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2-09 05:33
10. 제 4차 결집(불교 경전의 문자화)
인도에서 불교는 초기부터 고대 바라문교의 영향인 인도적 사고에 의해 경전의 문자화와 불상의 제작은 오랫동안 터부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의 역사에서 경전의 결집은 중요합니다. 결집 가운데 제3차 결집까지는 기억하고 있는 교법을 함께 합송하는 것이었지만, 제4차 결집은 지금까지 합송으로 전해져 왔던 삼장 및 그 주석서를 문자로 기록한 경전 필사의 결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경전 성립사의 관점에서 중요한 사건입니다.
기원 전 일세기 무렵에 테라와다의 정통인 마하위하라(Mahāvihāra, 대사)의 빅쿠들은 지금까지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구전되어 온 교법을, 처음 문자를 사용하여 필사 하게 됩니다.
디빠왕사와 마하왕사에 의하면, 「이전에는 큰 지혜있는 빅쿠들은 암송에 의해 삼장 경전 및 그 주석서를 미래에 전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교법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을 보고, 빅쿠들이 모여 교법을 오래도록 존속하기 위해서 필사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오래 이 세상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 순수하게 전승해온 가르침을 필사하여 패엽경에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문자로 필사하여 패엽경으로 남긴 곳은 스리랑카 고대 도시 아누라다뿌라(Anuradhapura)로부터 백 킬로 정도 떨어진 마탈레(Matale)의 알루위하라(Aluvihara (Alokavihara)) 석굴사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시와(Siva) 장로를 의장으로 한 5백 명의 빅쿠들이 참가해 왕의 후원을 받지 않고 7년에 걸쳐 완수한 대사업이었습니다. 빨리 삼장은 이때 패엽경에 완전하게 필사하였고, 싱할라 주석서는 A.D.I00년경까지 점차적으로 완료하여 기록되게 됩니다.
이것이 인도 불교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를 포함해 성전을 문자로 필사한 최초로 여겨집니다.
이렇게 필사된 패엽경을 1848년 영국군이 사원을 파괴하면서 소각해 버립니다. 2000년간 지켜온 최초의 필사본과 5세기 붓다고사 스님의 주석서들 모두를 말입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현재 알로까위하라 사원에는 800여 년 전에 제작된 패엽경이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경전을 필사한 배경 및 원인을 살펴보면,
불교가 정식으로 스리랑카에 전해진 것은 부처님의 입멸 후 236년 지나서 당시의 인도 왕인 아소까 왕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을 때 불교의 제3차 결집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후 제3차 결집의 의장이었던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는 여러 나라에 전도사들을 파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스리랑카에는 아라한인 마힌다 장로(Arahant Mahinda) 일행에 의해서 불교가 전해졌습니다.
불교가 스리랑카에 전도됐을 때는 데와남삐야 띳사(Devanampiya Tissa) 왕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 섬에는 확립된 기존의 종교는 없었기에 왕을 비롯한 백성들은 이 새로운 가르침이 매우 합리적인 진정한 가르침인 것을 충분히 이해한 다음 불교를 진심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이 맑고 깨끗한 가르침을 자유롭게 배우고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또한 기존의 민속신앙이나 전통 등 어떠한 것에도 오염되는 일이 없게끔 모든 수단을 다해 보존했습니다.
불교가 스리랑카에 확립되면서 스리랑카와 인도 사이에는 깊은 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스리랑카의 문화나 문명은 인도의 생활양식이나 삶의 방법에 매우 강하게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스리랑카의 왕들 중에는 부처님과 같은 석가족 자손의 왕녀들과 결혼한 왕도 있었습니다.
데와남삐야 띳사 왕은 마힌다 장로에 의해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었는데, 어느 날 마힌다 장로와 오래도록 이야기 한 후, 왕은 장로에게 불교가 이 나라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는지 어떤지 물었습니다. 장로의 대답은 “아니요! 아직 아닙니다.” 이었습니다. 마힌다 장로는 스리랑카 사람들이 스님이 되어 스스로 계율을 지키기 까지는 불교는 확고히 뿌리를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대답은 마힌다 장로가 불교의 현지화 내지 토착화를 언급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자 왕은 무언가 참배의 대상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소까 왕의 딸이었던 상가밋따(Saṅghamittā) 빅쿠니는 마가다의 부처님 성도지로부터 보리수 가지를 가져와서 이식하였는데 이것이 스리랑카에서 불교 참배의 대상으로서 확실히 정해지게 됩니다. 또한 데와남삐야 띳사 왕은 아누라다뿌라에 마하위하라를 건립하여 스리랑카 사람들이 출가하여 상가를 구성하고, 재가자들에게는 신앙의 거점이 될 여건을 마련하였습니다.
기원전 3세기 마힌다 장로에 의해 불교가 전해진 이후 당분간 평화가 계속되어 대대로 왕들은 불교를 보호해서 점차 불교가 활발하게 전파되었습니다. 어쨌든 아소까 왕 당시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사실은 각문 등을 통하여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마힌다 장로가 불교를 스리랑카로 들여왔을 때, 경전암송자(Bhānaka, 誦經者) 역시 같이 들어와 마하위하라(Mahāvihāra)의 몇몇 스리랑카 스님들이 송경자(Bhānaka)가 되어 모든 경전들을 암송하여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BC 1세기 경전들이 문자화될 때까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주었습니다. BC 1세기에 왕은 마하위하라의 몇몇 송경자들에게 담마 보전 보존을 위해 인도로 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인 60명은 우리 백성이 아직 고통 받고 있는데 어떻게 인도로 갈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왕의 충고를 거절했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담마를 암기하여 보존하기 위해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다른 빅쿠 스님들이 인도에서 돌아 왔을 때, 스리랑카에 남아 있던 스님들을 만나 함께 암송하면서 경전들을 비교하였습니다. 그들은 단 하나의 단어도 없어지거나 빠진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두 송경자 그룹이 단 하나의 단어도 잊어버리지 않고 구두로 경전들을 전승하였습니다.
한편 무외산사(Abhayagiri vihāra, 無畏山寺)라는 새로운 사원이 왓따가미니 아바야(Vaṭṭagāmani Abhaya) 왕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친분으로 마하띳사(Mahātissa) 빅쿠스님에게 주었습니다. 마하띳사 장로는 즉시 그리로 가지 않고 마하위하라 사원에 계속 머물렀습니다. 이 장로는 사교성이 있어서 속인의 집에도 자주 출입했기 때문에 지계 견고한 마하위하라 사원의 빅쿠로부터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마침내 마하위하라의 빅쿠스님들로부터 교단 추방의 처분을 받게 됩니다. 그 처분의 부당을 비난한 마하띳사 장로의 제자인 바할라맛수 띳사(Bahalamassu Tissa)는 그들의 추종자 5백 빅쿠와 함께 마하위하라 사원을 이탈해 독립의 일파를 형성하기에 이릅니다. 당연히 마하위하라 사원에서 쫒겨난 마하띳사 장로는 새로운 사원인 무외산사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곧 그곳은 많은 불교 행사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스리랑카의 불교는 정통보수적인 마하위하라(大寺)와 무외산사(無畏山寺)의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마하위하라 설립 후 대략 118년만에 스리랑카의 교단이 2개로 분열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은 BC 1세기에 일어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 후에도 무외산사파의 계통은 왕의 보호를 두껍게 받으며 법과 율에 이설을 주창하게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에 비하여 마하비하라 사원의 정통파는 점차 쇠락해 갔습니다.
한편 왓따가미니 아바야 왕 재위 동안 큰 가뭄이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굶주려 죽는 사람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빅쿠들은 산이나 숲으로 피난했습니다. 대사는 버림을 받아 경내에 나무가 어지럽게 뒤엉키고 풀과 이끼로 뒤덮였으며 사원은 방치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또한 계율에 철저한 빅쿠의 엄숙한 길을 실천할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환속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랫동안의 다양한 재난은 상가의 생활에 대단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성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다만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부처님의 순수한 말씀인 경전을 잘 지킬 필요가 명백하게 있었으므로 빅쿠들은 교법학습(Pariyatti)이 수행실천(Patipatti)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빅쿠들은 「불교의 근본은 빠리얏띠(pariyatti)인가 빠띠빳띠(patipatti)인가」라고 논쟁해, 전자가 승리를 거두어 경(Sutta)과 율(Vinaya)이 손상되지 않으면 실천은 손상되지 않기에, 교법학습이 수행실천을 능가한다는 것이 인정됩니다. 그래서 수행실천(Patipatti)보다 경전의 전승(suttante rakkhite)을 더 중시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행에는 뜻이 없고, 다만 생활을 위해서 출가하는 사람이 증가해 경전을 암송하는 의지가 약해지고, 교단 존속의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지금까지의 암송을 그만두고, 그 경전을 필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당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구전으로 전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고 있는 전문적인 송경자 빅쿠들의 죽음이 이어져 상가는 대단한 곤란에 직면했습니다. 이러한 위기에 빠진 상가를 구하기 위해서 빅쿠의 지도자들은 소의 성전을 보다 안전하게 전승하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하위하라 사원의 스님들은 만일 이러한 일이 앞으로 다시 일어난다면 담마는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담마가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마하위하라 사원의 스님들은 결집을 열고 그들 스스로 삼장과 주석서의 모든 텍스트를 종려나무 잎에 글자로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열린 이 회의가 제4차 결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불교의 텍스트가 이 결집에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불교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제4차 결집은 지금 알루위하라(Aluvihara)로 알려져 있는 알로까위하라(Ālokavihara, 광명사원)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알로까위하라에는 패엽경 제작을 위해 조성된 동굴이 14곳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은 현재의 캔디에 가까운 마탈레에 위치한 동굴입니다. 여기서 간단한 의문이 하나 떠오릅니다. 왜 당시의 수도인 아누라다뿌라(Anurādhapura)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결집을 행했을까? 통상적으로 앞서 열린 결집들은 더 좋은 시설들을 이용할 수 있는 큰 도시에서 열렸었습니다.
그러나 스리랑카에서 열린 제4차 결집은 왜 수도인 아누라다뿌라에서 열리지 않았을까? 우리는 정치적인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왓따가미니 아바야 왕은 마하위하라 사원보다는 아바야기리 사원에 있는 마하띳사 장로를 더 좋아했습니다. 반면 왕비는 마하위하라 사원의 독실한 후원자였습니다. 그래서 마하위하라 사원의 빅쿠 스님들은 왕으로부터 적극적인 후원을 받을 거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스리랑카의 도처에 마하위하라 사원의 분원들이 이미 설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스님들은 지역의 부호들인 지방귀족들의 후원을 왕의 후원보다 더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결집장소를 수도가 아닌 알로까위하라로 선택한 주된 이유일 것입니다.
작성일 : 13-12-09 05:33
10. 제 4차 결집(불교 경전의 문자화)
인도에서 불교는 초기부터 고대 바라문교의 영향인 인도적 사고에 의해 경전의 문자화와 불상의 제작은 오랫동안 터부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의 역사에서 경전의 결집은 중요합니다. 결집 가운데 제3차 결집까지는 기억하고 있는 교법을 함께 합송하는 것이었지만, 제4차 결집은 지금까지 합송으로 전해져 왔던 삼장 및 그 주석서를 문자로 기록한 경전 필사의 결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경전 성립사의 관점에서 중요한 사건입니다.
기원 전 일세기 무렵에 테라와다의 정통인 마하위하라(Mahāvihāra, 대사)의 빅쿠들은 지금까지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구전되어 온 교법을, 처음 문자를 사용하여 필사 하게 됩니다.
디빠왕사와 마하왕사에 의하면, 「이전에는 큰 지혜있는 빅쿠들은 암송에 의해 삼장 경전 및 그 주석서를 미래에 전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교법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을 보고, 빅쿠들이 모여 교법을 오래도록 존속하기 위해서 필사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오래 이 세상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 순수하게 전승해온 가르침을 필사하여 패엽경에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문자로 필사하여 패엽경으로 남긴 곳은 스리랑카 고대 도시 아누라다뿌라(Anuradhapura)로부터 백 킬로 정도 떨어진 마탈레(Matale)의 알루위하라(Aluvihara (Alokavihara)) 석굴사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시와(Siva) 장로를 의장으로 한 5백 명의 빅쿠들이 참가해 왕의 후원을 받지 않고 7년에 걸쳐 완수한 대사업이었습니다. 빨리 삼장은 이때 패엽경에 완전하게 필사하였고, 싱할라 주석서는 A.D.I00년경까지 점차적으로 완료하여 기록되게 됩니다.
이것이 인도 불교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를 포함해 성전을 문자로 필사한 최초로 여겨집니다.
이렇게 필사된 패엽경을 1848년 영국군이 사원을 파괴하면서 소각해 버립니다. 2000년간 지켜온 최초의 필사본과 5세기 붓다고사 스님의 주석서들 모두를 말입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현재 알로까위하라 사원에는 800여 년 전에 제작된 패엽경이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경전을 필사한 배경 및 원인을 살펴보면,
불교가 정식으로 스리랑카에 전해진 것은 부처님의 입멸 후 236년 지나서 당시의 인도 왕인 아소까 왕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을 때 불교의 제3차 결집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후 제3차 결집의 의장이었던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는 여러 나라에 전도사들을 파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스리랑카에는 아라한인 마힌다 장로(Arahant Mahinda) 일행에 의해서 불교가 전해졌습니다.
불교가 스리랑카에 전도됐을 때는 데와남삐야 띳사(Devanampiya Tissa) 왕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 섬에는 확립된 기존의 종교는 없었기에 왕을 비롯한 백성들은 이 새로운 가르침이 매우 합리적인 진정한 가르침인 것을 충분히 이해한 다음 불교를 진심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이 맑고 깨끗한 가르침을 자유롭게 배우고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또한 기존의 민속신앙이나 전통 등 어떠한 것에도 오염되는 일이 없게끔 모든 수단을 다해 보존했습니다.
불교가 스리랑카에 확립되면서 스리랑카와 인도 사이에는 깊은 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스리랑카의 문화나 문명은 인도의 생활양식이나 삶의 방법에 매우 강하게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스리랑카의 왕들 중에는 부처님과 같은 석가족 자손의 왕녀들과 결혼한 왕도 있었습니다.
데와남삐야 띳사 왕은 마힌다 장로에 의해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었는데, 어느 날 마힌다 장로와 오래도록 이야기 한 후, 왕은 장로에게 불교가 이 나라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는지 어떤지 물었습니다. 장로의 대답은 “아니요! 아직 아닙니다.” 이었습니다. 마힌다 장로는 스리랑카 사람들이 스님이 되어 스스로 계율을 지키기 까지는 불교는 확고히 뿌리를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대답은 마힌다 장로가 불교의 현지화 내지 토착화를 언급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자 왕은 무언가 참배의 대상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소까 왕의 딸이었던 상가밋따(Saṅghamittā) 빅쿠니는 마가다의 부처님 성도지로부터 보리수 가지를 가져와서 이식하였는데 이것이 스리랑카에서 불교 참배의 대상으로서 확실히 정해지게 됩니다. 또한 데와남삐야 띳사 왕은 아누라다뿌라에 마하위하라를 건립하여 스리랑카 사람들이 출가하여 상가를 구성하고, 재가자들에게는 신앙의 거점이 될 여건을 마련하였습니다.
기원전 3세기 마힌다 장로에 의해 불교가 전해진 이후 당분간 평화가 계속되어 대대로 왕들은 불교를 보호해서 점차 불교가 활발하게 전파되었습니다. 어쨌든 아소까 왕 당시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사실은 각문 등을 통하여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마힌다 장로가 불교를 스리랑카로 들여왔을 때, 경전암송자(Bhānaka, 誦經者) 역시 같이 들어와 마하위하라(Mahāvihāra)의 몇몇 스리랑카 스님들이 송경자(Bhānaka)가 되어 모든 경전들을 암송하여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BC 1세기 경전들이 문자화될 때까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주었습니다. BC 1세기에 왕은 마하위하라의 몇몇 송경자들에게 담마 보전 보존을 위해 인도로 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인 60명은 우리 백성이 아직 고통 받고 있는데 어떻게 인도로 갈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왕의 충고를 거절했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담마를 암기하여 보존하기 위해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다른 빅쿠 스님들이 인도에서 돌아 왔을 때, 스리랑카에 남아 있던 스님들을 만나 함께 암송하면서 경전들을 비교하였습니다. 그들은 단 하나의 단어도 없어지거나 빠진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두 송경자 그룹이 단 하나의 단어도 잊어버리지 않고 구두로 경전들을 전승하였습니다.
한편 무외산사(Abhayagiri vihāra, 無畏山寺)라는 새로운 사원이 왓따가미니 아바야(Vaṭṭagāmani Abhaya) 왕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친분으로 마하띳사(Mahātissa) 빅쿠스님에게 주었습니다. 마하띳사 장로는 즉시 그리로 가지 않고 마하위하라 사원에 계속 머물렀습니다. 이 장로는 사교성이 있어서 속인의 집에도 자주 출입했기 때문에 지계 견고한 마하위하라 사원의 빅쿠로부터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마침내 마하위하라의 빅쿠스님들로부터 교단 추방의 처분을 받게 됩니다. 그 처분의 부당을 비난한 마하띳사 장로의 제자인 바할라맛수 띳사(Bahalamassu Tissa)는 그들의 추종자 5백 빅쿠와 함께 마하위하라 사원을 이탈해 독립의 일파를 형성하기에 이릅니다. 당연히 마하위하라 사원에서 쫒겨난 마하띳사 장로는 새로운 사원인 무외산사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곧 그곳은 많은 불교 행사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스리랑카의 불교는 정통보수적인 마하위하라(大寺)와 무외산사(無畏山寺)의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마하위하라 설립 후 대략 118년만에 스리랑카의 교단이 2개로 분열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은 BC 1세기에 일어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 후에도 무외산사파의 계통은 왕의 보호를 두껍게 받으며 법과 율에 이설을 주창하게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에 비하여 마하비하라 사원의 정통파는 점차 쇠락해 갔습니다.
한편 왓따가미니 아바야 왕 재위 동안 큰 가뭄이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굶주려 죽는 사람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빅쿠들은 산이나 숲으로 피난했습니다. 대사는 버림을 받아 경내에 나무가 어지럽게 뒤엉키고 풀과 이끼로 뒤덮였으며 사원은 방치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또한 계율에 철저한 빅쿠의 엄숙한 길을 실천할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환속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랫동안의 다양한 재난은 상가의 생활에 대단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성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다만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부처님의 순수한 말씀인 경전을 잘 지킬 필요가 명백하게 있었으므로 빅쿠들은 교법학습(Pariyatti)이 수행실천(Patipatti)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빅쿠들은 「불교의 근본은 빠리얏띠(pariyatti)인가 빠띠빳띠(patipatti)인가」라고 논쟁해, 전자가 승리를 거두어 경(Sutta)과 율(Vinaya)이 손상되지 않으면 실천은 손상되지 않기에, 교법학습이 수행실천을 능가한다는 것이 인정됩니다. 그래서 수행실천(Patipatti)보다 경전의 전승(suttante rakkhite)을 더 중시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행에는 뜻이 없고, 다만 생활을 위해서 출가하는 사람이 증가해 경전을 암송하는 의지가 약해지고, 교단 존속의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지금까지의 암송을 그만두고, 그 경전을 필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당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구전으로 전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고 있는 전문적인 송경자 빅쿠들의 죽음이 이어져 상가는 대단한 곤란에 직면했습니다. 이러한 위기에 빠진 상가를 구하기 위해서 빅쿠의 지도자들은 소의 성전을 보다 안전하게 전승하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하위하라 사원의 스님들은 만일 이러한 일이 앞으로 다시 일어난다면 담마는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담마가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마하위하라 사원의 스님들은 결집을 열고 그들 스스로 삼장과 주석서의 모든 텍스트를 종려나무 잎에 글자로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열린 이 회의가 제4차 결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불교의 텍스트가 이 결집에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불교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제4차 결집은 지금 알루위하라(Aluvihara)로 알려져 있는 알로까위하라(Ālokavihara, 광명사원)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알로까위하라에는 패엽경 제작을 위해 조성된 동굴이 14곳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은 현재의 캔디에 가까운 마탈레에 위치한 동굴입니다. 여기서 간단한 의문이 하나 떠오릅니다. 왜 당시의 수도인 아누라다뿌라(Anurādhapura)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결집을 행했을까? 통상적으로 앞서 열린 결집들은 더 좋은 시설들을 이용할 수 있는 큰 도시에서 열렸었습니다.
그러나 스리랑카에서 열린 제4차 결집은 왜 수도인 아누라다뿌라에서 열리지 않았을까? 우리는 정치적인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왓따가미니 아바야 왕은 마하위하라 사원보다는 아바야기리 사원에 있는 마하띳사 장로를 더 좋아했습니다. 반면 왕비는 마하위하라 사원의 독실한 후원자였습니다. 그래서 마하위하라 사원의 빅쿠 스님들은 왕으로부터 적극적인 후원을 받을 거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스리랑카의 도처에 마하위하라 사원의 분원들이 이미 설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스님들은 지역의 부호들인 지방귀족들의 후원을 왕의 후원보다 더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결집장소를 수도가 아닌 알로까위하라로 선택한 주된 이유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