각합니까? 안 하죠. 동시에 같이 안 일어나죠.

어떤 경우든 느낌이 동시에 두 개가 같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즐거운 느낌이 있을 때는 즐거운 느낌만 있을 뿐이지 괴로운 느낌이나 무덤덤한 느낌은 없습니다. 괴로운 느낌이 있을 때도 꼭 마찬가지로 괴로운 느낌만 있을 뿐이지 즐거운 느낌이나 무덤덤한 느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괴로운 느낌이 사라지고 나야만 즐거운 새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일어난다고 분명히 내가 알게끔 되는 겁니다. 느낌은 그와 같습니다.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감각기관이 있어서 접촉이 있을 거 같으면 반드시 느낌은 일어나게 됩니다. 그 '느낌은 하나씩 일어난다'라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느낌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그리고 느낌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세 가지(根.境.識)가 합쳐졌을 때 느낌이 일어난다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눈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보여지는 대상, 그것을 인식하는 안식, 이 세 개가 있어야 만이 느낌은 일어납니다. 아무리 대상이 있더라도 내가 눈을 딱 감아버리면 보이질 않습니다.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보는 것으로부터 일어나는 느낌도 없습니다. 대상이 있고 내가 눈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식하지 않을 것 같으면 멍하게 있지 사물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세 개(根.境.識)의 접촉이 있어야만이 느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그 느낌으로 살아갈 거 같으면 그 느낌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흐리멍텅하게 이 세 개를 분산하고 각각으로 생각해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볼 때는 분명하게 보려고 해야 되는 거고, 들을 때는 들으려고 해야 되는 겁니다. 맛볼 때는 맛보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맛보면서 딴 일 할 것 같으면 맛을 몰라. 그게 두 번째 특징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걸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느낌을 왜 알아차려야 되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왜 알아차려야 될까? 하고많은 것 중에. 아까 뭐라 그랬어요? '딴하' '갈애'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느낌에 그냥 폭풍 같이 휩싸여서 내가 흘러가 버려. 그래서 반드시 느낌을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세상의 이치는 무상한 겁니다. 그런데 무상한 줄 모르고 나는 거기에 그냥 휩쓸려 들어가 버린다는 거라.

 

느낌을 알아차릴 때, 부처님이 뭐라고 하나면 "즐거운 느낌은 괴로움으로 이해하라. 괴로운 느낌은 화살로 이해하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으로 이해하라."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즐거운 느낌을 왜 괴로움으로 이해하라고 그럴까?

즐거운 느낌이 항상 지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즐겁다 해가지고 가만히 지속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로보트가 아니기 때문에. 웃으라 한다 해가지고 밧데리 넣어놓으면 내내 웃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는 괴롭게 된다는 거라. 변화하기 때문에 변화하는 것들은 어떤 것이든 괴로운 것들입니다. 괴롭기 때문에 변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즐거운 느낌이 있으면 아, 이것은 괴로움이라고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이것은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아무리 즐겁다 하더라도 나는 만족할 수가 없다는 거라. 그렇게 분명하게 이해를 하라는 거라.

 

괴로운 느낌은 화살같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으로 알아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계속 괴로움에 함몰되는 거라. 육체적으로 괴로우면 정신적으로 괴롭고, 그것으로 인해서 우울하게 되고, 계속 그렇게 발전돼버리는 거라. 괴로움에서 빠져나와야 돼. 빠져나오려면 괴로운 느낌은 화살과 같이 이해를 해야 된다는 거라.

왜 화살과 같이 이해를 해야 되는가? 한 번만 맞아라는 거라.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고만 알아차리고 나면 그다음으로는, 정신적인 괴로움으로는 넘어가지 않는다는 거라. 화살과 같이 이해를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괴로움을 계속 받는다는 거라. 1차적으로 받고 또 2차적으로 정신적으로 받고, 또 그것이 확장돼가지고 또 3차적으로 받고, 계속적으로 받는다는 거라. 그래서 화살과 같이 보라. 한 번만 맞아라는 거라. 괴로운 느낌이 있으면 괴로운 느낌이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서 끝내버리라는 거라.

 

그다음에 무덤덤한 느낌은 무상으로 알아차려라.

그 일어난 느낌 자체를 무상한 것으로 알아차리지 않으면 나는 게을러져 버린다는 거라. 무상한 것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일어났으면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그렇게 알아차리지 않을 거 같으면 무덤덤한 느낌에 그냥 빠져버리는거라.

수행하다가도 자지도 않았는데 한 시간 동안 뭐했는지 모르거든. 그건 무덤덤한 느낌에 그냥 빠져있는 거라. 게을러져버린거라. 수행하려고 하는 생각을 일으키질 않는 거라. 무상한 줄로써 분명하게 알아라는 거라.

 

그래도 여러분들이 다행으로 생각해야 되는 것이 뭐냐면, 느낌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거라. 참 다행이라.

생각이 먼저 일어나고 그다음에 느낌이 일어났을 거 같으면 아마 여러분들은 그걸 관찰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 느낌이 있고 나서 반드시 생각이 따라서 일어나집니다. 그래서 관찰하기가 더 쉬워집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한 시간 정도 지나니까 다리에 고통스런 느낌들이 있을 거라. 고통스러운 느낌이 오고 나서 그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싫다'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밀쳐내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분노가 일어나게 됩니다.

반드시 생각이라는 것은 느낌 뒤에 일어난다는 거라. 그러면 쉽게 말하면 내가 분노하고, 밀쳐내려고 하고, 여러 가지 생각을 일으키고 하는 것들은 느낌만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그다음으로 안 일어나진다는 거라.

 

자!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 수행자는 세 가지 양식의 느낌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이것은, 이러한 성향은 제거해야 된다."

왜? 즐거운 느낌은 집착하려고 한다는 거라. 괴로운 느낌은 밀쳐내려고 한다는 거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느낌은 어리석게 머물려고 한다는 거라. 그래서 그걸 탐·진·치라는 거라. 그 느낌으로 인해서 탐·진·치가 일어나기 때문에 분명하게 그 느낌을 알아차려라는 거라. 그 느낌을 알지 못하면 탐·진·치에 빠져버린다는 거라.

 

수행을 왜 합니까? 탐·진·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겁니다.

즐거운 느낌은 즐거운 느낌으로 알아차려라는 거라. 그래서 탐심이 생겨나지 못하도록 하라는 거라.

괴로운 느낌은 괴로운 느낌으로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거라. 성내고 화내고 하는 것들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라는 거라.

중립적인 느낌은 중립적인 느낌으로써 분명하게 알아차려라는 거라.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라는 거라.

그래서 느낌들을 탐·진·치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라 하는 겁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괴로운 느낌부터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수행할 때 가장 먼저 접해지는 게 그런 괴로운 느낌들입니다. 그 느낌을 제거하는 데는 보통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괴로우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든지, 그 괴로움을 제거하려고 하든지, 안 그러면 그 괴로운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든지 그러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에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것들을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이 있는 사람 질문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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