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관 수행법] · 14
《 무상관 수행의 독립성 》
“비구들이여, 눈[귀,코,혀,몸,마노(意)]는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무아다. 무아인 것은‘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봐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귀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코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혀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몸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마노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램으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안의 무상 경,
Ajjhatta-anicca-sutta>(S35:1)
“비구들이여, 형색[소리,냄새,맛,감촉,마노의대상(法)]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무아다. 무아인 것은‘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봐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형색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소리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냄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맛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감촉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마노의 대상인 법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램으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밖의 무상 경,
Bāhira-anicca-sutta>(S35:4)
‘온실 속의 화초는 자생력이 약한 법’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도마 위의
예리한 칼날에 손가락 한번 안 베어 보고서야
어찌 제대로 부엌살림을 배울 수 있겠으며,
뙈약볕에 목덜미를 검게 그을리지 않고서야
어찌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겠습니까?
젊어 고생은 사서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생력이나 적응력 같은 정신적 근력은
이리 부딪히고 저리 깨어질 때 생겨납니다.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정적인 상태, 즉 좌선수행을 통해서만
삼매를 개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요한 환경에서의 알아차림(삼마-사띠) 만으로는
온전한 통찰력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불가사의한 중생업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일상 속에서 알아차림을 유지할 수 있을 때라야 만이
온실에 있던 화초라 할지라도 쉽게 말라 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의 알아차림만으로는
아직도 여전히 동력(자생력)이 부족합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알아차림(삼마-사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계·정·혜(戒定慧) 3학이 구족된 ‘팔정도’를 실천
수행하라 이르셨습니다. 팔정도 수행이야말로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알아차림(삼마-사띠)과 함께
팔정도를 닦고 있는 수행자라면
이제 무상관을 더불어 닦아야 합니다.
무상관(無常觀) 수행은 선택이 아닙니다.
생사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수행자라면
반드시 닦아야 하는 필수적인 수행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무상관’을 위빳사나 수행,
알아차림(삼마-사띠)수행을 통해 증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무상관 수행을 다른 수행과 병행해서 닦거나
독립적으로 닦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경전을 통해 무수히 많은 곳에서
무상(비항상)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무상관을 닦으라고 이르셨습니다. 이 승이
세계 여러 불교국가를 돌아다녀보아도
무상(비항상)만을 수행주제로 하여 닦는 수행자는
거의 본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위빳사나수행, 알아차림수행이 무상관을
전혀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을 통해 통찰지(通察智)가 성숙되면
제행을 무상(비항상)으로 깨닫는 지혜가 생겨나는데,
그때 비로소 모든 현상을 무상(비항상)으로
관할 수 있게 됩니다. 의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일체 현상이 절로 무상(비항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현상을 무상(비항상)으로 관하는 지혜는 통찰지혜가
정점에 이를 때까지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사실 '위빳사나(Vipassāna)'의 뜻을 살펴보면,
위(Vi) : 무상(고·무아)를 구분 혹은 관통
빳사나 (Passāna) : 보다, 발견한다. 즉,
현상을 무상(고·무아)로 관찰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경전에는 분명히
『물질[色]은 항상됨이 없다고 관찰하라.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은 바른 관찰이니라.
이와 같이 느낌[受]·생각[想]·지어감[行]·
의식[識]도 또한 항상됨이 없다고 관찰하라.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은 바른 관찰이니라. 』
라고 설해져 있습니다. 경전 도처에
수십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설해져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색(色)·수(受)·상(相)·행(行)·식(識)이라고 하는
오온(5가지 집착의 무더기)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무상관 수행은 오온(오취온)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언제나 어디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할 수 있으며,
지속적 혹은 간헐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상관 수행이 일상화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사성제를 확연히 이해하게 될 것이며, 마침내
구경의 해탈·열반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무상관 수행법] · 14
《 무상관 수행의 독립성 》
“비구들이여, 눈[귀,코,혀,몸,마노(意)]는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무아다. 무아인 것은‘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봐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귀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코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혀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몸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마노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램으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안의 무상 경,
Ajjhatta-anicca-sutta>(S35:1)
“비구들이여, 형색[소리,냄새,맛,감촉,마노의대상(法)]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무아다. 무아인 것은‘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봐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형색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소리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냄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맛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감촉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마노의 대상인 법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램으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밖의 무상 경,
Bāhira-anicca-sutta>(S35:4)
‘온실 속의 화초는 자생력이 약한 법’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도마 위의
예리한 칼날에 손가락 한번 안 베어 보고서야
어찌 제대로 부엌살림을 배울 수 있겠으며,
뙈약볕에 목덜미를 검게 그을리지 않고서야
어찌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겠습니까?
젊어 고생은 사서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생력이나 적응력 같은 정신적 근력은
이리 부딪히고 저리 깨어질 때 생겨납니다.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정적인 상태, 즉 좌선수행을 통해서만
삼매를 개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요한 환경에서의 알아차림(삼마-사띠) 만으로는
온전한 통찰력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불가사의한 중생업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일상 속에서 알아차림을 유지할 수 있을 때라야 만이
온실에 있던 화초라 할지라도 쉽게 말라 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의 알아차림만으로는
아직도 여전히 동력(자생력)이 부족합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알아차림(삼마-사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계·정·혜(戒定慧) 3학이 구족된 ‘팔정도’를 실천
수행하라 이르셨습니다. 팔정도 수행이야말로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알아차림(삼마-사띠)과 함께
팔정도를 닦고 있는 수행자라면
이제 무상관을 더불어 닦아야 합니다.
무상관(無常觀) 수행은 선택이 아닙니다.
생사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수행자라면
반드시 닦아야 하는 필수적인 수행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무상관’을 위빳사나 수행,
알아차림(삼마-사띠)수행을 통해 증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무상관 수행을 다른 수행과 병행해서 닦거나
독립적으로 닦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경전을 통해 무수히 많은 곳에서
무상(비항상)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무상관을 닦으라고 이르셨습니다. 이 승이
세계 여러 불교국가를 돌아다녀보아도
무상(비항상)만을 수행주제로 하여 닦는 수행자는
거의 본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위빳사나수행, 알아차림수행이 무상관을
전혀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을 통해 통찰지(通察智)가 성숙되면
제행을 무상(비항상)으로 깨닫는 지혜가 생겨나는데,
그때 비로소 모든 현상을 무상(비항상)으로
관할 수 있게 됩니다. 의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일체 현상이 절로 무상(비항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현상을 무상(비항상)으로 관하는 지혜는 통찰지혜가
정점에 이를 때까지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사실 '위빳사나(Vipassāna)'의 뜻을 살펴보면,
위(Vi) : 무상(고·무아)를 구분 혹은 관통
빳사나 (Passāna) : 보다, 발견한다. 즉,
현상을 무상(고·무아)로 관찰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경전에는 분명히
『물질[色]은 항상됨이 없다고 관찰하라.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은 바른 관찰이니라.
이와 같이 느낌[受]·생각[想]·지어감[行]·
의식[識]도 또한 항상됨이 없다고 관찰하라.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은 바른 관찰이니라. 』
라고 설해져 있습니다. 경전 도처에
수십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설해져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색(色)·수(受)·상(相)·행(行)·식(識)이라고 하는
오온(5가지 집착의 무더기)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무상관 수행은 오온(오취온)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언제나 어디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할 수 있으며,
지속적 혹은 간헐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상관 수행이 일상화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사성제를 확연히 이해하게 될 것이며, 마침내
구경의 해탈·열반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