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1-03 19:11
야사 장로는 다문이며, 전승자이며, 지법자이며, 지율자이며, 현자였기 때문에 많은 지지자가 나타났습니다.
⑦ 야사 장로는 아호강가(Ahogaṅga) 산에 머무르고 있는 삼부따 사나와시(Sambhūta Sānavāsi) 장로를 방문하여 웨살리에서 행해지고 있는 비계율적인 10가지 항목에 관하여 상세하게 전합니다. 삼부따 사나바시 장로도 이것들이 비법이라는데 동의하였습니다. 그 때 빠테이야(Pātheyya, 서쪽 인도)로부터 60명의 비구들이 아호강가 산에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모두 삼림거주자(森林居住者)이며, 걸식자이며, 분소의자(糞掃衣者)이며, 삼의자(三衣者)이며, 아라한이었습니다. 아완띠(Avanti)와 닥키나빠타(데칸 남로) 지방으로부터도 88명의 비구들이 아호강가 산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 장로들은 소레이야(Soreyya: 마투라의 동쪽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레와따(Revata) 대장로를 떠올립니다.
⑧ 그 때 소레이야에 거주하고 있던 레와따 대장로는 천이통으로 장로들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논쟁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피해서 여러 곳으로 이동하다가, 사하자띠(Sahajāti)에서 장로들과 만나게 됩니다.
⑨ 야사는 레와따 대장로에게 열 가지 항목의 합법성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레와따는 열 가지 항목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들어본 뒤, 단호하게 그것을 비난하고, 논쟁에 참가하겠다고 약속합니다.
⑩ 한편 왓지족 출신 비구들은 이 논쟁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버려서 귀찮은 생각이 들어 레와따 대장로에게 사태의 수습과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동의를 위해 출가자의 필수품을 준비해서 대표단을 보냅니다.
⑪ 그때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살하(Sālha) 장로는 선정 중에 “빠찌나(Pācīna, 동쪽 인도)의 비구들은 비법설자이며, 빠테이야(Pātheyya, 서쪽 인도)의 비구들이야말로 여법설자이다.”라고 생각하며, 정거천 신들과 대화하고, 신들도 그의 생각에 동의를 표시합니다. 그러나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합니다.
10가지 항목의 논쟁을 동쪽의 비구와 서쪽의 비구의 분쟁으로 2분화해서, 동쪽의 비구가 비법을 말하고, 서쪽의 비구가 여법을 말한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단계에서 야사 장로 측과 왓지족 출신 비구들과의 대립은 명백합니다. 그런데 돌연 여법설자 측과 비법설자 측의 대립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상가가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동쪽의 비구들이 비법설자라고 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⑫ 웨살리의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은 레와따 장로를 찾아가 준비해 온 출가자의 필수품을 건네주려고 하지만 거절당합니다. 그래서 웨살리의 비구들은 레와따 장로의 제자인 웃따라(Uttara) 비구에게 출가자의 필수품을 건네줍니다. 웃따라는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그들의 권유를 못 이기고는 한 벌의 가사를 받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비구들은 웃따라 비구에게 “모든 부처님(佛世尊)은 동방의 국토에서 태어나셨다. 동쪽의 비구들이야말로 여법설자이며, 서쪽의 비구들은 비법설자이다.”라고 레와따 장로가 말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⑬ 웃따라 비구는 레와따 장로에게 이 말을 전하지만, 레와따 장로는 「너는 나에게 비법을 재촉했다」라고 하며 웃따라 비구를 떠나게 합니다. 웃따라 비구는 그 말을 왓지족 출신 비구들에게 전하자, 하는 수없이 왓지족 출신 비구들은 웃따라 비구를 스승으로 받들기로 합니다.
⑭ 이후로 갈라진 양자를 화합시키는 절차를 행하게 됩니다.
상가는 레와따 장로의 제의로 그 논쟁의 판결을 내리기 위해 웨살리로 갔습니다.
상가 대중들이 모이자 레와따 장로는 곧바로 논쟁에 대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⑮ 그때 삽바까미(Sabbakāmi)라는 대장로가 웨살리에 있었는데, 이 대장로는 아난다의 제자로 법랍이 120년이었습니다. 레와따 장로는 먼저 삽바까미 대장로를 찾아갑니다. 뒤따라 아호강가 산에 머물던 삼부따 사나와시(Sambhūta Sānavāsi) 장로도 그곳에 방문합니다.
⑯ 삼부따 사나와시 장로가 문제점들을 삽바까미 대장로에게 설명하자, 삽바까미 대장로는 “동쪽의 비구들은 비법설자이며, 서쪽의 비구들이 여법설자이다.”라고 판정합니다. 이에 삼부따 사나와시 장로도 동의를 표합니다.
드디어 10가지 항목을 둘러싼 논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비구들이 다 모였습니다.
⑰ 상가는 논쟁에 대한 판결을 내리려고 모였지만, 끝없는 논의가 되풀이 됩니다. 그래서 레와따 장로는 단사인(ubbahika, 斷事人, 분쟁을 조정해 화해시키는 직무를 행하는 자, 중재위원)을 선출해서, 논쟁을 진정시킬 것을 제안합니다. 그렇게 해서 동쪽과 서쪽 비구들로부터 네 사람씩 총 8명의 단사인이 선출됩니다.
율장의 건도부에는 이와 같이 끝없는 논의(anaggani bhassani)가 생길 경우에, 단사인을 선출하는 규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가가 분열 상태에 있는 것을 화합시키는 경우에는 통상의 다수결보다 단사인 선출로 전원 일치의 결론으로 상가의 화합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⑱ 즉, 8명은 삽바까미(Sabbakāmi), 살하(Sālha), 쿳자소비따(Khujjasobhita), 와사바가미까(Vāsabhagāmika), 레와따(Revata), 삼부따 사나와시(Sambhūta Sānavāsin), 야사(Yasa), 수마나(Sumana), 그리고 좌석 배정의 책임을 맡은 아지따(Ajita) 등으로 구성된 단사인에게 이 논쟁의 판결을 위임했습니다. 그리고 700명의 비구들은 웨살리에 있는 왈리까라마(Vālikārāma)가 이 논쟁을 진정시키는 장소로 적당하다고 하여 그곳으로 모두 갔습니다.
레와따 장로의 사회로 갈마가 이루어졌습니다. 레와따 장로가 10가지의 항목 하나 하나를 물으면, 삽바까미 대장로가 그것들을 빠띠목카(Pātimokkha, 戒本)의 조항과 대조하면서 대답하는 형식이었습니다.
⑲ 삽바까미 대장로는 각 항목의 구체적인 내용이 어떠한 율에 근거하는지를 설명한 후에, 그에 대한 정(淨)·부정(不淨)을 가렸습니다. 단사인들의 합의를 거쳐 이러한 것들을 재가하게 되고, 의장인 레와따 장로는 비법, 비율이라고 결정 난 것을 최종적으로 젓가락을 던져(salakaṁ nikkhipami) 확정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열 가지 항목에 대한 모든 판정이 행하여졌습니다. 상법정(常法淨) 이외의 9가지 항목이 모두 율에 저촉되는 행위로 판정됩니다. 상법정은 경우에 따라 인정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이들 열 가지 항목은 상가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이들은 모두 비법(邪法)이며, 비율(邪律)이며 스승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라고 하며 열 가지 항목에 대한 모든 심의가 끝납니다.
⑳ 마지막에 레와따 장로는 10가지 항목의 결착을 선언합니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논쟁(adhikarana)을 진정시키는 것이 빨리율 주석서에서 설명하는 제2차 결집의 목적이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상가 분쟁은 있어도 결론을 도출시켜 분쟁을 진정시킬 수 있었기에 파상가는 되지 않도록 노력한 것입니다.
부처님 없는 상가의 자주적 운영에서 부처님의 법과 율을 둘러싼 분쟁은 불가피하지만, 상가 내의 분쟁의 진압과 파상가의 회피를 통해서 부처님이 없어도 상가의 화합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보여줍니다.
㉑ 이 논쟁을 계기로 웨살리에 운집해있던 700명의 장로들은 경과 율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결집을 다시 실시했던 것입니다. 이 제2차 결집은 제1차 결집 때 확정된 부처님의 담마(Dhamma)와 위나야(Vinaya)를 다시 확인하고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새롭게 경전이나 율장을 만든 수도 없고, 경도 율도 결코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여기서 재확인했습니다.
이 결집은 깔라소까(Kālāsoka) 왕의 재위 10년, 기원전 386년에 8개월 동안 행해졌고, 700명의 장로들이 모여서 행한 결집이기에 칠백결집이라고도 부릅니다.
작성일 : 13-11-03 19:11
야사 장로는 다문이며, 전승자이며, 지법자이며, 지율자이며, 현자였기 때문에 많은 지지자가 나타났습니다.
⑦ 야사 장로는 아호강가(Ahogaṅga) 산에 머무르고 있는 삼부따 사나와시(Sambhūta Sānavāsi) 장로를 방문하여 웨살리에서 행해지고 있는 비계율적인 10가지 항목에 관하여 상세하게 전합니다. 삼부따 사나바시 장로도 이것들이 비법이라는데 동의하였습니다. 그 때 빠테이야(Pātheyya, 서쪽 인도)로부터 60명의 비구들이 아호강가 산에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모두 삼림거주자(森林居住者)이며, 걸식자이며, 분소의자(糞掃衣者)이며, 삼의자(三衣者)이며, 아라한이었습니다. 아완띠(Avanti)와 닥키나빠타(데칸 남로) 지방으로부터도 88명의 비구들이 아호강가 산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 장로들은 소레이야(Soreyya: 마투라의 동쪽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레와따(Revata) 대장로를 떠올립니다.
⑧ 그 때 소레이야에 거주하고 있던 레와따 대장로는 천이통으로 장로들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논쟁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피해서 여러 곳으로 이동하다가, 사하자띠(Sahajāti)에서 장로들과 만나게 됩니다.
⑨ 야사는 레와따 대장로에게 열 가지 항목의 합법성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레와따는 열 가지 항목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들어본 뒤, 단호하게 그것을 비난하고, 논쟁에 참가하겠다고 약속합니다.
⑩ 한편 왓지족 출신 비구들은 이 논쟁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버려서 귀찮은 생각이 들어 레와따 대장로에게 사태의 수습과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동의를 위해 출가자의 필수품을 준비해서 대표단을 보냅니다.
⑪ 그때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살하(Sālha) 장로는 선정 중에 “빠찌나(Pācīna, 동쪽 인도)의 비구들은 비법설자이며, 빠테이야(Pātheyya, 서쪽 인도)의 비구들이야말로 여법설자이다.”라고 생각하며, 정거천 신들과 대화하고, 신들도 그의 생각에 동의를 표시합니다. 그러나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합니다.
10가지 항목의 논쟁을 동쪽의 비구와 서쪽의 비구의 분쟁으로 2분화해서, 동쪽의 비구가 비법을 말하고, 서쪽의 비구가 여법을 말한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단계에서 야사 장로 측과 왓지족 출신 비구들과의 대립은 명백합니다. 그런데 돌연 여법설자 측과 비법설자 측의 대립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상가가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동쪽의 비구들이 비법설자라고 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⑫ 웨살리의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은 레와따 장로를 찾아가 준비해 온 출가자의 필수품을 건네주려고 하지만 거절당합니다. 그래서 웨살리의 비구들은 레와따 장로의 제자인 웃따라(Uttara) 비구에게 출가자의 필수품을 건네줍니다. 웃따라는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그들의 권유를 못 이기고는 한 벌의 가사를 받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비구들은 웃따라 비구에게 “모든 부처님(佛世尊)은 동방의 국토에서 태어나셨다. 동쪽의 비구들이야말로 여법설자이며, 서쪽의 비구들은 비법설자이다.”라고 레와따 장로가 말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⑬ 웃따라 비구는 레와따 장로에게 이 말을 전하지만, 레와따 장로는 「너는 나에게 비법을 재촉했다」라고 하며 웃따라 비구를 떠나게 합니다. 웃따라 비구는 그 말을 왓지족 출신 비구들에게 전하자, 하는 수없이 왓지족 출신 비구들은 웃따라 비구를 스승으로 받들기로 합니다.
⑭ 이후로 갈라진 양자를 화합시키는 절차를 행하게 됩니다.
상가는 레와따 장로의 제의로 그 논쟁의 판결을 내리기 위해 웨살리로 갔습니다.
상가 대중들이 모이자 레와따 장로는 곧바로 논쟁에 대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⑮ 그때 삽바까미(Sabbakāmi)라는 대장로가 웨살리에 있었는데, 이 대장로는 아난다의 제자로 법랍이 120년이었습니다. 레와따 장로는 먼저 삽바까미 대장로를 찾아갑니다. 뒤따라 아호강가 산에 머물던 삼부따 사나와시(Sambhūta Sānavāsi) 장로도 그곳에 방문합니다.
⑯ 삼부따 사나와시 장로가 문제점들을 삽바까미 대장로에게 설명하자, 삽바까미 대장로는 “동쪽의 비구들은 비법설자이며, 서쪽의 비구들이 여법설자이다.”라고 판정합니다. 이에 삼부따 사나와시 장로도 동의를 표합니다.
드디어 10가지 항목을 둘러싼 논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비구들이 다 모였습니다.
⑰ 상가는 논쟁에 대한 판결을 내리려고 모였지만, 끝없는 논의가 되풀이 됩니다. 그래서 레와따 장로는 단사인(ubbahika, 斷事人, 분쟁을 조정해 화해시키는 직무를 행하는 자, 중재위원)을 선출해서, 논쟁을 진정시킬 것을 제안합니다. 그렇게 해서 동쪽과 서쪽 비구들로부터 네 사람씩 총 8명의 단사인이 선출됩니다.
율장의 건도부에는 이와 같이 끝없는 논의(anaggani bhassani)가 생길 경우에, 단사인을 선출하는 규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가가 분열 상태에 있는 것을 화합시키는 경우에는 통상의 다수결보다 단사인 선출로 전원 일치의 결론으로 상가의 화합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⑱ 즉, 8명은 삽바까미(Sabbakāmi), 살하(Sālha), 쿳자소비따(Khujjasobhita), 와사바가미까(Vāsabhagāmika), 레와따(Revata), 삼부따 사나와시(Sambhūta Sānavāsin), 야사(Yasa), 수마나(Sumana), 그리고 좌석 배정의 책임을 맡은 아지따(Ajita) 등으로 구성된 단사인에게 이 논쟁의 판결을 위임했습니다. 그리고 700명의 비구들은 웨살리에 있는 왈리까라마(Vālikārāma)가 이 논쟁을 진정시키는 장소로 적당하다고 하여 그곳으로 모두 갔습니다.
레와따 장로의 사회로 갈마가 이루어졌습니다. 레와따 장로가 10가지의 항목 하나 하나를 물으면, 삽바까미 대장로가 그것들을 빠띠목카(Pātimokkha, 戒本)의 조항과 대조하면서 대답하는 형식이었습니다.
⑲ 삽바까미 대장로는 각 항목의 구체적인 내용이 어떠한 율에 근거하는지를 설명한 후에, 그에 대한 정(淨)·부정(不淨)을 가렸습니다. 단사인들의 합의를 거쳐 이러한 것들을 재가하게 되고, 의장인 레와따 장로는 비법, 비율이라고 결정 난 것을 최종적으로 젓가락을 던져(salakaṁ nikkhipami) 확정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열 가지 항목에 대한 모든 판정이 행하여졌습니다. 상법정(常法淨) 이외의 9가지 항목이 모두 율에 저촉되는 행위로 판정됩니다. 상법정은 경우에 따라 인정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이들 열 가지 항목은 상가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이들은 모두 비법(邪法)이며, 비율(邪律)이며 스승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라고 하며 열 가지 항목에 대한 모든 심의가 끝납니다.
⑳ 마지막에 레와따 장로는 10가지 항목의 결착을 선언합니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논쟁(adhikarana)을 진정시키는 것이 빨리율 주석서에서 설명하는 제2차 결집의 목적이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상가 분쟁은 있어도 결론을 도출시켜 분쟁을 진정시킬 수 있었기에 파상가는 되지 않도록 노력한 것입니다.
부처님 없는 상가의 자주적 운영에서 부처님의 법과 율을 둘러싼 분쟁은 불가피하지만, 상가 내의 분쟁의 진압과 파상가의 회피를 통해서 부처님이 없어도 상가의 화합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보여줍니다.
㉑ 이 논쟁을 계기로 웨살리에 운집해있던 700명의 장로들은 경과 율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결집을 다시 실시했던 것입니다. 이 제2차 결집은 제1차 결집 때 확정된 부처님의 담마(Dhamma)와 위나야(Vinaya)를 다시 확인하고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새롭게 경전이나 율장을 만든 수도 없고, 경도 율도 결코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여기서 재확인했습니다.
이 결집은 깔라소까(Kālāsoka) 왕의 재위 10년, 기원전 386년에 8개월 동안 행해졌고, 700명의 장로들이 모여서 행한 결집이기에 칠백결집이라고도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