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3-25 15:30
天水님의 글을 오늘 문득 보고서야 답글 올리게 되어 미안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수행문답을 담당하고 계신 뿐냐디빠스님께서는 홈페이지를 둘러보는 것도 잊은 채 근 한 달째 중요한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널리 이해 바랍니다.
天水님의 글을 보고 님께서 얼마나 진지하게 열의를 갖고 정진하고 계신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찬사와 격려의 마음을 보냅니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탐진치를 여의어서 그 어떤 내적 외적 대상에도 휘둘리지 않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것인데, 수행을 하다보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정신적 혹은 신체적 고통(둑카)이 현저하게 드러나는 때를 만나게 됩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지요? 좋은 일에는 꼭 마구니들이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다는. 게으른 수행자들에게는 마구니들도 잘 끼어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혜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마구니로 비유된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까요?
지혜로운 수행자는 고통이 두드러질 때, 그 감각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그런 불편한 감각으로부터 빨리 벗어나려하거나 걱정하기 보다는 우선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질 때 그 대상에 대해 순간순간 스스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를 비추어봅니다. 그럼으로써 그 대상과 나와의 관계성을 바르게 이해하게 되고, 고통의 발생원인을 파악하게 됩니다.
고통에 대한 인식은 오온을 가진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런 하나의 현상입니다. 지혜로운 수행자는 이때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둑카 아리야 삿짜)’를 관념이 아닌 실재로써 비추어보고 한 층 성숙된 지혜를 갖추게 됩니다.
수행 중에 신체의 이상은 대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선천적으로, 혹은 성장기에 완전한 성숙을 하지 못한 신체기관이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일상 생활에서는 전혀 인식되지 않다가 선정력이 높아지면서 사소한 감각까지도 예민하게 인지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특수한 자세를 무리하게 오래 취함으로써 4대로 구성된 신체의 균형이 깨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불교수행을 중도수행이라고 합니다. 몸과 마음이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을 때, 지혜가 성숙됩니다. 최적의 조건이란 치우짐이 없는 것, 몸의 흐름과 마음의 흐름을 바르게 알고, 한 대상(그 대상이 좌선의 대상일 수도, 행선의 대상일 수도)을 향해서만 의도적으로 과도하게 집중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치우친 수행을 하다보면 신체적 혹은 정신적 고통에 휘둘리게 됩니다.
4시간 좌선하고 30분쯤 행선한다는 말을 통해 님께선 이미 어떤 한 대상을 선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체에 이상이 감지된다는 것은 수행의 불균형을 되돌아보라는 신호로 볼 수 있습니다. 행선은 정진력을 북돋아주고 더욱 성성한 알아차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좌선은 대상에 안착할 수 있는 집중력을 강화시켜줍니다. 이 둘의 균형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지혜의 성숙 조건입니다. 균형이란 말은 50:50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님께서도 이해하시리라 사료됩니다. 님 정도의 수행연륜이라면 이제 행주좌와 어묵동정 그 어느 때라도 알아차림하면서 균형을 맞추어 갈 수 있습니다. 일상과 수행이 분리되면 우리는 자칫 행선을 통해서 혹은 좌선을 통해서 깨달음이나 그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수행이란 깨달음이나 그 어떤 얻을만한 것이 따로 있지 않음을 바르게 알아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소승이 한 때 외국의 한 수행처에 머물 때의 일입니다. 좌선할 때 수행이 잘 되는 듯해서 하루는 밥도 안먹고 행선도 안하고 하루종일 좌선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 시간 쯤 지나자 무릎이 아파오고 불쾌한 마음이 온몸을 지배하면서 그간의 선정력은 간데 없고 얼마나 오랫동안 앉아 버틸 수 있는가 보자는 식의 오기로 계속 버티어 보았습니다. ‘대단하다, 아무도 저 수행자를 방해하지 마라’ 는 소리가 귀가를 스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눈을 떴을 때 창밖의 바나나 나뭇닢 위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의 어리섞은 행동으로 인해 지금도 무릎관절이 부드럽지 않습니다. 스승께서는 그때 속으로 ‘ 어리섞은 것, 딱한 것’ 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도 그때를 반성하고 있습니다.
‘삼빠잔나’ 라는 빨리어 단어가 있습니다. ‘正知 , 분명한 앎’ 으로 풀이되는 이 단어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행을 바르게 지어가다 보면, 의식이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대상과 나를 바르게 이해하는 지혜가 생겨납니다. 삼빠잔나는 수행의 대상을 작의적으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알아차림하고 있는 의식을 비추어보거나 균형이 깨지는 것을 감지해 신호를 보내주기도 하며, 수행의 바른 대상 쪽으로 수행자의 의식을 이끕니다. 좌선할 때를, 행선할 때를, 밥먹야 할 때를, 말을 해야 할 때를, 어디에 알아차림을 두어야 할지를 알려주며, 더욱 중요한 것은, 수행대상에 매몰되지 않고 깨어서 바르게 알 수 있도록 합니다.
좌선을 하다보면 대상으로부터 그 무언가를 얻거나 발견하기 위하여 과도한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신체의 불균형을 초래하기도 하고, 대상을 향하여 지나치게 집중하다 보면, 선정의 좋은 느낌에 집착한 나머지 변하고 있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스스로 깨어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지혜가 성숙된, 온전히 깨어있는 수행자는 그 어떤 대상의 변화에도 반응하여 놀라거나 동요하지 않습니다. 변화를 빠르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할 뿐입니다. 그러나 대상에 몰입되어 있는 경우에는 선정력의 깊이에 따라 선정이 깨어지는 파동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님께서도 주의 깊게 숙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님께서는 요근래 좌선을 통해서 선정의 맛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하게 깨어있지 못하면 신체의 균형이 깨지는 것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수행자들은 자신의 신체 조건을 잘 살펴 그 조건에 맞는 자세나 방식을 계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행 중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통증들은 현저했다가도 수행이 깊어지면서 그 증상들이 완화되거나 근본적으로 치유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잘못된 수행방식, 혹은 어떤 구조적인 결함으로 인한 이상증세는 그 증세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좌선을 많이 해야만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법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당분간 행선과 와선 의자선 그리고 일상생활에서의 알아차림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시고, 108배 등 절수행을 통해 몸의 감각, 통증이 발생했던 고관절 부위의 감각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좌선할 때와 절할 때 나타나는 감각들에 대해서 마음이 각각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 차이를 체크해 보십시오. 관절은 완전하진 않겠지만 반드시 좋아집니다. 일정 기간이 경과했는데도 사라지지 않을 경우엔 꼭 외과검진을 통해 처방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자가 병원과 약국을 통해 치료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다만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자가치유의 위대한 능력을 사장시키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天水님, 대자유인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작성일 : 11-03-25 15:30
天水님의 글을 오늘 문득 보고서야 답글 올리게 되어 미안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수행문답을 담당하고 계신 뿐냐디빠스님께서는 홈페이지를 둘러보는 것도 잊은 채 근 한 달째 중요한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널리 이해 바랍니다.
天水님의 글을 보고 님께서 얼마나 진지하게 열의를 갖고 정진하고 계신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찬사와 격려의 마음을 보냅니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탐진치를 여의어서 그 어떤 내적 외적 대상에도 휘둘리지 않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것인데, 수행을 하다보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정신적 혹은 신체적 고통(둑카)이 현저하게 드러나는 때를 만나게 됩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지요? 좋은 일에는 꼭 마구니들이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다는. 게으른 수행자들에게는 마구니들도 잘 끼어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혜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마구니로 비유된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까요?
지혜로운 수행자는 고통이 두드러질 때, 그 감각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그런 불편한 감각으로부터 빨리 벗어나려하거나 걱정하기 보다는 우선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질 때 그 대상에 대해 순간순간 스스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를 비추어봅니다. 그럼으로써 그 대상과 나와의 관계성을 바르게 이해하게 되고, 고통의 발생원인을 파악하게 됩니다.
고통에 대한 인식은 오온을 가진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런 하나의 현상입니다. 지혜로운 수행자는 이때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둑카 아리야 삿짜)’를 관념이 아닌 실재로써 비추어보고 한 층 성숙된 지혜를 갖추게 됩니다.
수행 중에 신체의 이상은 대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선천적으로, 혹은 성장기에 완전한 성숙을 하지 못한 신체기관이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일상 생활에서는 전혀 인식되지 않다가 선정력이 높아지면서 사소한 감각까지도 예민하게 인지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특수한 자세를 무리하게 오래 취함으로써 4대로 구성된 신체의 균형이 깨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불교수행을 중도수행이라고 합니다. 몸과 마음이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을 때, 지혜가 성숙됩니다. 최적의 조건이란 치우짐이 없는 것, 몸의 흐름과 마음의 흐름을 바르게 알고, 한 대상(그 대상이 좌선의 대상일 수도, 행선의 대상일 수도)을 향해서만 의도적으로 과도하게 집중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치우친 수행을 하다보면 신체적 혹은 정신적 고통에 휘둘리게 됩니다.
4시간 좌선하고 30분쯤 행선한다는 말을 통해 님께선 이미 어떤 한 대상을 선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체에 이상이 감지된다는 것은 수행의 불균형을 되돌아보라는 신호로 볼 수 있습니다. 행선은 정진력을 북돋아주고 더욱 성성한 알아차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좌선은 대상에 안착할 수 있는 집중력을 강화시켜줍니다. 이 둘의 균형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지혜의 성숙 조건입니다. 균형이란 말은 50:50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님께서도 이해하시리라 사료됩니다. 님 정도의 수행연륜이라면 이제 행주좌와 어묵동정 그 어느 때라도 알아차림하면서 균형을 맞추어 갈 수 있습니다. 일상과 수행이 분리되면 우리는 자칫 행선을 통해서 혹은 좌선을 통해서 깨달음이나 그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수행이란 깨달음이나 그 어떤 얻을만한 것이 따로 있지 않음을 바르게 알아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소승이 한 때 외국의 한 수행처에 머물 때의 일입니다. 좌선할 때 수행이 잘 되는 듯해서 하루는 밥도 안먹고 행선도 안하고 하루종일 좌선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 시간 쯤 지나자 무릎이 아파오고 불쾌한 마음이 온몸을 지배하면서 그간의 선정력은 간데 없고 얼마나 오랫동안 앉아 버틸 수 있는가 보자는 식의 오기로 계속 버티어 보았습니다. ‘대단하다, 아무도 저 수행자를 방해하지 마라’ 는 소리가 귀가를 스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눈을 떴을 때 창밖의 바나나 나뭇닢 위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의 어리섞은 행동으로 인해 지금도 무릎관절이 부드럽지 않습니다. 스승께서는 그때 속으로 ‘ 어리섞은 것, 딱한 것’ 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도 그때를 반성하고 있습니다.
‘삼빠잔나’ 라는 빨리어 단어가 있습니다. ‘正知 , 분명한 앎’ 으로 풀이되는 이 단어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행을 바르게 지어가다 보면, 의식이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대상과 나를 바르게 이해하는 지혜가 생겨납니다. 삼빠잔나는 수행의 대상을 작의적으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알아차림하고 있는 의식을 비추어보거나 균형이 깨지는 것을 감지해 신호를 보내주기도 하며, 수행의 바른 대상 쪽으로 수행자의 의식을 이끕니다. 좌선할 때를, 행선할 때를, 밥먹야 할 때를, 말을 해야 할 때를, 어디에 알아차림을 두어야 할지를 알려주며, 더욱 중요한 것은, 수행대상에 매몰되지 않고 깨어서 바르게 알 수 있도록 합니다.
좌선을 하다보면 대상으로부터 그 무언가를 얻거나 발견하기 위하여 과도한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신체의 불균형을 초래하기도 하고, 대상을 향하여 지나치게 집중하다 보면, 선정의 좋은 느낌에 집착한 나머지 변하고 있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스스로 깨어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지혜가 성숙된, 온전히 깨어있는 수행자는 그 어떤 대상의 변화에도 반응하여 놀라거나 동요하지 않습니다. 변화를 빠르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할 뿐입니다. 그러나 대상에 몰입되어 있는 경우에는 선정력의 깊이에 따라 선정이 깨어지는 파동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님께서도 주의 깊게 숙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님께서는 요근래 좌선을 통해서 선정의 맛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하게 깨어있지 못하면 신체의 균형이 깨지는 것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수행자들은 자신의 신체 조건을 잘 살펴 그 조건에 맞는 자세나 방식을 계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행 중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통증들은 현저했다가도 수행이 깊어지면서 그 증상들이 완화되거나 근본적으로 치유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잘못된 수행방식, 혹은 어떤 구조적인 결함으로 인한 이상증세는 그 증세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좌선을 많이 해야만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법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당분간 행선과 와선 의자선 그리고 일상생활에서의 알아차림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시고, 108배 등 절수행을 통해 몸의 감각, 통증이 발생했던 고관절 부위의 감각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좌선할 때와 절할 때 나타나는 감각들에 대해서 마음이 각각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 차이를 체크해 보십시오. 관절은 완전하진 않겠지만 반드시 좋아집니다. 일정 기간이 경과했는데도 사라지지 않을 경우엔 꼭 외과검진을 통해 처방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자가 병원과 약국을 통해 치료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다만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자가치유의 위대한 능력을 사장시키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天水님, 대자유인이 되시길 기원합니다